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3화
아이가 태어난 날엔 짙은 바람이 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돌풍이 느닷없이 일어나 사납게 대지를 훑었다. 지붕이 떨어져 나가고 굵은 나뭇가지가 꺾였다. 그 강대한 힘 앞에선 판자로 지어진 작은 집이나 갓난아이를 덮은 낡은 짚더미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출산 직후 온전치 못한 몸으로 일하러 나갔던 어미는 돌풍이 아이가 있는 곳을 덮치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그때엔 이미 판자가 두부처럼 으깨어져 무너진 후였다.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에 어미는 울부짖었고, 함께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 역시 모두 신음했다. 모두가 비참한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울고 있던 어미의 어깨를 두드리곤 판자 더미를 가리켰다. 의아해하던 어미는 곧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달려간 곳에서, 어미는 무너진 판자 틈에서 울고 있는 제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온 사방에 파편이 튀어 엉망이 되었건만, 마치 일부러 막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 주변만은 온전했다. 감격한 아이의 어미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바람의 왕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 이적이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소년이 되었다. 소년은 마을에서 술래잡기를 가장 잘했다. 소년이 작정하고 숨으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아무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바로 앞에 있어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도 많았다.
그 날도 숨바꼭질을 하는 중이었다. 장소는 마을에서 가장 한적한 곳에 있는 어느 버려진 저택 안이었다.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모험심이 강한 아이들이 그 말을 귀담아들을 리가 없었다. 저택 안에 숨어든 아이들은 곧바로 술래잡기를 시작했고, 소년은 여느 때와 같이 적당한 장소에 몸을 숨겼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미 주위가 캄캄해진 상태였다. 당황한 소년은 주위를 돌아봤으나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친구들이 소년을 찾지 못하자 그냥 버려두고 간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면 혼날 게 분명 했기에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했다.
소년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쪽이었다. 모르는 척하면 될 텐데, 그날따라 호기심이 들었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는 생각보다 깊었고, 매우 넓었다.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수로와도 이어진 것 같았다. 그곳에서 소년은 한구석에 묶여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이상한 소리는 입에 재갈이 물린 소녀가 낸 신음이었다. 깜짝 놀란 소년은 서둘러 소녀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는지 계단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소녀를 가둬둔 일당이 내려오는 중인 게 분명했다.
소년은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소녀를 부축하고 어두운 곳을 찾아 숨었다. 곧 소녀가 사라진 걸 눈치챈 듯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단순히 숨어 있는 것만으로는 금방 잡힐 것 같았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소년은 소녀를 등에 업고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왠지 다른 쪽에도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소년은 출구를 찾아내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구출한 소녀는 어느 귀족 가의 자제였다. 애탄 마음으로 납치된 딸을 찾던 귀족은 소년을 크게 치하하고 상을 내렸다. 소년은 곧바로 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그때 한 여행자가 소년에게 관심을 보였다. 지하를 어떻게 탈출한 건지 묻는 말에 소년은 제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왠지 그쪽에 출구가 있을 것 같아서’, ‘그쪽으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는 설명을 들은 여행자는 소년의 부모를 찾아가 넌지시 조언했다. 소년에게 바람술사가 될 자질이 보이니 교육을 받게 하라는 것이었다.
소년의 이름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두 번째 이적이었다.
이후 학술원에 들어간 소년은 순조롭게 청년이 되었다. 그맘때쯤 청년은 부담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자질은 충분한데도 좀처럼 정령을 소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대하던 시선들에 점차 실망감이 담기기 시작하자 청년은 갈수록 말수를 잃었다. 머리가 복잡한 날엔 전망이 가장 좋은 언덕에 올라가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멍하니 누워 있는 그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착용한 교복 덕분에 같은 학술원 학생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상대는 청년에게 무언가 고민이 있는지를 물었고, 청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좀처럼 정령을 소환할 수 없다는 말에 상대는 웃으며 뜻 모를 답을 했다.
“큰바람이 이는 곳엔 작은 바람은 밀려나는 법이지.”
