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17화 (417/608)

제417화

“뭐하는 거예요.”

“그냥 구경. 얘가 이 나라 대공이랬지? 카류안은 그렇다 치고, 이 녀석은 좀 안 됐네. 업이 그리 많지도 않은 편이었는데 어쩌다 삶이 꼬여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되었을까?”

“무슨 핑계를 대든 천인공노할 짓을 했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물론 그렇지. 애초에 그 마음에 품은 증오가 카류안을 불러들인 걸 테니.”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 모습을 보니 무심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카노스는 카류안이 안 밉나요?”

다분히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내뱉음과 동시에 후회가 찾아들었다.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셈이니 분위기가 어색해질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흠, 글쎄, 굳이 말하자면 그냥 안타깝다는 쪽이려나.”

“……안타깝다고요.”

“정말 못 말리는 아이지. 왜 저리 아등바등 신이 되려고 하나 몰라. 신이라고 해서 딱히 좋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일단 올라서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다니 참 순진하기도 하지. 엘, 너도 명심해. 자기 자신을 망치는 방식으론 아무것도 제대로 얻을 수 없어. 마음이 지옥에 있으면 무엇을 얻어도 결국 그쪽의 길만 열 뿐이야.”

“알 것 같아요.”

“오, 내 말에서 진리를 깨달았어?”

“아뇨, 카노스의 태도가 관조적으로 보이는 이유요. 카노스는 모두를 같은 시선으로 보는군요. 당신에겐 우리나 카류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거예요.”

“아, 음. 그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카노스는 선뜻 긍정했다. 지금까지 딱히 숨기려 한 적도 없었고, 이제 와 새삼 부정하거나 회피할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정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게 실망했어?”

“……아뇨. 누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카노스 마음이죠.”

“다정해라. 본성이 살아나도 성격은 어디 안 가는구나. 역시 타고나는 것보단 학습인가?”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몸이 움찔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아스의 표정이 스쳤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더니 그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왜 그래? 갑자기 우울해진 것 같네?”

“난 별로 다정하지 않아요.”

“오호,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애들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요. 라피스한테 지적도 받았는데 본성이 살아났다는 자각도 제대로 못 했어요.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니.”

“기분이 어떤데?”

“그냥 쓰고 건조해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아요. 세상의 채도가 한 톤 낮아진 느낌이에요. 대체 본성이 왜 이런 건지 모르겠네요.”

“음, 좀 미안하네.”

“카노스가 왜요?”

“그 정령왕의 ‘본성’이라는 거 말이야. 최초의 정령왕들이 물려준 거거든.”

뭐라고?

처음 듣는 얘기에 놀라 바라보자 카노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의 삶에서 완성된 감정이 각자 계보의 본능으로 굳어졌지. 그래서인지 늘 비슷한 상황이 반복돼. 미네르바는 강한 자극을 찾아다니지. 트로웰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을 해. 이프리트는 정론을 지키느라 소중한 것을 놓치는 편이야. 엘퀴네스는 알다시피 항상 혼자고.”

전혀 몰랐던 내용이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할 말을 찾으려니 카노스가 빙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본성을 잃은 네가 흥미로웠어. 어떤 삶을 살아갈지 궁금했었지. 내 기대보다 더 보기 좋더라.”

“카노스…….”

“다른 엘퀴네스들도 그 본성이 없었다면 다른 삶을 살았겠지. 가만 보면 엘뤼엔도 의외로 상냥한 구석이 있잖아? 난 그게 진짜 그의 본성인 것 같거든. 본인은 별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을 끝마친 후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왜 울어?”

“……내가 지금 울고 있어요?”

“응,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데?”

손을 들어 뺨을 쓸어보니 축축한 감각이 묻어 나왔다. 딱히 의심했던 건 아니었지만 정말로 그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렇네요. 정말 우네요.”

“내 말 어디에 슬픈 내용이 있었어?”

“글쎄요. 슬픈 건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카노스가 굉장히 외로웠겠구나 싶어서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분명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데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난 가끔 이러는 건데도 힘들거든요. 세상에 나 혼자 떨어진 기분이 들어요. 그런데 카노스는 평생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거네요. 그걸 어떻게 견뎠어요?”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원망하는 게 아니라?”

“카노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웃은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아름답다고 인정한 사람이 네가 두 번째라고.”

