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8화
“상처가 다시 벌어졌어요. 아직 이렇게 일어나 있으면 안 돼요. 자, 어서 다시 누우세요.”
“난 괜찮아.”
“아뇨, 안 괜찮아요. 당신은 소멸할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났어요. 숨이 붙어서 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고요. 잔말 말고 누워요. 슈레이, 천상수를 이리로 가져오세요.”
“네, 사나시드 님.”
치유신의 뒤쪽에 서 있던 이가 물주머니를 들고 다가왔다. 연한 산호색 머리칼과 회색의 눈동자를 지닌 이는 천사가 아니라 하급신이었다. 그것도 아직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라데카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물었다.
“수양(修養) 신이냐?”
“아, 예! 맞습니다, 라데카 님.”
까마득히 높은 존재가 관심을 보인 것이 기쁜지 그의 뺨이 상기됐다. 수양 신은 오랜 수련과 고행을 거쳐 신이 된 이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대체로 어느 정도 덕을 쌓은 영혼이 중천에서 상당 기간 공적을 쌓아야 이룰 수 있는 결과였다. 이렇게 신이 된 이들은 백지상태로 시작하기 때문에 원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선 관련 상급신에게 일을 배우며 힘을 부여받아야 했다. 즉, 그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건 치유의 신이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고된 길이었을 텐데 장하구나. 명계에선 무슨 일을 했느냐?”
“결정자의 보좌관으로 있었습니다.”
“아, 섀넌의 아들놈 말이구나. 제 아비를 닮아서 깐죽거리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놈이지.”
“그래도 좋은 상관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명계에 쭉 있지 않고? 아레히스가 제 아버지를 추천해 주려고 했을 텐데?”
“그, 그건 제가 치유의 힘을 동경해서…….”
“그럼 힘을 받고 나서 다시 명계로 가면 되겠구나? 명계에도 치유 신이 필요할 거란다.”
“하하하하, 천상수가 좀 부족한 것 같네요. 제가 냉큼 가서 더 가져오겠습니다!”
슈레이가 누가 봐도 어색한 핑계를 대며 물러서려 하자 라데카가 피식 웃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나시드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쿠웅! 일순 바닥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리면서 섬뜩한 한기가 파고들었다. 평화롭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경직되고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넋을 잃고 있던 루세프도 정신을 차리고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악신이 있는 곳을 비추려는 시도였으나 온통 뿌옇기만 했다. 한창 무언가를 진행하는 중인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았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루세프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악신이 각성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아마 저항이 강해서 천군과 연결된 결박진이 흔들린 거겠지.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구나. 사나시드, 저이의 치유를 서두를 수 있겠느냐?”
라데카의 말에 굳어 있던 사나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해볼게요. 천상수는 됐어요, 슈레이. 지금 하려는 집중 치료를 도와주세요.”
사나시드가 다급히 엘뤼엔의 환부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런데 바로 돌아와야 할 대답이 없었다.
“슈레이?”
의아해진 사나시드가 고개를 돌리다 얼굴을 굳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슈레이가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
“슈레이! 슈레이! 왜 그래요?”
“크흑, 흐으으…….”
놀란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라데카만이 아니라 루세프도 당황해서 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발견한 것에 그들은 일제히 숨을 삼켰다. 슈레이의 머리에서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름다웠던 산호색 머리칼은 구정물이 묻은 것처럼 얼룩덜룩해졌다. 이윽고 슈레이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마치 홀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야 해…….”
“슈, 슈레이?”
“도와야……그분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정신 차려요, 슈레이! 악!”
“사나시드!”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걸 사나시드가 막으려 했다. 하지만 엄청난 힘에 밀려 그대로 고꾸라졌다. 당황한 루세프가 막아섰지만 그 역시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루세프의 얼굴이 굳었다. 이제 막 하급신이 된 존재가 상급신인 자신의 힘을 이렇게 쉽게 꺾는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강한 타격 소리가 들리더니 슈레이가 의식을 잃고 스르륵 쓰러졌다. 당황해서 멍해진 루세프는 그 뒤에 서 있는 엘뤼엔을 발견하고 곧 상황을 파악했다. 그가 신력을 쓴 것이다.
“너 그렇게 움직이면…….”
“그래, 그렇군. 악신으로 각성한 후엔 막을 수 없다고 하더니. 죽일 수 없는 건지, 죽이지 않으려는 건지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후자였던 모양이야.”
그가 하려는 말을 가르고 엘뤼엔이 입을 열었다. 루세프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후자라니?”
“악신은 주신과 대등한 권능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주신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지. 그럼 악신에겐?”
“어……어?”
“이미 하급신은 감화되기 시작한 것 같군.”
엘뤼엔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루세프가 경악해서 입을 벌렸다. 그 순간 갑자기 바깥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둔탁한 병장기 소리와 비명이 마구 섞여들었다.
루세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침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신계의 붕괴를 알리는 전조였다.
* * *
상황은 순식간에 악화했다.
