제433화
“사제님?”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침묵에 잠겨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 그냥 생각을 좀 해보고 있었어요. 말했다시피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중이거든요.”
“뭔가 또 떠올리신 게 있소?”
“일단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기억을 잃게 된 건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마족을 소환하진 않았어요. 그건 정말 분명해요.”
“흠, 그럼 이곳에 좀 더 머물러 주실 수 있겠소? 마수가 나타난 걸 신고했으니 내일이면 시청에서 조사단이 나올 거요. 사제님이 정말 무고하다면 그들 앞에서 증명해 주셨으면 좋겠소.”
“그건 상관없는데, 뭘 어떻게 증명하죠?”
“마족을 소환하면 특유의 파장이 한동안 몸에 남아 있소. 조사단에서 그걸 검사할 거요.”
그런 것도 있구나. 거절할 이유가 없던지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누명을 확실히 벗을 수 있다면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덕분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나와 엘뤼엔에게 집주인인 에리나는 흔쾌히 빈방을 하나 내주었다. 한때 여관이었던 집이라 넘치는 게 빈방이라며, 아예 몇 날 며칠 편히 묵어가도 된다는 호의까지 베풀었다. 방까지 직접 안내를 맡은 랑시가 여분의 침구를 챙겨주었다.
“여기, 이걸 쓰시면 돼요.”
“고마워, 랑시.”
“뭘요, 혹시 시장하진 않으세요? 뭔가 요깃거리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원랜 머물다 갈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식사도 대충 해결(이번엔 물고기를 잡아먹었다)하고 온 참이었다. 상냥한 소녀는 더 챙겨주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럼 쉬세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구요.”
이윽고 랑시가 떠나간 공간엔 고요가 찾아들었다. 드디어 엘뤼엔과 단둘만 있게 된 순간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미소를 거두고 급히 사과부터 했다.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 미안!”
다행히 엘뤼엔은 이 상황을 그다지 불쾌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조금 어이없어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일을 키우는 재주가 있군. 용건만 마친 후에 바로 떠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아하하, 그러게. 원래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기억을 잃었다고 둘러댈 생각은 어떻게 한 거지?”
“그것 말고는 상식이 부족한 이유를 적당히 설명할 만한 핑계가 없더라고. 누구나 다 아는 걸 나만 모르고 있으면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확실히 수상할 정도이긴 하더군. 암흑절은 아는 눈치면서 균열은 모르다니. 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라면 그렇게 되는 건지 궁금할 정도다.”
“……미안해. 그건 말 못 해.”
“잘 기억하고 있군.”
거짓말을 할 바엔 차라리 답하지 못한다고 하라. 친히 들은 경고를 잊지 않고 따른 것에 엘뤼엔은 피식 웃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정성이 갸륵해서 넘어가 준다는 표정이었다.
“저기, 근데 왜 다들 마수만 신경 쓰는 거야?”
“무슨 말이지?”
“내가 소환한 거든 아니든, 어쨌든 균열이 있었다는 건 마족이 건너왔다는 거잖아. 근데 다들 그 자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마수보다 마족이 훨씬 더 위험하지 않나?”
“소환된 마족은 계약에 묶인다. 계약자를 돕는 선 이상의 관여를 하지 못해. 그러니 괜찮다고 여기는 거겠지.”
“고위 마족은 그냥도 건너올 수 있잖아.”
엘뤼엔이 다시 피식 웃었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사나운 웃음이다. 당황해서 바라보니 그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거, 보통은 모르는 부분이다.”
“…….”
아, 젠장. 또 실수했나 보다.
이러다 진짜 다 들키는 거 아니야? 제 무덤을 파도 이렇게까지 신명 나게 팔 일인가 싶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땅을 파면서도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딴청을 피웠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엘뤼엔이 말했다.
“전문지식은 있지만 상식은 부족한 계약자에게 특별히 조언 하나 하지. 검사는 안 받는 게 좋을 거다.”
“어? 왜?”
“이런 작은 왕국의 검시 도구로는 소환술의 방향까지 상세히 가려내진 못해. 기껏해야 이계의 존재를 소환했는지 정도나 알아내겠지.”
“그런데?”
“넌 네가 날 어떻게 만났는지 잊었나?”
“……헐.”
그 소환에 정령 소환도 포함되는 거였어? 하긴, 엄밀히 말하면 정령계도 이계이긴 했다. 서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대차원계와 중간계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니까. 한마디로 지금 검사를 받으면 완벽하게 걸린다는 소리였다.
