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2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말인즉 라피스의 혼이 명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죽은 게 분명한데 혼을 찾을 수 없다니? 그럼 라피스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지?
“그가 사망할 당시에 명계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건 너도 기억할 거야. 그래서 인도자가 조금 늦게 발령되었는데, 찾아갔을 땐 이미 그 몸에서 혼을 찾을 수가 없었어. 다른 데로 날아간 것으로 추론하고 지금까지 계속 찾았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고.”
페르데스의 설명을 듣는 동안 천천히 얼굴이 굳었다. 혼을 찾을 수도 없고, 발견하지도 못했다니. 아무리 들어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엘뤼엔을 바라보니 그가 살짝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차원의 틈에 빠진 것 같다.”
“……차원의 틈? 거기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건데?”
“무작위로 아무 차원에나 떨어지지.”
“그럼 그냥 찾아오면 되는 거 아니야? 떨어진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서 다시 찾아오면 되잖아.”
그러자 이번엔 페르데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 차원의 틈엔 시공도 같이 얽혀 있어. 어떤 장소에 어떤 형태로 섞이는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돼. 이런 경우엔 어디선가 우연히 발견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게 몇 년 후일지 몇십만 년 후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해.”
“말도 안 돼. 그걸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고? 어떻게든 떨어진 장소를 추측해서 찾으러 갈 수는 없는 거야?”
“아주 불가능하진 않은데, 조건이 까다로워.”
“조건?”
“혼을 찾으러 갈 자는 실종된 혼의 현생과 강한 인연으로 묶인 존재여야 하고, 차원의 틈을 건너갈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해. 적어도 하급신 이상은 되어야 하지. 여기까지 들으면 알겠지만, 지금 이 조건에 맞는 건 엘뤼엔밖에 없어.”
나는 반사적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네가 원하면 가주마.”
“정말?”
“그래.”
“아니, 안 돼.”
단란한 부자의 대화를 막은 건 페르데스였다. 골치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 엘뤼엔. 넌 지금 마신의 일까지 겸임하고 있어서 신계를 비워선 안 된다는 거 알잖아. 게다가 아직 설명도 아직 다 하지 않았어. 엘에게 죄책감을 안길 참이야?”
그 말에 엘뤼엔이 약간 눈썹을 움찔했다. 왠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페르데스를 돌아보았다.
“죄책감이라니?”
“이 일은 위험부담이 너무 커. 어디로 떨어질지도 알 수 없는 데다가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어.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는 거야.”
“확신을…… 못 한다고? 왜?”
“중간계는 서로 시간대가 전부 다 달라. 그래서 본계와 연결되는 정확한 귀환 경로를 알아야 돌아올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건너간 경우엔 시공이 얽혀서 그걸 찾기가 힘들어진다고 들었어.”
이어진 설명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돌아올 수 없을 수도 있다니. 그런 걸 알면서 엘뤼엔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가 간다고 해도 말릴 거다.
그럼 뭐야. 라피스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서 방황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데 그냥 이대로 방관해야 한다는 건가.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도 없는 세월을 그냥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자리에 주저앉자 엘뤼엔이 페르데스를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짓을. 애가 절망하잖아.”
“난 사실을 알려준 것뿐이야. 이런 중요한 사실이라면 당연히 알려야지. 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걸 엘이 바랄 거라고 생각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만은 없지. 추를 만들면 귀환 확률을 좀 더 높일 수는 있긴 하다.”
“……추?”
무심코 되물었더니 엘뤼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쪽에서도 연결되는 존재를 두는 거지. 그게 끈을 묶어두는 기둥이 되어 귀환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추의 역할을 하는 쪽도 마찬가지로 실종된 혼과 인연이 닿아 있어야 해. 물론 찾으러 가는 쪽과도. 게다가 끌어주는 쪽은 더 큰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상급신은 되어야 할 거야. 그런데 지금 이 역할을 할 존재가 아무도 없잖아.”
이번에도 페르데스의 반대가 이어졌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두 신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가면?”
“뭐?”
페르데스와 엘뤼엔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향했다.
“엘, 지금 무슨 소리를…….”
“라피스와 가장 강한 인연을 가진 건 나잖아. 난 정령왕이니까 하급신 이상은 당연히 될 거고. 끌어주는 쪽을 아버지가 하면 돼. 모든 조건에 딱 맞아.”
말을 할수록 머릿속이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하늘에 빛이 깃드는 것 같았다.
“그래, 정말 그렇네. 왜 이걸 바로 떠올리지 못했지? 내가 가서 라피스를 찾아올게!”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령왕은 아크아돈을 떠나면 안 된다는 걸 잊었어? 또다시 이 땅에 가뭄을 불러올 생각이야?”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아버지, 어떻게 생각해? 혹시 좋은 방법 없어?”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엘뤼엔이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페르데스는 나를 붙잡고 고개를 젓기 바빴다.
