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화
슈텔 남작가는 건국 시기에 작위를 받은 후로 눈에 띄는 활약 없이 근근이 혈통을 이어온 작은 가문이었다. 전통 있는 무가로서 사병도 보유하고 있었지만 특출한 전사를 배출하진 못했다. 몇 대전부터는 투자한 사업이 연이어 실패하는 바람에 재정난도 앓았다. 별다른 일이 있지 않아도 조만간 사병과 저택을 처분할 일만 남은, 평범한 몰락 귀족이 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남작의 딸인 아니카가 대공을 거스르고 친황파의 식솔을 도왔을 때나, 그로 인해 가문의 남자들이 끌려가듯 출정하게 되었을 때도 큰 반향을 끌진 못했다. 다들 어차피 망할 가문이 그 시기가 앞당겨진 것쯤으로 보았다. 당사자인 남작과 그 아들들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들에겐 뜻밖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남작의 결단으로 그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슈텔 남작가는 대공 편에서 출정한 가문 중에서 황제의 진노를 피한 유일한 가문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을 텐데 찾아든 행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올해로 스물다섯. 슈텔 남작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인 루이스 드 슈텔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건네지는 제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얀색의 슈트와 어깨에 달린 은색 견장, 푸른 띠와 망토로 구성된 제복은 기사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제복이기도 했다. 바로 황제의 친위대가 입는 제복이었으니까.
무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기도 전부터 기사로 내정된 그의 오랜 목표는 황제의 친위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위대는 황실의 오랜 전통에 따라 자작 이상의 귀족이거나 그 자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남작 가문인 그에겐 입단 시험을 치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평생 동안 동경이자 원망의 대상이었고, 체념하면서도 끝내 떨쳐내지 못한 미련이었던 바로 그 제복이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친위대 입단을 축하하네, 루이스 경. 약식이라 일단은 제복만 선지급되고, 갑옷과 소속 패는 나중에 정식으로 입단식을 치를 때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실 것이네.”
황제라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루이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봐도 눈앞에 있는 사내가 황제의 친위대 대장인 케이 드 세리크 백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혼란의 밤에 황제를 데리고 무사히 탈출한 공신 중의 공신, 죽었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끝내 살아 돌아온 불사의 기사였다. 그가 자신에게 직접 제복을 건네주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저어…….”
“뭐지?”
“제가, 제가 정말 친위대가 된 겁니까?”
물으면서도 루이스는 자신이 정말 멍청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이는 한심해하는 대신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틀림없는 친위대 기사네.”
친위대 기사네. 친위대 기사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반복됐다. 그대로 황홀한 감각에 빠져 넋을 잃으려는 걸 루이스는 간신히 참아냈다.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편하게 받아들이기엔 이 모든 상황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일의 발단은 마틴 성의 전투가 끝난 직후였다. 그때 루이스와 그의 병사들은 대공군 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몰래 성문을 여는 역할을 맡았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고, 이후엔 난전 속에 섞여들어 무조건 베고 찌른 기억밖에 없었다. 전투가 다 끝나고서야 자신이 황제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정도였다. 승전을 함께했다곤 하나 본래는 반역 가문의 명단에 올라 참수당했을 운명. 포상은 감히 언감생심이었고,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한 친위대의 기사가 다가와 그의 관등 성명을 확인하더니 지나가는 어조로 친위대에 관심이 있는지를 물었다. 몇 가지 시험을 치러보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땐 그냥 별다른 생각 없이 응했다. 설마 그게 친위대 입단 시험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합격했다는 말을 들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어쩌면 착오일지도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착오일 것이다. 기쁨이 단숨에 절망으로 바뀌지 않으려면 일단은 침착해야 했다.
“저어, 혹시 뭔가 착오가 있는 건 아닌지요. 저는 기사이고 준남작의 자격을 갖고 있긴 합니다만 아직 정식 작위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버님도 남작이십니다만.”
“아아, 그거라면 입단 규정이 바뀌었네.”
“예? 규정이 바뀌었다고요?”
“황제 폐하께선 친위대 입단 조건이 여러모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셨다네. 실력 있는 기사가 신분 때문에 친위대가 될 수 없는 걸 안타까워하셨지. 그래서 인원을 새로 보충하기에 앞서 규정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셨네. 이제 기사라면 누구든 입단 시험을 치를 수 있네.”
“그, 그렇군요.”