“저기, 국법을 어기면 어떻게 돼?”
“기본적으로는 재판 후 처벌이지. 신관인 경우엔 교단으로 인계되어 그쪽에서 처리한다. 넌 후자겠군. 그 문장이 가짜라는 게 들키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들키면……?”
“그걸 물을 필요가 있나?”
지극히 당연한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야 그렇지. 신관을 사칭했는데 당연히 무사할 리가 없다. 내 시대에선 화형이었을 텐데, 아마 그건 여기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물론 네 문장은 그리 쉽게 들키진 않을 거다. 나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니까. 기껏해야 고위 사제 주제에 성력이 없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정도겠지.”
“그, 그래?”
“대신 근신 처분은 피할 수 없다. 당연히 그 기간 중엔 기도실에 갇힐 거고. 그럼 마신이 널 알아보겠지.”
“…….”
화형이 아니면 카노스에게 들키는 결말이라. 하하, 뭐야. 어찌 됐든 최악밖에 없다는 거잖아. 덕분에 더는 번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만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웃었다.
“튀자.”
엘뤼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 *
야속한 엘뤼엔은 혼자 알아서 하라며 사라졌다. 계약자의 위기 따윈 안중에도 없는 매정한 정령왕이었다. 버려진 나는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움직이기로 했다. 그 시간은 곧 찾아왔다. 남모르게 일을 도모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 새벽이었다.
“엘.”
그러나 내가 탈출이라는 걸 너무 만만히 여겼던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아래층에 내려서자마자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거실 한구석에 드리워진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랑시였다.
“아, 랑시. 아직 안 잤어?”
“네.”
하하, 새벽 세 시는 되지 않았나. 어린애가 밤잠이 참 없구나.
사실 나도 도주하는 마당에 정직하게 문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필 창문 걸쇠가 처음 보는 특이한 형태라 푸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을 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뜯어내고 뛰어내릴 걸 그랬지. 나는 억지로 웃어준 다음 슬쩍 닫힌 방문들 쪽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까진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는 기척은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대화가 더 길어지면 분명 누군가는 눈치채고 깨어날 거다. 일단 후퇴한 다음 재도전을 할까 고심할 때였다.
“괜찮아요, 엘. 어른들은 다 깊이 잠들었어요. 아침까지 안 일어날 거예요.”
그런데 이어진 랑시의 말이 뜻밖이었다. 당황해서 돌아보니 더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다들 수면제가 들어 있는 물을 마셨거든요.”
“……어?”
“원래 제가 깨워드리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네요. 지금 떠나시려는 거죠? 이쪽 일은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그런데 왜 혼자세요? 엘의 아버지는요? 벌써 가셨어요? 나가시는 거 못 봤는데.”
상황을 판단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어린아이가 사람들을 일부러 잠재웠다는 소리였다. 내가 몰래 도망칠 거라는 걸 알아차리고, 날 도와주기 위해서.
“랑시, 너…….”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자 랑시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아까 시몬 아저씨가 엄마한테 하는 말을 들었거든요. 시청에서 조사단이 나오면 소환 진위를 떠나 일단 엘은 구금될 거래요. 고위 마신관이 혼자 이 지역을 방문한 것부터가 정황 조사가 필요한 일이라나 봐요.”
“어, 그, 그래?”
“네, 요즘 왕실이 마신의 교단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대요. 어쩌면 엘이 기억을 잃은 것도 그거랑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엘도 그걸 알고 계셨던 거죠?”
“음, 아니, 나는…….”
“혼날 건 각오하고 있어요. 하지만 엘이 잡혀가는 게 더 싫어요.”
단호하게 말하면서 랑시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의젓하게 말해도 사실은 무서워하는 게 보였다.
“……왜 날 도와주는 거야? 나 때문에 어머니가 다친 걸 수도 있는데.”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거짓말한 거면 어쩌려고.”
“엘을 믿어요. 하지만 맞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엘이 마족을 소환해서 균열이 일어난 거래도 그 마수가 엄마를 다치게 한 건 엘이 의도한 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엄마를 살려준 것도 엘이니까요.”
