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04화 (404/608)

제404화

그 말에 가슴 속이 울컥거렸다. 일족의 왕이자 제사장, 신을 제 몸에 깃들게 할 수 있는 고유 능력. 원래대로였다면 시벨리우스에겐 루세프가 가장 친근한 존재였어야 했다. 그런데 마신이나 형벌의 신보다도 오히려 멀게 느끼고 있었던 거다. 이런 날을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을 만큼.

그가 룬의 힘을 각성하지 못한 건 무의식이 스스로 봉인한 탓이었지만, 그걸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한때는 계속 접신을 시도해봤을 거고, 실패하는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좌절을 거듭했겠지. 그러다 나중엔 체념했을 거다. 아마 시벨리우스는 그동안 루세프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창조신과의 조우에 기쁨이나 감격보다 당혹감과 의아함을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을 거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그런데 그때 아스가 그를 빤히 보다가 불쑥 말했다.

“시벨, 얼굴이 붉어졌어.”

“……거짓말 마.”

“정말인데. 블루 엘프가 아니라 레드 엘프인 것 같아. 엘프족에 새로운 종이 생겨났다고 해도 믿겠어.”

“뭐? 설마 그럴 리가 없……역시 거짓말 맞잖아, 이 망할 꼬맹이!”

급히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본 시벨리우스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고, 아스를 노려보며 버럭 화냈다. 그러나 사나운 시선에도 아스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 이제 시벨만큼 커. 키는 아마 여기서 더 자랄 거고. 꼬맹이 아닌데?”

“덩치가 무슨 상관이냐? 열 살도 안 된 놈은 그냥 꼬맹이지!”

“시벨은 그럼 늙은이겠네.”

“죽을래?”

“이럴 때 화를 내면 인정하는 건데. 시벨은 참 어리석네. 그러니까 그런 하찮은 거짓말에도 쉽게 낚이는 거야.”

“주종이 아주 쌍으로 돌아가며 사람을 환장하게 하지?”

다툼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내심 묘한 기분으로 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만 마주치면 투닥거리는 거야 여전하긴 한데, 이전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아스가 시벨리우스를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부른다는 점이었다. 그동안엔 항상 퍼런 엘프라거나, 혈마라는 식으로 돌려서―정확히는 시벨리우스가 싫어할 만한 방식으로― 칭했는데 지금은 꼬박꼬박 ‘시벨’이라고 확실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말다툼은 일부러 아스가 유도한 거였다. 아마도 시벨리우스를 심란한 기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다투는 동안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벨리우스의 표정을 아스가 유심히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분위기가 완전히 평소대로 돌아오자 눈동자가 한층 깊어지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건 분명 만족감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마족들을 해치우려 할 땐 시벨리우스가 먼저 만류하며 나섰었지. 그때 그가 언급한, 못 본 척할 수 없는 녀석들이란 게 아스와 데르온을 뜻하는 건 누가 봐도 뻔했다. 이건 뭐랄까, 역시 아무리 봐도…….

“둘이 꽤 친해졌네?”

“뭐? 아냐, 엘. 하나도 안 친해!”

“응, 친하진 않아.”

말을 꺼내기 무섭게 정색하는 시벨리우스와, 그에 동조하는 아스의 답변이 이어졌다. 그런 직후 싱긋 웃은 아스가 가벼운 말투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냥 내가 관대하게 대하는 것뿐이야, 대부. 저래 보여도 계약자니까.”

“아, 그래…….”

“너어, 까불지 마! 관대하게 대하는 건 나거든!”

“유치하네, 시벨. 어린애와 일일이 경쟁해서 이기고 싶어?”

“이럴 때만 어린애인 척하지 마!”

……아니, 그러니까 바로 이런 모습들이 친해졌다는 건데.

어차피 지적해봤자 다시 부정할 게 뻔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어쨌거나 사이가 좋아진 건 좋은 일이긴 했으니까. 사실 둘의 관계는 쭉 평행선을 이룰 줄 알았다. 성격이나 종족의 문제를 떠나 둘 다 서로 가까워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시벨리우스보다는 아스가 문제였다. 시벨리우스는 의외로 마음이 약한 면도 있고, 정도 있는 성격이다. 갓 태어난 날부터 쭉 지켜봐 온 아이인데 상대가 자신을 따르면 아무리 마족이라도 분명 외면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에 비해 아스는 정말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냥 대부의 친구니까 일행으로 인식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이랄까. 그래서 지금 보이는 태도 변화가 신기할 정도였다. 카노스 때문에 강제로 맺게 된 계약이 예상치 못한 효과를 가져온 것 같았다.

그때 문득 트로웰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코 그 뒷모습을 쫓아가려는데 별안간 사방이 진동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직, 콰아앙! 바람과 함께 강렬한 기운이 덮치듯이 쏟아져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와 닿는 영향은 전혀 없었다. 트로웰이 곧바로 방호벽을 만들어 막아낸 덕분이었다.

“아……고마워, 트로웰.”

