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화
“윽, 젠장!”
이빨을 세운 염소 머리가 바로 눈앞에서 날뛰는 건 별로 정신건강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거대한 손톱을 연신 휘두르는 것도 성가셨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생김새나 덩치에 비해 놈의 완력이나 속도가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제 눈앞을 가로막은 나뭇가지가 성가신지 연신 빼앗으려 하는데도 내 힘을 이기지 못했다. 약간의 몸 씨름 끝에 나는 틈을 벌려 놈을 걷어차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잠시라도 떨구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큰 결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키에엑!”
그런데 걷어차인 몬스터가 그대로 저만치 날아갔다. 맞은 몬스터도 당황했겠지만 나도 당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 힘이 꽤 강한 편인 모양이다. 그래도 거기까진 그저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다음 광경을 보기 전까진.
“……어?”
바닥에 엎어진 몬스터는 한동안 거품을 토하며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는지 좀처럼 몸을 추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축 늘어지더니 그대로 잠잠해지는 게 아닌가. 반격을 대비해 나뭇가지를 단단히 움켜잡고 있던 나로선 눈앞의 상황이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심쩍은 기분에 계속 주시해 봤지만 시간이 지나도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단순히 의식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설마 싶은 마음에 나는 경계를 거두고 조심스럽게 몬스터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웅크린 몸을 나뭇가지로 꾹 밀자 눈을 까뒤집은 염소 머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드러났다. 역시나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정말로 그 발차기 한 번에 죽은 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죽은 몬스터 앞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심각하게 고찰했다. 물론 내 딴엔 온 힘을 다해 차긴 했다. 원래 정령왕인 내 몸 그대로였다면 이게 당연한 결과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인간(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이었다. 체형도 가는 편인데 엄청난 충격을 줄 리는 없었다. 걷어찬 부위가 운 좋게 급소였던 건가? 어쩌면 떨어지면서 어딘가 크게 잘못 부딪친 건지도 몰랐다.
수많은 혼란한 생각 끝에 나는 간신히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다. 겉모습만 흉악했지, 사실은 아주 약한 몬스터였던 거다. 사실 덩치가 크다고 해서 무조건 강한 몬스터라는 법은 없잖아? 완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걸 생각해 봐도 역시 하급 중에서도 최하급 몬스터인 게 분명했다.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현실 도피 하는 꼴을 봐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문득 시선을 내리다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보게 됐다. 대충 아무거나 꺾은 데다가 워낙 정신이 없어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어떻게 쉽게 꺾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두께가 굵었다. 게다가 상태도 뭔가 조금 이상했다. 몬스터의 이빨이 닿은 부분이 으스러진 거야 당연한 일이니 신경 쓸 게 없지만, 왠지 양쪽 끝도 그만큼 뭉개져 있었다. 딱 내가 잡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거 혹시 내가 이렇게 만든 건 아니겠지?’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처음부터 그랬는데 내가 너무 정신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한 거겠지. 밀려드는 생각들을 외면하면서도 나는 시험 삼아 멀쩡한 부분을 쥐고 힘을 꾹 줘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똑같이 으스러진 덩어리를 봐야 했다.
“…….”
엘뤼엔, 이 아버지야. 대체 나한테 무슨 몸을 준 거야.
손바닥을 털어낸 후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호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 *
누리지 못한 사람은 결핍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벌은 누리게 한 후에 빼앗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냐면 지금 내가 딱 그 상태이기 때문이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어느덧 몇 시간. 정처 없이 숲을 걷는 동안 주변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사이 나는 내가 누리던 것들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원래도 감사하긴 했는데 더 깊이 감사했어야 했다. 인간에서 정령왕이 되었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정령왕에서 인간이 되니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침엽수림 안에서는 더욱 그랬다. 다른 정령들과 교감하지도, 하늘을 날지도 못하니 숲의 규모를 파악하기는커녕 방향을 제대로 잡아가고 있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걸을 때마다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가장 치명적인 점은…….
“배고파…….”
허기가 느껴진다는 거다.
