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6화
“많이 불편합니까?”
미네가 건네는 말에 아네아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자신이 가슴 부근을 문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정화진을 감당하면서 받는 몸의 부담에 무의식적으로 손이 움직인 듯했다.
“평소보다 마나 순환이 빨라진 게 조금 익숙지 않은 것뿐이야.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수면기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뀐 환경에 적응할 겨를도 없이 고생하는군요. 유감입니다.”
“그렇게 치면 미네가 더하지. 태어나자마자 악신을 수습하는 처지잖아.”
“그 점에서는 동료가 있어서 괜찮습니다.”
“동료? 아, 하긴 물의 정령왕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던가?”
“네, 그는 악신 때문에 본래 태어나야 할 시기까지 놓쳤습니다. 저보다 더 심한 피해자죠.”
물의 정령왕이 한동안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네아도 나중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잠든 사이에 세상이 멸망할 뻔했다는 덴 놀라지 않은 그녀였으나, 정령왕을 건드린 자가 있다는 사실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물며 세대교체 시기를 틈타 탄생을 늦추는 방식을 쓸 줄이야. 아크아돈에 미치는 정령계의 영향력은 물론이오, 폐쇄적인 특성까지 파악하지 않고서야 계획하지 못했을 범행이었다. 맹점을 짚었다는 점에선 여러모로 대단한 자이긴 했다.
역사적으로 악신이 되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인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정화진을 만들어야 하는 사태까지 이른 적은 없었다. 쏟아지는 평가가 어떻든, 그가 신들을 가장 크게 농락한 자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선지 순조롭게 정화진이 완성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지금에 와서도 어딘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네아, 정말 괜찮은 것 맞습니까?”
“음? 무슨 말이야?”
“또 가슴을 짚고 있습니다.”
이어진 말에 아네아는 재차 당황했다. 지적받은 대로 자신이 어느새 다시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한번 의식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적응할 거라 여겼는데 아직도 마나의 변화에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듯했다. 게다가 상태를 자각하고 나니 왠지 조금 전보다 더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천천히 파고 들어와 전신을 얽매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래, 마치…… 거미줄에 감겨드는 것 같은…….’
그 순간 머리끝에서부터 오싹한 한기가 덮쳐들었다. 아네아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아네아?”
바로 이어진 음성이 아니었다면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부축해 오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아네아는 자신이 한껏 몸을 웅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럽니까, 아네아?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미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누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아, 그건 정령왕들일지도 모릅니다. 방진 주변을 순찰하는 거겠죠. 저도 돌아보는 중이지만 주위에 문제가 될 만한 위협 요소는 없습니다.”
“아냐, 그게 아냐.”
아네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떨렸다. 부들부들 떠는 계약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미네가 아네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야.”
“내부?”
“정화진, 정화진의 연결 상태가 이상해졌…….”
그 순간 아네아의 표정이 어딘지 멍해졌다. 입술이 벌어지고 눈동자에선 빛이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심상치 않은 현상을 인지한 미네의 얼굴이 굳었다.
“아네아?”
조심스럽게 불러 본 이름에 다행히 아네아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천천히 미네를 돌아보았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사물을 처음 인지하는 듯이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이었다. 미네가 괜찮으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그녀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람의 진은 역시 미네르바와 같이 있었군.”
“네?”
“여기 없으면 섭섭할 뻔했는데 다행이야. 일이 좀 더 쉬워지려면 필요했거든.”
“……!”
이건 아네아가 아니다.
미네는 반사적으로 잡고 있던 손을 뿌리쳤다. 아니,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진득한 무언가에 붙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미네는 살짝 숨을 멈췄다. 아네아가 붙잡은 부분으로부터 스멀스멀 검은 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위기를 감지한 몸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호소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마나가 점차 역류하려는 것도 느껴졌다. 역소환의 징조였다.
‘일부러 날 노렸어.’
미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령왕의 역소환은 계약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견고히 쌓인 정화진을 무너트릴 만한 타격까진 아니었다. 물론 공격 방식을 봤을 땐 그 부분도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을 굳이 저격했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또 다른 한 부분에 대한 것이 분명한.
미네는 남은 힘을 불어 모아 아네아의 몸에 흘려 넣었다. 그러자 탁하기만 하던 아네아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다행히 아직 완전히 삼켜지진 않은 것 같았다.
“미네?”
