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1화
쏴아아― 귓가에서 파도 소리가 울렸다.
차가우면서도 상쾌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건 모든 불순물이 일시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청량감 같기도 하고, 포근하고 안락한 품에 감싸진 안정감 같기도 했다. 캄캄하던 세상에 빛이 비치는 것 같다. 꺼지지 않는 희망이자 유일한 구원이었다.
‘뭐야, 이거…….’
더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에 숨을 헐떡였다. 방심하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아 억지로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개안한 것처럼 주변이 색다른 풍경들로 채워졌다.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형체들이 주위를 가득 채운 광경이었다. 나이아스를 비롯한 자연의 정령들이었다.
―와, 계약했다!
―정말 계약했어!
―왕의 계약자가 나왔어!
―물의 왕과 계약한 인간이라니! 처음이야! 굉장해!
사방에서 탄성과 환호성이 쏟아져 들었다. 윙윙거리는 강렬한 소리들의 향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일순 전파가 망가진 것처럼 시야가 크게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모든 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주변 어디를 돌아봐도 정령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소란스럽게 들썩이던 공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드넓은 강물 위에 보이는 이는 여전히 그림처럼 서 있는 엘뤼엔뿐이었다.
“어…….”
뭐야, 방금 그건 뭐였지? 내가 잘못 본 건가? 하지만 너무 선명했다. 어디까지가 허상이고 실제인지 분간도 되지 않을 만큼.
눈을 뜬 채 꿈을 꾼 기분이라 나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그동안 엘뤼엔은 물에서 벗어나 내가 있는 땅으로 건너왔다. 소환 마법진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반투명하던 그의 모습 역시 완전히 선명해져 있었다. 계약을 마침으로써 중간계를 유희하기에 걸맞은 몸으로 바뀐 것이다. 덕분에 실재감이 더 강해져서 기분이 묘했다.
“계약해줘서 고마워.”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파란 머리칼을 흘끔거리다 나는 용기 내어 말했다. 그러자 엘뤼엔이 멈칫하더니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너, 지금 제정신인가?”
“……제정신이거든.”
“제대로 대답하는 걸 보니 멀쩡하긴 하군. 왜 제정신이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정령왕의 기운을 받고도 멀쩡하게 사고하니 묻는 거다. 인간은 우리와 계약할 때 한동안 정신을 놓으니까.”
“정신을 놓는다고?”
“울면서 헛소리하거나, 매달려 통곡하거나, 그대로 까무러치거나. 셋 중 하나엔 해당하지.”
“그게 무슨…….”
아, 혹시 그 이상한 기분들 때문인가. 물의 인장을 받는 순간 가슴 속을 파고들던 이상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마치 깊은 심해 속에 빠져든 것만 같았지. 끝이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는 티끌에 불과했다. 절대자의 영광을 온몸으로 실감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원래는 그 감동의 해일에 완전히 휘말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온전한 인간은 아니다 보니 적절한 선에서 멈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아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아, 정령들을 본 것 같아서…….”
“제정신이 아니긴 했군.”
“아니, 그치만 진짜로 본 것 같았어. 이 주변에 수많은 정령들이 몰려 있었어. 왕의 계약자가 나왔다고 다들 시끄럽게 떠들었는데.”
그러자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는 듯하던 엘뤼엔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너…….”
“어? 혹시 진짜야? 내가 본 게 맞는 거지?”
“……정말 뭐와 계약을 한 건지 알 수가 없군.”
이제 그는 노골적으로 찌푸린 얼굴이었다. 그래도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짐작이 맞은 모양이다. 내가 자연체의 정령들을 봤던 거다. 어쩌면 오전에 나이아스를 봤다고 여긴 것 역시 착각이 아닌 건지도 몰랐다.
