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1화
“왜 그래, 엘?”
“아니…… 그게…… 그 부근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헤리카가 나온다 싶어서…….”
“헤리카?”
되묻던 트로웰이 곧 짧게 탄성을 흘렸다.
“아, 그래. 지금 스왈트 제국의 수도 지명이 헤리카였지. 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알겠어. 엘, 네 계약자가 지금 그곳에 있지 않아?”
“나, 나 잠깐만 이사나한테 갔다 올게!”
마족들이 정말로 수도로 향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중간에 길을 틀어서 다른 지역으로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헤리카로 가는 거라면? 혹은 그들이 지나치다가 황제의 군대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충돌 없이 끝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사나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적어도 피하라는 경고만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마족의 군대라고?”
바람이 불었나 싶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공간 이동하려던 것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눈앞에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고대 그리스 복식을 연상시키는 차림을 한, 훤칠하게 큰 남자였다.
“……어?”
그는 어깨에 자신보다 더 커 보이는 거대한 활을 메고 있는 모습이었다. 진주를 개어놓은 듯 은은하게 반짝이는 은발에 새파란 눈동자가 무척 강렬했다. 양쪽으로 길게 뻗은 귀는 엘프의 것과 닮았지만 그 정체가 엘프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를 보면서 처음 떠올린 느낌은…….
“유니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살짝 쳐져서 나른해 보이는 눈매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내가 유니콘인 것 같아?”
“네? 아, 뭔가 기운이 닮은 것 같아서…….”
“그야 닮긴 했겠지.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유니콘이 날 닮은 거겠지만?”
나는 살짝 숨을 삼켰다. 그 말 한마디로 남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선후 관계가 명확할 때뿐이다. 심지어 한 종족을 통틀어 단언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그들을 만든 창조신밖에 없었다.
“정의의 신 루세프.”
답은 내가 아닌 트로웰에게서 나왔다. 뒤에서 들려온 차분한 음성에 은발의 남자―루세프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갑작스러운 신의 강림도 놀라운데 그 정체가 말로만 듣던 정의의 신이라니.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다시 살펴보았다. 왜 그를 보고 곧바로 유니콘부터 떠올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시벨리우스의 은발과 푸른 눈동자가 그와 똑같았다. 그저 닮은 조합인 정도가 아니라 한 물감에서 짜낸 듯 완전히 같은 색, 같은 질감이었다. 색상만 보면 어떤 게 누구의 것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선지 분위기도 왠지 시벨리우스와 비슷한 것 같았다.
“천군 최고의 수색꾼이 나섰다는 건 아직 신계에서도 죄인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인가?”
이번에 질문한 건 엘뤼엔이었다. 그가 나서자 빙글빙글 웃고 있던 루세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처음 보는 신이네. 내가 알지 못하는 상급신은 없는데? 아, 네가 혹시 엘뤼엔?”
“그런데?”
“……허어, 겁나 잘생겼잖아. 형벌의 신이 괴물처럼 생겼다는 소문을 퍼트린 게 대체 누구야? 하긴 애초에 터무니없는 소리긴 했지. 엘퀴네스 출신은 대체로 외모가 뛰어난 편이라 그럴 리 없다 싶었거든. 이쪽은 되레 지나친 것 같지만.”
“내가 네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어야 하나?”
“음, 성격이 더럽다는 소문은 사실이구나. 뭐, 그건 나도 그럴 것 같았어. 왠지 엘퀴네스 출신들은 항상 미모와 인성을 맞바꿔 먹는단 말이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루세프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가늘어진 눈에서 뚜렷한 경계심이 읽혔다.
“너도 성격 장난 아니겠네.”
음, 그러니까 이건 해석하자면 나도 잘생겼다는 소리인 거겠지? 초면에 꽤 무례한 사람이다 싶기는 한데 악의가 느껴지진 않아서인지 그리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뒷머리를 긁다가 물었다.
“저기, 악신을 찾으려고 오신 거죠?”
“어? 어, 그렇지.”
“제가 지금 상황이 좀 급해서 미적거릴 시간이 없어요. 지금 마족들이 스왈트 제국의 수도 쪽으로 향하고 있거든요. 혹시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신가요?”
“으으음, 아무리 봐도 엘퀴네스 맞는데?”
“네?”
“아, 실례. 엘퀴네스가 정중하게 말해서 좀 당황했어.”
“……네?”
“정말 미안. 내가 선입견이 생기면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 그게 옳다는 건 아닌데 아무튼 그래서 이런 돌발 상황에는 조금 약해. 이제 이해했으니까 제대로 할게.”
