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1화
“라피……?”
그때 뒤쪽에서 작은 음성이 들렸다. 멈칫해서 돌아보니 흑발의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디아곤과 메세테리우스였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도착한 그들은 멍한 얼굴로 라피스를 바라보다 그 몸에 손을 짚었다. 그리곤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나를 돌아보았다.
“라피스가…… 죽은 거야?”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모든 설명을 다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디아곤이 신음을 삼키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미안해.”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미안해.”
계약자인데도 지키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그가 죽어가는 것도 알아차려 주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까지 날 위하다 유언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게 하고 말았다. 전부 다 내 탓이었다. 두 사람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선을 맞출 용기도 없어서 입술만 악물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디아곤이 부드럽게 웃었다.
“사과하지 마. 왜 사과해? 넌 잘못한 게 없어.”
“하지만…….”
“죽음이란 여행과 같지. 라피는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난 것뿐이야. 다른 곳에 정착해서, 거기서 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지. 우린 그저 그가 잘 지내길 바라기만 하면 돼.”
그래, 죽음이 끝은 아니다. 지금의 삶 또한 수많은 내세 중의 하나. 그의 삶이 다시 이어진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 라피스인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내 표정이 여전히 굳어 있기만 하자 디아곤이 난처한 얼굴을 하다 말했다.
“으음, 이 얘기를 하면 조금은 네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실은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날을 대비해 왔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
“무슨…….”
“라피는 원래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었어.”
뜻밖의 이야기에 몸이 굳었다.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보고 디아곤은 씁쓸히 웃었다.
“이 녀석이 누구보다 강한 화기를 타고났다는 얘기는 했었지? 그 화기는 너무 강한 나머지 본인의 생명도 천천히 갉아먹고 있었어. 오래 살아도 청년기를 넘기지 못할 거라 했지. 어미인 란타샤는 괴로워한 나머지 정신병을 앓기 시작했고, 광룡이 되기 전에 안정하기 위해 강제로 수면에 들어가야 했어. 그래서 트로웰이 대부를 맡아준 거야.”
“혹시 그걸 라피스도…….”
“아무도 말해준 적은 없어. 하지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
대답한 건 트로웰이었다. 오히려 디아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뭐? 그랬어?”
“라피스가 바보는 아니잖아. 자신의 힘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자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했어. 몸이 버텨내는 것에 한계가 있을 거라는 것도.”
“……그렇지. 그 예리한 녀석이 모를 리가 없지. 정말이지, 내 자식이지만 어떻게 그런 녀석이 난 건지 모르겠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디아곤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상념에 물든 얼굴이었다. 그 옆을 말없이 지키고 있는 메세테리우스 역시 몹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했다.
“물의 왕, 외람되지만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네, 말하세요.”
“라피스의 형제로서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제 동생은 날 때부터 너무 잘나서 오히려 욕망이 별로 없는 녀석이었죠. 그런 녀석이 유일하게 집착한 게 바로 물의 정령왕이었습니다. 일생을 걸고 엘퀴네스를 염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람대로 그 계약자가 되었고, 그 곁에서 죽었으니 그걸로 녀석은 만족했을 겁니다.”
“…….”
“우린 당신이 라피스와 계약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자책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라피스도 당신이 슬퍼하는 걸 바라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난 아직 그를 보낼 준비가 안 됐는걸.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입 안으로 꾹 삼켰다. 저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해선 안 된다. 누군들 준비가 되었을까. 내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해도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다. 아무리 대비했어도 폭풍처럼 덮쳐드는 아픔이 덜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괴로웠다. 그와 헤어지는 상황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서로 수명이 다르니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눈물이 다시 떨어졌다. 내가 다시 울기 시작하니 디아곤과 메세테리우스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멈춰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도저히 그칠 수가 없었다.
“녀석을 만나게 해 주마.”
그때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렸다. 고개를 번쩍 드니 엘뤼엔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나게 해준다고? 라피스를?”
“그래.”
“어떻게?”
그 말에 엘뤼엔이 옆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곳엔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섀넌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명계의 신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그가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원랜 안 되지만, 워낙 특별한 경우니 할 수 없군요. 혼이 회수된 직후일 테니 아직 환생 절차를 밟진 않았을 겁니다. 들어가기 전에 작별인사 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들었지?”
“아버지…….”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라. 멋대로 죽은 놈을 위해 흘리기엔 네 눈물이 아깝다. 더 울면 놈의 내세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거다.”
“뭐야, 그게…….”
