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9화
카류안의 두 눈이 증오를 담고 붉게 번들거렸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이오웬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증오를 정면에서 받아내는 카노스는 그저 조금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그래. 그 아이의 이름을 내가 붙인 건 아니지만, 그 문제는 차치하기로 하고. 일단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뭘 말이지?”
“너 아르카 아니야.”
이어진 말에 나는 다시 놀라야 했다. 카류안 역시 흠칫했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노스를 노려보았다.
“거짓말을 하는군.”
“내가 왜 이런 거로 거짓말을 하겠어. 애초에 그 열매가 보여준 건 네 전생이 아냐. 너와 같은 아이들에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금기지. 그건 아무리 나라도 할 수 없어. 할 생각도 없고.”
“……거짓이다.”
“아니, 정말이야. 넌 아르카가 아니고, 그러니 그 아이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알지 못해. 네가 가진 그 기억은 왜곡되어있어. 잘 생각해 봐. 아르카의 마지막이 어땠지?”
“나는…… 아스가 죽은 후에…… 나는?”
카류안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을 되짚으려 할수록 그는 더욱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표정에 카노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기억나지 않지? 넌 아르카의 죽음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럼 내가 봤던 게 다 뭐라는 거냐!”
“그건 환상이지. 아르카에게 감정을 이입한 네가 만들어낸 너만의 공상. 아마 천마대전에 관한 책이라도 읽었나 보지.”
이번에도 카류안의 눈이 흔들렸다. 정곡을 찔린 듯한 모습이었다.
“말했잖아. 그 열매는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넌 정말 내 말을 안 믿는구나.”
“그럼 그게 전부 다 내 착각이라고?”
“적어도 그게 아르카의 생각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진짜 네 기억과도 가깝지는 않겠지만.”
대답하는 카노스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차라리 이걸로 끝나면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카류안도 기묘한 기분을 느낀 듯 크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짜 내 기억?”
“그때 너도 그 자리에 있긴 했거든.”
“내가…….”
“진짜 너는 아르카를 지키려는 쪽이었지. 마지막 순간엔 그 아이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다는 건 단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기억을 되짚어볼 필요도 없어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르카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이의 상황이 조금 전 카류안이 한 말과 빈틈없이 겹쳐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천사 아스모델과.
“그래. 네 눈앞에서 죽었다는 아스모델. 그게 바로 너야.”
“……!”
불신의 눈으로 보고 있던 카류안이 두 눈을 부릅떴다. 나 역시 놀라서 입을 벌렸다. 황급히 이오웬을 돌아보니 그는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방패를 들고 있는 손이 안쓰러울 만큼 떨고 있었다.
“넌 창조신을 거부하고 타락을 택하면서 저주받았지. 원래는 염화 속에 던져져 소멸할 때까지 태워졌어야 했는데 이오웬이 다시 기회를 주고 싶어 했어. 그래서 일부가 남았을 때 다시 거둬졌지. 타락한 혼을 다룰 수 있는 게 나뿐이라 내게 보내졌고.”
“지금 무슨 말을…….”
“처음 얼마간은 순조로운 듯했어. 하지만 역시 저주의 영향을 떨쳐내지 못하는지 성장할수록 어둠에 먹히기 시작했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얼마 없었어. 널 폐기하고 다시 염화에 던지느냐, 증오를 발산하게 해서 해소하게 하느냐.”
거기서 카노스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카류안이 지금 살아서 눈앞에 있는 게 바로 그 결과일 테니까.
“지혜의 열매를 준 건 네 시선을 조금이라도 환기하려던 거였어. 마신의 대리인인 루카르엠을 죽이려 하든, 전쟁을 일으켜 신들에게 도전하든, 네 손으로 직접 복수할 기회를 얻길 바랐다. 그러면 대가를 치르더라도 후련해질 거고. 그때야말로 넌 정화될 수 있었을 거야.”
그러나 카류안은 이번에도 예상을 벗어난 길을 택했다. 그의 복수는 신을 향하지 않고 인간 아이들을 향했다. 그 심장을 취해 힘을 키우는 쪽으로 깊어져 갔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던 거야. 신에게 복수하려는 줄 알았지, 설마 신 그 자체가 되고 싶었던 걸 줄이야.”
낮게 중얼거린 카노스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검은 눈이 서늘한 기운을 품고 카류안을 응시했다.
“신을 비열하다 여기면서, 그와 같은 권력은 누리고 싶었나?”
아아, 그렇구나.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깨달음에 숨을 삼켰다. 그래, 카류안은 복수를 원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앙갚음하려 했다면 마신과 단절하고 제멋대로 마계를 지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거다. 혹은 그가 말한 대로 루카르엠을 죽이려 하는 쪽이 더 합리적이었겠지. 하지만 그는 신이 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무고한 아이들을 잔혹하게 죽여야 하는데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품은 원한은 변명에 불과할 뿐, 이쯤 되면 욕망과 탐욕이 더 앞섰다고 봐야 했다. 사실은 그저 카노스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거다.