다시금 머리가 멍해졌다. 루이스는 숨을 크게 삼킨 후에 하염없이 제복을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정말로 자신이 친위대에 들어갔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케이가 말했다.
“아, 하지만 규정이 그대로였더라도 자네는 해당했을 거네.”
“예?”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나? 슈텔 남작님이 이번 내전의 공훈으로 동부 헤레이스의 일부 봉토와 자작의 작위를 받게 되신다네. 남작 위는 자네에게 돌아가겠군.”
“예에?”
“이제 슈텔 가가 자작 가문이라는 소리지.”
한동안 이해하지 못해 멀뚱거리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멸문을 피한 것만으로도 천운이라 생각했는데 포상으로 상위 작위와 봉토라니! 심지어 동부에 있는 헤레이스라면 루비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제국을 대표하는 질 좋은 루비는 전부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중 하나만 받아도 가문의 오랜 재정난을 해결하고도 남을 것이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눈을 깜빡이던 루이스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굳어지는 그를 보고 케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군?”
“포상이 너무 과합니다. 폐하의 위명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가주의 올바른 결정으로 그들 가문이 목숨을 건지긴 했으나 결과만 놓고 보면 배신한 것이었다. 어느 쪽에서든 힐난하자면 충분히 비난할 수 있는 일이었고, 각오도 했다. 그런 중에 포상까지 두둑이 받는다면 비난의 시선이 더 크게 따라붙을 것 같았다. 자신들은 의당 치러야 할 대가라 하더라도, 황제까지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을까 두려웠다. 그러자 케이가 실소했다.
“경은 겸손이 지나치군. 마틴 성 전투 승전의 일등 공신인 가문에게 당연한 포상이네. 성문 안쪽에서 아군이 들어올 길을 터주지 않았나. 위험하고 어려운 역할을 참으로 잘해 주었네. 공신에게 내리는 포상이 크다 해서 폐하의 위명이 상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루이스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들이 성문을 연 게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황제군이 거의 다 이긴 전쟁이었다.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대공 군은 이미 패색이 짙은 상태였다. 굳이 그들 가문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황제군이 이겼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다 차려진 상에 수저만 얹은 셈이었다. 그래서 그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만 감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일등 공신이라 하니 감정이 크게 격동했다.
“과하다 생각지 말게. 슈텔 가문은 아니카 영애가 보인 의기만으로도 충분히 포상받을 만하네. 남작님과 자네 형제가 대공 편으로 출정한 것도 영애와 가문을 지키기 위한 선택인 것 역시 잘 알고 있지. 그걸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네. 오히려 자네들이 그런 성품이 아니었다면 폐하께서도 품지 않으셨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힘겹게 고개를 숙이는 그의 어깨를 케이가 가볍게 두드렸다. 루이스는 두 손에 쥔 제복을 꽉 움켜쥐었다. 황제가 내린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다. 평생 그의 그림자로서 그를 지키며 내 모든 것을 바치리라. 루이스는 가슴 깊이 맹세했다.
그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그날 황제의 친위대엔 루이스까지 포함하여 총 열 명의 신입이 새로 뽑혔다. 앞으로도 차근차근 입단 시험을 치러 추가 인력을 계속 뽑을 예정이라고 했다. 본래는 입단식을 치른 후에 배속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내전 이후로 친위대의 인력이 몹시 부족해진 상태였기에 루이스는 정식 입단식을 치르기도 전에 근무부터 시작하게 됐다. 다른 신입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내 사람들인가?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이른 오전, 신입 친위대원들이 정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황제 앞에 섰다. 처음으로 군신의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제가 웃으며 말했을 땐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이후로도 몇 마디 말이 더 이어졌으나 머릿속이 하얗게 빈 루이스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동기들과 회의장 밖을 지키는 중이었다. 한시름을 놓은 루이스는 크게 심호흡한 후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황제와 악수할 때의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저, 루이스 드 슈텔 경이시죠?”
“예? 어떻게 저를……?”
“마틴 성 전투에서 활약하시던 모습을 멀리서 뵈었습니다. 저도 참전했었거든요. 레나스 드 슈미온입니다.”
“아, 혹시 슈미온 남작님의?”
“네, 차남입니다.”
“앗, 저는 미드엘 드 라하스입니다.”
“저는…….”
신입 친위대들은 그제야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눴다. 가벼운 잡담이 오가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도 한결 편안해졌다.
