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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432화 (432/608)

제432화

랑시의 집을 다시 찾았을 땐 어느새 날이 거의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 앞에 이르자 마침 밖으로 나오던 중인 소녀와 마주쳤다. 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랑시에게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너무 늦었지, 랑시.”

“엘! 엘이에요?”

“응, 나야.”

후다닥 달려온 후에도 랑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살피기 바빴다. 그런 후에야 정말 나라는 걸 실감했는지 환하게 웃었다.

“그냥 떠나신 줄 알았어요.”

“설마. 잠시 다녀올 곳이 있었어. 어머니는 좀 어떠셔?”

“괜찮으세요. 치료사님이 다녀가셨는데, 며칠 쉬면 금방 나을 거래요.”

“그래? 다행이다.”

집 안엔 약품 냄새가 가득했다. 랑시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서 나는 평온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는 에리나를 볼 수 있었다. 치료를 마친 그녀는 안색이 조금 나쁘긴 했지만 무척 안정된 모습이었다. 의식이 없을 때도 닮았다 여겼는데, 눈을 뜬 모습을 보니 모녀의 생김새가 서로 빼다 박은 듯이 똑같았다. 랑시가 성장하면 딱 이 모습이 될 것 같았다. 에리나는 내게 고마워했다. 낯선 이를 경계하는 시선이 있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호의적인 태도였다.

“사제님에 관한 말씀은 들었습니다. 마수의 독을 빼주셨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별것도 아니었는걸요.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떠나기 전까지 북적거리던 공간엔 시몬과 델라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 일행은 모두 본인들의 거처로 돌아갔다고 했다. 어딜 다녀온 건지 궁금해하는 그들에게 나는 대충 지어낸 상황을 설명했다. 신의 문장을 본 이후로 머리가 아프더니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고. 그런 김에 일행과 헤어진 장소를 찾아가 본 거라 말했더니 다들 이해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을 믿어주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그래서 정말 일행을 만나셨다니, 그것참 다행이긴 한데…….”

중얼거리던 시몬의 고개가 힐끔 옆으로 돌아갔다. 그 행동을 따라 다른 사람들의 고개도 같이 향했다. 동요를 담은 시선들이 닿은 곳은 창문가였다. 그곳엔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푸른 머리칼의 남자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어쩐 일인지 아직도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고 나와 동행 중인 엘뤼엔이었다.

“뭐지?”

“아, 아무것도 아니오.”

돌아보는 것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얼굴이 다들 불타는 것처럼 빨갛다. 제대로 눈도 못 맞출 거면서 왜 굳이 살펴보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 정도면 무난한 반응이긴 했다. 랑시는 그를 보자마자 딸꾹질을 했더랬다. 그 딸꾹질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었다. 하긴 말도 없이 사라졌던 내가 일행이랍시고 불쑥 휘황찬란하게 생긴 사람을 데려왔으니 당황스러운 것도 이해는 된다.

솔직히 나도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수중에 가진 게 전혀 없으니 돈 좀 빌려달라고 한 것뿐이었다. 보석 꽃 몇 개나 던져주고 갈 줄 알았는데 그는 뜬금없는 질문만 던졌다. 한 돈의 금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 은화 몇 개가 있어야 금화 하나 값을 쳐주는지 같은, 주로 화폐 가치를 묻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이곳의 화폐 가치를 알 리가 없어서 내가 아는 시대의 기준으로 대답했는데, 4천 년 간극의 시세를 무시할 순 없었는지 돌아온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네게 상식이 부족하다는 건 확실하군.”

그러더니 앞으로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말하라고만 했다. 설마 그게 동행할 거라는 의미인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내게 돈을 쥐여주면 안 된다고 여긴 것 같다. 십중팔구 사기당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펑펑 쓸 거라 여긴 모양이지. 에바스 에덴만 가면 널린 게 보석이고 금인데, 그거 좀 낭비하면 어때서. 엘뤼엔이 수전노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던지라 이 상황이 좀 당황스럽긴 하다. 뭐, 덕분에 같이 다닐 수 있게 된 것 같아 나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에겐 사전 상황을 대강 설명해 둔 참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를 어떻게 소개할지도 미리 합의를 봐뒀다. 합의라고 해봤자 마음대로 하란 말에 정말 그러기로 한 것에 불과하긴 해도.

“그러니까, 관계가 어떻게 되신다고?”

“아버지요.”

물론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그와의 관계는 당연히 하나뿐이다. 가뿐히 대답하니 주위가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소개했던 것 같은데, 새삼 충격을 받을 정도로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 형님이 아니라?”

“아버지요.”

나더러 여러 번 묻는다고 타박하더니, 본인도 당황스러운지 반복 재생기가 따로 없다. 한 번만 더 물으면 그냥 안 넘어갈 테다. 경고의 시선을 담아 응시하자 내심 찔렸는지 시몬이 헛기침을 했다.