“그게 뭐가 나쁘단 거냐!”
카류안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넌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넌 비참해 본 적이 없으니까! 한 번도 남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던 네가 뭘 안다는 거야!”
“글쎄.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뭣?”
“한땐 상급 신족이었던 아스모델이었고, 다시 태어나서도 강한 마족으로 태어나 순조롭게 마왕이 되었지. 넌 인정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너 역시 낮은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존재야. 네가 정말 낮은 자의 마음을 안다면 힘없는 아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진 못했겠지.”
“아니야!”
흥분한 카류안이 그에게 덤벼들었다. 헉하고 숨을 삼키는데 카노스는 생각보다 가볍게 그의 공격을 피했다. 오히려 훌쩍 타고 올라가 그 몸에 박혀 있던 창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크아아악!”
고개를 젖힌 놈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질렀다. 꺽꺽 소리를 내며 몸을 비트는 그를 카노스는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다행히 아직 심판관이 효력이 있는 모양이네.”
“네놈……!”
“그거 알아? 심판관은 주인의 피를 삼키면 더 증폭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
“뭐……!”
카노스는 설명 대신 행동으로 증명했다. 손바닥을 그어 피를 낸 후 심판관을 움켜쥔 것이다. 그러자 기름에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카류안이 마구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고통을 자신의 힘으로 치환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럴 여유도 없을 만큼 심판관의 힘이 그를 짓누르는 게 더 큰 것 같았다. 카노스는 날뛰는 그를 능숙하게 제압해서 바닥에 결박했다. 생각보다 손쉽게 상황을 이끌어가는 것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정화진이 또 실패했을 땐 눈앞이 캄캄했는데 이대로라면 놈을 바로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카류안도 자신이 무력하게 당하는 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건 모두 다 네 탓이다!”
꼼짝없이 엎드려진 놈이 발악하듯 소리 질렀다.
“내가 누구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그때 아르카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될 일은 없었다!”
그 말에 빠르게 움직이던 카노스의 동작이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기회라 여겼는지 카류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방치한 거지? 넌 우리를 구할 수 있었다!”
“……내겐 너희만이 아니라 지켜야 할 다른 아이들도 있었거든.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 대신 마계의 미래를 지켰지. 그 안엔 참전하지 않은 마족도 있었고, 부화를 앞둔 알들도 있었어.”
“네가 그런 타협에 응할 필요가 뭐가 있었지? 넌 마신이다! 신 중에서 가장 강한 신 아닌가! 모두를 굴복시키고 너만 따르는 이들을 이기게 하면 되었다!”
“왜?”
“왜냐니!”
“난 나만 따르는 걸 바라지 않는데.”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에 카류안이 소리치던 걸 멈췄다.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를 카노스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세상이 전부 다 내 방식대로만 움직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건 그냥 나 혼자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 그래서 널 따르는 이들을 외면했단 말인가!”
“아, 그러고 보니 애초에 전제 자체가 틀렸네. 그 아이들이 날 따랐다고? 아니지, 그때 마족들은 날 따르지 않았어.”
“무슨 소리냐!”
“난 그 아이들이 분리된 마계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즐겁게 살길 바랐지. 신계로 건너와서 신족을 죽이라고 한 적도 없고, 전쟁을 일으키라 한 적도 없어. 그 아이가 자신의 분을 못 이겨 시작한 전쟁이 왜 나를 위한 게 돼?”
“널 모욕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거니까!”
“하지만 그 이면엔 지난날 마족들이 잔혹하게 신족들을 괴롭힌 과거가 있지. 사태를 규명하자면 그게 먼저 아닐까? 설령 그게 아니었더라도 법을 어겼으니 얌전히 처벌을 받으면 되는 거였어. 전쟁을 일으켜 끝을 택한 건 아르카의 의지야.”
“그래서 넌 그가 안타깝지도 가엾지도 않았다는 건가!”
“물론 안타깝지. 당연히 가여워. 그래서 그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다 가게 한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그때 마족들을 강제로 굴복시켜 투항하게 했을 수도 있었겠지. 네가 말한 방식 그대로.”
움찔한 카류안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걸 본 카노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왜? 이건 또 아닌 것 같아?”
“넌 마족의 창조주다! 그들의 아버지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면 아이가 잘못된 길에 서도 무조건 이기게 해줘야 하나? 넌 그토록 신이 되길 열망하면서도 정작 누구보다 가장 신을 무시하는구나?”
“뭣?”
“신은 너희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는 인형이 아니야.”
그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카류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그는 다시 분한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긴 여기까지 와서 수긍하기는 힘든가? ……뭐, 내게 이러는 게 너희만은 아니긴 해.”
어딘지 씁쓸해 보이는 카노스의 모습에 나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는 마족의 창조주이기도 하지만 신이기도 하다. 당연히 신들도 그가 나서서 해결해주길 바랐을 거다. 카류안이 마족을 이기게 하길 원한 것처럼 그들 역시 자신들이 이기는 쪽을 원했을 건 분명했다. 카노스가 아무것도 택하지 않은 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심지어 택하지 않더라도, 그는 잃는 쪽이었다.
