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10화 (410/608)

제410화

“그보다 엘뤼엔을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 그를 더 방치하는 건 위험해.”

“아, 맞아, 그렇지. 치료해야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카노스가 성큼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엘뤼엔을 가만히 살피는 시선이 진지해서 루세프는 다시금 숨을 삼켰다. 사실 그는 카노스가 한 말을 믿지 않기로 한 참이었다. 그가 특정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시계를 부쉈다는 말을 믿느니 악신의 각성을 도우려고 저질렀다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친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기분이 급속도로 이상해졌다. 카노스에게 친구라니. 세상에서 결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기분이었다. 그동안 점검을 마친 카노스가 고개를 들었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다 같이 굳어졌다.

“흠, 이거 큰일인걸.”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 거야?”

“피에 젖은 미인이라니. 위험한 취향에 눈을 뜰 것 같아.”

“…….”

“냐하하, 농담이야.”

급격하게 싸늘해지는 공기 속에서 카노스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이 순간 경멸의 표정을 짓지 않은 건 창조신을 존경하는 마음만 가득한 아스모델뿐이었다.

“상태가 꽤 나쁜 건 맞아. 일단 사나시드에게 데려가야겠네. 치유의 신이라 해도 엘보다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이겠지만. 안정하기엔 본계가 더 낫겠지.

“신계로 옮길 수나 있겠어? 차원 이동부터 못 버틸지 몰라.”

“아아, 그렇네. 그럼 내 힘을 좀 나눠줄까.”

“당신의 힘?”

“엘뤼엔은 나와 같은 속성이니까. 잠시 의식을 차릴 순 있을 거야.”

그 말과 함께 카노스가 엘뤼엔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주 잠시 강렬한 전류가 튀었고, 몸이 크게 격동했다. 다음으로 엘뤼엔이 왈칵 피를 토해냈다.

“엘뤼엔!”

깜짝 놀란 이들이 모두 동시에 숨을 삼켰다. 굳게 감겨 있던 엘뤼엔의 눈이 가늘게 떠졌기 때문이었다. 흐릿하던 푸른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카노스가 생긋 웃었다. 반대로 엘뤼엔의 표정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신 들어, 자기?”

“……꺼져.”

“너무하네. 생명의 은인한테.”

카노스가 서운한 표정으로 투덜거렸지만 엘뤼엔은 오히려 얼굴을 더 찌푸리기만 했다(그 냉정한 태도에 지켜보는 이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쾌감을 느꼈다). 그가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엘은?”

“눈 뜨자마자 아들부터 찾기야? 너 소멸할 뻔했단 자각은 있어?”

“엘은 어딨냐고 물었다.”

“음, 글쎄. 근처에 있긴 해. 근데 애가 살짝 맛이 갔네.”

“뭐?”

“아, 맞아! 바로 그거였어!”

그토록 찾았던 표현을 드디어 떠올린 루세프가 반사적으로 외치다 주위의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몸을 일으키려던 엘뤼엔이 신음을 토하며 다시 바닥에 등을 기댔다. 옆에서 부축하려는 손길을 저지한 카노스가 그 모습을 느긋하게 내려다보았다.

“무리하지 마. 너 아직 나은 거 아냐.”

“닥……쳐. 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나 제대로 설명해.”

“그냥 본성이 살아난 것뿐이야.”

“본성이 살아나?”

“학습으로 형성된 성격 때문에 가려진 본래 성향 말이야. 애가 너무 순진해서 이 험한 세상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했었는데. 화가 나니 아주 무서운걸. 역시 엘퀴네스 계보를 잇긴 했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엘뤼엔은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듣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제대로 인지하지는 못하는 상태로 보였다.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습은 의식이 없었을 때보다 더 그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이 점차 굳어져 갔지만 카노스는 오히려 더 화사하게 웃었다.

“아까 위험한 취향에 눈을 뜨는 기분이라고 했었는데. 농담이라고 했던 걸 취소할게. 세상 고고하던 남자의 가련한 모습이란 거 참 좋네. 가슴이 너무 떨리는데?”

“닥쳐.”

이윽고 다시 눈을 뜬 엘뤼엔이 카노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넌 왜 여기에 있어.”

“드디어 나한테도 관심 주는 거야?”

“너, 아까부터 내가 두 번씩 말하게 하는데…….”

