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8화
“마신을 안다고요? 정말로?”
“물론 정말이지. 설마 모르는 걸 안다고 하겠소?”
“……그럴 리가 없는데.”
“음? 지금 뭐라고 하셨소?”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정말 마신을 안다는 말이죠?”
“대체 몇 번을 묻는 거요?”
돌아가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마신을 어떻게 아는 거지? 이곳도 신계와 가까운 세계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중간계에서 신계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곳은 아크아돈이었다. 그 아크아돈의 인간들은 모두 마신의 존재를 잊었다. 그런 신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이사나와 알리사에게도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부분이다. 가까이에서 접했던 인간들조차 그를 깨끗이 잊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고?
“아, 그래. 이름! 혹시 마신의 이름도 알고 있어요?”
혹시 이곳의 마신은 내가 아는 그와 다른 이가 아닐까. 어쩌면 그사이에 새로운 마신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물었다.
“카노스 님이잖소?”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반사적으로 삼킨 숨이 목울대를 연거푸 울렸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얬다. 정말이다. 정말 카노스를 알고 있었다.
“카노스를, 어떻게 알아요?”
“아까부터 이상한 말을 하시는군, 사제님.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듣는 이름인데 어떻게 모르겠소? 삼 대륙을 통틀어 교세도 가장 큰 신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하지만…….”
“그보다 나도 좀 물읍시다. 에리나를 구해준 건 정말 고맙소. 고맙긴 한데, 너무 기묘하군. 마수의 독에 당했는데 때마침 준비된 듯이 사제가 나타났다라……. 심지어 그 사제가 마기를 다루는 일에 가장 탁월한 마신관이라니. 우연치곤 참 꺼림칙하다고 생각지 않소?”
“네?”
“아니, 사제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말요. 이 상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소. 혹시 이번 균열과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마족을 소환하려 했던 건 아니오? 허가서는? 왕실에 신고하지 않은 마족의 소환은 금지되어 있는데, 그건 알고 있소?”
그가 하는 말은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뿐이었다. 물론 알아들었다 해도 그에 답하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온통 꽉 차 있었으니까.
“이봐요, 어린 사제님. 내 말 듣고 있는 거요?”
시몬이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일부러 대답을 피한다고 여겼는지 자못 험악한 기세였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랑시가 내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시몬 아저씨. 그렇게 다그치지 마세요. 엘은 아무것도 몰라요. 기억을 잃었어요.”
“뭐? 기억을 잃어?”
“네, 이름 말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대요. 르네아 강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래?”
시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한동안 꺼림칙한 시선으로 나를 살피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내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라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전부 선명하게 들려왔다.
“혹시 마신관이 아닐 수도 있는 건가?”
“아냐, 마신관 맞아. 검은색 기운이었잖아. 애초에 신관이 아니면 마수의 독을 정화하지도 못할 테고, 사제 중에서 검은색 성력을 가진 건 마신관뿐이라고.”
“마족일 가능성은? 마족도 마기를 다룰 수 있잖아?”
“멍청하긴. 저 금발이랑 녹색 눈동자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마족은 모두 흑발에 붉은 눈이야.”
“하지만 뭔가 좀 묘한 느낌이란 말이지. 게다가 기억을 잃었는데 성력을 쓸 수 있긴 해?”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다면 본능적으로 한 거겠지. 마수의 독을 이렇게 쉽게 정화하는 걸 보면 꽤 고위 사제인 것 같은데.”
고위 사제.
그 순간 섬광이 꽂힌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시선을 떨어트려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눈에 보이는 건 다섯 개의 손가락뿐, 본래 손등이 보여야 하는 부분은 긴 소매에 가려져 있는 채다. 문득 조금 전 마기를 빼낼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왠지 이상하리만치 손등이 간지러웠다.
……설마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은 착실히 확인 과정을 밟았다. 소매를 걷어 올리니 가려져 있던 손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편편한 피부와 약간 비치는 핏줄, 손가락과 이어지는 단단한 뼈대. 그냥 평범한 사람의 손이었다.
그래, 그 위에 새겨진 선명한 문양만 아니었다면.
“…….”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것 같다. 심장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새하얀 문양은 가죽 날개를 양쪽으로 펼친 듯한 형태였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가 이 문양을 착각할 리가 없다. 틀림없는 카노스의 문장이었다.
“맙소사, 지금 봤어? 신의 문장이 손등에 있어.”
“손등이면 엄청 높은 거 아냐?”
“그걸 말이라고. 거의 대사제 급은 될걸?”