“엘, 안 돼. 그건 너무 무모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도 안 돼. 난 반대야.”
“뭐야, 그럼 왜 나한테 말해주러 온 건데?”
발끈해서 물은 것에 만류하던 페르데스가 입을 다물었다. 흔들리는 보라색 눈동자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가 날 걱정해서 이러는 거라는 것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내겐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찾을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잖아. 방법이 있잖아. 그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포기해? 날 말리려면 처음부터 그런 말은 하지 말지 그랬어. 라피스를 찾을 방법이 전혀 없다고, 그 녀석 영혼이 완전히 소멸해서 희망이 없다고 말했어야지.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이 포기했을 텐데…….”
“……엘.”
“난 라피스를 모른 척할 수 없어. 내가 그 녀석을 찾아올 수 있게 해 줘. 금방 돌아올게. 사고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다녀올게. 그러니까…….”
“과연, 이렇게 되는 거군.”
그때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엘뤼엔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의미 모를 시선을 보내던 그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좋아, 다녀와라.”
“……!”
“에, 엘뤼엔?”
페르데스가 경악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엘을 보내? 그러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엉뚱한 차원으로 떨어지면 어쩌려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겠다잖아. 아버지라면 아들의 말을 믿어줘야지.”
“엘은 정령왕이잖아! 아크아돈은 어떻게 하려고?”
“그것도 방법이 있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대답에 페르데스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할 말을 찾지 못해 굳어 있는 그를 무시한 채, 엘뤼엔이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네겐 내가 있다.”
“……!”
“나만은 반드시 네 편이다.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아들.”
가슴이 벅차오르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한껏 크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아버지!”
결정을 마친 후 나는 그 길로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를 찾아가 내가 자리를 비운다는 사실을 알렸다. 마침 함께 있던 덕분에 같이 이야기를 듣게 된 두 사람은 몹시 당황했다가 내가 떠나는 목적을 듣고 더 크게 당황했다.
“그러니까, 라피스 님의 혼이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단 거지?”
“응, 그 바보 같은 녀석이 차원의 틈에 빠져버렸대. 혼자서는 돌아올 수도 없다나 봐. 그래서 찾으러 가야 해.”
“그렇구나. 그럼 당연히 가야지.”
이사나는 아주 간단히 내 결정을 지지했다. 아직 제국은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고, 그의 곁에도 내가 필요한 시기였다. 그런데도 너무 쉽게 보내줘서 오히려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 이사나. 이런 식으로 곁을 비우게 돼서.”
“아니, 난 괜찮아. 라피스 님을 찾길 바라는 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엘, 그분을 꼭 찾아야 해.”
“응, 그럴게. 시벨리우스, 그동안 이사나 좀 잘 부탁해.”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대답하는 시벨리우스는 몹시 무거운 얼굴이었다. 내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다른 생각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얼굴로 계속 입을 우물거렸다.
“저기, 엘.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응?”
“어쩌면…….”
“그 기억이 소중하다면 더는 입을 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때 내 옆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엘뤼엔이(페르데스는 말리기를 포기한 끝에 신계로 돌아갔다) 이어지려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시벨리우스가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지금 네 기억은 이 세계의 균형에 맞지 않아. 본래 지워졌어야 했지만 규칙에서 벗어나 있어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 믿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지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게 진실이 되면 균형이 널 알아볼 거고, 지워지게 될 거다. 네가 그걸 원할 것 같지 않아서 해주는 충고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시벨리우스는 의미를 알아들은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던 그가 곧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를 보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어서 나는 엘뤼엔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이야?”
“어차피 곧 알게 될 거다.”
이번에도 엘뤼엔은 뜻 모를 대답을 했다.
이후론 이사나와 시벨리우스에게 당부를 건네는 것으로 모든 작별인사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과 포옹을 나눈 후에야 나는 엘뤼엔의 곁에 섰다.
“그럼 다녀올게.”
“잘 다녀와.”
이윽고 모든 상황이 정리된 걸 확인한 엘뤼엔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며 익숙한 전경이 펼쳐졌다. 새파란 물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간이었다.
“여긴…….”
도착한 곳은 정령계, 그중에서도 물의 영역이었다. 게다가 익숙한 존재들이 나보다 먼저 와 있는 상태였다. 미네를 비롯한 정령왕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엘.”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네. 왜 이제야 와?”
반기는 미네에 이어 이프리트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너희가 어떻게……?”
“이날이 보였거든.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모두를 불렀어.”
당황해서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트로웰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미래를 보는 능력을 지닌 그다운 설명이었다.
