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20화 (420/608)

제420화

“카노스!”

“이게 무슨 짓이야, 카노스! 이거 풀어! 당장 열어!”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가 웃으며 하는 대꾸에 두 신이 그대로 굳었다.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눈물이 자꾸 솟아올라서 눈앞이 흐렸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렸다.

“지금, 당신이 희생하려는 거예요?”

“희생?”

카노스가 무슨 말을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엘은 너무 날 좋게만 본단 말이야. 내가 희생 같은 걸 할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하지만 지금 당신의 행동이…….”

“내 행동? 아아.”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던 그가 곧 맑게 웃었다.

“아냐, 엘. 이건 희생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게 희생이 아니면 뭔데요!”

“그야 당연히, 책임을 지는 거지.”

“……!”

아니, 아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분명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별안간 심판관이 진동하더니 새하얀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는 동안 섀넌과 이오웬도 그 현상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들이 더 필사적으로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카노스!”

“카노스! 제발 이걸 열어! 책임이라면 내가 질게! 제발!”

“다들 잘 있어.”

심판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느꼈을 텐데도 카노스는 변함없이 느긋한 얼굴이었다. 그는 이쪽의 소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늘어진 카류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다시 정신을 차리려는지 카류안이 조금씩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지.”

“카……노스…….”

“그래, 내 불쌍하고 어리석은 아이야. 나와 함께 가자.”

곧 눈이 멀 것처럼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처음은 심판관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젠 카노스에게서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나는 돌아보는 카노스와 눈이 마주쳤다. 먹물을 머금은 것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엘뤼엔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전해줘.”

그 순간 카노스의 모습이 강렬한 빛 속에 완전히 삼켜졌다.

“카노스! 안 돼! 카노스!”

동시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지며 강렬한 바람이 몰아닥쳤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당장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달려가려는 걸 누군가가 강하게 뒤에서 붙잡아 세웠다. 라피스가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미쳤어? 너까지 끌려 들어갈 작정이야?”

“하지만 카노스가!”

“상황 보면 몰라? 이미 늦었어! 뒤로 물러나!”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택한 거야! 정신 차려! 네가 지켜야 하는 건 따로 있잖아!”

호통을 치는 것 같은 음성이 얼굴을 할퀴는 것 같았다.

“엘!”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시벨리우스가 의식이 없는 아스를 끌어안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아아, 그렇지. 내겐 지켜야 할 것이 있었지. 나는 입술을 악물고 뒤를 돌아 달려가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동시에 세찬 바람이 뒤를 덮쳐들었다. 그 순간 라피스가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둥근 보호막이 생겨 우리를 감쌌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폭발이 이어졌다.

쿠웅! 콰아아아아!

자욱한 연기가 붉은 불씨를 품고 거대하게 뭉쳐 일어나는 모습은 마치 핵폭발의 장면과 비슷했다. 위력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았다. 쩌적거리며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보호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큭! 젠장, 역시 이대로는 힘든가?”

“라피스?”

“너흰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

그때 라피스에게 빛이 나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눈앞에 붉은 전신을 드러낸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가 본체로 돌아간 것이다. 라피스의 본신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감탄할 겨를도 없었다. 그가 몸을 곧추세우고 날개를 크게 펼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눈에 봐도 뭘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아서 나는 경악했다. 폭발의 파장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려는 것이다.

“라피스, 지금 뭘 하는 거야? 너무 무모해!”

[시끄러! 입 다물어!]

만류하려는 나를 라피스가 거친 일갈로 무시했다. 그와 동시에 거센 폭풍이 다시 덮쳐들었다. 곧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어딘가로 강하게 고꾸라졌다.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문득 주위가 지나치게 고요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들어오는 건 새파란 하늘이었다.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화창한 하늘이 잔잔한 구름을 품고 있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니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꽤 멀리 날려온 것 같았다. 나는 몸을 털고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밀려 나온 거리만큼 원래 있던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맞이한 건 휑하게 파인 거대한 구덩이였다. 일대의 모든 것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노스와 카류안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끝났다. 전부.