즉 바람의 왕이 청년을 주시하고 있기에 다른 정령들이 감히 나서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선뜻 믿어지지 않는 말이라 얼떨떨해하는 청년에게 상대는 작은 술잔을 내밀었다. 무심코 받아드니 맑은 술이 한가득 채워졌다.
“마시렴. 그럼 원하는 길을 가게 될 거야.”
청년은 홀리듯이 술을 마셨다. 그러자 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알 수 없는 열기에 시달리다 청년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그는 들판에 혼자 누워 있었다. 선배인지 후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던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꿈이었을 지도 몰랐다. 멍하니 몸을 일으키면서 청년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 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왠지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개운했다. 지금이라면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은 이제 거의 습관이 되다시피 한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눈앞에서 거대한 폭풍이 일었다. 마치 주변을 흐르던 모든 바람이 그의 앞으로 한꺼번에 몰려든 듯했다. 그 강렬한 기체의 진동 사이에서 투명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형상은 눈부시게 새하얀 여인의 형상을 갖추었다. 크게 벌어진 청년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가려졌던 시야가 훤하게 드러나며, 몰랐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아아, 당신이었군요. 전부 당신이었어요.”
새하얀 여인은 조금 전에 술을 권했던 낯선 학생이었다. 그 전에는 소년의 재능을 알아보고 조언했던 여행자였다. 무너진 판자 더미에 갇힌 갓난아이의 생사를 그 어미에게 알려준 누군가이기도 했다.
청년은 그대로 무너져 오열했다. 새하얀 여인이 그런 그를 가만히 끌어안아 다독였다. 그 품은 너무도 다정해서 청년은 오히려 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후 청년이 바람의 왕과 계약했다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져나갔다. 세상을 뒤흔든 세 번째 이적이었다.
* * *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머리칼을 간질이는 선명한 바람, 들이쉬는 숨 한가득 진한 흙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아마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슬쩍 눈을 뜨니 찌르듯이 강렬한 햇살이 아무런 여과 없이 파고들었다. 손을 들어 가리려다가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숨을 삼켰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으, 뭐야…….”
목소리도 잔뜩 잠겨 있었다.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간신히 몸을 일으키니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새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너머의 지평선을 빼곡한 숲이 두르고 있는 모습이 심혈을 기울인 한 폭의 삽화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낯설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잔 건지 머리가 멍해서 상황판단이 잘되지 않았다. 뭔가 요란한 롤러코스터를 탔던 것 같기도 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닌 것 같기도 했다. 아득한 의식 저편,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을 연달아 느꼈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더라. 먹물처럼 까맣기만 한 머릿속을 더듬어가며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아, 그래. 라피스의 영혼을 찾으려는 중이었지. 녀석이 사라진 궤적을 따라 엘뤼엔이 날 이동시켜 준다고 했었다. 뭔가 묘한 감각을 느낀 후 곧바로 추락했는데, 그 이후로는 모든 기억이 흐렸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그럼 성공한 건가? 나 제대로 도착한 거야?”
물론 이곳엔 나밖에 없었으므로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정령계에 있었던 내가 전혀 다른 장소에서 눈을 떴다는 것 자체가 성공했다는 증거였으니까.
무엇보다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선명히 느껴지는 기후였다. 정령이 된 후로 나는 기온을 딱히 느낀 적이 없었다. 머리로는 온도를 인지할 수 있지만 그걸 온전히 체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추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바랜 듯한 들판 색이나 숲에 나뭇가지만 엉성한 걸 보면 아마도 한겨울인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옷을 입고 있다는 거다. 그것도 꽤 두꺼운 재질에 목에서 손등까지 전부 단단히 감싼 차림이었다. 물론 이 옷차림 역시 기존의 내 차림과는 달랐다.
“그럼 정말 새로운 몸이라는 말인데…….”
얼굴을 더듬어보니 털이나 비늘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과 발도 본래 내가 알던 형태 그대로였고, 꼬리나 뿔 같은 것도 없었다. 우려하던 몬스터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기존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피부색이라든가 귀 모양이 둥근 걸 보면 무난하게 인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눈앞에서 웬 금실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치우려고 보니 내 머리칼이었다.
“금발이구나.”