“……험험, 그렇군. 아버님이 상당히 동안이시구만. 아니, 그래도 이만큼 장성한 자식을 보려면 대체 몇 살에 혼인을…….”

“아버지는 아직 미혼인데요?”

“헙! 심지어 혼인도 안 하고……!”

숨소리에 경악이 섞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조금 전까지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수많은 의미를 담은 시선으로 엘뤼엔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나는 이쯤에서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하하, 장난이구요. 정확히 말하면 서류상의 아버지죠.”

“서류요?”

“네, 전 양자거든요.”

웃으며 설명하니 그제야 혼란스러워하던 얼굴들에 수긍의 표정이 떠올랐다. 엘뤼엔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한 건지, 그냥 말이 되든 말든 무조건 친자라고 우길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아무리 나라도 그와 내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아 보인다는 것 정도는 아는데 말이다.

문제는 양자 문화에 대한 인식 정도였는데, 다행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는 분위기였다. 그게 조금 뜻밖이긴 했다. 내 시대의 아크아돈은 신관이 되면 타고난 출생이 뭐든 속세와 인연을 전부 끊어야 하는 문화였으니까.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귀족이겠지? 아직 젊은 데다가 미혼인데 양자부터 들이다니 특이하네.”

“저 정도 고위 사제면 그럴 만도 하지.”

“근데 진짜 피가 안 섞인 거 맞나? 둘이 뭔가 좀 닮지 않았어?”

“헉, 역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구나. 솔직히 아까 아버지라고 말했을 때 그냥 믿었다.”

“실은 나도 그래. 생김새는 다르긴 한데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화려한 느낌이 너무 비슷해. 솔직히 저렇게 생긴 사람들이 혈연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더 무섭지 않냐?”

“뭐, 말은 저래도 사실은 혈연일지 누가 알아. 귀족들 족보가 복잡한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그만 떠들지.”

쑥덕이는 말들은 서늘한 목소리에 곧바로 조용해졌다. 단 한마디로 입을 다물게 하다니, 역시 엘뤼엔. 누가 형벌의 신으로 거듭나는 존재 아니랄까 봐 포스만큼은 확실하다. 내가 곧 죽어도 따라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해서 내심 부럽기까지 했다.

그보다 우리를 닮았다고 생각하는구나.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실실 웃고 있으려니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러다 찌푸린 얼굴이 기본형으로 고정될 기세다. 물론 정령왕이니 주름 따위가 생기진 않겠지만.

“어쨌든 다시 돌아오실 줄 몰랐소. 일행도 찾으셨는데 왜 굳이 오신 거요? 랑시와는 그저 우연한 인연에 불과하신 것 아니오?”

“네, 그렇죠. 그래도 인사도 없이 그냥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더불어 구상했던 대로 우물을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이제 정령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게 됐으니 없는 수로를 내서라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자 머쓱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본 시몬이 뒷목을 긁었다.

“뭐, 덕분에 오해하지는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대로 달아나신 거라 생각했소. 역시 사제님 때문에 균열이 일어난 게 맞았구나 싶었지.”

“균열?”

그 말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엘뤼엔이었다. 움찔한 시몬이 한층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마수가 나타났었소.”

“종은?”

“4급 아라네아였소.”

“자연 발생 종은 확실히 아니군.”

“그 말씀이 맞소. 애초에 이 근원의 숲은 천의 속성이요. 몬스터가 많은 편이긴 하지만 마수가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지. 자연적으로는 결코 발생할 수가 없소.”

“그렇겠지.”

“말이 통하는 분이신 것 같아서 다행이오. 어쨌든 그래서 우린 여기 있는 사제님이 균열에 관여했다고 여겼소. 혹시 양부 되시는 분은 뭔가 아시는 것 없으시오? 사제님은 기억을 잃으셔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신다던데.”

그 말에 엘뤼엔의 눈길이 잠시 나를 향했다. 언제까지 이 한심한 사기극을 이어갈 거냐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야 나는 진짜 신관이 아니니 마신관이 일으킬 수 있는 현상에서도 당연히 무관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신관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적당히 맞춰달라는 의미로 바라보니 그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짐작 가는 거 없으시오?”

“글쎄. 아는 게 있다 해도 내가 답을 해야 하나?”

“마수 때문에 사람이 다쳤소. 귀족이라 해도 국법은 지엄한 법. 무관하다면 해명하셔야 할 거요.”

“……건방지군.”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무심하던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갔다. 한순간에 싸늘해진 공기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이러다 사달이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균열이란 게 대체 뭐예요?”

참견한 효과는 좋았다. 다만 너무 지나치게 좋았는지 시몬만이 아니라 엘뤼엔까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시선을 돌린다는 목적엔 성공했기에 나는 모른 척 뻔뻔하게 웃었다.

“아예 균열 자체가 뭔지 모르시오?”

