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30화 (430/608)

제430화

“너, 설마 신관인가? 그것도 마신의 문장으로 보이는데.”

“어, 아니, 이건…….”

“……기가 막히는군. 마신관이 날 소환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무심해도 어느 정도는 호의적이었던 시선에 시린 날이 서기 시작했다.

낭패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문장이 있는 이상 언제고 겪을 일이긴 했지만, 대처 방안을 마련하기도 전에 벌어지니 당황스러웠다. 지금 그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너무도 훤했다. 신성력과 정령의 힘은 섞이지 못한다. 하물며 마신관처럼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성력과는 더더욱 상극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고위 마신관으로 보이는 내가 정령왕을, 그것도 가장 소환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물의 정령왕을 소환했으니 당연히 수상하기 짝이 없겠지. 이 세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불순물로나 보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넌 대체 뭐지?”

노기를 띤 눈동자가 짙푸른 색으로 어두워졌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다. 그 진노의 파도가 금방이라도 덮쳐들 것만 같아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도 아주 크게 걱정되지 않는 건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과거의 엘이 마신관이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즉, 내가 이 상황을 잘 수습한다는 소리였다.

“그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니, 답할 필요 없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런데 어떻게든 변명하려는 말을 차가운 목소리가 먼저 잘라냈다. 이어진 말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첫 인간 소환자라 관대히 보았지만 변종엔 흥미 없다. 계약은 없던 일로 하지.”

“어?”

“우연이라도 나와 다시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목숨을 조금이라도 아낀다면 또 정령을 소환할 생각은 영원히 접어라. 이만 작별이다.”

“엥? 진짜? 아니, 잠깐만, 아버지! 기다려! 내가 다 설명할게! 일단 내 얘기 좀 들어봐!”

아니, 뭐가 이렇게 단호해? 여기서 우리가 계약하는 거 아니었어? 엘뤼엔은 상대를 떠보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가 간다고 하면 정말 간다는 소리였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놓칠 게 분명해서 나는 황급히 고함쳤다. 그러자 조금 흐릿해지는 듯하던 엘뤼엔이 얼굴을 찌푸리고 바라보았다.

“또 날 아버지라 부르는군.”

“아…….”

“이유가 뭐지?”

왜냐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당신이 날 아들로 삼았잖아. 당신이 먼저 내 아버지가 되어 준다고 했잖아. 내가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기쁜 표정을 지었잖아.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거북한 거품이 가득 찬 것처럼 속이 크게 들끓었다. 이 상황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누군지 설명하기만 하면 전부 간단하게 끝날 일이었다. 처음엔 불신하겠지만 결국 내 말이 맞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게 될 거다.

그러나 그건 말할 수 없다. 말해선 안 됐다.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날 이 세계에서 지탱하고 있는 주술의 효력이 끝나버릴 테니까.

<유념해라, 엘. 그 세상에서 만난 이들에게 네 정체를 알려 주면 안 된다. 네 진짜 신분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해.>

당부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정도는 별로 어려울 것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거하게 맞을 줄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알겠다고 답하진 못했을 것이다. 당장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수많은 말을 삼키는 대신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엘뤼엔이 돌아갈 생각은 미룬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말이 헛나온 거야. 당신이 내 아버지랑 닮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거짓이군.”

“왜!”

“정령왕의 외모는 유일무이하다. 날 닮은 이가 있을 리 없지. 자꾸 어설픈 거짓말이나 할 생각이라면…….”

“아냐, 있어! 있다니까! 정말이야. 내가 왜 이런 거로 거짓말을 하겠어? 머리 색이랑 눈동자 색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전부 다 닮았어. 쌍둥이처럼 똑같다고!”

다름 아닌 본인이니 닮는 게 당연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엘뤼엔은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젠 흡사 사기꾼을 보는 시선이라 억울했다.

“좋아, 정 그렇다면 확인해 주겠다. 날 닮았다는 그자가 어디에 있지?”

“소용없어. 아무리 찾아도 못 만나.”

“못 만난다?”

“그래, 못 만나. 이 세상엔 없거든.”

“죽었다는 뜻인가?”

아니, 미래에 있어. 지금으로부터 4천 년 후에나 태어날 예정이지. 이번에도 답하지 못하는 진실이 목 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졌다. 덕분에 침묵이 이어지자 엘뤼엔은 대답을 알아서 해석한 듯했다. 날카롭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서 하려던 말은 뭐지?”

“……어?”

“내게 전부 설명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더불어 내 얘기를 들어볼 마음도 생긴 모양이다.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천금 같은 기회라 나는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일단 오해하고 있는데, 난 마신관이 아니야.”

