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7화
“그래, 후배 님이라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아직 제대로 모르는군. 새 마왕 전하의 이름은 뭐지?”
“……그건 왜 묻지?”
“그래도 명색이 마지막 마왕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야 내가 카노스를 내 앞에 무릎 꿇릴 때 그를 더 조롱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헛꿈을 꾸네. 난 마지막 마왕이 아닐 거고, 카노스 님이 너 따위에게 무릎 꿇을 일도 없어.”
“후후, 마신을 향한 마족들의 맹목적인 신뢰란 참 대단하단 말이야. 한때는 나도 그랬었지. 뭐, 그렇다 칠까. 하지만 네가 오늘 여기서 죽는다는 건 변하지 않을 거다. 허무하게 사라지느니 이름이라도 남기는 게 좋지 않겠나?”
명백한 도발에 아스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그가 잠시 카류안 을 노려보다가 곧 입을 열었다.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지만, 소원이라면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내 이름은 아스모델이다.”
“……뭐라고?”
“아스모델, 그게 내 이름이라고.”
그러자 카류안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뭔가에 놀란 듯,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곤 다음 순간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아스모델이라! 네가 아스모델이란 말이지! 크큭, 그래. 그러고 보니 나더러 하나씩 잃어갈 것이라는 건방진 말을 했었지. 그게 바로 이런 뜻이었나. 아주 재미있군. 재미있어!”
재밌는 이유를 알 수도 없는데 카류안은 혼자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심 당황해하며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더니 그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미친놈에게 뭘 기대하냐는 표정이었다. 지극히 그다운 반응이라서 허탈하게 웃으려는데 문득 루세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루세프?’
카류안은 한참 만에야 폭소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눈에서 증오심이 번들거렸다.
“아니, 난 아무것도 잃지 않아.”
선언하듯 중얼거린 그가 이윽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손이 아스모델을 가리키듯 뻗어졌다.
“지금부터 전부 되돌려받을 것이다.”
그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데르온을 향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스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압도되어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 돼, 아스!”
보호하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스를 그 자리에서 밀쳐내는 것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새카만 기운이 덮쳐들었다.
“엘!”
세상의 모든 것이 한순간 멈춘 것 같았다. 그때만큼은 카류안의 모습도, 경악하는 아스의 표정도, 나를 향해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시야를 새카맣게 덮는 거대한 장막도 모두 아득하기만 했다. 착각이었을까. 해일 같은 기류에 삼켜지기 직전, 무언가가 나를 끌어안는 것 같았다. 사방의 모든 소음이 멈추고 지독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의식이 돌아왔다는 걸 느끼고 눈을 천천히 깜빡여 보았다. 크게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아픔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죽었나? 그래서 지금 영혼이 되어 있는 걸까? 현재로썬 가장 그럴싸한 예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 멀쩡할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혼이라도 남았으니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인 걸지도 몰랐다.
일단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예상했던 것과 조금 많이 달랐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금싸라기 같은 머리칼이었다. 화사하면서 아름다운 머리칼이 내 위를 커튼처럼 덮어 내리고 있었다. 그 너머 조각처럼 섬세한 이목구비와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보기 좋은 입술이 희미한 미소를 그려냈다.
“무모한 아들 덕분에 별일을 다 해보는군.”
지나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평소와는 약간 다른 울림으로 들렸다.
“엘뤼……엔?”
왜 엘뤼엔이 내 위에 있는 거지?
잠시간 돌아가는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동안 그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진다 싶더니 이내 묵직한 감각이 한쪽 어깨를 덮었다. 그 모든 순간이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편집된 영상처럼 몹시 느리게 느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가 내 위로 쓰러졌다는 사실을 겨우 자각했다.
“에, 엘뤼엔?”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무언가 뜨뜻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선연히 차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반사적으로 숨부터 삼켰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보니 손바닥 가득 강렬한 붉은색의 액체가 흥건했다. 피였다.
“아…….”
콰아앙!
그 순간 가까이에서 커다란 소음이 울렸다. 멍하니 돌아본 시야에 누군가가 싸우고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루세프가 카류안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서 아스가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무어라 소리치는 것도 보였다. “……려!” “……부, 정……!” 웅웅거리는 귓가에 몇 마디가 드문드문 끊겨 들려왔다.