“이게 농담인 것 같으면 더 울어도 된다.”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디아곤과 메세테리우스가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아내다 허탈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협박이었다.
* * *
라피스의 장례는 그의 지인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단출하게 치러졌다. 신들이 모두 돌아가고, 어느 정도 사태가 정리된 후였다. 드래곤 로드이자 블랙 일족의 수장이며, 라피스의 부친이기도 한 디아곤이 직접 자식의 장례를 주관했다.
“드래곤의 창조주, 지옥의 신 크라제시여. 명계를 관할하는 위대한 섀넌이시여.”
디아곤은 이름 모를 꽃을 한 아름 가져와 라피스의 시신 주변에 뿌렸다. 하얀색 잎이 나비의 날개처럼 피어난 꽃이었는데, 저승을 상징한다고 했다. 섀넌의 상징 문양이 하얀 나비의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의 자녀가 이 땅에서 젊은 생을 마감하였으니 부디 그 육체를 받아주소서. 그가 지니고 있던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이 세상의 일부가 되게 하소서.”
그러자 그 말에 화답하는 것처럼 라피스의 몸이 화려한 불길에 휩싸였다. 누군가가 일부러 태운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자체에서 발화한 불이었다. 드래곤이 죽어 제를 치르면 그 육신은 품고 있던 속성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즉, 불의 속성을 지닌 이들은 불로, 땅의 속성을 지닌 이들은 흙으로, 바람과 물의 속성을 지닌 이들은 각자 바람과 물이 되어 이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디아곤이 읊었던 마지막 말과 같이.
“라피스가 정말 죽다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네.”
시벨리우스가 먹먹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에 나란히 서 있던 아스가 침울한 얼굴을 했다. 장례 직전이 되어서야 뒤늦게 의식을 차린 그들은 그사이에 모든 일이 끝났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 했다. 특히 창조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스가 충격을 크게 받았다.
“괜찮냐, 너?”
장례가 진행되는 내내 창백하게 굳어 있는 아스가 걱정이 되었는지 시벨리우스가 물었다. 멍하니 있던 아스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리 봐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실은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전부 다 끝났다니. 카노스 님이 소멸하고, 은인도 죽다니…….”
카노스가 미리 알려준 대로, 의식을 되찾은 아스는 그를 만났던 것까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그의 기억이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카노스가 소멸한 상황에서 자신의 전생을 알고 있었다면 자책감을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다행히 그는 시벨리우스와 내가 무언의 시선을 주고받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데르온이 깨어나면 뭐라고 설명하지.”
아스가 우울한 얼굴로 데르온이 잠들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고치에 덮여 있는 그는 여전히 그 장소에서 잠들어 있었다. 상처는 이미 치료되었고, 기운도 완전히 진정했지만 새 힘을 다스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깨어난 그에게 설명이 막막하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라 마음이 같이 무거워졌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그리 가볍지는 않았겠지만.
“이사나, 얼굴이 엉망이야.”
장례에 참가한 유일한 인간인 이사나는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불었다. 눈의 붓기를 가라앉히는 김에 탈수도 막을 겸 치유력을 불어넣으니 창백하던 안색이 한결 좋아졌다. 그제야 조금 진정한 듯 이사나가 겨우 안정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엘. 엘이 더 힘들 텐데…….”
“미안하긴. 마음이 아픈 데 누가 더 힘들고 안 힘든 게 어딨어.”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혼란한 정신을 수습하고서야 그의 존재를 상기한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이사나는 그 숲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모습이 가려져 있어서 온 숲을 돌아다녀야 했지만 내 목소리를 들은 그가 결계에서 스스로 나온 덕분에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모른 채 반가운 얼굴을 하는 그에게 라피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 어려웠다.
여행 초창기부터 함께 해 왔던 만큼 이사나에게도 라피스는 각별한 존재였다. 평소 의지하고 따르는 게 훤히 보일 정도였으니 그런 존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로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건 지금까지도 여전해서, 간신히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또 우는 거야?”
“미안해.”
“아냐, 괜찮아. 실컷 울어. 내 몫까지 이사나 네가 다 울어줘. 난 라피스의 평온한 내세를 위해서 울면 안 되거든.”
그 말이 어설픈 농담이라고 여겼는지 이사나가 흐리게 웃었다. 편히 생각하게 내버려 둘 요량으로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줄 때였다.
“저어…….”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얼굴을 굳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물쭈물한 자세로 서 있었다. 다른 드래곤 일족들이었다. 그중 블루 일족 사이에서 유독 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히 가라앉은 짧은 푸른색 머리칼에 물처럼 파란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
“당신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틀림없이 오칼이었다. 정화진에서 물의 방진을 맡았던 블루 드래곤.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살아있었다.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으며 가슴 속이 싸늘해졌다.