“드래곤 영혼을 찾으러 떠난다니. 참 무모한 생각을 다 하네. 너무 너다워서 말릴 생각도 안 들어.”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무모합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미네, 비판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엘에게 동조하지 마. 저런 말썽쟁이는 한 명으로 족하다고.”
“그건 유감입니다.”
“글쎄, 유감이 아니라니까?”
주변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웃음을 삼키고 있으려니 마음이 한층 풀리면서 몸이 편안해졌다. 긴장하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먼 길을 떠난다 생각하니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때쯤 엘뤼엔이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가는 것은 네 육체가 아닌 영혼뿐이다. 네 몸은 여기 물의 영역에서 잠들어 있을 거다.”
“어? 영혼만?”
“이곳에 가뭄이 들지 않게 하려면 어쩔 수 없다. 왕의 껍데기라도 남아 있어야 물의 정령들이 유지되거든. 설마 이 정도도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아,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그럼 난 영혼인 채로 다녀?”
“그럴 리가. 그곳으로 가면 육체가 생기도록 조치를 해놓을 거다. 그게 인간의 것이 될지 엘프가 될지, 또는 몬스터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잠깐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아무리 그래도 몬스터가 되면 안 되잖아! 내가 바란 일이라지만 너무 무책임하게 말하는 거 아냐? 아버지가 이래도 돼? 황당해져서 바라봤더니 엘뤼엔이 피식 웃었다.
“몬스터는 농담이다.”
“…….”
요즘 들어 엘뤼엔의 성격이 변했다고 느끼는 건 내 착각일 뿐일까. 농담하는 엘뤼엔이라니. 이건 좀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여정은 시작부터 부정을 탄 게 분명했다. 그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엘뤼엔이 가볍게 내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파…….”
“아버지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거 아니다.”
“아버지가 먼저 속이니까 그렇지.”
“속인 건 아니야.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윽, 그럼 정말 몬스터가 될 수도 있는 거야?”
“육신에 대한 건 나도 정확히 단언하기 힘들다. 하지만 아마 그 세계에서 가장 무난한 종족이 될 거다. 그 세계에서 무난한 종족이 몬스터라면, 그렇게 되겠지.”
이렇게 되면 라피스가 멀쩡한 세상에 떨어졌길 기원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암담한 현실에 체념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왕 몬스터가 될 바엔 좀 크고 강한 몬스터가 됐음 좋겠다. 몬스터는 약육강식이 확실한 종이다. 라피스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상위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결말만은 사양이었다.
“다만 이 주술엔 큰 약점이 있다. 네 진짜 정체가 밝혀지면 효력이 끝난다는 거지.”
“헉?”
진짜 정체가 밝혀지면 끝난다고? 뜻밖의 말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엘뤼엔의 시선이 한층 엄격해졌다.
“효력이 끝나면 넌 육신을 잃는다. 떠돌이 혼이 되어 네가 찾는 그 녀석처럼 그 세계에 갇히게 될 거다. 그러니 유념해라, 엘. 그 세상에서 만난 이들에게 네 정체를 알려주면 안 된다. 네 진짜 신분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해.”
“으응, 아, 알았어. 조심할게.”
“확실히 이해한 게 맞는 거냐?”
“응, 이해했어.”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엘뤼엔은 굳은 시선을 풀었다.
“일단 놈과 연결된 인연의 궤도를 좇아 너를 보낼 거다. 그곳에서 녀석의 영혼은 원석의 형태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었으면 보석으로 가공되었을 수도 있어.”
“으음, 정말 범위가 크네.”
“그렇다고 했잖아. 찾기는 어려울 테지만 일단 발견하면 그게 네가 찾던 거라는 걸 단숨에 알아볼 거다. 그걸 찾으면 곧바로 귀환의 주문을 외워라. 내가 널 다시 이쪽으로 끌어올 테니까.”
“귀환의 주문?”
고개를 끄덕인 엘뤼엔은 그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으면 머릿속에 귀환 주문이 저절로 떠오를 거라는 말이었다.
“명심해라. 네가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난 널 끌어올 방법이 없다. 반드시 주문을 외워야 해.”
“응, 알겠어.”
이번에도 나는 그가 만족할 때까지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지겨울 만큼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게 싫진 않았다. 연거푸 확인한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거고, 그가 나를 걱정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제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네자 당부를 멈춘 엘뤼엔이 한 손으로 내 머리를 덮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으면 쫓아갈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찾아라. 아무튼 그 도마뱀은 끝까지 말썽을 피우는군. 이 고생을 시켰으니 내세는 절대 편하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전해라.”
나는 헤헤 웃고 말았다. 이렇게 말해도 내가 부탁하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포옹한 후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정령왕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잘 다녀올게. 다들 나중에 봐.”
“앗, 잠깐 기다려.”