허망한 숨을 흘리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페르데스를 비롯한 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린 듯했다. 황폐한 공간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은 멍하기만 했다. 비틀거리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섀넌이 바닥의 흙을 한 줌 움켜쥐었다. 한참 동안 숨을 삼키던 그가 이내 떨리는 음성을 내뱉었다.

“악신이…… 소멸했습니다. 명계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다시 붕대가 감겨졌다. 그 붕대가 다 완성되기도 전에 섀넌은 무너지듯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를 따르듯 이오웬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 끝난 것이 분명한데 모두가 허망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머릿속을 천천히 정리했다. 생각이 뒤죽박죽이라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 거지? 아, 그래. 피해 상황을 확인해야지. 폭발이 미친 범위가 생각보다 컸다. 이사나가 있는 숲 쪽은 멀어서 괜찮을 것 같지만 황성은 완벽하게 사정권 안이었다. 그곳에 인간들이 남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크게 다쳤을 거다. 가서 사상자가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흙덩이 사이에서 푸른빛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시벨리우스가 만들어준 내 장갑이었다. 소란 통에 어느새 흘렸던 모양이다. 장갑을 다시 주워 끼려다가 숨을 삼켰다. 손등이 깨끗했다. 그곳에 있어야 할 마신의 문장이 보이지 않았다.

“…….”

무언가가 목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들어 황급히 입술을 악물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노스가 소멸했다.

그가 이제 더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엘.”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잔뜩 흐려진 시야 속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빛이 스며든 듯한 금발, 하늘처럼 맑은 눈동자.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간절하고 그리웠던 이였다.

“아버지…….”

참지 못하고 울먹이기 시작하자 그가 내게 두 팔을 뻗었다. 나는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품에 매달리다시피 안기는 나를 그가 단단히 끌어안았다.

“카노스가 소멸했어.”

“그래.”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그게 마지막 말이었어.”

“그래.”

“어떡하지, 아버지? 가슴이 너무 아파.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아픈데 어떡하지?”

그러자 잠시 멈춘 손이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들. 그래도 괜찮다.”

부드러운 온기가 내 이마에 입 맞추었다. 그 다정한 행위가 내게 울어도 된다는 허락을 내린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목놓아 울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침내 고별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가끔은 재밌었고, 가끔은 짓궂었으며, 늘 다정했던 아름다운 마신이 완전히 우리 곁을 떠났음을.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것도.

난 앞으로도 이날을 잊지 못하겠지. 드문드문 돌이켜 떠올리다 문득 우울해지기도 할 거다. 잘 가요, 카노스. 부디 잘 가요. 멈추지 않는 눈물 속에서 나는 카노스에게 마지막까지 건네지 못한 작별인사를 거듭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고별이었다.

* * *

“카노스가…… 소멸했다고?”

한창 울고 있던 나를 진정시킨 건 당혹감을 담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루세프가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옆엔 처음 보는 사람도 함께 있었다. 흑단처럼 검은 피부에 그보다 더 짙은 흑발을 지닌 소녀였다. 눈동자 색은 화려한 황금빛이라 전체적으로 트로웰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신인 건 분명하고, 외모만 보면 트로웰 출신인 것 같은데, 상급신이라기엔 기운이 약했다. 그래서 더 묘한 분위기였다.

“젠장, 이게 뭐야. 악신의 영향력이 사라져서 내려왔더니 그새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정말 카노스가 소멸했어? 어이, 섀넌! 이오웬!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가 아무리 어깨를 흔들어도 이오웬과 섀넌은 넋을 잃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답답한 표정으로 침울하게 서 있는 페르데스를 돌아보았다.

“페르데스, 네가 설명해 봐.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를 하라는 게 아니라…… 아, 미치겠네.”

“다그치지 말아라, 루세프. 다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네가 그런다고 되겠느냐.”

루세프가 머리를 마구 부여잡는 동안 검은 피부의 소녀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나무랐다. 소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구덩이 쪽을 바라보았다.