기억한다. 아마도 루카르엠 때 했던 말이었던 것 같다. 그가 카노스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때. 당연히 그냥 대충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 갑자기 그 말을 왜 하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니 그가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 감정을 외롭다고 표현한 것도 네가 두 번째야.”

“아…….”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나 닮은꼴이라니. 정말 재밌는 부자라니까.”

이어진 말의 의미를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내 아버지라고 지칭할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가만히 숨을 삼키려니 카노스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나 참, 원래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 주진 않는데. 네가 너무 착한 아이라 나까지 방심한단 말이지. 여러모로 무서운 아이란 말이야? 그러니, 엘. 그 감정에서 빠져나가지 못할까 봐 무서워할 거 없어. 넌 다르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본성이 살아날 때를 잘 생각해 봐. 대체로 어떨 때 그랬어?”

그 질문에 나는 천천히 지난 일을 돌아보았다. 첫 자각은 미네가 태어났을 때. 본계에서 푹 쉬다가 별다른 계기 없이 변했던 거로 기억한다. 이후로는 대체로 화가 나거나 신경이 예민해질 때였다. 그렇게 답했더니 카노스가 거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나고 왜 예민해졌는데?”

“네? 그거야…….”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냥 화가 났던 적은 없었다. 평소보다 예민해질 땐 대체로 일행이 얽혀 있었다. 그래, 그들을 지켜야 할 때. 천천히 머리를 장악해가는 깨달음에 멍해지자 카노스가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웃었다.

“화날 때 화를 내는 건 당연한 거야. 다른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경계심이 강해지는 건 네가 여전히 다정한 아이라는 증거지. 상처를 줄까 봐 자리를 피한 것도 마찬가지야. 넌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나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다시 솟아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카노스도 다정해요.”

“난 악신과 너희를 똑같이 취급하는데?”

“그러니까요. 똑같이 대한다는 건 모두를 다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재밌는 해석이네. 보통은 모두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나?”

“그건……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관심이 없다면 누가 죽든 다치든 상관도 안 했겠죠. 악신을 막으려고 할 리도 없구요.”

“그냥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라면?”

“그래도요. 그래도 난 카노스가 다정한 것 같아요.”

아까부터 떨어지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나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카노스가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뤼엔은 정말 운이 좋단 말이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엘뤼엔 버리고 내 아들 할래?”

“그건 싫은데요.”

“매정하긴.”

그때 주위가 훅하고 더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정화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완성을 마쳤는지 마법진이 본격적으로 발동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에 맞춘 것처럼 대공을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도 완전히 그를 덮었다. 한 덩어리가 되어가는 동안 대공이 내지르던 소음도 파묻혀 잠잠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노스가 피식 웃었다.

“자아, 드디어 종막인가? 이제 모든 게 끝날 시간이야.”

* * *

문득 뺨을 간질이는 느낌에 엘뤼엔은 천천히 눈을 떴다. 뿌연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며 나뭇가지로 한가득 덮인 천장과 그사이에 우거진 덩굴 나뭇잎이 보였다. 이불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기온에, 울창한 가지들 사이에선 맑은 햇빛이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쏟아지고 있었다. 꽃향기를 품은 바람은 스칠 때마다 재잘거리는 새소리를 들려주었다.

멀쩡한 사람도 저절로 잠들어 버릴 듯한, 낮잠 자기 좋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반대로 주위를 인지할수록 엘뤼엔의 정신은 점차 또렷해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언제 의식을 잃었는가’였다. 그를 강제로 떠맡은 루세프가 공간이동을 한 건 확실히 기억했다. 말없이 노려보는 그에게 루세프가 쩔쩔매던 모습도 선명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채였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다시금 뺨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그를 깊은 잠에서 깨운 바로 그 감각이었다. 고개를 돌린 엘뤼엔은 그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고 있던 걸 발견했다. 동그란 눈과 동그란 얼굴을 가진 생물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후다닥 달아났다.

“……뭐야, 저건.”

“고양이지.”

들려오는 음성에 엘뤼엔은 멈칫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조금 전 그를 건드리다 달아난 것과 같은 생물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신이 들었느냐?”

친근한 어투에 엘뤼엔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녀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녀는 신계에서 가장 협소한 인맥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그가 얼굴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신 중 하나였다. 단지 분위기가 그가 알던 것과 달랐다.

“운명의 여신?”