“당연한 걸 물으니 그렇지. 친구의 소중한 충고 따윈 귀담아듣지 않는 어느 분이 무모한 짓을 저지를 것 같아서 말이야. 막으러 온 게 뻔하잖아?”

“무슨 헛소리를…….”

다음 순간 엘뤼엔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목과 다리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고정한 카노스가 그대로 그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신계로 인계하는 짓이지. 네가 아직 네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여기서 치료 더 늦어지면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다고.”

“엘을 두고는 안 가.”

“아니, 가야 해. 지금은 어차피 너보다 네 아들 쪽이 훨씬 쓸만하거든? 이쪽 일은 멀쩡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부상자는 얌전히 치료나 받으라고.”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지. 근데 그거 알아, 엘뤼엔? 어느 나라에선 이런 걸 공주님 안기라고 부른다더라.”

“정말 죽고 싶나 보지.”

엘뤼엔의 눈빛이 흉흉해졌지만 카노스는 그저 경쾌하게 웃기만 했다. 그리곤 그 상태 그대로 루세프의 품 안에 떠넘겼다. 얼결에 엘뤼엔을 넘겨받게 된 루세프가 식겁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려가서 치료받게 해.”

“어? 뭐? 내가? 왜?”

“난 지금 신계로 돌아가면 혼나거든. 남은 일을 처리하기에도 너보단 내가 여기 남는 게 더 나을 거고.”

확실히 전력에서 마신이 자신보다 위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루세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하필이면 엘뤼엔의 신경을 긁을 대로 긁어둔 상태로 넘길 건 뭔가 싶었으나,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어서 따지지도 못했다. 루세프는 힐끔 엘뤼엔을 살피다 바로 시선을 피했다. 곧바로 강렬한 살기가 덮쳐드는 게 눈빛으로 살해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화났으니 복수심에 불타서라도 중간에 정신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후환을 염려하는 것도 일단 살리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근데 나도 지금은 차원 이동 못 해. 사방에 결계가 깔려 있다고.”

“뭐야, 이것도 못 뚫어?”

“……뚫은 네가 이상한 거거든.”

“아, 하긴. 네 수준을 나와 같이 두면 곤란하긴 하지.”

도대체 저 마신은 조금이라도 얄미운 말을 하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병이라도 있는 건가. 루세프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좋아, 어차피 없애야 하는 거니 이것도 도와주지, 뭐.”

싱긋 웃은 카노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 안에서 새카만 기류가 일어나며 무기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을 드리운 낫이었다.

‘심판관.’

루세프는 잠시 숨을 멈췄다. 카노스가 심판관을 든 모습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오늘따라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 엘뤼엔 덕분에 새로운 형태의 심판관을 본 게 원인인 것 같았다. 같은 무기인데도 사용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비단 형태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윽고 한 손으로 낫을 휘두른 카노스가 하늘을 한 번 그었다. 그러자 허공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더니 곧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산산이 조각나서 흩어졌다. 먹구름 가득하던 하늘이 점차 열리며 벌어진 틈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빛 한가운데 선 카노스는 마치 그 자체가 빛이 된 것 같았다.

“가지 않고 뭐해?”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압도되어 있었다는 걸 자각한 루세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멸진이 실패하고 엘뤼엔이 다쳤을 때만 해도 앞으로 진행할 일이 막막하기만 했는데 긴장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정말 열 받을 정도로 짜증 나는 놈이었지만 그가 누구보다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또한 분명했다.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물론 지금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불안한 시선을 보낸 후 루세프는 할 수 없이 신계로 이동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부디 사태가 더 악화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두 신이 사라진 후 남은 자리엔 어색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페르데스와 시선을 교환한 후 트로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물러나 환해진 공간에 다시 신들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설마 무기를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결계를 깰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마신의 힘을 직접 확인하고 보니 놀라웠다.

트로웰은 다시 카노스 쪽을 돌아보았다. 다시 무기를 거둔 그는 어느새 시벨리우스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돌보고 있던 데르온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마신의 관심을 예상치 못한 시벨리우스가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많이 다쳤네. 어쩌다가?”

“아, 그게…… 악신이 기습을…….”

“그런 것 같더라. 용케 살았구나? 하긴, 옛날부터 명줄 하나는 질긴 아이였지.”