“원망은 나중에 듣겠다더니. 결국 마지막까지 그럴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앞으로가 문제다. 최고신인 마신이 사라졌으니 전 차원이 상당한 진통을 겪을 것이야.”

“웃기지 마. 그 자식은 정말 끝까지…….”

입술을 악문 루세프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머리끝까지 화난 표정이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눈가가 새빨갰다. 그런 그의 등을 위로하듯 몇 번 다독인 소녀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페르데스를 돌아보았다.

“페르데스, 넌 괜찮으냐?”

“저는…….”

“왜 그런 표정인 것이냐? 네가 이 일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카노스를 잃은 걸 아쉬워한다는 게 곧 네가 희생했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란다. 누가 죽었든 그 희생에 가치가 없었겠으며 안타깝지 않았겠느냐. 난 네가 살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같은 생각일 것이야.”

소녀는 루세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시선이 닿는 것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루세프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당연하지! 누가 페르데스가 희생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감히 비겁하게! 그런 자식이 있으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회랑이고 성역이고 발도 못 들이게 해주겠어!”

“루세프…….”

루세프는 잠시간 복잡한 얼굴을 하다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은 그냥……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서 놀랐을 뿐이야.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잖아. 최고신은 신계를 가호하고 지탱하는 기반이야. 카노스는 그중에서도 특히 감당하고 있는 게 많은 녀석이지. 자신이 사라진 후의 혼란과 파장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아마 나섰다 해도 다들 반대했을 거고.”

“그걸 알기에 내색하지 않았던 거겠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허탈하게 중얼거린 루세프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페르데스가 망설이는 표정을 하다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씀드리기는 조심스럽지만, 전에 카노스가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카노스가? 무슨 말을?”

“더는 잃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잃어가는 건 지겹다고…….”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을 잃는 쪽을 택한 것이냐. 정말 그 녀석답구나.”

소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루세프는 설명을 듣기 전보다 더 참담한 얼굴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내 앞에 있는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모든 대화를 들었을 그는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 소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왠지 모르게 조금 긴장하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온 소녀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소문으로만 듣던 엘뤼엔의 양자로구나. 난 운명의 신인 라데카란다.”

“아…….”

그제야 그녀에게 느낀 위화감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운명의 신이라면 최고신이자 최초의 트로웰이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 카노스가 운명의 시계를 부쉈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그런 탓에 힘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퀴네스입니다.”

“엘퀴네스치고 무척이나 예의가 바른 아이로구나. 이번 일로 아크아돈에 큰 피해를 입힌 것에 유감을 표한다. 우리 쪽에서 최대한 수습하고 피해보상을 할 것이다.”

그전에 저 얼간이들이 정신을 차려야겠지만 말이다. 여전히 넋을 잃고 있는 섀넌과 이오웬 쪽을 돌아본 라데카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소멸 현장에 가까이에 있었던 것치곤 무사한 이들이 많구나. 그건 다행이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근방에 있던 이들이 크게 다치지 않은 건 모두 라피스 덕분이었다. 그가 보호막을 치고 나중에 가선 자신의 몸으로까지 막아줬기 때문에. 결국 최후엔 압력에 휘말려 다 튕겨 나가긴 했지만, 그가 선방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훨씬 더 컸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낸 라피스는 분명 크게 다쳤을 거다.

나는 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시벨리우스와 아스가 보였다. 다가가서 확인하니 다행히 의식만 잃은 상태였다. 근처에서 발견한 데르온 역시 무사했다. 그는 아직 덩어리에 감싸진 채였는데, 그 덕분에 오히려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라피스가 보이지 않았다.

“엘.”

“잠깐만, 아버지. 라피스가 안 보여.”

뒤에서 엘뤼엔이 부르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주위를 살피는데 곧 깊게 파인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할퀸 듯한 자국이 저편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부분을 따라가니 그 끝에 자리 잡은, 집채만 한 붉은 몸체가 보였다. 라피스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 앞에 생각지 못한 이가 서 있었다.

“트로웰……?”

