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29화 (429/608)

제429화

드디어 주문이 끝을 맺었다. 그 순간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 반동으로 해일처럼 일어난 물결이 금방이라도 덮칠 듯 밀어닥쳤다. 그것이 온전히 나를 삼키는 순간에도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아니, 감을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솟구친 물줄기가 점점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물에 완전히 삼켜졌을 땐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사정없이 밀려드는 물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저항하려 할수록 옭아 드는 악력에 의식이 빠르게 흐려졌다. 이대로 질식해서 죽는 건 아닌가 싶어졌을 때일까. 일순 갑갑한 느낌이 사라지더니 갑자기 숨이 쉬어졌다.

“쿨럭, 쿨럭!”

한동안 바닥에 엎드려 정신없이 기침을 토했다. 물을 한 움큼 토해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뱉어지는 건 그냥 마른 숨뿐이었다. 몸을 더듬으니 입은 옷의 푹신한 감촉만 닿았다. 분명 물에 삼켜졌건만 그 어디에도 젖은 느낌이 없었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숨을 삼켰다. 환청이 아닐까 생각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적어도 어제, 아니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이 목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인간이 나를 소환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사납던 강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잔해진 모습이었다. 고요한 수면 위에 내가 불러낸 황금색 마법진이 여전히 옅은 금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형태였다.

그러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른 쪽이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곳에 자리한 존재가 점점 더 선명하게 시야를 사로잡았다. 마법진 한가운데 누군가가 떠 있었다. 누구보다 익숙하지만, 동시에 지독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지는 남자의 모습이.

“하…….”

한 번쯤은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알던 그의 색은 늘 찬란한 금빛이었으니까. 한때 그이기도 했다는 물이, 그 청명한 색이 그를 이루고 있었을 땐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그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푸른 물빛의 머리칼을 늘어트린 엘뤼엔이었다.

* * *

어두운 골목길엔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더럽고 으슥한 탓에 훤한 대낮에도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길목이었다. 그 협소하고 후미진 장소에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신음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했다.

쇠를 긁는 듯한 이상한 소리는 바닥을 기고 있는 남자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허우적거리던 남자가 앞을 향해 부들거리는 팔을 뻗었다. 성한 부분 없이 얼룩진 손가락에서 굵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사, 살려줘.”

그러자 간절한 음성에 반응하듯 그를 등지고 서 있던 이가 천천히 돌아섰다.

“살려줘?”

흥미롭다는 시선이 기고 있는 남자를 느긋하게 훑었다. 깊이 눌러쓴 후드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형이나 목소리를 통해 남자는 그를 소년이라 짐작했다.

평소 남자에게 있어 그 나잇대의 소년은 상대하기 아주 쉬운 존재였다. 순진해서 부리기 쉬운 데다가 완력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맷집은 어느 정도 있어 거칠게 다루기에 편했다. 저를 무서워하며 기죽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토끼를 사냥하는 듯한 우월감에 우쭐하기도 했다.

“내가 왜?”

그러나 지금 눈앞의 소년은 그가 아는 평범한 소년들과는 달랐다. 토끼가 아니라 맹수였다. 아니, 그보다 더 잔인한 야수였다.

“사,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고?”

“예,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글쎄, 지금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하나뿐인데. 그 더러운 꼴을 깨끗하게 하는 거.”

경멸이 담긴 목소리에 남자는 황급히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피고름과 퀴퀴한 진흙,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물이 잔뜩 묻어있는 몸은 제가 보기에도 몹시 더러웠다. 과연 경멸할 만도 했다. 그러나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건 다름 아닌 눈앞의 소년이었다. 남자는 억울했지만 애써 불만을 삼켰다. 그가 보기에 소년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저를 다짜고짜 죽이려고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미친놈에게 말이 통할 리가 없다. 지금은 그저 납작 엎드려야 했다.

“지, 지금 당장 깨끗하게 씻겠습니다!”

“정말?”

소년이 생긋 웃었다. 다행히 마음에 든 대답을 한 모양이었다. 안심한 남자는 억지로 따라서 웃으려 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완성되지 못했다.

“커, 커헉!”

진득한 격통과 함께 숨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남자는 마지막 생피를 울컥 토해냈다. 부릅뜬 그의 두 눈은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

“왜 그렇게 봐? 네가 바란 대로 해주고 있잖아.”