“어쨌든 그럼에도 너희가 내 아이들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후 카노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완전히 제압을 마친 그는 카류안의 몸에 아예 올라탄 상태였다. 이 순간에도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심판관을 적시고 있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알려줄게. 네가 그토록 안타까워하고 애틋해한 진짜 아르카는 아무런 원망 없이 눈을 감았어.”
“……뭐?”
“잘못한 게 많아서 몇 번 힘든 내세를 살았지만 완전히 털어냈고, 최근엔 다시 마족의 삶을 얻었지. 태어나기도 전에 네게 죽을 뻔한 적도 있었는데 운이 좋아서 목숨을 건지더라. 지금은 든든한 대부의 보호 아래 훌륭하게 성장했고.”
“무슨…….”
“기막힌 인연으로, 한때 네가 가졌던 이름을 지금은 그 아이가 가졌어.”
이게 다 무슨 말이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반사적으로 아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 녀석이, 아르카라고?”
카류안 또한 그가 한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경악하는 얼굴이 아스 쪽을 향했다. 카노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카류안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크게 외치는 소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더 가까웠다. 그러자 온 사방이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온통 뒤흔들리며 검은 기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기가 반응하고 있었다. 그에 혀를 찬 카노스가 창을 조금 뽑아 들더니 단숨에 더 깊이 꽂아 넣었다. “크헉!” 거친 신음과 함께 부들거리던 카류안이 축 늘어졌다. 아마도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정말 애를 먹이네.”
한숨을 내쉬며 그 몸에 걸터앉는 카노스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건 페르데스였다.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바로 소멸을 진행하겠습니다.”
“응? 아아, 잠깐 기다려.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네?”
페르데스가 의아하게 되묻는 동안 카노스는 아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스는 숨을 쉬고 있는 게 맞는지 걱정스러울 만큼 굳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를 향해 카노스가 살짝 손짓했다.
“아스, 이리 와.”
그 말에 아스가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멈춰 서는 그를 카노스가 웃으며 응시했다.
“뜻밖의 사실을 알아서 많이 놀랐겠네.”
“아, 아닙니다, 카노스 님. 제가…… 저는…….”
할 말을 찾아 방황하는 아스는 카노스와 제대로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어색하게 일그러트린 얼굴엔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전생이라는 것 자체도 놀라운데 그 정체가 초대 마왕인 데다가 악신의 전생과도 연관되어 있다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뭐, 알아도 상관은 없긴 한데, 그래도 지금 들은 건 잊는 게 좋겠다. 모처럼 행복해졌는데 다시 불행해질 필요는 없지.”
“네? 아…….”
빙긋 웃은 카노스가 자유로운 쪽의 손을 뻗어 아스의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아스의 몸이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아스!”
급히 달려가 받아내니 의식을 잃은 몸이 축 늘어졌다. 당황해서 살피는 내게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괜찮아. 기억을 지운 것뿐이야.”
고개를 들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카노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거리를 두고 있었을 땐 미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본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왠지 그게 조금 충격이었다. 그가 내내 태연하게 행동하기도 했지만, 왠지 카노스라면 당연히 괜찮은 줄 알았다. 피를 계속 흘리는 중이니 괜찮을 리가 없을 텐데도.
“깨어나면 지금 상황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할 거야. 너도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로 해줘. 예전처럼 대해줬으면 해.”
“……그럴게요. 그런데 정말 아스가 초대 마왕이에요?”
“그래.”
“혹시 그래서 아스의 알을 따로 챙겼던 거였어요? 단순히 색이 예뻐서라거나 강한 운명을 타고나서 그랬던 게 아니었던 거죠?”
카노스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만 지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긍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역시 그랬던 거구나. 마음이 몹시 갑갑해졌다. 저 태연한 얼굴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진실이 감춰져 있는 건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새로운 마계를 열 운명을 타고난 건 맞아. 그게 이런 뜻이 될 줄은 나도 몰랐지만.”
“이런 뜻?”
“내게서 난 첫 마왕이 내 마지막 마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네.”
“네?”
그 순간 강한 바람이 일어나 강제로 몸이 떠밀렸다. 마치 그 장소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카노스?!”
옆에서 당혹감을 담은 목소리가 들렸다. 떠밀려 난 건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인 듯 그가 쓰러진 채로 돌아보고 있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나쁜 예감이.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다시 카노스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투명한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벽이었다. 그 안에서 카노스는 혼자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왜 이래요, 카노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예요?”
“오지 마, 엘. 이쪽은 위험해.”
“위험하다니……!”
“심판관은 주인의 피를 충분히 흡수한 후엔 폭발해. 자폭 장치 알지? 그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네? 무슨…….”
“처음부터 말했잖아. 원래 심판관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라니까.”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오웬과 섀넌이 굳은 얼굴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벽을 두드리고 무기로 내치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벽은 깨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