인간이 됐어도 자연의 정령을 보다니, 시벨리우스가 이때의 날 보고 정령왕 같았다고 여길 만하구나. 아무 때나 일어나는 현상은 아닌 듯한데, 뭔가 보이는 법칙 같은 게 있는 걸까? 나중에 한 번 시험해 봐야겠다. 잘만 하면 원할 때마다 보는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보다 정말 계약했어.’
뒤늦게 찾아드는 현실감에 나는 슬쩍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딱히 만져지는 감촉은 없지만 짙은 기운이 서렸다는 게 느껴졌다. 지금 엘뤼엔에게서 느껴지는 것과도 같은, 익숙한 정령의 힘이었다.
한때 엘뤼엔의 문장이 있던 자리에 또다시 그가 준 인장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심지어 이번엔 정령의 인장이다. 물의 인장을 받아본 물의 정령왕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겠지. 태생부터 그랬지만 유난히 특이한 경험은 다 해보는 것 같다.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행적을 그대로 밟아가는 탓일까. 왠지 주어진 과제를 무사히 수행한 기분이 들었다. 이만하면 첫 단추는 성공적이었다.
* * *
곧바로 돌아갈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엘뤼엔은 계약을 마친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마를 만지작거리면서 히죽거리는 나를 찝찝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당장 사라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로선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와 논의할 부분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렇게 싱글거리는 거 그만둬라. 더 수상해 보이니까.”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다니 너무하네. 하지만 싫다면 조심할게. 그보다 주의사항 좀 알려줘.”
“주의사항?”
“아버, 엘퀴네스 님에게 어디까지 도움을 청해도 되는지, 하루에 몇 번 정도 연락해도 괜찮은지, 지켜야 할 상한선 말이야. 내가 이런 쪽엔 눈치가 없어서 미리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
논의해야 할 건 이거였다. 엘뤼엔은 라피스가 레드 드래곤이라는 이유로 계약도 거부했을 만큼 도도한 정령왕이었다. 분명 일상에서도 엄청나게 빡빡한 규정이 있을 게 뻔했다. 특히 난 그의 기준에 현저히 떨어지는 계약자일 테니 미리 자수해서 광명을 찾아야 했다.
“왜 떨어져 있는 걸 전제로 말하지?”
“정령계로 돌아갈 거잖아?”
나야 소환된 김에 유희도 할 겸 붙어 다닌 거지만 보통은 계약한다고 해서 무조건 계약자 곁을 상주하진 않는다. 특히 엘뤼엔처럼 상당수 많은 계약자를 보유하고 있을 정령왕이 나 하나만을 위해 곁에 있어 줄 거라는 건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지금 엘뤼엔의 성격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엘뤼엔은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게 더 의외였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찌푸리고 있던 얼굴이 더 미묘하게 굳어졌다.
“간곡히 도와달라고 한 것치곤 태도가 가볍군. 전리품처럼 가는 곳마다 달고 다니려 할 줄 알았더니. 그게 너희 인간이 가장 잘하는 일 아닌가?”
“그런 짓 안 해. 인간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과시욕을 향상심으로 착각하는 종이지. 목숨을 걸고 정령왕을 소환하는 어리석은 짓을 서슴지 않는 것도 그래서라고 보는데.”
“……이거 지금 나 욕하는 거지?”
“아, 유지 마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겠군. 하긴, 마나가 워낙 쥐꼬리만 해서 쓸데가 없긴 하다만.”
“아니거든! 나 정도면 인간치곤 엄청 많은 거라고! 그리고 내 마나량 같은 게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정령왕은 유지 마나가 거의 들지도 않잖아! 당장 역소환이 일어날 것도 아닌데!”
그 말에 엘뤼엔이 잠시간 나를 응시했다.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되짚어봐도 딱히 걸리는 게 없어서 의아해하다가 나는 바로 뜨악해졌다.
“혹시 역소환 할 생각이었어?”
“……헛소리.”