“무슨…….”

“쓰레기가 가장 깨끗해지는 순간이 언제인 줄 알아?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때야.”

“……!”

“너희가 내 마음에 드는 유일한 순간이지.”

속삭여진 음성은 남자의 귀에 닿지 못했다. 어느새 축 늘어져 있는 남자를 보며 소년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럴 줄은 익히 알았지만 역시나 이번 것도 맥이 빠질 정도로 약했다. 괴롭히는 보람이 없잖아, 이미 죽은 남자가 들었으면 기함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릴 때였다. 문득 멈칫한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음?”

가늘게 뜬 시선이 잠시간 하늘 저편을 응시했다. 소년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천 자락 사이에서 빠져나온 검은 머리칼이 다갈색 피부 위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화려한 금색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품었다.

“한 세대에 두 번의 기적이라…….”

소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포식한 사자와 같은 나른한 미소였다.

“일이 좀 재밌어지네.”

* * *

「드디어 만났다, 엘.」

비틀림이 시작된 순간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마 누구든 그런 경험은 쉽사리 잊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엘 맞아. 이 특유의 체향을 몰라볼 리가 없잖아. 게다가 얼굴도 똑같고 목소리도 똑같아.」

「엘은 금발에 녹안이었어.」

「엘도 그랬어. 화가 나면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명칭이나 비유들을 썼어.」

「정말? 그게 입맛에 맞아?」

「그거 다 네가 좋아했던 것들이야.」

「엘.」

수많은 목소리가 해일처럼 나를 덮친다. 담겨있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한 사람이 낸 목소리다. 분노하고 답답해하고 슬퍼하고, 그러면서도 차마 희망을 놓지 못하던, 지나간 기억들 속의 시벨리우스였다.

그가 나를 보면서 과거를 추억하는 게 싫었다. 그 입에서 옛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 자리가 지워지고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거부하고 외면했다. 똑바로 마주하는 대신 그대로 묻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억지로 지워버린 기억들이 지금은 다른 의미로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점이 많았다. 한 사람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어쩌면 내 소중한 이들의 무의식에 깊은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는 사람. 그러나 정말로 실재했는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한 사람. 그 사람이 하필이면 나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점도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성격이나 행동거지까지 비슷하다고 했다. 나와 체취도 비슷하고, 내가 아는 한국의 용어들을 그 역시 알았다.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확실히 지나친 우연이었다. 망상이라기엔 너무나 상세한데 진짜라기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많은 부분이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부터 의심해봤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벨리우스가 기억하는 4천 년 전의 엘이란 사람이 정말로 나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나와 그가 각자 별개의 인물인 게 아니라…….

‘내가 과거로 간 건 아니었을까.’

라고 말이다.

물론 그랬다면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을 거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냐는 면박이나 들었겠지. 정령왕이 시간 여행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인간이 되어 전대의 정령왕을 소환한다는 건 더 불가능한 일이다. 우스갯소리 취급도 받지 못할 허무맹랑한 공상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비웃음을 사더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봤어야 했다. 그 어처구니없는 일이 정말로 일어나버렸으니까.

“아버지…….”

눈앞에 있는 모습은 이 모든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훌륭한 증거였다. 나는 힘겹게 마른침을 삼켰다. 온 시야를 장악한 선명한 존재감에 소름이 돋았다. 날뛰는 심장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투명한 영체에 가까운 모습을 한, 물의 색을 지닌 엘뤼엔이라니.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틀림없는 물의 정령이었다. 정말로 그가 엘퀴네스인 거다.

“난 너 같은 아들을 둔 적 없는데.”

그 순간 이어진 냉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하염없이 넋 놓고 있을 뻔했다. 아, 그렇지. 지금의 그는 내가 아는 엘뤼엔이 아니었다. 아직 신이 되기 전인, 나를 알지도 못하는 물의 정령왕이다. 급히 정신을 차리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가 보였다. 어딘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 저기…… 그러니까…… 엘퀴네스 님?”

“잘됐군. 그걸 안다면 지금 네가 할 일이 뭔지도 알겠어.”

“……?”

“계속 그런 꼴로 있을 생각인가?”