다갈색 피부에 짙은 흑발, 황금안을 지닌 소년이 내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역시 트로웰이 맞았다. 그는 마지막 정화진이 실패했을 때 역소환 되었던 참이었다. 한동안 정령계에서 나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벌써 돌아오다니.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았던 걸까.

“엘.”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평소보다 조금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역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이니 기운이 없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 모습에 왠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날개를 늘어뜨린 채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는 상태였다. 인간일 때보다 몇 배는 큰 몸이다. 그만큼 생명력이 넘쳐야 할 텐데 이상하리만치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풍겼다.

“라피스……?”

무심코 손을 대었다가 흠칫 놀라 바로 떼어냈다. 피부가 지나치게 차가웠다. 아, 그러고 보니 파충류는 변온 동물이고, 대체로 체온이 낮은 편이지. 드래곤도 일단은 파충류에 속하긴 할 거다. 아마 그래서 그런 거겠지. 그래, 그래서 그런 걸 거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너무 차갑지 않나?

“그 아이는 이미 혼이 떠났구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멍하니 돌아보았다. 언제 따라온 건지 라데카가 서 있었다.

“혼이 떠나……?”

“죽었다는 뜻이다.”

나는 다시 라피스를 돌아보았다. 지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하기에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추측으로도 쉽게 내뱉어선 안 되는 말이었고, 농담이라면 너무 질이 나빴다. 당연히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몸이 떨렸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다시 라피스의 몸에 댔다. 치유술을 불어 넣으니 스며들지 않고 그대로 흩어졌다. 몸속에서 무언가가 덜컥거리는 것 같았다. 화살을 맞은 대공을 치유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었다. 그건 그의 숨이 끊어졌다는 증거였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이게…… 뭐지.

머릿속이 점차 혼란해졌다. 다시 라피스의 몸에 치유술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스며들지 않았다. 또 치유술을 썼다. 한번 더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시 또 하려는데 트로웰이 내 손을 잡았다.

“엘, 그만해. 이제 그만 해도 돼.”

평소보다 낮고 건조해진 목소리가 아프도록 박혔다. 멍하니 고개를 드니 트로웰이 일렁이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라피스가, 죽었다고?

“죽었다고? 라피스가?”

내게 그 말을 믿으라고?

“죽지 않았어.”

“엘.”

“안 죽었어. 죽을 리가 없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어.”

“엘…….”

“이거 놔!”

트로웰이 날 끌어안으려는 걸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트로웰은 더 강하게 날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강제로 붙잡힌 채 나는 마구 머리를 흔들었다.

“라피스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떠날 리가 없어! 이건 뭔가 잘못됐어! 고작 그 정도 폭발을 막다가 라피스가 죽었다고? 말이 안 되잖아!”

그래, 이건 진짜 말이 안 된다. 절대 안 되는데…….

“엘, 잘 들어.”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트로웰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이어지는 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정화진이 무너졌을 때, 라피스는 악신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어. 그때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파괴됐어.”

“드래곤…… 하트?”

“드래곤의 마나 하트.”

그게 뭔지는 나도 알고 있다. 마력을 관리하는 부분으로 드래곤들에게 그 부분은 진짜 심장보다 중요한 기관이었다. 마나 하트를 잃으면 아무리 강한 드래곤도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건 마력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내 치유력으로도 되살릴 수 없다. 그런데, 그게 파괴되었다고?

“라피스는 그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가 신체 통솔력이 뛰어나서 생각보다 오래 버틴 거야.”

“말도 안 돼…….”

문득 눈앞을 스치는 건 얼굴을 크게 찌푸리던 라피스의 모습이었다. 정화진에 이상이 생겼을 때, 그가 유난히 사납게 욕설을 내뱉었었다. 검은 덩어리 같은 것을 토하는 모습이 한눈에도 심상치 않았다. 그때 트로웰이 그에게 뭐라고 했었더라.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그래, 분명 그렇게 물었었다. 그리고 라피스와 잠시간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땐 단순히 정화진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냐고 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의미였던 거다. 그게 ……이런 뜻이었다고?