“대부!”
“……!”
눈앞에 번개가 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막혔던 숨이 갑자기 터진 것도 같았다. 급물살이 일어나듯 모든 상황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니 내게 기대 있던 몸이 옆으로 힘없이 늘어졌다. 혹시나 잘못 봤던 건 아닐까, 몇 번이나 연거푸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나 벌꿀이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금발의 남자는 틀림없는 내 아버지 엘뤼엔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이 창백했다. 그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던 모습이었다. 부축해 똑바로 눕히고서야 비로소 그의 상태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가슴께부터 복부까지 상반신이 전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에, 엘뤼엔……! 정신 차려, 엘뤼엔! 엘뤼엔?”
부상 부위를 확인하려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옷깃을 열자 울컥 쏟아지는 붉은색의 향연에 눈앞이 아찔했다. 피가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내 이름이 엘뤼엔이라는 건 알고 있어.”
다행히 의식을 잃은 건 아닌지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평소보다 확연히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래서일까. 목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돼야 하는데, 오히려 더 불안했다.
“잠깐만! 잠깐만 참아! 내가 금방 치료할게! 주, 죽으면 안 돼?”
그가 킥하고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 희망을 걸고 나는 곧바로 치유술을 썼다. 그런데 치료가 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워졌다. 이미 데르온 때의 경험도 있어서 한 번에 쉽게 나으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것과도 느낌이 달랐다. 아무리 치유술을 불어 넣어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느린 정도가 아니라, 효과가 전혀 없다는 느낌이었다.
“안 돼. 안 돼! 나아! 나으란 말이야!”
초조해지는 마음에 좀먹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엘뤼엔의 뺨을 적셨다. 그러자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움찔 떨리며 천천히 열렸다. 가늘게 떠진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엘.”
“미, 미안해, 엘뤼엔. 많이 아프지. 지금 열심히 치료하고 있어. 조금만 더 버텨줘. 미안해.”
울먹거리는 걸 참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꽉 메이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아마 표정도 분명 엉망일 것이다.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후 하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윽고 그가 피에 젖은 손을 천천히 들었다. 날 만지려는 게 느껴져서 서둘러 내가 먼저 그 손을 잡고 얼굴을 댔다. 한 뺨 가득 따스한 체온이 닿자 억지로 눌러 참고 있던 서러움이 본격적으로 복받쳤다.
“내 하나뿐인 아들은 겁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군.”
“하지만, 하지만…….”
“난 괜찮다, 아들.”
“어디가 괜찮다는 거야!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아니, 정말 괜찮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 짙어졌다. 뻔히 상태를 보면서도 정말 괜찮은 건가 무심코 안도할 만큼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마라.”
그 순간 그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잡고 있던 손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엘뤼엔!”
황급히 불렀지만 그 손이 다시 힘을 얻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급속도로 그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내 말 들려, 엘뤼엔? 듣고 있어?”
그러나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오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나는 숨을 참고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생기가 사라지니 밀랍으로 빚은 인형 같았다.
신의 생사를 확인하는 방법은 모른다. 당연히 인간과는 다를 것이다. 다만 소멸한 신이 시신을 남긴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의식을 잃은 것뿐이겠지. 그럴 거다. 엘뤼엔이 이렇게 죽을 리가 없었다. 분명 내가 원하면 죽지 않는다고 했었다. 엘뤼엔은 내게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맞을 거다. 분명 그럴 터였다. 그러나 머릿속의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점점 떨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이 없는 엘뤼엔이라니. 지독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왜 그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엘뤼엔은 강한 신이었다. 신계에서 제일 강한 마신에 비견할 정도로 강하다고 했었다. 그 말처럼 그에게선 늘 가까이하기 힘들 만큼 짙은 아우라가 넘쳤다. 아무리 카류안이 강해졌어도 쉽게 당할 존재가 아니었다. 주신의 힘이 담긴 무기를 잃은 순간에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도 그 모습을 유지한 채였을 것이다. 그래, 나만 아니었어도. 그가 나를 구하려 하지만 않았어도!
“대체 왜! 나 같은 게 뭐라고!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이렇게 다 큰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필요는 없잖아!”