“……말을 해도 꼭…….”

“칭찬이야. 난 불운에 강한 거 좋아하거든.”

이 상황에서도 데르온은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시벨리우스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일어나, 이 녀석아. 네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마신이 바로 네 앞에 있다고!’

그러나 그가 아무리 간절해도 데르온이 기적처럼 깨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잠잠해서 설마 죽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안색도 창백하니 거무죽죽한 색에 가까웠다.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순간 이어진 카노스의 말은 시벨리우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어쩐다? 평범한 부상이라면야 혈관이 마디째로 끊어져도 상관없는데 이건 나도 낫게 못 해. 엘에게 맡겨도 몇 년은 걸리려나. 그래도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고.”

“……원 상태로 못 돌아간다고?”

“악신의 흔적인데 후유증이 안 남을 리가 없잖아. 살아남은 것만으로 운이 좋은 거야.”

“그렇기야 하겠지만…….”

“뭐, 그래도 이왕 창조주가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끝내기도 좀 그렇나? 아쉬우면 도박이라도 할래?”

“도박?”

“아까 엘뤼엔 봤지? 데르온에게도 내 힘을 부여해 줄 수 있어. 신인 그는 잠시 체력을 회복한 정도였지만 얜 마족이니까 신체가 재구성되어 완전히 나을 수 있을 거야.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해지겠지. 물론 그 힘을 온전히 다 흡수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아…….”

“대신 실패하면 뼛조각도 못 찾아.”

무심코 안도하기 무섭게 들려온 말에 시벨리우스는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경직된 그를 보고 카노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보기엔 어느 쪽이 좋겠어?”

“그, 그런 걸 어떻게 결정해?”

“얜 의식이 없으니까 달리 물어볼 수가 없잖아.”

“그렇다고……!”

“힘을 내려주십시오.”

그때 방황하는 시벨리우스의 목소리를 가르고 차분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아스모델이었다.

“데르온이라면 설령 멀쩡한 상태였더라도 카노스 님의 힘을 받는 쪽을 택할 겁니다.”

그건 시벨리우스도 동감하는 부분이긴 했다. 마족은 본래 목숨보다 힘을 욕망하는 종족이다. 약해진 채로 살아남느니 치료받다가 죽는 쪽을 택할 이들이 열 명 중에 일곱은 되었다. 심지어 데르온은 마음 깊이 마신을 흠모하는 자였다. 그런 그가 마신의 힘을 받을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제안을 다 듣기도 전에 힘을 받겠다며 외치고도 남았다. 카노스 역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그렇겠지. 오히려 누군가의 반대로 내가 그만뒀으면 반대한 사람은 평생 원망을 들었을걸.”

“거기까지 알면 대체 왜 물어본 거야?”

“내가 싫어서.”

기막혀하던 시벨리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대답을 생각지 못한 아스모델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할 수 없나. 난 참 마음이 약하단 말이지.”

가볍게 웃은 카노스가 손을 뻗어 데르온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거미줄이 덮이는 것처럼 그의 몸에 실타래가 감기기 시작했다. 시벨리우스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아스모델이 신체를 성장시키기까지 고치에 갇혔던 현상과 비슷했다. 곧 데르온을 덮어가던 실타래가 완전히 그의 모습을 감쌌다. 그제야 손을 떼어낸 카노스가 몸을 일으켰다.

“결과가 나타나려면 좀 걸릴 거야. 혹시 폭주할 것 같으면 네가 좀 도와주든지. 그럼 살 확률이 조금은 올라갈지도.”

“내가 뭘 어떻게 도울 수 있어?”

“너무 어두워지면 램프를 켜야지? 같은 원리야.”

아리송한 대답에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기묘해지다 곧 완전히 일그러졌다. 다음으로 카노스는 불안정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스모델을 돌아보았다.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는 시선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닿았다.

“아스모델.”

“네, 네!”

“이쪽 일은 네게 맡기마. 잘 지켜줘.”

누구의 것인지 분명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일렁이는 눈으로 자신의 창조신을 바라본 아스모델이 곧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응시한 카노스가 이윽고 트로웰과 페르데스를 돌아보았다.

“자, 그럼 남은 일을 해야지. 우선 잔뜩 화나신 우리 물의 왕님부터 진정시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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