“그럴 리가 없어.”

“엘.”

“괜찮다고 했어. 다치지 않았다고. 혈맥이 나쁜 건 장기 위치를 바꿔서 그랬던 거라고, 마력이 거친 건 큰 힘을 많이 써서 그런 거랬어. 그냥 그것뿐이랬어.”

라피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를 숨긴 적이 없었다.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뭐든 즉각 요구하고 실행에 거침없었으며 욕망에 솔직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은 의심 없이 믿어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자기가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던 거라고? 이 엄살도 심한 녀석이? 자기 죽음을 내게 숨겼다고?”

“그래.”

“아니야. 싫어. 안 믿어.”

“엘.”

“안 믿어! 안 믿을 거야! 그 잘난 척 좋아하는 녀석이 그럴듯한 유언도, 잘 있으라는 말도 안 했단 말이야! 아무 말도 없었어! 정말 아무것도! 난 계약자잖아! 나와 계약했잖아! 그런 중요한 일은 말해 줘야 하는 거잖아!”

“엘, 그건…….”

머뭇거리는 트로웰을 밀어내고 라피스에게 다가섰다.

“라피스, 대답해!”

주먹을 움켜쥐고 단단한 피부를 강하게 내리쳤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으니 꽤 아플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라피스 라즐리! 당장 일어나! 지금 다들 장난치는 거지? 날 놀리는 거지? 화내지 않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 용서할 테니까 죽은 거 아니라고 해! 제발! 제발…….”

라피스가 죽었다니. 이렇게 멀쩡하게 내 눈앞에 있는 그가 이제 세상에 없는 존재라니, 믿을 수 없다. 절대 믿지 않을 거다. 하지만 감정이 부정할수록 머릿속은 점차 차가워졌다. 숨을 쉬지 않는다. 심장이 뛰지도, 피가 흐르지도 않는다.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을 만큼, 모든 증상이 한 가지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절감한 건 그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계약을 맺은 후로 내게 주어졌던 라피스의 마나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감각을 이어보려고 해도 잡히는 게 없었다.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하.”

두드리던 팔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트로웰이 옆에 다가온 것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 기운도 없었다.

“라피스는 널 걱정했어.”

“……무슨 소리야?”

“언젠가 나이아스가 계약자를 살리려고 죽음을 택한 적이 있었을 거야. 하필 다친 부분도 비슷하고. 네가 또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까 봐 우려한 거야.”

“나는, 나이아스가 아니야.”

“그래. 하지만 나이아스는 네 가치관을 반영하지.”

이어진 말에 말문이 막혔다. 언젠가도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 너도 저런 걸 할 수 있다는 말이네?」

나이아스가 계약자의 심장으로 변했다는 걸 알았을 때, 라피스가 내게 물었던 말이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답했었지? 아마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덧붙였던 말도 떠올랐다.

「내가 심장이 되면 드래곤의 마나 하트보다 더 강할 거야. 오히려 그 힘을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모르겠네.」

「야, 너…….」

「어? 왜?」

「……아냐, 됐어. 그냥 물어본 말에 진지하게 대꾸하지 마.」

그때 라피스는 기묘하게 불쾌해하는 얼굴이었다. 얼마 전엔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 적도 있었다. 내가 누구한테나 애정을 주며 목숨을 쉽게 내준다는 타박이었다. 그 예시로 나이아스의 경우를 들기에 아니라 했더니 바로 정색했었다.

「나이아스는 네 일부 아냐? 너랑 뭐가 달라?」

그는 늘 그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말라고!」

정화진이 무너지기 직전 내게 몇 번이나 거듭했던 경고들도. 나와 접촉하기를 꺼렸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상태를 눈치챌까 봐 그랬던 거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죽기로 철저히 작정했던 거다. 내가 그를 살릴 유일한 방법을 실행하기 전에.

“정말…… 바보 같아.”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허망하게 중얼거리니 트로웰이 다시금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누구를 향한 건지도 모를 서러움이 복받쳤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카노스가 죽었을 때보다 더 이상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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