“별말씀을.”

가볍게 돌아본 트로웰이 생긋 웃었다. 잠시 후 그가 만든 방호벽이 걷히고 그 너머의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욱한 먼지 바람 속에서 엘뤼엔이 활을 들고 서 있었다. 그가 쏘아낸 게 분명한 금빛의 빛줄기가 검은 덩어리로 힘차게 날아가는 중이었다. 조금 전 바람의 파장은 화살을 날릴 때 일어난 것인 듯했다.

빛줄기는 검은 덩어리를 완전히 꿰뚫어 바닥에 단단히 박혔다. 그러자 그때까지 잠잠하던 검은 덩어리가 조금씩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엘뤼엔이 손을 내밀었고, 루세프가 그에게 다음 화살을 건넸다. 두 번째 화살이 세 번째가 되고, 네 번째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날아간 화살들은 전부 검은 덩어리를 꿰어 바닥에 깊이 박혔다. 말뚝을 박듯이 그 몸을 고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유심히 화살을 살폈다. 단순히 루세프가 만들어서 건네주는 것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다른 곳과 연결된 흐름이 느껴졌다. 느낌이 워낙 뚜렷해서 정체를 짐작하기가 어렵지도 않았다.

“뭘 하는 걸까? 단순한 결박 같지는 않은데. 저 화살에 걸린 주술들, 신계와 연결된 거 맞지?”

“응, 맞아. 정화진처럼 신계 쪽에 본진을 둔 것 같네. 아마 봉인하려는 것 같아. 소멸진을 덮어씌우기 쉽도록 고정하려는 거겠지. 왜 루세프만 내려왔나 했더니 나머지 신들은 저걸 만들고 있었구나.”

트로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꽤 아슬아슬했어. 주술을 푸는 쪽으로 해결해서 다행이야. 악신은 사기도 삼키거든. 금제가 이미 풀린 상태였으니 그때 마족들을 죽였다면 고스란히 악신에게 흡수됐을 거야.”

헉, 그럼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

시벨리우스와 아스가 시기적절하게 나타나서 다행인 셈이었다. 나는 질린 기분으로 봉인의 현장을 지켜보다가 시벨리우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도 모두 굳은 얼굴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주술을 푼 거야?”

“아, 정확히는 주술이 아니라 최면을 푼 거야.”

“최면?”

영문을 몰라 하는 내게 시벨리우스가 자세히 설명했다.

“타락 천사의 주술에서 가장 주요한 요소는 신을 향한 절망과 증오의 감정이야. 평소 신과 가까웠던 사람일수록 반작용이 더 크게 일어나기 때문에 주로 제사장이나 신관을 겨냥하는 거야. 하지만 말 그대로 신과 가까웠던 존재잖아? 이들은 결코 쉽게 신을 저버리지 않아. 그래서 이 주술을 실행할 땐 보통 최면을 거는 편이야. 이미 내가 신을 증오하는 상태라고 착각하게 하는 거지.”

“……!”

“하지만 이 방식은 효과가 빠른 만큼 허점도 커. 일단 가짜로 만들어진 감정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아. 그래서 최면이 풀리면 곧바로 주술도 깨지게 되어 있어.”

“그, 그렇구나. 그런데 그 최면이란 것도 쉽게 풀리진 않을 텐데……?”

“맞아, 아마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오히려 이렇게 잘 되진 않았을 거야. 모르스라서 운이 좋은 거였지.”

“모르스?”

그러고 보니 루세프도 모르스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마족 군대를 뜻하는 명칭이겠거니 했는데 뭔가 다른 의미가 더 있었던 걸까. 의아해하고 있는데 아스가 설명을 거들었다.

“마왕을 위한 특수군을 모르스라고 해.”

“아, 친위대 같은 거야?”

“응, 비슷해. 왕을 보호하기보다는 그 힘을 대신 실행하는 진압군에 더 가깝지만. 어쨌든 모르스는 어떤 상황에 있어도 하나만은 반드시 인지하게 되어 있어.”

“그게 뭔데?”

“왕이 부르는 소집 나팔 소리. 그건 모르스의 혼에 새겨진 거라 아무도 못 막아.”

아, 그래서 그 나팔을 쓰기 위해 왕이 되어야 했던 거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특별한 구조로 이루어진 나팔인 모양이었다. 귀에 닿는 게 아니라 혼을 건드리는 방식인 게 분명했다.

아무리 강력한 최면이라도 현실을 인지하면 풀린다. 그런 의미에서 소집 나팔만큼 확실하고 깨끗한 해결 방법도 없었다. 필요한 시점에 때마침 그 나팔을 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타났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단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마왕이 모르스를 소집할 수 있는 건 임기 내에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아스가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를 여기에 쓴 셈이었다. 그것도 즉위한 바로 직후에.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탄식하니 아스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대부. 전체 소집만 못 하게 되는 것뿐이야. 원래 이차원과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면 전체를 소집할 일도 별로 없어.”