담담한 답변에 잠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진심은 본인이 아니고서야 누구도 모른다.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이라면 더욱 그럴 거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일을, 이 작은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나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춘 다음 랑시와 시선을 맞췄다. 똑바로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약하게 떨고 있는 눈동자가 더 선명히 보였다. 그 표정이 더 굳어지지 않도록,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믿어줘서 고마워, 랑시. 난 정말 마족을 소환하지 않았거든. 네가 실망할 일은 없을 거야.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작아져 있던 랑시의 숨소리가 천천히 원래의 호흡으로 돌아왔다. 생기를 담은 눈빛이 별처럼 빛나며,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네, 알아요.”
바깥으로 나오니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뺨을 찔렀다. 하늘을 수놓은 별 무리가 주위를 제법 밝히고 있었다. 랑시는 문밖의 울타리 앞까지 나를 따라 나왔다. 괜찮다고 했지만 극구 배웅하겠다는 걸 말릴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마웠어.”
“저도요, 엘. 조심히 가세요.”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랑시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른들은 작별할 때 이렇게 하더라고요.” 귀여운 말에 나 역시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그러나 정작 손을 잡은 순간엔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맞닿은 손에서 어린애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굳은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시 우물을 만들었어야 하는 건데. 쓸데없는 분란을 피하려면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겠지만, 이대로 그냥 가자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음?’
그런데 그런 마음이 반영된 탓일까. 문득 생각지 못한 감각이 잡혔다. 나는 악수를 멈춘 다음 손을 떼고 잠시간 랑시의 모습을 살폈다. 그런 후에 다시 손을 내밀었다.
“랑시, 다시 잡아볼래?”
“……? 네.”
랑시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그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추측이 확신으로 굳혀졌다. 틀림없었다. 나와 접촉할 때마다 랑시가 지닌 자연 친화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당장이라도 나이아스 정도는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령왕일 땐 이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은사 계약도 있을 만큼,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정령사로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인간이 된 지금도 그대로라니, 이건 좀 사기 아닌가? 하긴 자연체의 정령들도 보는 마당에 이제 와선 새삼스럽긴 했다.
“뭐, 아무렴 어때.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우물 대신 더 좋은 선물을 해줄 수 있게 됐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랑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러 번 반복된 과정으로 익숙해진 랑시가 이제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손을 잡아 왔다.
“랑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해 볼래? 잘하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좋은 일이요?”
순진하게 답하는 얼굴을 보니 괜히 감언이설로 어린애를 꼬여내는 나쁜 어른이 된 기분이다. 나는 랑시에게 정령 소환주문을 외우도록 했다. 혹시나 안 되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주문이 시작됨과 동시에 주위의 습도가 확 높아졌기 때문이다. 자욱한 안개가 퍼져나가더니 부글거리며 물방울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속에서 나이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서 갑자기 작은 형체가 튀어나오자 랑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인어?”
“아냐, 정령이야.”
“저, 정령이요? 얘가 정령이라구요?”
“그래, 나이아스라고 해.”
“나이아스? 물의 정령 나이아스요?”
숨을 삼킨 랑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영특한 아이답게 나이아스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는 눈치라 부연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때쯤 랑시의 주위를 빙그르르 돌아보던 나이아스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네가 날 소환했구나?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맞아, 난 나이아스야. 너는?
랑시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크게 심호흡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사람처럼 단단히 각오를 다진 얼굴이었다.
“나, 나는 랑시야. 랑시라고 해.”
―랑시. 예쁜 이름이네. 나랑 계약할래?
“계약?”
―응, 계약. 나랑 친구 하자. 나랑 놀자.
명랑한 제안에 랑시의 얼굴이 한껏 상기됐다. 기대감에 들뜬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였다.
“놀래. 나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좋아, 약속했다.
다음 순간, 방긋 웃은 나이아스가 한 줄기의 물이 되어 랑시의 이마로 스며 들어갔다. 계약이 완료된 순간이었다. 다만 계약 당사자는 정작 본인이 겪은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마를 짚은 후 몇 차례 눈을 깜빡이던 랑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엘?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네가 나이아스랑 계약한 거야. 정령사가 된 거지.”
“정말요? 제가 정령사라구요?”
“그래, 물의 하급 정령사야.”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요. 나이아스는요? 나이아스는 어디로 간 거예요?”
“정령계로 돌아갔을 거야. 이곳과 연결해 주던 소환진이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서로 연결됐으니 이제 언제든 부를 수 있어. 한 번 ‘나이아스 소환’이라고 말해 볼래?”
“나이아스 소환……?”
그러자 퐁, 물방울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나이아스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랑시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지는 순간이었다. 그 정직한 얼굴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언젠가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들 이럴 땐 반응이 비슷하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