조금 난처한 듯이 답하던 루세프의 얼굴이 다음 순간 바로 진지해졌다. 웃음기가 걷힌 얼굴에 날카로운 빛이 서리면서 느슨하던 기류가 단숨에 팽팽해졌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내심 놀라는 내게 그가 물어왔다.
“안 그래도 나도 그걸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왜 아크아돈에 마족의 군대가 있어?”
“아아, 카류안이 차원의 벽에 균열을 냈어요. 아스의 말로는 그가 일부러 마족들을 넘어오게 한 거라고…….”
“아, 이런. 뭔지 알겠어. 모르스를 부른 거군. 그렇지, 마왕은 그걸 쓸 수 있었지. 그걸 생각 못 했네. 근데 아스는 누군데?”
“아스모델이라고, 차기 마왕으로 유력한 마족이에요.”
“……아스모델?”
그 순간 루세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놀란 듯 돌아보는 눈동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왠지 뭔가에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거, 누가 지은 이름이야? 설마 카노스는 아니지?”
“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죽은 북공작이 붙였다고 들었어요.”
“후우, 그래. ……근데 걔가 차기 마왕이라고?”
“네, 자격은 다 갖췄다고 들었으니까 아마도요?”
“그걸 카노스도 알아? 걔 이름도?”
“카노스가 먼저 그렇게 말해 줬어요. 아스의 이름을 아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알지 않을까요?”
내 말에 그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뭐 별…… 아, 망할, 이젠 나도 모르겠다. 일단 모르스부터 어떻게든 해야겠네. 지금 놈들이 스왈트인지 뭔지 하는 제국의 수도로 가고 있다고 했나?”
“네, 정확한 목적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방향으로 가는 중인 건 맞아요.”
“흠, 내가 이쪽에 관여하지 않은 지 좀 오래돼서 최근 아크아돈의 사정을 잘 모르는데 말이야. 혹시 스왈트가 카노스를 섬기는 신성제국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게 맞는데요……?”
“맞아? 아아아― 맙소사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이런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단 말이야.”
잠시간 양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절규한 루세프가 어깨에 두른 활을 다시 고쳐 맸다. 뭔가 혼자서 결론을 내린 듯한데,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나로선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어? 아아, 지금 이 사태에선 매우 나쁜 의미지.”
대답하는 루세프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이어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혹시 타락하는 천사의 눈물이라는 주술 알아?”
“……!”
“내가 제일 싫어하는 흑주술이야. 신관들을 타락시켜서 그로 인해 파생하는 저주의 기운을 역이용하는, 엄청나게 추악한 주술이지.”
물론 알고 있는 내용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로 인해 한 가문의 가장이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는 걸 낱낱이 지켜보았는데. 아마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 중 하나일 거다.
“마족들은 마신관과 비슷한 기운을 갖고 있어.”
그래서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이 혼란스럽기만 했는데, 이제 그가 하려는 말이 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신의 가호를 받는 장소에선 그 기운이 한층 더 특별해져. 신성제국, 그중에서도 교단의 본관은 신의 가호가 가장 강하게 임하는 곳이고. 즉, 거기서 그 주술이 실행되면 진짜 신관에게 거는 거랑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지.”
“그 말은…….”
“성력을 뽑아내어 증폭할 수 있다는 거야. 게다가 한둘도 아니고 군대 규모야.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는 건데, 그 정도 힘이면 카노스의 금제도 거뜬히 풀 수 있어.”
아, 역시 그게 목적인가.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족들을 이 땅에 불러들인 건 그저 시간 끌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들을 이용해 소란을 일으켜 우리의 눈을 가리려는 속셈이라고.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쓰기 위해 마련해 둔 방편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왜 진작 저지르지 않았을까요. 금제에 걸리자마자 시도해도 되었을 텐데…….”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지.”
그때 엘뤼엔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충격적인 내용이 연달아 전해진 상황이었는데도 그의 표정은 침착해 보였다. 아니, 그만이 아니라 트로웰과 라피스도 그리 놀란 모습은 아니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다들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못한 거라고?”
“그런 주술이 대단위로 일어나면 반드시 카노스에게 들켰을 거고, 붙잡혔을 테니까.”
“아.”
그건 달리 말하면 지금은 들켜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이젠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카노스도 이길 수 있다는 뜻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좋은 쪽으로 해석되진 않았다.
“일단 난 먼저 간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루세프가 급하게 외치고 그대로 사라졌다. 바람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데 트로웰이 가볍게 어깨를 짚어왔다.