처음 새로운 정화진이 발동했을 때만 해도 진행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검은 덩어리 속에서 카류안의 저항이 심해지긴 했지만 다들 잘 버텨나갔다. 그런데 저 멀리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거대한 독수리 날개에 해골로 된 머리를 달고 있는 새였다.
‘저게 왜…….’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정체가 뭔지는 알았다. 인간들에게 하늘 뱀 괴수라고 불리는 비행 몬스터다. 무리 지어 다니는 종류인 데다가 서식지도 이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근방에서 절대 홀로 나타날 일이 없는 몬스터라는 소리다.
게다가 지금 이곳엔 신과 드래곤이 있었다. 미물이라 여겨지는 벌레조차 그들의 존재감을 이기지 못하고 근방에서 모두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지능이 있는 멀쩡한 몬스터가 제 발로 여길 찾아들 리가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얼굴을 찌푸리는데 어디선가 창이 날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괴수가 떠 있는 곳이 인간들의 거주지와 가까웠다. 그곳에 있던 인간들이 몬스터를 발견하고 공격하는 것 같았다.
“죽이면 안 돼!”
다급히 소리쳤을 땐 이미 날카로운 창대가 괴수의 몸을 그대로 꿰뚫은 뒤였다. 반으로 갈라진 몸이 속절없이 그대로 거꾸러지는 모습이 느린 화면처럼 이어졌다. 떨어지면서 해골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쿠우웅!
그 순간 카류안을 감싸고 있던 검은 덩어리가 더 크게 부풀었다. 사방이 진동하면서 바닥이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그 사이에서 새카만 기운이 퍼져 나왔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처럼 오싹한 한기를 품은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다시 잠잠했다. 괴수 역시 악신의 조각을 나눠 받은 것 같긴 한데, 다행히 아주 일부였는지 그 힘이 돌아간 것만으로는 큰 영향을 주진 않은 듯했다. 이상한 기분을 느낀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흠칫 얼굴을 굳혔다. 천군 사이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활을 겨누고 있었다.
“어……?”
멈칫하는 순간 짙은 광선이 떨어졌다. 그 빛은 나를 스쳐 지나가 바로 옆에 꽂혔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빛의 화살이 방진 위에 꽂혀 있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대공의 몸에.
“뭐야. 이게 무슨…….”
머리로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 나는 서둘러 화살부터 뽑아내고 대공에게 치유술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힘은 스며들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간헐적이나마 내뱉던 숨이 완전히 멈췄다. 고요한 몸에서 온기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미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간 쌓아온 악명에 비해 허무하리만치 간단한 죽음이었다.
“하.”
어이가 없어서 허탈한 숨이 흘러나왔다. 이게 뭐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모든 상황이 선명했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천군이 대공에게 활을 쏘았다. 지금 대공을 죽이면 안 된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왜?
망연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나는 얼굴을 굳혔다. 천군 진영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점차 흐려지는 구름 속에서 사람들이 어지러이 섞여 치열하게 싸우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그들 사이에서 변심한 자가 나온 듯했다.
“하급신들이 악신에게 물든 것 같습니다!”
섀넌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구름이 걷히며 천군의 모습이 일제히 사라졌다. 신계 상황이 나빠지니 그들 쪽에서 연결을 끊은 것 같았다. 당연히 정화진과 연결되어 있던 힘 역시 흩어져 사라졌다. 악신을 묶어두고 있던 결박진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그 즉시 검은 덩어리가 더 크게 팽창하며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이었다. “허억!” 정화진을 지탱하고 있던 이들이 창백한 얼굴로 신음을 토해내다 한 번에 무너졌다. 우르르 쓰러진 드래곤들이 의식을 잃는 것과 함께 트로웰과 이프리트의 모습이 그대로 흩어졌다. 역소환이었다.
“트로웰! 이프리트!”
페르데스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이어진 건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날카로운 파공성이었다. 쨍그랑! 투명한 파편이 허공에서 퍼져나가며, 정화진 위에 떠 있던 심판관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 현상이 뜻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정화진이 실패한 것이다.
“아아, 정말이지. 쉽게 가질 않네.”
가장 빨리 움직인 건 카노스였다. 가볍게 혀를 찬 그가 손을 뻗자 긴 창이 생겼다. 그가 사라진 심판관을 다시 소환한 것이다. 정화진은 실패했지만 그 덕분에 심판관도 소멸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날 듯이 덩어리 위로 뛰어오른 카노스가 그 속에 창을 던져 깊게 찔러 넣었다. 콰직! 콰아아아아―! 뭉쳐져 일어난 큰바람이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
“…….”