“그렇지? 어휴, 놀랐잖아. 그런 거 안 할 거지? 화가 나면 그냥 말로 해줘. 솔직히 내가 하면 안 되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라서. 알다시피 난 마나가 쥐꼬리만 하잖아? 역소환이 일어나면 죽을지도 모르거든. 이 점을 꼭 인지해줬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드네.”
“조금 전 네 입으로 많다고 하지 않았나?”
“아하하, 그래 봤자 인간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어. 허세인 거 다 알면서 그러네. 인간은 아주 아주 약한 존재랍니다.”
사람의 앞날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설마 라피스를 상대로 쓰던 짓을 반대로 내가 당할까 봐 염려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물론 엘뤼엔이 나처럼 유치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았다. 이래서 평소 심보를 곱게 써야 한다는 말이 있나 보다.
“그래도 주제는 잘 알고 있군.”
“물론이지. 그러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줘. 난 그냥 위급할 때 도움을 좀 얻고 싶은 것뿐이야. 필요한 순간에 의지할 곳이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 정서가 안정되잖아.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 원하면 계약했다는 사실도 밝히지 않을게.”
딱 잘라 답한 말에 엘뤼엔의 표정이 다시 묘해졌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찾는 게 뭐지?”
이어진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어? 찾는 거?”
“반드시 찾아야 할 게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잖아. 설마 그것도 거짓말이었나?”
“아냐, 내가 찾는 건…… 아니, 근데 그것도라니? 내가 언제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고?”
“대답.”
“……일단은 광물 같은 거야.”
“광물이면 광물이지, 광물 같은 건 뭐지?”
“정확한 생김새를 모르거든. 내가 아는 건 그게 광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어쩌면 가공된 보석일 수도 있다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다는 거……?”
그러자 무심히 듣고 있던 엘뤼엔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영혼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영혼인 거겠지.”
“어? 뭔지 알아?”
“라프네리아를 찾는 건가?”
“라프네리아?”
“죽어서 명계로 돌아가지 못한 떠돌이 혼을 칭하는 말이다. 길을 잃은 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이물질과 섞여 단단하게 굳혀지지. 그 상태가 된 건 영혼의 보석이라 불릴 거다.”
“헉! 맞아, 그거야!”
영혼의 보석이라니. 이름부터 너무 완벽한 게 그냥 듣기에도 내가 찾는 거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정작 이곳으로 보내지기 전에 그로부터 들었던 설명은 이렇게 상세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과거의 자신이 알려줄 걸 알아서 그랬나 보다.
“찾을 수 있을까?”
“라프네리아 자체는 찾기 어렵다. 흔하지도 않지만 본래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거라서 형태도 없고 존재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지. 하지만 보석으로 굳혀진 건 몇 개 정도 발견된 게 있다고 들었다.”
“정말? 그건 어디 가야 볼 수 있어?”
“그보다 그런 걸 왜 찾지?”
“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길을 잃은 혼은 발견 즉시 신계에 신고해야 한다. 그걸 빼돌리거나 사사로운 목적에 사용하는 건 엄격히 금지된 일이지.”
“그, 그래?”
“하물며 그걸 찾겠다고 정령왕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너처럼 겁이 없는 인간도 없을 거다. 신의 문장을 위조한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네겐 신벌이 피해갔다고 안심하는 모양인데, 사후의 세계를 참 우습게 여기는군. 염옥에서 영겁을 보내고 싶나?”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
“……그건 말 못 해.”
“참 믿음직스러운 대답이군.”
빈정거리는 말투에 아차 싶었다. 좀 더 다른 식으로 말했어야 했는데. 가장 신뢰해야 하는 계약자에게 설명을 거부했으니 돌아올 반응이 너무나도 뻔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예상했던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뜻밖이라 빤히 쳐다봤더니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보았다.
“그 시선은 뭐지?”
“아니, 그냥. 내가 숨기는 게 많아서 계약을 파기한다고 할 줄 알았어.”
“내 쪽의 일방적 계약 파기가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군.”