“정신이 듭니까, 아네아?”
아네아는 잠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자신과 미네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 이게 무슨…….”
“시간이 없습니다. 잘 들으세요.”
이 순간에도 역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몸이 천천히 흩어지는 상태에서 미네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아네아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녀 역시 한눈에 미네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당신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차렸으리라 믿습니다. 정화진은 틀렸으니 포기하세요. 아니면 다시 먹힐 거고, 이번엔 저도 막을 수 없습니다.”
“미네, 이게 대체…….”
“문제가 또 있습니다. 바람의 장막이 깨질 겁니다. 묶어둔 마족의 군대가 풀려난다는 소리입니다.”
“……!”
“그자가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노리는 이유가 있겠죠. 보다시피 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괴롭겠지만 몸을 추리는 대로 대응 부탁합니다.”
“미, 미네.”
설명이 이어질수록 아네아의 안색은 더 창백해져 갔다. 경악으로 떨리는 계약자의 눈동자를 보며 미네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미네의 몸이 완전히 흩어졌다. 절규하는 아네아의 비명이 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 * *
문득 스치는 이상한 예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니, 찢어지는 소리였을까?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이상할 정도로 찜찜한 기분이었다. 본능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유카르테를 찾지 못해 초조해지던 상황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엘뤼엔과 트로웰의 힘까지 동원해서 방진 주변을 탐색해 봤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이런 때 좋지 않은 조짐을 느끼니 한껏 예민해지면서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좋지 않은 흐름이네.”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트로웰이 굳은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것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꾸만 치미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기 위해 나는 잠시간 눈을 감고 대기의 기류에 집중했다. 걸리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끄러운 흐름이 이어졌지만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엔 대기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아야 하는 게 맞았다. 미네가 일부러 비틀어둔 공간이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정령왕이라 느낄 수 있는 아주 미묘한 차이였고, 정확한 위치는 나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어딘가에서 뭔가가 가려져 있다는 것만은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걸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미네가 펼쳐둔 장막이 사라진 건가……?”
“응, 그런 것 같아.”
트로웰도 동의하는 걸 보면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정령왕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건 보통 두 가지 의미였다. 본인이 직접 거뒀거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풀렸거나. 후자의 경우엔 그 압력으로 정령왕이 받는 피해가 거의 소멸에 이를 만큼 강해야 한다. 거기까지 깨닫고 나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물론 미네가 소멸했다면 그 순간에 바로 느꼈을 테니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러나 소멸에 이를 만큼 강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도 결코 안심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미네가 힘을 거둔 거겠지?”
불안해져서 돌아보자 트로웰이 쓰게 웃었다.
“음, 그러면 좋겠는데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네. 지금 정령계를 살펴봤는데 바람의 영역이 닫혀있어.”
“그 말은…….”
“강제 회복기에 들어간 것 같아.”
왜 항상 나쁜 예감은 잘 맞는 걸까. 무심코 숨을 삼킨 채로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미네가 다치다니. 그것도 아크아돈에 행사한 영향력이 풀릴 만큼 위험한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설마 본계에서 당한 건 아니지?”
“그건 아닐 거야. 내 회복이 끝난 시점에 미네도 다시 아크아돈에 내려왔었거든. 아마 계약자와 있었을 거야.”
“미네의 계약자면…….”
“드래곤 여럿과 계약한 거로 알지만, 지금 시점에서 가 있을 만한 곳은 하나지.”
“혹시…….”
“맞아, 실버 드래곤 아네아달리스. 이번 정화진에서 바람의 축을 맡은 드래곤이야.”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미네가 다친 것도 문제인데 그 장소가 하필이면 정화진의 한 축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해석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공에서 재생 중인 화면을 응시했다. 엘뤼엔이 만들어 준 영사막은 그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 안이 비추고 있는 카류안의 모습도 아직 이렇다 할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바람의 진 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그래, 문제가 생기긴 했네. 진원은 다른 곳 같지만.”
대답한 건 라피스였다. 그가 한 말의 자세한 의미를 알고 싶었지만 질문은 이을 수 없었다. 돌아보자마자 보인 라피스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라피스?”
“아, 씨발.”
곧이어 들려오는 험악한 욕설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간 라피스가 짜증 내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가 이렇게 수위 높은 비속어를 입에 담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왜 그래, 라피스? 어디 아파?”