그때 이프리트가 앞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의아해져서 바라보자 그가 성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뭐긴, 축복의 키스지.”
“어?”
“내 능력은 일시적이지만 혼에도 새겨지거든. 한 삼사 년은 유지될 거야. 네가 얼마나 헤매다 오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이게 널 지켜줄 수 있길 빌어.”
“이프리트…….”
“같은 정령왕한테 축복을 써보긴 또 처음이네. 아무튼 너 때문에 별일을 다 해 본다니까. 후딱 해결하고 얼른 돌아와.”
와, 이건 정말 감동했다. 설마 이프리트가 날 위해 나서줄 거라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자 미네 역시 은신의 장막을 건네주겠다고 나섰다. 물론 장막은 가져갈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의 제안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프리트만 선물을 주다니 치사합니다.”
“미네, 너도 전에 엘을 도와줬잖아.”
“그렇게 치면 이프리트가 도와준 게 먼저입니다. 상단에서 만났잖습니까.”
“인연이 그렇게 닿는 걸 어쩌겠어. 내가 엘의 엄마가 될 몸이라 그런가 봐.”
“역시 치사합니다. 그럼 전 엘의 아빠가 되겠습니다.”
“그게 아니지! 엘의 아빠는 엘뤼엔이잖아!”
“아, 그런가요. 그럼 이프리트도 엄마를 하면 안 되잖습니까? 엘뤼엔은 혼인하지 않았으니까요.”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자자, 둘 다 그만해. 엘이 곤란해하잖아.”
투닥거리는 이들을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가슴 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뜻했다. 뭐든 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라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한꺼번에 모두를 덥썩 끌어안았다.
“뭐, 뭐야?”
“너희 모두 내 가족이야.”
속삭인 음성에 버둥거리던 몸짓들이 멈췄다. 나는 먹먹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웃었다.
“마음 써줘서 고마워. 정말 너무 기뻐.”
“……잘 다녀오기나 해, 바보야. 무사히 돌아오지 않으면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그렇게 말하는 이프리트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트로웰과 미네도 울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얼굴을 한 상태였다. 특히 트로웰의 표정이 불안정했다.
“어떡하지, 엘. 내색하지 않고 보내주려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 여행의 끝을 모르겠어.”
“트로웰.”
나를 응시하는 금안이 흔들렸다. 최근 들어 그는 이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때가 많았다.
“내가 아는 건 너무 단편적이야. 결과가 전혀 보이지 않아. 네게 받은 게 너무 많은데,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다는 게 너무 한심해. 차라리 내가 가면 좋겠어. 하지만 그러면 어떤 변칙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 두려워. 너희 둘 다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아.”
“음,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트로웰. 난 괜찮아.”
“엘, 무사히 돌아온다고 해줘. 꼭 돌아온다고.”
“응, 걱정하지 마. 반드시 무사히 다녀올게.”
우리는 한동안 서로 끌어안고 마지막 포옹을 나눴다. 하나도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날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가벼웠다. 앞으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도. 이 순간만 생각하면 뭐든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 태어나서, 이들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인사는 다 끝난 거냐?”
엘뤼엔에게 다시 돌아왔을 땐 실컷 울고 난 후였다. 모습이 엉망이었는지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지금이라도 하기 싫으면 그만두면 된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쪽을 더 권한다.”
“아니, 할 거야. 라피스를 찾아올 거야.”
“그렇게 대답할 거라 생각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후 엘뤼엔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심해 보이지만 그 시선이 애정을 담고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은 역시나 다정했다.
“엘, 넌 내 아들이다. 어디서든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응, 아버지. 당연하지. 아버지가 이제 나더러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난 평생 아버지 아들 할 거야.”
암, 아주 찰거머리처럼 지겹게 따라붙어 다닐 거다. 그러자 왠지 내 말에 엘뤼엔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딘가 허점을 찔린 것 같은 얼굴이다. 설마 진짜로 그럴 생각이었나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니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의 손이 다시 내 머리를 덮었다. 여전히 따스한 온기였다. 이 손길을 한동안 다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제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빼라.”
이어진 지시에 따라 바닥에 누운 나는 눈을 감고 몸을 편하게 했다. 그가 무언가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며 내 이마를 짚었고, 그 부분을 타고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나른해졌을 때였다.
쿠웅!
돌연 묵직한 소리가 울리더니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덮쳤다. 나를 받치는 감각이 사라진 건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
까마득히 높은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같은 아찔한 감각이 밀어닥쳤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낯설고 무서운 감각이었다. 저항도 통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급류에 휘말린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어디론가 끌려 들어갔다. 무언가가 나를 잡아채는 것 같았다. 몸이 크게 뒤집히며 강하게 부딪혔다.
‘아버지!’
눈앞이 빠르게 캄캄해졌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