“신의 문장을 가졌으면서 신관이 아니다? 문장을 받았으나 교단엔 아직 등록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아니, 진짜 말 그대로의 의미야. 난 정말 신관이 아니야. 이 문장은 신분 위장용으로 만든 가짜야.”

“헛소리를 참신하게 하는군. 내가 신의 문장의 진위도 가리지 못할 것 같나? 그 문장에 서려 있는 건 분명 마신의 힘이다. 그건 뭐라고 설명할 거지?”

“정말이야. 그…… 내 친구 중에 마신관이 있거든. 그 사람이 자기 성력을 써서 만들어준 거라서 그래.”

카노스는 내 친구나 다름없고, 그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준 거니 결과적으로 거짓말은 아니다. 게다가 이건 이론적으로도 가능한 방법이긴 했다. 일명 각인 주술이라 불리는, 문신을 통해 신체에 주술을 새겨넣는 술법이 있다. 종이에 마법진을 그려 넣는 스크롤 마법처럼 빠르고 간략하게 주술을 쓰기 위해 주술사들이 고안한 방법이라고 한다. 단지 부작용이 많고 각인 방법이 매우 까다로워서 그다지 잘 활용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각인 주술에 신성력을 활용하면 신의 문장도 그럴듯하게 위조해 낼 수 있었다. 카류안 역시 그 술법을 응용해서 유카르테 대공에게 마신의 문장을 새겨준 거였다.

내가 이걸 알게 된 것도 엘뤼엔 덕분이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신계에서 카류안과 대공의 행적을 대대적으로 조사했는데, 엘뤼엔이 그 결과를 내게도 알려줬었다. 대공이 위조한 신의 문장은 처음엔 완벽하지 않았다. 그냥 도장으로 찍어낸 어설픈 수준이라 매일 숨어서 덧칠했다고 한다. 그러다 카류안과 계약하면서 완벽한 위조가 가능해졌다고. 마족의 마기가 마신관의 성력과 비슷한 성질이라는 점을 활용한 거다.

실제로 대공이 지니고 있던 마신의 문장은 겉보기로는 감쪽같았다. 틈틈이 그를 지켜봤던 만큼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단순한 그림이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일찌감치 가짜라는 걸 알아봤을 거다. 물론 그전에 먼저 수십 년의 긴 세월 동안 숨길 수도 없었을 거고.

“그런가. 물론 그 친구는 죽었겠군.”

“어?”

“신관이 신의 문장을 위조한다는 건 신을 기만하는 짓이지. 살아 있을 리 없을 텐데?”

“어, 마, 맞아. 죽었어.”

그게 대공이 처음부터 그 주술을 쓰지 못했던 이유다. 핵심 재료인 신성력을 제공해야 할 신관 쪽에서 그런 주술엔 절대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관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자신이 섬기는 신이니까. 신벌을 받아 죽으면 신의 품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는데 어느 누가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맞바꿔 문장을 위조하려 하겠는가.

사실 마족에게도 기력이 상당히 소모되는 일이라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마왕인 카류안이나 되니까 가능했던 거다. 그래도 어지간한 마족이라면 귀찮아서 응하지 않을 텐데(그러느니 그냥 다 쓸어버리자고 꼬시는 걸 택할 거다), 하필 카류안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대공도 참 재수가 없었다. 그때 소환한 마왕이 카류안만 아니었어도 거기까지 가진 않았을 텐데.

아니, 재수가 없었던 건 우리 쪽이다. 대공이 카류안을 소환하지만 않았어도 그의 계획이 그렇게까지 급물살을 타진 않았을 테니까. 적어도 한참은 더 늦출 수 있었을 거고, 그랬다면 그전에 발각됐어 무산됐을 가능성도 컸다. 그럼 카노스와 라피스가 죽을 일도, 내가 이곳에 떨어질 일도 없었겠지.

“제 영혼을 포기하고 네게 가짜 신분을 만들어줄 정도라. 그가 널 상당히 소중히 여겼나 보군. 아니면 희생정신이 투철한 자였나?”

“……그랬지.”

그리고 지금처럼 상황을 전혀 모르는 과거의 엘뤼엔을 통해 아픈 기억을 회상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빛 속에 삼켜지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나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엘뤼엔이 싸늘하게 웃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 건드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자 그가 차디찬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원래 엘뤼엔이 이런 얼굴이었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낯설었다. 내 아버지가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 엉망진창이었던 첫 만남에서도 그가 저런 식으로 나를 바라본 적은 없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경멸을 담은 시선을 보낸 적은.

“불리한 증언에 관계된 이들은 전부 죽었다고 하면 되니 참으로 편리한 변명이야. 어려도 종은 숨길 수 없군. 과연 영악한 인간다워.”