“가까이 오지 마.”
“뭐?”
당황해서 나는 되묻기 무섭게 나는 그대로 경악했다. 라피스가 그대로 울컥 피를 토해냈기 때문이다. 아니, 다시 보니 피가 아니었다. 그건 검은 덩어리에 더 가까웠다. 마치 갯벌의 흙을 토해낸 것 같았다.
“라피스!”
“가까이 오지 말라고!”
거친 음성에 그에게 가려던 걸음이 절로 멈췄다. 하지만 그보다도 엘뤼엔이 팔을 내밀어 내 앞을 가로막는 게 더 빨랐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라피스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트로웰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한동안 엎드린 자세로 검은 덩어리를 토하던 라피스가 진정한 건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발작적인 구토가 그치고 숨을 내쉬는 간격이 조금씩 뜸해지는 것이 느껴졌을 때쯤, 그가 긴 숨을 내쉬었다.
“막았나?”
“막았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엘뤼엔의 질문에 라피스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또한 의미를 알기 힘든 대답이었다. 잠깐 사이에 라피스는 식은땀에 절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까지 지친 그를 보는 것 역시 처음이라 나는 연신 마른침만 삼켰다. 치유술을 써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엘뤼엔이 가로막은 상태라 다가갈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라피스는 크게 분노한 얼굴이었다. 정화진의 축이 된 이후로 안 그래도 붉었던 눈동자가 더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그 시선은 정확히 화면 속의 카류안을 향해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가, 감히 날 집어삼키려고 해?”
“뭐? 무슨 소리야?”
“정화진의 방진들끼리 연결되었다고 했잖아. 그 통로를 통해서 저 새끼가 날 삼키려 했어. 아, 젠장. 아직도 역겹네.”
“……!”
라피스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입을 벅벅 문질렀다. 그가 토해 낸 검은 덩어리들은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태우는 중이었다. 저게 몸속에 들어 있었다면 라피스의 속도 멀쩡하진 않을 것이다. 역시 치료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만류를 무릅쓰고 다가가려는데 라피스가 손을 들어 보였다.
“아직 오지 마. 방어에 성공하긴 했는데 여전히 영향권 안에 있어. 잘못하면 너도 역소환 된다.”
“나도?”
“미네가 이렇게 당한 것 같아.”
해석해 준 건 트로웰이었다. 그러나 그 친절에 감동하기엔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하고 경악하는 게 더 급했다.
“자, 잠깐 기다려 봐. 지금 카류안이 정화진을 통해서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야?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해? 정화진인데?”
“그 정화진이 오염됐어. 진원지는 물의 진이고.”
“……!”
“오칼이 먹힌 것 같아.”
머릿속을 스치는 건 깔끔하고 단아한 인상이었던 파란색 머리칼의 소년이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사태가 이렇게 된 것에 원인을 제공한 이라고 했던가. 지난 일을 사과하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던 모습에선 진정성이 느껴졌었다. 그런 그가 또 원인이 되었다고 하니 당혹감이 컸다.
“예상이 어긋났어. 설마 방진 위치를 이렇게 빨리 알아낼 줄이야. 파악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던 모양이야.”
트로웰도 착잡한 표정이었다.
“조치를 해두긴 했는데 소용이 없었군.”
“조치를 해뒀다고?”
한숨과 함께 짧게 중얼거린 엘뤼엔의 말에 라피스가 눈꼬리를 사납게 올렸다.
“만일을 대비해서 결계를 쳐뒀었다. 오칼 쪽에서 외부와 접촉하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게 하는 결계였지.”
“그 빌어먹을 놈이 외부와 접촉했다는 말이네?”
“아마도.”
“그럼 그게 깨지는 순간 느꼈을 거 아냐. 왜 미리 말을 안 했는데?”
“안 깨졌으니까.”
“뭐?”
“결계를 건드리지 않고 목표물만 빼냈어. 어차피 위치를 가리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결계였으니 발각된 시점에서 예견된 일이지만.”
“남의 결계를 통과하려면 그보다 더 강해야 하잖아?”
“이제 놈의 힘이 나보다 강하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텐데?”
나는 다시금 숨을 삼켰다. 카류안이 최고신만큼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엘뤼엔보다 강하다는 뜻이라고 하니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머리로는 돌아가는 상황이 전부 분명히 인지되는데 왠지 이 모든 일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