한동안 덩어리에선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다시 착지한 카노스도, 섀넌과 페르데스도 모두 말없이 덩어리를 주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갈작갈작거리는 소리였다. 소리의 출처는 명확해서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덩어리에서 천천히 금이 생기고 있었으니까. 처음에 나타난 건 아주 작은 균열이었다. 그러나 틈새는 순식간에 벌어졌고, 그 틈을 비집고 긴 손톱이 뻗어 나왔다. 그걸 본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이윽고 완전히 갈라진 안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썩은 열매가 터진 듯이 사방에 악취가 진동했다. 그 속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카류안은 그새 덩치가 더 커진 것 같았다. 먹물처럼 새카만 피부 위엔 기이하게 그려진 붉은 문양이 가득했다. 뼈대와 살점 일부만 있었던 날개도 완전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한쪽 날개가 없었다. 놈이 힐끔 자신의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카노스가 꽂아 넣은 창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펴지지 못한 다른 쪽 날개가 그에 같이 짓눌려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놈은 단숨에 창을 뽑아내려는 듯 손잡이를 움켜쥐었지만, 곧바로 다시 손을 떼어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서 연기가 나는 게 보였다.
“……흥, 마지막 발악인가?”
코웃음을 친 후 카류안은 창을 단 채로 보란 듯이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발자국이 찍히는 소리가 선명히 울릴 때마다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담담한 건 카노스뿐인 것 같았다. 그는 가까워지는 카류안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섀넌, 명계의 문을 닫아.”
“네?”
“명계가 넘어가면 끝이야. 거긴 최후까지 지켜야 해.”
당황하던 섀넌이 그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바로 수인을 맺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붕대가 풀리면서 그 속에 감춰져 있던 피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엔 먹으로 새긴 듯한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주문이 이어질수록 글자가 은색으로 빛나더니 피부에서 떨어져 나와 살아 움직이듯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마침내 확장된 글자들이 별 가루처럼 퍼져나가는 순간, 강한 공명과 함께 묵직한 감각이 쏟아졌다. 이어져 있던 통로 하나가 닫혔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류안도 그걸 느꼈는지 몸을 약간 움찔했다.
“지금 뭘 했지?”
“명계를 봉인했습니다.”
“봉인이라…….”
“내가 아니면 이 문은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유감이지만 당신이 완전히 각성해도 최고신은 당신의 권속에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날 죽이지 않는 한 당신은 영원히 지배권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섀넌을 죽이기 전에 날 먼저 죽여야 할 거야.”
그때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말을 덧붙였다. 나타난 사람은 금색의 갑옷으로 무장한 채 방패와 검을 들고 있었다. 높게 묶어 올렸는데도 발끝까지 흘러내린 풍성한 머리칼이 총 천연한 색으로 화려했다. 카노스가 밤이라면 그녀는 마치 태양이 현신한 것 같았다. 덕분에 자연스레 그 정체도 알 것 같았다. 천신 이오웬, 그의 본 모습이었다.
돌아보니 시벨리우스가 지친 모습으로 아스의 부축을 받는 것이 보였다. 역시 천신이 그 몸에서 빠져나온 게 분명했다. 곧 섀넌을 보호하듯이 그 앞에 선 이오웬이 들고 있던 방패를 땅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며 그들 앞에 투명한 보호막이 생겼다. 그것을 본 카류안의 두 눈이 크게 꿈틀거렸다.
“……아직도 헛된 수고를 하는군. 뭐, 좋아. 이럴수록 빼앗을 때의 희열이 더 클 테니 말이야.”
그 사이에도 카류안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완전히 다가온 카류안이 카노스의 앞에 멈춰 섰다. 카노스도 꽤 큰 편에 속하는데 상대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그대로 짓밟힐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카류안 쪽이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마신?”
“카류안이잖아?”
“아니, 그게 아니지. 네가 아는 다른 이름이 있을 거야.”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고개를 기울인 카노스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웃었다. 악신이 되었다는 여유일까. 분노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카류안 역시 그저 낮게 웃었다.
“매일 밤 악몽을 꿨다.”
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난 그 악몽을 해결할 방법을 원했고, 지혜의 열매를 찾았지. 그걸 먹으니 어디에서 기인한 악몽인지 모든 게 선명히 보이더군.”
“그래?”
“그렇다. 덕분에 깨달았지. 내가 바로 초대 마왕인 아르카이델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건 전혀 생각지 못한 과거였다. 페르데스가 당황하는 것과 이오웬이 얼굴을 굳히는 것이 보였다. 카노스의 얼굴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아르카이델이라…….”
“그래, 아르카 말이다. 설마 잊지는 않겠지? 네게 만들어졌지만 결국 네게 버려져 비참하게 죽은 마왕을 말이다. 내가 사랑하던 너의 천사들도 모두 개죽음을 당했지. 아스모델은 내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스모델이라고?
익숙한 이름에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자가 말하는 자가 내가 아는 아스일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스의 이름을 누군가에게서 따온 거라고 들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이름의 주인과 연관된 이야기인 듯했다.
“아스모델은 신계에서 가장 곧은 천사였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이유가 없었지. 그때 네가 오기를 내가 얼마나 기다리고 개처럼 애원했는지 아나? 난 죽더라도 그만은 살려주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그가 죽음을 택할 때까지도 넌 끝끝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런데 그 이름을 다른 이가 쓰고 있더군. 그 이름을 어떻게 다른 이에게 붙일 수 있지? 어떻게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