하긴 몸이 달라졌으니 머리 색도 달라질 수 있는 거겠지.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부분인데도 막상 바뀐 부분을 보니 신기했다. 이 정도면 엘뤼엔보다는 조금 더 진한 색인가? 그래도 이사나의 머리색보다는 밝은 편인 것 같다. 전체적인 기장은 본래의 나와 비슷해 보였다.
거기까지 파악하고 나니 왠지 기묘한 기분이 들어 몸을 더듬어보았다. 가슴이 평평한 건 여느 때랑 같아서 위화감이 없었는데, 약간 설명하기 힘든 곳에서 한동안 느껴지지 않던 감각이 전해졌다. 덕분에 굳이 벗어보지 않아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새로 얻은 몸의 성별은 남자였다. 없던 게 다시 생기니 조금 불편했지만, 여자의 몸보다는 익숙하다는 점에서 다행이긴 했다.
“그보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대강 상황 정리를 마치고 나니 눈앞이 막막했다. 무사히 도착한 것까진 좋은데 라피스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어딘지는 당연히 모르고, 입고 있는 옷 외에는 수중에 땡전 한 푼도 없는 상태였다. 운 좋게 금방 인가를 발견한다 해도 숙소를 구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그렇다고 마냥 여기서 이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서 가까운 마을을 찾자. 거기서 적당한 일자리를 구한 다음 돈을 벌면서 이곳의 정보부터 얻는 거야.’
내가 생각해도 막연한 계획이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별다른 묘안이 없었다. 나는 일단 무작정 걸었다. 해가 떨어지면 기온이 더 낮아질 거고, 짐승을 만날 수도 있다. 아직 이곳의 생태계는 잘 모르지만 야수가 어두운 시간에 활보하는 건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그전에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된다고 하던가. 위기는 생각보다 더 일찍 찾아왔다. 그것도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안 좋은 방향으로.
“……저게 뭐야.”
숲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이한 생물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처음엔 덩치가 남다르게 큰 침팬지나 오랑우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뿔 달린 머리 모양이 한눈에도 염소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 맹수처럼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 손톱과 발톱도 기형적으로 긴 데다가 엉덩이 뒤로 늘어진 꼬리는 악어의 그것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평범한 짐승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 역시 몬스터가 존재하는 세계인 모양이었다.
벌어진 놈의 입에선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초식 동물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날 맛있는 한 끼 식사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 기대에 응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동료가 몰려올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자.’
나는 늘 하던 대로 물을 움직여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당연히 따라와야 할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다가 뒤늦게 스치는 낭패감에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난 정령왕이 아니지. 몸이 달라졌는데 물을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만, 그럼 지금 내가 몬스터와 맞서면 위험한 거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당연히 위험한 게 맞았다. 그제야 깨달은 상황에 마른침을 삼켰다. 더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이런 식으로 실감할 줄이야. 더 어이없는 건 몬스터가 날 알아차리기 전에 내가 먼저 저 녀석의 기척을 느꼈다는 거다. 즉 도망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걸 무시하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최적의 골든 타임을 고스란히 날린 셈이었다.
‘미쳤어. 생존본능은 어디다 버렸냐, 엘.’
대체 어떻게 이런 걸 실수할 수 있는지. 인간으로 산 세월이 훨씬 더 길건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정령왕의 몸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다. 그게 정말로 황당했다. 그간 정령인 내게 적응하지 못해 일이 꼬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이젠 다시 인간의 몸에 적응해야 하는 사태라니, 무슨 놈의 팔자가 이런지 모르겠다.
어쨌든 분명한 건 인간은 무기 없이 단독으로 몬스터를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눈앞의 몬스터는 크기가 나와 엇비슷한 데다가 덩치는 더 컸다. 이대로 도망쳐봤자 금방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그러자 그런 생각이 눈앞의 상대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키키킥,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울리더니 눈이 마주친 이후로 쭉 견제만 하던 몬스터의 기세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급히 물러서려 했을 땐 이미 놈이 나를 덮쳐든 후였다. 반사적으로 근처에 쓰러져 있던 죽은 나무의 나뭇가지를 꺾어 방어하긴 했지만 균형을 잃은 몸이 뒤로 넘어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몬스터에게 깔린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