“너 뭐야.”
“무, 물의 왕이시여…….”
나직하게 내뱉은 말에 블루 드래곤들이 굳어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피스가 죽었는데…… 넌 왜 살아 있어?”
“……죄송합니다.”
“네가 왜 살아 있냐고!”
“에, 엘.”
퍼뜩 정신을 차린 건 겁먹은 듯한 이사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멈칫하는 동안 블루 드래곤들이 우르르 고개를 숙여 사과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제발 용서하십시오.”
오칼은 완전히 엎드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단숨에 식으며 모든 게 허무해졌다. 사실 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라피스는 이미 죽었는데. 저 녀석이 살았든 죽었든 그는 돌아올 수 없을 거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엎드린 채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오칼을 바라보았다. 다른 블루 드래곤들도 모두 긴장한 채 바짝 숨죽이고 있었다.
“앞으로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물의 정령이 블루 드래곤과 교류할 일은 없을 거야.”
“무, 물의 왕이시여.”
“돌아가.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단호한 말에 입을 벙긋거리던 오칼이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그가 원하는 답을 내려줄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라는 소리 안 들려?”
곧 침통하게 눈을 감은 그가 간신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미련이 뚝뚝 남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른 블루 드래곤들도 의기소침해져서 어깨를 늘어트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
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들끓었다. 나는 내게 쏟아지는 시선을 뒤로하고 무작정 걸었다. 적당히 멀어졌을 때쯤 아무 데나 걸터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짚어왔다. 트로웰이었다.
“엘, 괜찮아?”
“……응. 아니.”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연달아 흘러나왔다. 괜찮지만 괜찮지 않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바라보던 트로웰이 가볍게 내 어깨를 다독였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칼도 피해자라는 건 안다. 그라고 원해서 정화진을 깨지는 않았을 거다. 조금 더 조심했으면 좋았겠지만, 앞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다 알 수 있다면 애초에 악신이 태어날 일도 없었겠지. 그 처참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남았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이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달랐다.
“화풀이를 했어.”
“저런, 고작 그런 게 화풀이면 너무 온건한걸. 정말 화풀이를 하려면 드래곤 세계에서 블루 일족의 씨를 완전히 말렸어야지. 적어도 대를 잇는 저주 정도는 내리거나.”
“……그건 농담이지?”
“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생긋 웃는 얼굴이 무섭게 느껴지는 건 단지 기분 탓이겠지……? 어색하게 시선을 맞추니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역시 농담이었구나. 가끔 보면 트로웰은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덕분에 심란하던 마음이 풀렸다. 나는 그를 따라 웃다가 천천히 몸에 들어간 힘을 뺐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모든 게 다 끝났다곤 하는데 전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첫 유희치곤 너무 파란만장했어. 시작부터가 평탄치 않았잖아?”
“……응.”
“그리고 아마 이게 끝이 아닐 거야.”
이어진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워서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의아해져서 바라보았지만 그는 가만히 미소 짓기만 했다.
“괜찮아, 엘.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해.”
“힘 말이야?”
“어느 쪽이든. 난 평생 너보다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아하하. 그건 너무 띄워주는 것 같은데.”
“아니, 정말이야. 그러니까, 엘.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해도 될까?”
왠지 조심스러운 말투로, 트로웰이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아서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트로웰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엘.”
* * *
라피스의 장례를 치른 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세상은 시시각각 변해가고 있었다. 먼저 인간들의 기억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나타난 천군과 신을 목격한 기억이 전부 지워지고 그저 날씨가 몹시 나빴던 것으로, 황궁이 파괴된 건 몬스터 떼가 습격한 것으로 인지했다. 신계 쪽에서 사태를 수습하면서 인간들의 기억을 대거 수정한 것 같았다. 실제로 몬스터 떼가 정말 나타나기도 했었다는 모양이다. 덕분에 뜬금없이 이사나의 인기가 높아졌다. 몬스터 떼를 쫓아내는 과정에서 라피스가 본체로 돌아가 이사나를 태우고 다녔던 모양인데, 그 현장을 목격한 이들이 이사나가 드래곤을 조종했다고 오해한 탓이었다.
어쨌건 이 광범위한 현상에서 벗어난 인간은 내 계약자인 이사나뿐이었다. 그는 천군이 나타난 것도, 신들이 강림한 것도, 그 모든 게 악신으로 인해 벌어진 사태라는 것도 전부 다 또렷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서도 사라진 기억이 있었다.