“아니, 그게 아니라…….”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시린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주변의 온도가 갑자기 내려간 것 같았다. 엘뤼엔은 여전히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 짙푸른 시선에 서린 의도가 선명히 읽혔다. 날 죽일 생각인 거다. 신관이라고 오해할 때만 해도 더는 얽히지 않으려는 정도였던 것 같은데, 내가 거짓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다는 거겠지.

역시 낯설다. 내가 아는 엘뤼엔은 사정을 잘 봐주지 않는 편이긴 해도 잔혹하진 않았다. 적어도 자신을 소환한 존재를 고작 이 정도 이유로 죽이는 이는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신이 된 후엔 성격이 유해진 거라고 했던가. 그 차이를 이런 식으로 경험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왠지 분하고 서러운 마음이 솟아올라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냥 믿을 생각이 없는 거잖아.”

“뭐?”

“내가 한 말이 전부 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인 것도 아니야. 친구가 문장을 준 것도 맞고, 그 친구가 죽은 것도 맞아. 내가 마신관이 아니라는 것도 맞아. 애초에 내가 진짜 신관이었으면 정령을 소환하는 게 가능하기나 했겠어? 아버, 엘퀴네스 님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 거 아냐. 내가 신관인 것 같아? 내게서 성력이 느껴져?”

그건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에리나의 몸에서 마기를 빼냈을 때 확실히 느꼈다. 내겐 성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문장은 진짜라서 마기를 조금 다룰 수 있게 된 것뿐이다.

사실 이게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원래라면 난 마신관이 돼야 했다. 신의 문장이 새겨진 몸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의 지배를 받는다. 신과 하나로 연결되어 그 힘을 드러내는 일종의 통로가 되는 셈이다. 내가 엘뤼엔에게서 신의 문장을 받았을 때 그가 황당해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정령왕이라 신의 지배를 받진 않지만, 담긴 의미 자체가 거북하니까.

문제는 바로 그거다. 그간 신의 문장이 있어도 괜찮았던 건, 심지어 그게 여러 개여도 상관없었던 건 내가 정령왕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인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영향을 안 받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이 시점보다 미래에서 받은 문장이라 뭔가 오류가 생긴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내 영혼 자체는 여전히 정령왕이라 그런 건지도.

어쨌든 항변한 보람은 있는지 엘뤼엔은 침묵했다. 그 역시 내가 신관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판단한 듯했다.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던 살기가 현저히 옅어졌다는 게 그 증거였다.

“찾고 있는 게 있어.”

간신히 편해진 공기에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게 뭐라고 그새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고 있는 꼴이 왠지 우스워서 쓴웃음을 삼켰다. 그런 나를 엘뤼엔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드시 찾아야 하는 거야. 그런데 내가 지금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거든. 세상에 대한 상식도 부족하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 도움이 필요해.”

“많은 걸 바라진 않아. 그걸 찾을 때까지만 함께 해줘. 내 길잡이가 되어줘. 부탁이야. 최초로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인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잖아.”

연거푸 말을 쏟아낼 때까지 그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설마 더 화나게 한 건 아니겠지. 아예 무릎 꿇고 빌어볼 걸 그랬나. 너무 비굴하게 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최대한 당당하게 말한 건데 판단을 잘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초조한 마음에 나는 슬쩍 시선을 들어 엘뤼엔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 이름은?”

“……엘.”

“엘이라…… 내 이름의 앞글자와 같군.”

그것만은 마음에 든다는 듯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엘뤼엔이 한 손을 들었다. 그 손에서 물보라가 일더니 눈앞에 반투명한 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물로 이루어진 서류엔 빼곡한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

저 형태가 무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틀림없었다. 정령 계약서였다.

“아버지……!”

“그 아버지란 소리는 질리지도 않고 하는군. 이쯤 되면 실수가 아닌 것 아닌가?”

감동해서 바라보자 성가셔하는 푸념이 돌아온다. 물론 가슴이 벅차오른 내게 그의 못마땅한 표정 따윈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렸던 순간이 이어졌다.

“이 계약은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와 인간 엘의 맹약이다. 그대 엘은 계약을 이행함으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낼 힘을 제공하며, 나는 그 대가로 너의 보필자가 될 것을 약속한다. 계약하겠는가?”

“할게! 하겠습니다!”

행여나 중간에 취소할까 다급히 대답하니 엘뤼엔이 나직이 혀를 찼다. 그래도 계약 과정은 착실히 나머지 절차를 밟고 있었다. 다음 순간 물로 된 서류가 하나로 뭉쳐져 몰려들더니 그의 손끝에 새파란 기운이 맺혔다. 이제 저걸 내 이마에 찍으면 물의 인장이 완성된다. 생각을 잇기 무섭게, 엘뤼엔이 곧게 세운 두 개의 손가락을 내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