“아깐 떨려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도요. 황제 폐하를 이렇게 가까이서 뵙다니. 이제야 그분의 기사가 됐다는 실감이 드네요.”
“참, 그거 압니까? 황제 폐하가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하시던데요.”
“네? 그게 정말입니까?”
“참전군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선봉에 섰던 이들은 모두 봤다고 합니다.”
“세상에…….”
“황제 폐하는 마신이 내리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마틴 성의 전투에서 승전하신 날엔 하늘에 빛줄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아, 맞아요. 아는 사제한테 들었는데 그게 성력 덩어리랍니다. 괴물들을 정화한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래선지 괴이한 비명을 들었다는 사람도 많고요.”
“아, 저도 들은 것 같습니다.”
“저도요.”
특별한 이능과 특별한 징후.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일들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이스의 기분은 하늘 위를 둥둥 떠 있었다. 물에 빠져도 두둥실 떠오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온몸이 가벼웠다. 세상이 기쁨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단언컨대 최상의 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콰직! 콰아아앙!
“히이익!”
사방에 진동하는 요란한 소음에 루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꼴사납게 웅크린 건 다른 신입들도 마찬가지였다. 선배 친위대원들은 그나마 의연히 버티고 있었으나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긴 했다.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갈라진 하늘 사이, 빛이 쏟아지는 새하얀 구름 속.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그 공간에 수백의 사람이 보였다. 심지어 양쪽에 커다란 날개를 단 천사들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시작은 급작스러웠다. 루이스는 덜덜 떠는 와중에도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갔다. 인사를 나눈 동료들과 본격적인 대화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한창 수다 꽃을 피우던 신입 친위대원들은 불쑥 끼어든 음성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허어, 이번 신참들 안 되겠네. 경비를 서랬더니 임무 중에 잡담질입니까?”
그들 앞에 나타난 건 금발에 녹안을 지닌 젊은 기사였다. 그가 친위 대장의 부관이자 부(副)대장인 알렉 드 이르완 자작이라는 걸 알아본 이들이 사색이 되어 자세를 바로 했다.
“부, 부대장님.”
“친위대 훈련이 얼마나 빡센지 아직 안 받아보셨지? 첫날부터 연무장으로 직행하고 싶습니까?”
“시정 하겠습니다!”
우렁찬 외침에 알렉이 짓궂게 웃을 때였다. 돌연 그가 얼굴을 굳히더니 회의장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어 갔다. 당황해서 뒤따르던 루이스는 눈에 들어오는 방 안의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황제 앞에 처음 보는 이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새파란 머리칼을 지닌 신비한 느낌의 소년이었다. 분명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한 번이라도 봤다면 잊히기도 쉽지 않은 외모니 잘못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갑자기 등장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황성엔 마나 가공을 막는 마법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공간 이동 마법을 활용한 기습을 막기 위한 방어진이다. 그러자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황제 폐하가,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자기도 모르게 바라보자 시선이 마주친 알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을 이해한 신입들 모두가 조용히 경악했다. 이후 소년은 모두의 눈앞에서 물보라를 일으켜 보임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드러냈다. 정령왕. 정말로 물의 정령왕이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창밖에서 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먹구름이 가득 차오른 하늘에 사람 하나가 우뚝 떠 있었다. 그가 빛으로 된 활을 쏠 때마다 사방이 온통 진동했다. 더 경악스러운 건 그다음 광경이었다. 마구잡이로 쏜 화살에 무언가가 깨지는 듯하더니 공중에 결박된 사람들이 드러난 것이다. 모두 온몸에 가시가 박혀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이었다. 그걸 본 정령왕이 급히 자리를 떠나 그쪽으로 향했고(여기서 그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후 공중에 몇 사람이 더 나타나면서 결박된 자들이 곧 풀려나는 듯했다. 그러자 이번엔 하늘이 빠르게 개더니 구름 속에서 천사들이 등장했다. 다음으로 이어진 건 한 여인이 황금빛을 흩뿌리며 하강하는 장면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신의 강림이었다. 그 뒤로 루이스는 계속 떨기만 했다. 아무리 멈추려 해도 몸이 떠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본능이 알아서 굴종하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구름 속에서 천군이 나타나고 신이 강림하다니. 건국 신화에서조차 이런 엄청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있었더라도 과장된 허풍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 걸 생눈으로 목격하려니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 한동안 잠잠하던 땅에 다시 소음과 진동이 울려 퍼진 상태였다.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다는 생각에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천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