“네, 전혀 모르겠어요.”

“허흠. 기억이 아직 시원치 않으시긴 하군. 일단 알려드리겠소. 균열이란 차원 벽에 미세한 틈이 생기는 거요. 주로 마기가 짙어지는 콴제르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 틈을 타고 마수나 마물이 기어들어 오지. 그때가 아니면 균열이 일어나는 건 마족이 넘어왔을 때뿐이오.”

아, 그래서 날 의심하는 거구나. 마신관은 마족을 소환할 수 있으니 유력한 용의자로 여길 만도 했다. 더불어 당황스럽다. 기껏해야 마신관들이 쓰는 특정 주술 정도에나 관련된 내용인 줄 알았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스케일이 너무 컸다. 무려 차원 벽에 관련된 현상이라니, 과연 엘뤼엔이 관심을 보일 만한 주제였다. 그러나 알아들었다고 해서 이 상황을 전부 이해한 건 아니었다.

“마족이 넘어올 때마다 틈이 생긴다구요?”

내가 정령왕으로서 모든 지식을 다 각성한 건 아니긴 하다.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을 거다. 그래도 그런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엘뤼엔이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에펜 왕국에선 마족 소환은 콴제르에만 할 수 있게 되어 있소. 어차피 균열이 일어나는 시기니 그때 전부 몰아서 처리할 수 있도록 국법으로 정해졌지. 콴제르가 아닌 다른 때 마족을 소환하려면 사전에 왕실에 신고하고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하고.”

“으음, 콴제르에 마기가 짙어지는 이유는 뭔데요?”

“그야 암흑절이 있기 때문이오.”

아, 이건 뭔지 안다. 암흑절이라면 마신의 탄생일이 있는 주간을 뜻하는 말이었다.

확실히 그 시기엔 마기가 강해지긴 했다. 신들의 탄생일은 그들이 가진 영향력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라서 특이 현상도 많이 일어난다. 치유의 신의 탄생주간엔 성수로 된 비가 내린다거나, 꽃의 신의 탄생주간엔 꽃들이 많이 피어난다거나, 라는 식이다. 상급신일수록 미치는 범위가 커지는데, 최고신쯤 되면 그냥 아크아돈 전역이라고 보면 된다.

마신의 탄생일에 생기는 현상은 암흑절이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어둠>이다. 알폰프 제국에 있던 시절, 한창 사막을 횡단하던 시기였던가. 거의 일주일간 밤하늘에 아무것도 뜨지 않은 적이 있었다. 낮에도 그리 밝지 않고 흐린 날이 계속된다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의도한 날씨가 아니라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암흑절에 일어나는 대표적인 현상이었다. 신전이 있는 장소는 더 심하게 어두워져서 신성제국인 스왈트 제국은 낮에도 횃불을 달 정도다. 그나마 아크아돈이니까 그 정도이고, 그 시기의 마계는 온종일 먹물 같은 어둠에 완전히 잠긴다. 알리사를 만났던 시기쯤이니까 봄, 아마도 3월이었을 거다.

‘콴제르가 3월이란 뜻이었구나. 음, 하지만 그 시기에 균열이 일어난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는데.’

관련된 현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형태는 아니다. 게다가 지극히 드물고, 그걸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마수가 넘어오는 건 그냥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사고에 더 가까웠지, 마족이나 마신관을 연관 짓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긴 몇천 년 전의 과거인데 같을 리는 없겠지. 게다가 내가 아는 아크아돈은 세계가 한 번 완전히 멸망하고 다시 생겨난 문명이었다. 이쯤 되면 그냥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카노스한테 연락해 보는 건…… 안 되겠지.’

손등의 문장에 생각이 미쳤다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는 날 알지도 못하는데 연락해서 뭘 어쩌려고. 미래에서나 친우의 아들이고 후배이지, 지금의 카노스에게 나는 내리지도 않은 문장을 가진 수상한 인간일 뿐이다. 주술로 만들었다는 변명이 그에게까지 통할 리가 없다. 다행히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행여나 그가 내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하는 날엔 아주 엄청나게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눈치챘을지도. 그 성격이라면 언제 어디서 숨통을 쥐어볼까 각을 재며 주시하고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느긋한 신이라지만 아무리 그가 관조적인 성격이라 해도 나 같은 특이점을 그냥 넘어가진 않겠지.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내 정체를 금방 간파할 것 같다는 거다. 무엇보다 내가 먼저 그를 보고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얼굴을 보면 분명 눈물샘부터 터지겠지. 반가움과 그리움을 감출 수 있을 리도 없다. 아주 내 정체를 알아봐달라고 광고를 하는 셈인데, 그러다 진짜로 주술이 풀리기라도 하면 전부 다 망하는 거다. 멀쩡히 살아 있는 카노스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영영 이 세계에 갇히게 되는 결말은 사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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