주변의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 언제부터 내 행동을 주시한 건지 모두 내 손등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에게도 이 문장이 보인다는 소리였다.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왜 카노스의 문장이 다시 나타난 거지? 이 문장은 사라졌었다. 그가 소멸한 후 내 손등에서 지워진 걸 두 눈으로 분명히 확인했다. 그때 느낀 절망감과 허탈감이 아직도 시리도록 선명한데, 이걸 믿어야 한다고? 이게 정말 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게다가 애초에 내가 받은 신의 문장은 두 개였다. 육체가 달라진 탓에 없어진 거라 여겼지만, 문장이 있으려면 당연히 엘뤼엔의 것도 같이 있어야 했다. 사라진 마신의 문장은 다시 나타난 판국에 멀쩡하던 그의 문장만 사라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꼭 사라진 게 카노스가 아니라 엘뤼엔이라는 것처럼.’
문득 오늘 아침 물에 비쳐 봤던 내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전과 똑같은 얼굴에 금발과 녹색 눈동자. 어디선가 많이 봤던 그 모습을 내가 그대로 지닌 건 단지 우연에 불과한 일일까. 그게 아니면…….
더는 한계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수군거리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은밀히 살피고 있던 시몬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흠칫했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죠?”
“뭐, 뭐요?”
“이 세계를 부르는 명칭 알아요? 지구라든가 바이톤이라든가, 그런 호칭이 있을 거 아니에요. 설마 아크아돈인 건…… 아크아돈은 아니죠?”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황스러운 듯 시몬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그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들끓던 속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생각이 지나친 거다. 카노스의 문장이 다시 나타난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다른 원인이 있을…….
“신관은 신관이군. 기억을 잃었다면서 신학은 기억하는 거요?”
“……네?”
들려온 목소리에 이어지던 생각이 끊겼다. 멍청히 돌아보는 내게 시몬이 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지금 창세 신화에 대해 말한 거 아니오?”
“창세 신화?”
“그래, 그거 말요. 신학자들이 말하길 이 세상은 4개의 대차원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수많은 중간계로 이뤄져 있다더군. 그중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그렇게 부른다고 들었소. 사제님이 방금 말한 아크아돈 말요.”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대로 주저앉지 않은 건 모든 힘을 쥐어짜 낸 의지의 결과였다. 다만 얼굴이 굳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시몬이 조심스레 나를 살폈다.
“사제님 괜찮소? 꼭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군.”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요?”
“여기가, 여기가 정말 아크아돈이라고요? 정령들이 있는 아크아돈?”
“정령? 아, 이 세계의 자연을 관장한다는 존재 말요? 실제로 본 적은 없다만 그런 존재가 있긴 하지. 음? 왜 그런 표정이시오?”
“아뇨…….”
의아한 시선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령까지 아는 걸 보면 정말 아크아돈이 맞긴 한 모양이다. 거기까지 인정하고 나자 목이 꽉 메어 아무런 소리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가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데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 그건 정말 말이 안 되잖아.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엘. 라피스의 영혼은 차원의 틈새로 튀어나갔고, 엘뤼엔은 그저 그가 흘러간 궤도를 따라 날 보내줬을 뿐이다. 그 장소가 아크아돈 그대로라는 건 당황스럽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냥 등대 밑이 어두웠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뿐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내가 아는 그 세계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아크아돈엔 성냥이 없었다. 헌터라는 직업군이 체계적이지도 않았고 몬스터의 내장을 땔감으로 쓰지도 않았으며, 기원의 숲이라든가 에펜이란 이름을 가진 왕국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나라를 다 돌아본 건 아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문화가 생소하다는 건 이상했다.
나는 다시금 손등의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물감으로 그린 듯이 선명한 문양은 각도에 따라 은은한 광택을 띠었다. 그 빛에서 요사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생기가 느껴졌다. 이 문장에 대고 그를 부르면 금방이라도 응답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델라. 너 얼마 전에 세이크 제국에 갔을 때 유명한 정령사 본 적 있다고 하지 않았나? 타라 대륙에서 왔다는 바람의 정령사 있잖아.”
때마침 들려온 말소리에 잠시 생각을 멈췄다. 세이크 제국, 타라 대륙, 둘 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귀에 익었다. 그러나 기억을 짚어 볼 겨를도 없이 델라의 대답이 이어졌다.
“아, 그 정령사. 왕발톱 거인의 토벌전에서 봤지. 후방에서 귀족들과 진 치고 있어서 활약하는 꼴은 못 봤지만.”
“엥? 후방에만 있었다고? 토벌전에서 활약하라고 몸값 비싸게 주고 모셔온 거 아니었어?”
“그랬다곤 들었지. 하지만 병사들이 우르르 실려 나가는데도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으시더라고. 다들 그 정령사가 다치기라도 할까 꽁꽁 감싸기 바쁘시던데?”