이건 정말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든 뭐든 육체를 지닌 생물이라면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거였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인데 내겐 상관없는 영역이었다 보니 그런 당연함조차 잊고 있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 여정을 강행한 건지 스스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여하튼 오랜만에 느껴보는 허기는 상상 이상으로 괴로웠다. 강지훈일 때도 잘 챙겨 먹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때의 기억보다 이상하리만치 더 힘든 것 같았다. 무식한 완력을 생각해 보면 이 육체의 기초대사량이 너무 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말이 나온 김에 설명을 추가하자면 그 이후로도 나는 동종의 몬스터와 몇 번 더 마주쳤고, 전부 다 때려잡았다. 좀 지나치게 강하다 싶은 몬스터도 만나긴 했는데 그런 건 최대한 숨거나 달아나는 방식으로 따돌렸다. 한 번은 집요한 놈을 만나는 바람에 꽤 긴 시간 동안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아, 그래서 더 배가 고픈 건가.’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력을 좀 더 아껴 쓸걸. 후회해봤자 늦었지만 입 안이 썼다. 이대로는 숲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지쳐서 쓰러질 게 분명했다. 뭔가 먹을 만한 걸 구하면 좋겠는데 겨울 숲이라 그런지 적당한 게 없었다. 토끼나 사슴 같은 것들은 간간이 보였지만 손질할 도구도 없는 데다가 불도 없는데 어떻게 조리할지가 문제였다.
‘아니지, 불이야 피우면 되잖아?’
원시적으로 불을 피우는 방법 중에 나무의 마찰열을 활용하는 게 있던가.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했다. 마침 근방에 죽은 나무도 널려 있어서 마른 가지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우선 주변을 다니며 돌팔매질 방식으로 토끼 몇 마리를 잡았다. 몬스터도 때려잡는 힘이라 그런지 토끼를 잡는 건 너무 쉬워서 내심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나머지 과정도 순탄하게 이어졌다. 모닥불 자리를 마련한 후 나뭇가지를 맞대어 빠르게 비비자 하얀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불꽃이 타올랐다. 예상했던 일이긴 한데, 막상 기세 좋게 넘실거리는 불씨를 보자니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이게 원래는 이렇게 간단하게 되는 게 아닐 텐데. 그간 내가 봤던 인간들은 어땠더라. 샴페인 용병들이야 오러로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이니 논외로 치고, 군대에서 봤던 병사들은 부싯돌을 가지고도 꽤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불 피우는 걸 전담하는 병사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런 걸 시행착오도 없이 단숨에 성공하다니. 이것만 봐도 내 몸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이제 와선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만들어낸 불씨를 모닥불에 옮긴 후 본격적으로 조리에 들어갔다. 가죽을 벗겨내는 건 포기하고 그냥 통째로 구워 고기를 발라내기로 했다. 그렇게 완성된 토끼 구이는 약간 누린내가 났지만 먹을 만은 했다. 혀로 맛을 느껴보는 게 오랜만이다 보니 그 자체가 좋아서 아마 뭐든 괜찮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온종일 굶주렸던 속이 채워지니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끝없이 가라앉았던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귓가에 어렴풋이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 건 식사를 거의 다 마쳤을 무렵이었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거리감이 모호하긴 했으나 틀림없는 물소리였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이동했다. 걸어갈수록 물소리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이제 더는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분명해졌을 땐 물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 조금 더 걸어가니 시야가 트이며 출렁이는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큰 하천이었다.
“다행이다. 강이 있었구나.”
마음이 한결 놓였다. 강이 있는 곳엔 인가가 있을 확률이 높다.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이 나오거나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우선 물을 떠서 목부터 축였다. 냄새가 나쁘지 않아서 크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예상대로 아주 맑은 물이었다. 급한 갈증을 해결하고 나니 물 위에 어렴풋이 비치는 내 모습에 시선이 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원래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뭐, 날이 밝아지면 확인할 수 있겠지.’