친자식도 아니고 고작 양자였다. 이렇다 할 계기도 없이 정말 가볍게 건넨 말 한마디로 맺어진 인연. 그에겐 아무것도 득 될 것이 없는, 오직 나만을 위한 선물. 그래서 더 망설였다. 내게 그의 존재가 깊은 의미가 될수록 오히려 그에겐 부담이 될까 봐.
“멍청이 엘뤼엔! 바보 아버지! 젠장! 죽지 마, 아버지! 아버지, 제발! 제발!”
아아, 왜 진작 그를 이렇게 부르지 못했을까. 이게 다 뭐라고. 이렇게 쉬운 거였는데. 조금만 더 빨리 아버지라고 부를걸. 그의 의식이 있을 때. 그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때.
“안 죽는다고 했잖아.”
벌을 받는 걸까. 희생할 신이 엘뤼엔이 아니라고 안도해서, 다른 사람이 겪을 아픔은 모른 척해서 그 대가를 치르는 걸까?
전생의 부모는 언제나 나 때문에 불행하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사실이었다. 내가 잘못 태어난 아이였으니까. 그 가정에 없어도 되는 아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모두가 불행해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니었다면 엘뤼엔이 이런 일을 겪을 일도 없었겠지. 내가 어설픈 정령왕이 아니었다면 아들로 삼을 일도 없었을 거다. 정말로 내가 문제였다. 전부 다 나 때문이었다. 역시 난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그러면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잡은 손에선 이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온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떴을 때 다시 강지훈이 되어 있어도 괜찮았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을 전부 다 잃어버려도 상관없었다. 다시는 엘뤼엔의 아들이라고 불리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발……!
“제발 눈을 떠, 아버지…….”
주위가 고요해졌다는 걸 느낀 건 조금 후였다. 거센 바람과 소음이 멈추고 여러 목소리가 흩어졌다.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누가 엘뤼엔이라고?”
들려온 목소리는 역시 예상한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류안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리운 채 히죽 웃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만신창이의 몸으로 서 있는 루세프와 아스가 보였다. 각자 부상자와 함께 있던 시벨리우스와 트로웰도 엉거주춤 일어난 채였다. 굳어 있는 얼굴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들 카류안과 내 거리가 가까워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거 믿을 수가 없군. 정령왕이 마왕의 목숨을 구하려고 뛰어든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 정령왕을 대신 구하고 죽는 신이라니. 대체 어느 덜떨어진 놈인가 했는데 말이야. 지금 엘뤼엔이라 했나? 그 악명 높은 저주와 형벌의 신 엘뤼엔?”
“……함부로 말하지 마.”
“하하, 정말 그 엘뤼엔이 맞단 말이지! 크크큭, 푸하하하!”
기막히다는 얼굴로 외친 카류안이 곧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치켜 올라간 입꼬리 가득, 주체하지 못하는 기쁨이 역력히 드러났다.
“고작 이 정도였던가, 형벌의 신! 마계를 벌벌 떨게 만든 상급신도 이제 보니 정말 별거 아니군! 그동안 주제 넘치는 영광을 누렸어!”
“……너…….”
“아니지, 그만큼 내가 강해진 거겠지. 주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니 당연한 건가. 하지만 조금 안타깝군. 형벌의 신에겐 유감이 없었거든. 게다가 이렇게 보니 눈에 띄게 아름다운 신이군. 내게 순순히 복종만 했다면 곁에 두고 아껴줬을 텐데 말이야. 그래, 목줄을 걸어주고 개처럼 바짝 엎드려 기어 다니게 해줄 수 있었겠지. 재롱을 피우면 상으로 썩은 고기를 던져주는 것도 즐거웠을 텐데.”
“……뭐?”
“아쉽군, 정말 아쉬워. 설마 이렇게 쉽게 개죽음을 당할 줄이야. 그래도 형편없이 나동그라지는 꼴은 꽤 볼 만했지.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마지막이었다.”
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겼다. 그게 한계에 달한 인내심인지, 마지막 이성인지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엘뤼엔의 손을 내려놓은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똑바로 바라보자 놈이 느긋하게 웃는 얼굴로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