“허참, 그 도도한 세이크 귀족 놈들이 설설 긴다는 게 사실이었구만?”
“아무렴 어쩌겠어. 무려 미네르바의 계약자잖아.”
심장이 쿵 진동했다.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멀거니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시몬과 델라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보시오, 사제님?”
“지금……미네르바의 계약자라고 했어요? 미네르바가 인간과 계약했다고요?”
“그랬소.”
“어, 언제요? 미네르바가 언제 소환됐어요?”
“허어, 이거 정말 다 잊으시긴 한 모양이군. 그만큼 유명한 사실을 모르시다니 말이야. 그 정령사가 미네르바를 소환한 건 벌써 10년도 더 됐소.”
“10년…….”
“엘, 왜 그러세요?”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가 혼란한 정신을 일깨웠다. 빤히 바라보자 날 불렀던 랑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엘?”
아아, 그래. 엘이라고, 내가 가르쳐줬었지.
그 이름을 밝혔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기억을 전부 다 잃었다고 하면 불편할 것 같아서 이름만은 떠오른다고 했던 것뿐이다. 그 정도는 밝혀도 괜찮겠지 싶어서.
조금 전 들었던 대화 내용을 다시 짚어 보았다. 세이크 제국과 타라 대륙. 내가 아는 아크아돈에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들이 왜 귀에 익었는지 선명히 떠올랐다. 전부 시벨리우스에게서 들었던 명칭들이었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의 기억이 아직 머나먼 과거에만 머물러 있던 시절에.
“……랑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인어가 있다고 했었지. 그럼 유니콘도 있어?”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더 가까웠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는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간 주저하던 랑시가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답하듯이.
“있어요. 하지만 만나긴 쉽지 않대요. 깊은 숲에 은거하는 데다가 변장을 잘하는 일족이거든요.”
“……혹시 형벌의 신 알아?”
“형벌의 신? 처음 들어보는 신이에요.”
고개를 갸웃하는 랑시를 보다 그 너머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래. 모를 줄 알았어.”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내내 손끝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인간과 계약한 미네르바. 내가 아는 아크아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어와 유니콘. 형벌의 신을 모르는 사람들. 사라진 카노스의 문장이 다시 나타난 이유.
<이게 끝이 아닐 거야.>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러니까, 엘.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해도 될까?>
트로웰, 네가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을까. 넌 처음부터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오히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던 거였어. 그렇지?
이다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정처 없이 숲길을 걷고 있었다. 어렴풋이 떠올리기론 에리나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옅은 신음이 들렸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진 틈을 타 나 혼자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는 모르겠다. 걷다 보니 어느 순간 고요하게 흐르는 강이 보였다. 르네아 강이라고 했던가. 랑시와 만났던 바로 그 강가였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을 잠시간 응시하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물에 손을 담갔다. 여기서 다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 뭔지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되었으니 밟아야 할 절차가 좀 더 복잡해지긴 했지만, 시도하지 못할 건 없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매개체가 약한 편이라는 건데, 이것 역시 식을 좀 더 구체화하는 거로 보완하면 될 것 같았다.
“……태초의 지배자께 허락을 구하노니.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노라.”
정령의 소환식은 조건을 갖췄을 때만 반응한다. 그 조건엔 정령계와의 연결도 포함된다. 내 재능이 아무리 넘쳐 흘러도 이곳에 정령이 없다면 부름이 닿지 않는다는 뜻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순간까지도 확신은 하지 못했다. 반쯤은 도박에 가까운 심정으로,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는 말자는 마음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주문을 읊기 무섭게 힘이 훅 빠져나가더니 큰 파문이 일었다. 둥그렇게 번져나가는 물결을 보며 나는 호흡을 낮췄다. 미치겠네, 이게 정말 되는 거냐. 무작정 저지르긴 했지만 막상 정말 반응하는 걸 보니 마음이 상당히 복잡했다.
“여기 자격을 갖춘 이가 물의 유지를 이어 가길 감히 바라나이다. 나 오늘날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을 맞이하고자 하오니. 허락된 숙명 안에서 고귀한 뜻을 품은 자는 의당 그 합당한 소원을 이룰 것이라.”
곧 수면 위에 거대한 금색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 주변으로 거품이 일면서 물결이 거칠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기운에 숨이 크게 가빠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눈앞이 핑 돌았다.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을 간신히 견디며 입술을 악물었다.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직 술식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그대, 살아 있는 모든 물의 근원이자 지배자인 정령왕 엘퀴네스여.”
설마 살아생전에 내가 내 입으로 이 이름을 부를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오는데 너무 힘들어서 얼굴은 찌푸려졌다.
“갈급한 자가 간곡히 청하오니, 부디 내게 응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