“카노스가, 누군지 몰라……?”
“응, 기억나지 않아. 그 사람이 누군데?”
말갛게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카노스가 소멸한 이후 전 대륙에 있던 마신의 신전이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이사나를 비롯한 모든 인간이 카노스를 기억하지 못했다. 마신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물론 스왈트 제국이 그의 신성제국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모든 인간이 스왈트 제국이 처음부터 전제 군주제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대공이 신관이었다는 사실은 그대로 기억하면서도 그가 누구의 사제였는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마신이야. 마신 카노스. 넌 기억하지 못하지만, 원래 스왈트 제국은 마신의 신성제국이었어.”
“아, 그랬었구나.”
사실을 설명해 줄 때마다 이사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게 수긍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의아한 얼굴로 연신 갸웃거리는 그를 보는 게 가슴 아팠다.
―지금은 인간뿐이지만, 앞으로 갈수록 범위가 넓어질 거다.
답답한 마음에 연결한 통신에서, 엘뤼엔의 담담한 음성이 울렸다. 조금도 희망적이지 않은 답변이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것도 신계에서 한 일이야?”
―아니, 신계에선 그에 관한 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악신과 얽혀서 소멸했기에 저절로 진행되는 일이다.
“범위가 넓어진다면, 나도 언젠가는 그를 잊게 되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다른 이들보다는 꽤 오래 걸리겠지만.
“마족들도?”
―마족들도.
연결을 끊은 후에도 나는 한동안 먹먹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두를 위해 희생했는데 돌아온 결과가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는 거라니. 지인만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종족들에게서도 잊힌다니.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대부.”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몸이 움찔했다. 고개를 돌리니 문 앞에 아스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단정한 얼굴을 보니 문득 숨이 막혔다. 인간들의 기억에서 카노스가 잊혔을 때 아스는 충격을 크게 받았다. 그가 한동안 우울해했던 게 떠올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있잖아, 아스. 카노스는 앞으로 점점 더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게 될 거래. 너도, 언젠가 카노스를 잊게 될지도 모른대.
“대부?”
“아, 응. 미안. 무슨 일이야?”
“데르온이 깨어났어.”
“……!”
며칠째 반응이 없어 모두를 애타게 했던 데르온이 드디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서둘러 그가 잠들어 있던 장소를 찾아가니 바닥에 허물 같은 것이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데르온을 감싸고 있던 껍데기였다. 그 앞에 서 있던 군청색 머리칼의 남자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데르온.”
“물의 왕을 다시 뵙습니다.”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몸은 괜찮은 거예요?”
“네,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부끄럽습니다.”
그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강해져 있었다. 키와 체구도 더 커진 것 같았고, 짧았던 머리칼도 길어져 허리까지 닿았다. “너무 거추장스러우니 잘라야겠네요.”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그간의 상황은 이미 아스가 얘기해줬다고 했다. 그는 의외로 담담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자신이 부상을 당해 죽을 뻔했다는 것도, 카노스가 그를 살리기 위해 힘을 줬다는 것이나 그가 소멸했다는 사실도.
“내 신께 마지막 인사도 드리지 못했군요.”
중얼거리는 데르온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내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이 보였다.
“괜찮아요, 데르온?”
“사실 괜찮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질 겁니다. 제 사명은 아스 님의 곁을 지키는 거니까요.”
약간 쉰 목소리로 답한 그의 붉은 눈이 곧 결연하게 빛났다.
“카노스 님이 제게 맡기셨고, 기꺼이 따르기로 맹세한 일입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두 번 다시 제 왕을 혼자 두고 제가 먼저 무너지지는 않을 겁니다.”
아아, 정말 많이 변했구나.
언젠가 정처 없이 방황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계에 다녀온 이후, 그의 머리 색이 검은색에서 군청색으로 변했을 때의 일이었을 거다. 그때 그는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까맣게 죽은 눈으로 숨만 쉬고 있었다.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누구보다 빛나는 눈으로 활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아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아스 또한 그가 있기 때문에 버틸 수 있겠지. 나는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둘은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부, 우린 이만 마계로 돌아갈까 해.”
그래서 이어진 아스의 말에도 그리 충격을 받지 않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말이었다. 아스는 마왕이다. 창조신이 사라져 무엇보다 혼란해졌을 세계를 진정시키려면 그가 가서 할 일이 많았다. 이미 모르스라고 했던, 카류안에게 이용당한 마족 중 생존자들도 치료를 마치자마자 전부 마계로 돌려보낸 상태였다. 그동안엔 데르온이 잠들어 있어서 가지 못했을 뿐, 이제 그가 깨어났으니 돌아가야 했다.