“엘, 우리도 가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스치는 생각에 멈칫했다. 왜 이럴 때 카노스가 엘뤼엔에게 남긴 메시지가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얌전히 있으라고, 그렇게 썼다고 했었지.
“…….”
짧은 순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나쁜 감정을 다 맛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소멸진에 대해서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루세프를 그렇게 보낸 게 후회됐다. 알아봐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상급신이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절대 바꿀 수 없는 전제조건인지, 그렇다면 어떤 조건으로 선별되는 건지, 혹은 이미 누군가가 선별된 건지, 엘뤼엔이 미리 지상으로 내려온 게 그것과 연관된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내용이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하지만 내가 입으로 뱉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엘뤼엔.”
“말해라.”
“안 죽을 거지?”
그러자 엘뤼엔은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잠시간 묘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곧 피식 웃었다.
“내 아들이 그러길 바란다면.”
* * *
한 교단에 교황이 나타나면 그 본관은 독립된 신성 왕국으로 인정받는다. 이때 본관이 위치한 기존의 나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나라 전체가 신성 왕국 쪽으로 흡수되거나, 그 지역만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가벼운 교류만 하거나. 대체로 후자가 압도적이었고, 전자일 때는 강제성이 작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중에 자발적으로 전자의 방식을 택해 신성제국의 된 스왈트는 다소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한 대륙을 호령하는 거대한 제국인 스왈트는 한때 솔트레테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왕국이었다. 별다른 인재도 없고 쓸 만한 자원도 보유하지 않은, 늘 이웃 나라에 속수무책으로 침략당하기 일쑤인 왕국. 무너지기 직전인 이 작은 나라의 수도에 불쑥 마신의 신전이 나타났을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신전이란 어느 날 불쑥불쑥 나타나는 존재다. 인간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 부분이었으므로 누구도 그걸 특별히 주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수도의 값비싼 땅 일부를 신에게 빼앗긴 불쌍한 왕을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당시 솔트레테의 국왕은 그것이 훗날 태풍을 몰고 올 나비의 날갯짓이 될 거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마신의 교단과 적극적으로 교류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때는 마신의 권능이 가장 강력하게 임한 시기였다. 하급 신관조차 손가락 하나로 수백의 병사를 무력하게 만들던 절대 권능의 시기. 그 힘을 등에 업은 왕국은 세상에서 무서울 게 없었다. 힘없고 볼품없던 왕국이 반대로 이웃 왕국을 위협할 만큼 성장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솔트레테 왕국은 마침내 제국으로 부상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진짜 역사적인 부분은 황제가 대관식을 치른 다음 날에 일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리디어린 마신관의 뺨에 신의 문장이 나타난 것이다. 마신의 교단에 세워진 첫 교황이었다. 이에 감격한 제국의 첫 황제는 교단의 본관과 어우러지는 곳에 새로이 궁을 짓고 마신 카노스에게 정식으로 나라를 바친다. 여기까지가 신성제국 스왈트가 탄생한 배경이었다.
……이 구구절절한 내용의 요점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마신의 교단 본관이 수도에 있다는 소리다. 그것도 황성 바로 옆. 통틀어 한 장소라고 봐도 상관없을 정도로 서로 바짝 밀착한 형태다. 지금 그곳엔 마족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는 중이고, 조금 전 그걸 막으려는 신도 향했다. 어쩌면 곧 악신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연히 그를 소멸시키려는 신들의 대처도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문제는 지금 황성 안에 이사나가 있다는 거다. 바로 얼마 전에 황제군이 내전에서 최종 승전하고 다시 복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냥 수도였어도 아슬아슬할 텐데 이젠 아예 사정권 안이었다. 심지어 가장 한복판!
카터스 황궁에서 봤던, 귀신처럼 스멀거리던 카류안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의 손에 죽은 황족의 시체가 늘어져 있던 모습도. 가슴에 구멍이 휑하니 뚫린, 그 처참한 시신의 모습이 이사나의 모습으로 바뀌려는 걸 억지로 참아냈다. 틈틈이 정령의 눈으로 살폈을 때 이사나는 잘 지내는 모습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도 멀쩡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문제가 벌어지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인간은 찰나에도 죽는다.
“이사나!”
황성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 과정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나마 확실한 건 일행에게 먼저 간다고 말하고 나섰다는 사실뿐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거의 내리치듯이 책상 위로 몸을 날린 상태였다. 바로 코앞에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이사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 손에 조금 전까지 잡혀 있던 종이가 툭 하고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