“그렇단다.”

예상한 그대로의 대답이 돌아왔지만 엘뤼엔은 오히려 얼굴을 더 찌푸렸다. 그가 기억하는 운명의 여신 라데카는 달빛을 머금은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머리칼은 짙은 흑색이었다. 피부색 역시 진한 흑갈색이다 보니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그게 이상하진 않았지만 평소의 그녀와 다른 느낌이 된 건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라데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고가 있어서 잠시 힘을 잃었단다. 그래서 한동안 이곳에서 요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이곳?”

“모르겠느냐? 여긴 사나시드의 치유실이란다.”

대답과 함께 라데카가 품에 안고 있던 하얀 고양이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뭐하는 짓이냐는 엘뤼엔의 시선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주 귀엽지? 사나시드의 치유실엔 이런 귀여운 아이들이 아주 많단다. 환자의 정서 안정을 위해서지. 네가 지금 딱 정서 안정이 필요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됐으니까 치워.”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고양이를 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니. 누가 형벌의 신 아니랄까 봐 냉정한 녀석이로구나. 저기 있는 루세프를 좀 본받거라.”

라데카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엘뤼엔은 구석에 앉아 있는 루세프를 발견했다. 어딘지 퀭해 보이는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한 채 하염없이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황당해진 엘뤼엔은 몸을 일으켰다. 본래는 완전히 일어날 생각이었지만 몸을 가르는 듯한 통증에 허리를 세워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직 무리해서 움직이는 건 좋지 않단다.”

“상관하지 마. 저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조금 전에 그가 보는 앞에서 이오웬이 아크아돈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란다.”

라데카의 대답은 그가 상황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천신 이오웬이 아크아돈으로 내려간 게 루세프가 넋을 잃고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인 건지, 인과 관계를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카노스가 그에게 맡긴 일은 엘뤼엔을 치유의 신에게 데려다주는 것까지였다. 이오웬과 길이 어긋난 게 문제라면 다시 따라 내려갔으면 됐을 일이다. 저렇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궁상을 떨 게 아니라. 그 의문을 읽은 라데카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그를 부르는 몸에 강신했단다.”

“강신?”

“루세프의 그릇 말이다. 그렇게 찾던 루세프의 아이가 능력을 각성한 모양이더구나.”

“아아.”

그제야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아서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 옆에 붙어 있던 유니콘이 생각난 덕분이었다. 관심도 없어서 몰랐는데 아무래도 그 유니콘이 접신할 수 있는 존재였던 듯했다. 어째선지 제 창조신인 루세프를 놔두고 다른 신을 불러들인 모양이지만.

“시벨이 날 안 부르고 이오웬을 불렀어. 날 안 부르고……. 나도 여기 있는데. 나도 천의 속성인데……. 이오웬보다는 쪼끔 약해도 나도 쓸 만한데…… 내가 제일 가까운 신인데…….”

저러면 나라도 안 부르겠군. 엘뤼엔은 속으로 가볍게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유니콘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하염없이 중얼거리는 루세프를 무시하기로 한 엘뤼엔은 다시금 라데카를 돌아보았다.

“아크아돈의 상황은 어떻지? 악신은?”

“글쎄다. 말했다시피 난 힘을 잃어서 당분간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단다. 하지만 듣기로는 천군이 결박해 두었다는구나. 그 이후로는 조용하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런가.”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러지 않는다면 내 그 괘씸한 종자를 잡아다 뼈째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끌어안은 라데카의 황금빛 눈동자가 음험하게 번뜩거렸다. 엘뤼엔은 어렵지 않게 지난 상황을 추측했다. 대체로 너그러운 편인 라데카가 유독 이를 가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저 밤의 머리칼은 카노스가 원인이 된 듯했다.

“앗, 벌써 움직이면 안 돼요!”

그때 마침 문을 열고 들어서던 이가 엘뤼엔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투명한 비취색의 머리칼을 양쪽으로 묶어 모양을 낸 여인에게선 짙은 약초 냄새가 풍겼다.

“저이가 바로 치유의 신 사나시드란다.”

라데카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엘뤼엔은 이미 여인의 정체를 알아본 상태였다. 서둘러 다가온 사나시드는 곧바로 엘뤼엔의 환부부터 점검했다. 그녀의 오렌지 색 눈동자가 책망을 담고 엘뤼엔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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