두 마족이 귀환한다는 사실은 곧 모두에게 알려졌다. 이사나와 시벨리우스가 배웅하는 길을 함께했다.
“잘 지내, 대부. 자주 놀러 올게.”
가볍게 포옹을 나눈 후 나는 씩씩하게 웃는 아스의 모습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자주 놀러 온다곤 하지만 왕이면 굉장히 바쁠 거고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할 테니, 생각만큼 자주 볼 수는 없을 거다. 내가 마계로 가지도 못하니 다음에 그를 보는 건 언제가 될지 몰랐다.
“너도 몸 건강히 잘 지내. 끼니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말고.”
“응응, 걱정 마. 대부는 곧 명계로 가는 거지? 은인을 만나면 내 인사도 같이 전해 줘. 그동안 고마웠다고.”
“그래, 알았어.”
“다음은 마족으로 태어나라고도 해줘. 내가 잘해 준다고.”
라피스라면 그게 맘대로 되겠냐고 화내지 않을까. 그래도 마족으로 태어난 라피스를 생각해 보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 녀석 성격에 잘 어울리는 종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이것도 명계에 부탁해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가슴 속에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요즘은 라피스만 생각하면 우울했는데 다음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조금은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럴게.”
이윽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모습이 흐려지듯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손을 흔드는 두 마족에게 점차 카노스를 잊게 될 거라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그건 모르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스와 데르온이 마계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나는 한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시벨리우스는 각성한 힘을 본격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개인 수련에 들어갔고, 이사나는 국정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무너진 황성도 복원해야 했고, 내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과 사람들도 보살펴야 했다. 대공의 죽음은 자결로 처리했다는 것 같았다. 본래는 아무리 반역자라도 황족이 죽으면 예우 차원에서 장례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이사나는 그걸 과감히 생략했다. 대공의 시신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폐허에 버려졌다. 당연히 무덤도 남기지 못했다.
알리사는 여전히 카터스 제국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거기서 지내는 동안 그곳 문화에 매력을 느꼈는지 아셀이 다니는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했다. 이사나에게 넌지시 그래도 괜찮겠냐고 의사를 떠보았더니 그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사가 하고 싶다는 걸 내가 반대할 권리는 없지. 일단은 괜찮을 거야. 파이어 버스터가 지켜주고 있으니까.”
“……그 검, 계속 알리사한테 있었어?”
“세상이 워낙 위험하잖아. 알리사도 강한 정령사이긴 하지만 정령을 늘 소환해 둘 수는 없으니, 몸을 지킬 무기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어. 파이어 버스터라면 알리사가 방심한 부분까지 잘 방어해줄 거고.”
그거야 당연히 그렇다. ……덧붙여 그 수다쟁이 검은 알리사에게 호감을 품고 다가오는 이들까지 전부 경계할 게 분명했다. 가장 크게 당할 사람이 라온휘젠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도 아니고 이렇게 오랜 시간 알리사에게 있는데도 파이어 버스터가 얌전하다는 건 그도 동의했다는 뜻이다. 자아를 지닌 에고 소드가 주인이 아닌 사람을 따르기는 쉽지 않은데. 평소에도 자주 알리사에게 파이어 버스터를 맡기더라니, 설마 이런 일을 대비하려고 미리 서로 적응하게 한 건 아니겠지. 어쩌면 이사나야말로 가장 방심할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들 순조롭게 각자 할 일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만 혼자 이질적으로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왠지 가슴 속이 뻥 뚫린 듯이 허전했다. 이 공허함이 긴 여행을 마친 탓인지, 쭉 함께하던 이들이 하나둘씩 제 자리를 찾아가는 탓인지, 아니면 그 전부가 원인인 건지 모르겠다.
“엘.”
엘뤼엔과 페르데스가 날 찾아온 건 내가 그런 공허감에 절정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혼자서 멍하니 황성 정원을 구경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반색해서 일어났다. 간간이 통신을 주고받긴 했지만 엘뤼엔이 직접 찾아온 건 신계로 돌아간 이후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명계 소속인 페르데스와 함께 왔다는 것에서 생각할 수 있는 용건이 하나밖에 없었다. 드디어 라피스와 만날 준비를 마친 거다. 그런데 어째선지 둘 다 표정이 심각했다.
“아무래도 일이 좀 틀어진 것 같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녀석의 혼을 찾을 수가 없게 됐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