“으음, 하지만 위급 시에 쓸 수 있는 가장 큰 전력을 잃은 거긴 하잖아.”

“상관없어. 어차피 위급 상황이 일어날 일도 없을 텐데.”

“어? 그래?”

“그들 전부를 다 합친 것보다 내가 더 강하거든.”

나는 조금 묘한 기분으로 아스를 바라보았다. 소년일 때도 예쁘장하긴 했지만 지금의 아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외모였다. 눈매가 날카로운 편이다 보니 본래도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묘한 박력마저 더해져서 그 느낌이 몇 배는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그래선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와 닿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아마 전의 모습으로 이런 말을 했다면 씩씩해서 대견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왕다운 여유와 위엄으로 보여서 감탄이 더 앞섰다. 사람의 겉모습이라는 게 인상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새삼 깨달은 기분이었다.

“단지 부작용이 좀 있는데.”

“부작용?”

“모르스는 원래…… 다른 차원에서 소집되면 그 차원의 말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움직이거든.”

“……어?”

“음, 하지만 괜찮을 거야. 내가 바로 취소 명령을 내리면 돼. 근데 취소는 직접 마주 봐야 할 수 있어서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거 정말 괜찮은 거 맞는 건가?

나는 슬그머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받아낸 직후 대충 모아둔 마족들은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당장 깨어나더라도 몸 상태가 성치 않아서 뭔가 저지를 기력도 없어 보이긴 했다.

콰과강!

그때까지도 엘뤼엔은 계속 활을 당기고 있었다. 빼곡하게 꽂힌 빛줄기 때문에 검은 덩어리의 모습이 고슴도치처럼 보였다. 덩어리는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엘뤼엔이 쏜 화살이 마지막 궤적을 그리고 난 후였다. 화살이 박힌 곳마다 서로 빠르게 선이 이어지더니 화려한 문양이 완성됐다. 그러자 그 안에서 마치 그물 같은 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줄기는 덩어리의 몸을 완벽하게 감싸 채우다 못해 하늘로까지 솟아올랐다. 검은 덩어리의 미약한 저항마저 완전히 삼켜지는 순간이었다.

“됐어! 제대로 연결했어!”

루세프가 기쁜 얼굴로 외쳤다. 그러자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더니 먹구름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있는 게 보였다. 감춰져 있던 해가 드러나고 있었다. 빠르게 물러나는 먹구름 대신 하얀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태양 빛을 한가득 품은 구름 떼는 웅장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수많은 그림자가 보였다.

“……!”

처음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다시 봐도 그건 그림자가 맞았다. 그것도 분명한 사람의 형태였다. 마치 군중이 구름 속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웅성웅성웅성

동시에 귓가에서 수군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의미 없는 잡음 같기도,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떠들어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시각과 청각을 가득 채우니 그것만으로도 위압감이 상당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내 집에 멋대로 침범한 듯한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혹시 저거 신계를 비추는 거야?”

“……응, 그런 것 같네.”

하늘을 올려다본 트로웰이 조금 느린 어조로 답했다. 루세프와 엘뤼엔 역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그들 쪽에 다가갔다.

“악신이 봉인된 건가요?”

“그래, 성공했어. 시간은 벌어뒀으니 이제 소멸진만 실행하면 돼.”

루세프는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기쁨이 드러난 모습이었지만 반대로 나는 초조해졌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악신을 소멸하려면 상급신이…… 희생해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러자 루세프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었다. 엘뤼엔이 이쪽을 응시하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차마 그와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마치 시험을 견디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루세프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세프는 잠시 망설이는 얼굴을 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맞아. 그건 이미 정해졌어.”

“……! 정해졌어요? 누, 누구로요?”

루세프가 우리 쪽을 힐끔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의식하는 게 분명한 태도라 가슴 안쪽이 술렁거렸다. 진땀을 흘리고 난 직후의 불쾌하고 찝찝한, 몹시도 기분 나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어진 말에 나는 숨을 크게 삼켰다.

“아마 너희도 아는 신일 거야.”

“……!”

잠깐 암전이 된 것 같았다.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시야가 닫혔다는 착각이 일었다.

“마침 저기 오네.”

이어진 말을 듣고서야 허둥지둥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구름 사이에서 빛줄기가 쏟아지며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뜻밖에도 긴 흑발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온몸에 금가루를 흩뿌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 금가루가 봉인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아아.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조금 전 아주 잠깐 느꼈던 기분을 저주하고 싶을 만큼 비참하고 서글픈 마음이 차올랐다. 풍기는 기운도, 공기도, 향기조차도 내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죽음과 망자의 신 페르데스. 명계 소속의 상급신이지.”

라일락색을 머금은 눈동자,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칼이 한때 품었던 색을 기억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투명한 바람의 색을 지녔었다. 시린 듯 차가우면서도 청아하고 따스한 향이 풍겼다. 끝 무렵에 접어든 겨울 같기도, 새순이 싹트는 봄 같기도 했다. 내가 만난 첫 바람이었다.

소멸한 미네르바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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