헉, 이거 보통은 모르는 부분이었나?
내겐 너무 당연한 지식이라 별생각 없이 말했는데 좀 더 조심해야 했나 보다. 혹시 아까 엘뤼엔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던가. 퍼뜩 점검해 보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이 이어졌다.
“유지 마나가 거의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일부러 역소환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이젠 계약 파기가 가능하다는 것까지인가. 정령왕에 대해 또 뭘 알고 있지?”
“어, 그, 글쎄. 난 그냥 책에서 본 대로 말한 것뿐이라…….”
“책?”
“그 뭐지, 아, 맞아. 정령이 나오는 동화책이었어. 거기서 그런 내용이 써진 걸 봤던 것 같거든. 너무 오래전에 본 거고 누가 쓴 건지도 알 수 없는 동화였는데 이제 보니 맞은 모양이네. 하하……와, 신기하다. 혹시 정령왕의 계약자가 썼던 거였나?”
“그런 거로 해두지.”
피식 웃는 입술과는 달리 목소리는 싸늘하다. 누가 봐도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내 이미지가 완전히 거짓말쟁이로 굳혀진 게 분명했다. 이번은 확실히 거짓말이 맞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곤란한 질문엔 처음처럼 답할 수 없다고 해라. 그편이 거짓말보다는 더 낫군.”
“아니, 나는…….”
“네가 수상한 녀석인 건 처음부터 알았다. 고작 이 정도로 계약을 파기하진 않아. 그 작은 머릿속에 뭘 더 감추고 있는지 흥미롭기도 하니 일단은 지켜봐 주지.”
“고, 마워.”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 둬라. 내가 이 계약을 끝내겠다고 결정한 그 날, 너는 죽는다.”
……살인 예고를 이렇게 태연하게 해도 되는 건가요.
내가 그를 주시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만큼 담담하고 평온한 어조였다. 하지만 눈동자만은 차디찼다. 문득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저 냉정한 색은 내게서 신의 문장을 발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덕분에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데도 그가 나와 계약한 이유. 내 변명이 통해서도 아니고 내 처지를 동정해서도 아니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라 너그럽게 대하는 거다. 사형수에게 베푸는 마지막 만찬처럼, 그마저도 시시해지면 금방 끝내버릴 정도의 호기심이었다.
잠시간 멈췄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시대의 엘뤼엔은 정말 무서웠구나. 아니, 원래 이랬던가? 지금이 좀 더 냉정한 편이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의 그도 이런 느낌이긴 했던 것 같다. 일견 봐주는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성격이었지. 언제부터인가 한없이 관대하다는 느낌밖에 없어서 잊고 있었다. 그가 이 시대의 내게 영향을 받아 날 아들로 삼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들로 삼은 후에 다정해진 건 확실히 맞는 것 같다. 그간 내가 얼마나 큰 호의 속에 있었는지 깨달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다가갈 차례인 거야, 그렇지?
한번 크게 심호흡한 다음 마음을 다잡았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지. 왠지 고생길을 자처한 것 같지만 그를 소환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빈말이 아닌 게 분명한 경고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계약을 끝낸다는 마음이 들기 전까진 괜찮다는 거니까. 라피스를 찾을 때까지 어떻게든 잘 버티면 된다.
“명심할게. 그때까진 잘 부탁해, 아버지.”
“……역시 그 호칭은 일부러 쓰는 게 분명하군.”
엘뤼엔이 미간을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게 분명한데 전부 다 마음에 걸려서 그 이유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심장이 여러 가지 의미로 두근거렸다. 그가 그 호칭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겠지. 어쩌면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이다음은 분명 더 나아질 테니까.
적어도 혈혈단신으로 떨어졌다고 여긴 어제와 비교하면 지금이 더 낫지 않은가. 아니, 확실히 더 나았다. 모두와 헤어져 외로운 여정이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또 다른 형태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가, 내 가족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이곳에서도 난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