그제야 나는 내가 상당히 볼품없이 주저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보니 정령왕을 맞이하고도 인사는커녕 자세조차 똑바로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격을 지닌 그에겐 지금 내 행동이 엄청난 하극상으로 보일 터였다. 그의 표정이 더 가라앉기 전에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

상체를 세우기 무섭게 다시 엉덩이가 바닥에 닿았다. 다리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그러자 맥없이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엘뤼엔이 가볍게 혀를 찼다.

“고작 소환한 정도로 바닥이 난 건가. 듣기는 했지만 정말 한숨이 나올 만큼 한심한 마나로군.”

아, 이게 마나가 바닥나서 그런 거구나. 그러고 보니 날 소환했을 때 이사나도 비슷한 상태이긴 했다. 그래도 난 기절까진 하지 않았으니 사정은 더 나은 편이었다. 하긴 그때의 이사나가 날 소환한 건 요행에 더 가까운 거였으니 누구든 그보다는 낫겠지만.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한심하다고 할 것까진 없지 않나? 인간이 정령왕을 소환하는 건 그 자체로 굉장한 일이다. 원래도 성공률이 희박한 편인데 타고난 마나까지 부족하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야말로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란 소리다. 내가 몸으로 경험해 보니 더 잘 알겠다. 지금도 속에서 신물이 올라올 만큼 힘들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내는 건데 한심하다니. 없는 사람이 쥐어짜 낸 거니까 오히려 대견해 하지는 못할망정!

하긴, 드래곤처럼 마나가 펑펑 남아도는 종족만 만나 본 정령왕이 뭘 알겠어. 세상을 편하게만 살아온 사람은 이래서 안 된다. 어쩔 수 없지. 인간에게 소환된 경험은 내가 먼저니까 선배로서 참는 수밖에.

차마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몸이 가뿐해지는가 싶더니 근육에 힘이 생겼다. 그래도 비실거리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는지 엘뤼엔이 마나를 불어넣어 준 것 같았다.

“아, 고맙…….”

“계약하겠나?”

“어? 네? 뭐?”

아니, 저기요. 바로 조금 전에 저더러 한심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왠지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데요? 뜬금없이 이어진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황당해져서 바라보는 나를 엘뤼엔은 여전히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난 그다지 자비롭지 않다. 손해 보는 건 특히 싫어하지. 본래라면 이런 무가치한 계약은 재고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인간이 날 소환한 건 처음이니 네겐 특별히 기회를 주지.”

“와아, 그것참 영광이긴 한데…… 그보다 잠깐, 아버지. 아니, 엘퀴네스 님? 일단 잠깐만 기다려.”

그러고 보니 소환한 정령과는 계약할 수 있었지. 아니, 애초에 계약하기 위해 소환하는 거였다. 증거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을 뿐 솔직히 거기까진 염두에 두지 못했던지라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과거의 ‘엘’이 엘퀴네스의 계약자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머릿속 한구석에선 이 순간을 믿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그 입에서 계약이라는 말이 나오니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들었다. 정말로 여기가 4천 년 전의 아크아돈이고, 내가 과거의 엘이었던 거다.

금발에 녹안, 인간이면서도 정령들을 가족처럼 여겼다는 물의 정령사. 엘뤼엔을 나보다 먼저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했었지. 그를 회상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아팠는데 이제 보니 전부 당연한 거였다. 그 엘이 바로 나였으니까. 지금도 벌써 두 번이나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 참이었다.

‘결국 내가 날 질투한 꼴이었잖아.’

허,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지. 돌아가면 모두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 시벨리우스의 앞에선 고개를 들지도 못할 것 같다. 그는 이런 상황을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마지막에 내게 뭔가 말하려던 걸 보면 뭔가 알아차린 건지도 모른다. 그걸 저지하던 엘뤼엔도 뭔가 알고 있는 느낌이었지. 화끈거리는 낯을 견딜 수가 없어서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뭐지, 그건.”

“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얼굴을 찌푸린 엘뤼엔이 보였다. 그는 내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옷을 걷은 뒤로 그냥 내버려 뒀더니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그대로 보인 모양이다. 나는 얼른 손을 뒤로 감췄다. 물론 머리로는 한참 늦은 대처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엘뤼엔의 얼굴에서 빠르게 표정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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