일단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낼까. 그러고 보면 너무 쉴 새 없이 걷기는 했다. 자각하고 나니 급격히 피로해져서 그대로 바닥에 등을 눕혔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
새카만 밤하늘을 보석처럼 화려한 별 무리가 수놓고 있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찬란한 빛의 향연에 홀리는 것만 같았다. 돈을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밤이 된 지도 꽤 되었는데 하늘이 이렇게 멋지다는 걸 이제야 알아보다니, 오늘 온종일 여유가 없었다는 게 새삼 와 닿았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낯선 세상과 변한 환경에 겁먹었던 거다.
하지만 이곳도 결국은 어느 중간계 중 하나겠지. 대차원인 신계나 명계와도 연결되어 있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놀랍도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 잘 도착했어.”
아직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이 예쁜 걸 보면 괜찮은 곳인 것 같아. 배고픈 게 좀 곤란했는데 다행히 잘 해결했어. 하천을 발견했으니 곧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거야. 앞으로 점점 더 요령이 생기겠지. 그러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수많은 말을 속으로 삼킨 채 하늘을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나를 위한 다짐이자 의식이기도 했다.
“금방 돌아갈게.”
* * *
“엘.”
어느 순간 잠들었던 것 같다. 희뿌연 의식 저편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였다.
“엘, 일어나. 엘?”
무언가 급한 용건이 있는 걸까. 재촉하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머리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모습이었다. 한순간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라피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라피스는 조금 놀란 듯이 움찔했지만 뿌리치진 않았다. 끌어안은 품 안에선 좋은 향이 났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의, 수분을 잔뜩 머금은 장미와 따듯한 볕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였다. 이 또한 익숙한 체향이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이다. 정말 라피스였다.
“다행이야, 만났어!”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왜 그렇게 죽어버려서 슬프게 했는지, 혼자 이런 낯선 곳에 떨어져 괜찮았는지, 그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도 많았는데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장 난 기계처럼 다행이라는 말만 연거푸 반복했을 뿐.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레드 드래곤인 라피스는 평소 체온이 높은 편이었다. 내가 인간이 되었으니 더 확실한 온기를 느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끌어안은 그의 품은 서늘할 정도로 차가웠다.
“라피스?”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라피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눈앞에 있는 건 축 늘어진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굳게 감겨 있는 두 눈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혈색을 잃은 가죽에서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흘렀다.
“아…….”
“그 아이는 이미 혼이 떠났구나.”
들려온 음성에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운명의 여신이 서 있었다. 안타까움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죽었다는 뜻이다.”
“허억!”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밝은 빛이 파고들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스치는 광경이 온통 낯설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새파란 하늘과 주위를 가득 채운 나무숲, 바로 눈앞엔 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어느 곳에도 라피스의 시신이나 라데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문득 잿가루만 남은 모닥불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잠들기 전에 내가 직접 피워둔 것이었다는 걸 떠올리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꿈이었구나.’
긴장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상당히 싫은 꿈을 꾸고 말았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괴로운 기억을 헤집는 꿈. 아직도 몸이 떨리는 것 같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아팠다. 진정하길 기다리며 숨을 천천히 몰아쉬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간신히 괜찮아졌을 땐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제 더는 호흡이 힘들지 않다는 걸 인지한 후에야 나는 지친 상태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머리칼부터 온몸이 다 축축해서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물가로 다가가 그대로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공기가 차단되면서 일기 시작하는 저항감이 내가 이제 정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게 더 반가웠다. 이 몸 자체가 이 세계 어딘가에 그가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얼마간 그러고 있다가 숨이 벅차다고 느낄 때쯤에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거친 기침을 몇 번 뱉어내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 찾을 수 있어.”
라피스를 찾을 거다. 반드시 찾아내서 함께 돌아갈 거야.
연거푸 다짐하는 동안 동요하던 마음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니 물에 비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금발을 지닌 소년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낯선 머리 색에 둘러싸인 얼굴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뭐야, 이건.”
급히 뺨을 더듬으니 물속의 형태도 따라 움직였다. 역시 내 모습이 비치는 게 맞았다. 환시나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 당혹스러웠다.
“원래 얼굴이랑 똑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