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화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제게 시간을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오칼의 청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련한 자리는 드물게 즐거웠다. 처음엔 평범한 잡담만이 오갔으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무르익으면서부터는 점차 개인적인 이야기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엘퀴네스의 소멸에 대해 언급한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물의 정령왕이 곧 소멸한다고?”
“아무래도 시기가 그럴 때지요. 전 그의 계약자라서 좀 더 확실히 느낄 수 있거든요. 갈수록 점점 결속이 약해지고 있어요.”
“그 시기를 정확히 알긴 힘든가 보군?”
“그건 명계의 소관인걸요. 인도자의 생명부를 훔쳐보지 않고서야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가요.”
그저 가볍게 스치듯 지나간 말이라 오칼은 그게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카류안의 모습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어진 질문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혹시, 유니콘의 눈도 취급하나?”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당시엔 그저 영혼의 보석에서 유니콘의 눈으로 흥미가 옮겨간 것뿐이라고만 여겼다. 사실 유니콘의 눈은 장식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도무지 그 외의 다른 용도를 생각할 수가 없기도 했다.
물론 이미 계획을 정한 이상 그가 아니었더라도 카류안은 어떻게든 유니콘의 눈을 모았을 것이다. 그냥 처음부터 엘퀴네스의 소멸을 언급해선 안 되는 거였다. 벌써 몇 번째 차오르는 좌절감을 다시 만끽하며, 오칼은 두 팔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이번 엘퀴네스가 온화한 성격이었으니 망정이지 전대였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일이다. 진실이 밝혀진 바로 그 날에 드래곤 세계에서 블루 일족이 완전히 지워졌을지도 몰랐다. 사실 가차 없기로 악명 높은 형벌의 신이 왔다고 했을 땐 신계로 끌려가는 줄 알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그런 용건은 아니었지만, 그가 유난히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아서 지금도 얼굴이 뜨거웠다. 기분 탓인지 전대 엘퀴네스와 뭔가 닮은 느낌이라 마치 그에게 힐난을 받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좀 비슷했던가?’
오칼은 형벌의 신을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되짚었다. 이상하게 그의 외모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물의 진을 세우기 전 오칼은 형벌의 신으로부터 직접 간단한 점검을 받았다. 혹시 카류안이 뭔가 술수를 부려둔 것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한 검사였다. 그때 분명 그의 얼굴을 똑똑히 마주 봤던 것 같은데 생김새는커녕 머리 색이나 눈동자 색 같은 기본적인 특징조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형벌의 신 쪽에서 뭔가 조치해뒀음이 분명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긴 했으나 까칠하기로도 유명한 신이니 타인과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런 성격마저 전대 엘퀴네스와 비슷하다는 건 우연치고 조금 찜찜했지만.
“놈이 준 걸 먹거나 마신 적은 없었나?”
점검에서는 특별히 발견된 건 없었다. 그래도 형벌의 신은 신중했다. 그가 낮고 차분한 어조로 추궁했을 때, 오칼은 자신 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류안과의 교류는 대부분 그의 레어에서 이뤄졌다. 오칼 쪽에서 다과를 대접한 적은 있어도 카류안이 준 적은 없었다.
“놈과 거래해서 받은 마석들은 어떻게 했지?”
“전부 처분한 지 오랩니다. 지금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할 때마다 형벌의 신은 한참 동안 그를 빤히 응시했다. 진위를 가려내는 듯한 시선에 오금이 저렸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라 담담히 받아냈다. 이후에도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고, 전부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물의 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길고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만약 다른 이로 대체할 수 있었다면 굳이 이 역할에 오칼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의 진을 감당할 만한 드래곤이 지금은 그밖에 없었다. 드래곤 세계에서 물의 속성을 지닌 건 블루와 화이트 일족뿐이고, 이 두 일족은 다른 일족에 비해 전체적으로 타고나는 힘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강한 드래곤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데다가 그마저도 거의 수면기에 들어가 있었다. 현재 깨어 있는 물 속성의 드래곤 중에선 오칼이 가장 뛰어났다. 그런데도 정화진을 감당하기엔 아슬아슬한 수준이라 여기서 그보다 더 약한 이를 택하는 건 불가능했다. 잠든 이들을 깨우면 좋겠지만, 드래곤의 수면은 깨어나는 과정만으로도 몇 년이 걸린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할아버님이 수면기에 든다고 하셨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조부인 라미아스는 전대 엘퀴네스와의 계약이 끊어지는 순간을 맨정신으로 겪고 싶지 않다는 황당한 이유로 수면을 택했다. 다음 세대의 엘퀴네스가 바로 태어나지 않았을 땐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으나(온 난리를 쳤을 게 분명하므로) 지금 다시 생각하니 라미아스가 깨어 있었다면 조금 더 사태를 일찍 판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엘퀴네스를 향한 집착은 정말로 굉장했으니까. 그라면 물의 정령왕이 태어나지 않는 이유를 철저히 분석해서 어떻게든 원인을 알아내려 했을 것이다. 정화진을 만드는 문제를 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음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와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가득 밀려드는 아쉬움 때문에 오칼은 자신의 머리칼을 부여잡았다. 그때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새파란 물고기 하나가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 존재를 발견한 오칼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우나.”
우나는 라미아스가 하나뿐인 손자를 위해 만들어 준 퍼밀리어였다. 본래 퍼밀리어는 주인의 분신 용도로 쓰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오칼은 그저 곁에 두고 애완동물로 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오래 산다는 것 말고는 쓸 만한 능력도 없어서 평범한 물고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잠시 눈을 뗀 사이에 포식자한테 잡아먹힐 뻔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다행히 소화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구출해냈지만 워낙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진땀을 빼며 치료했었다.
“…….”
그러고 보니 카류안이 건네준 마석 중 하나를 우나의 치료에 썼던가?
뒤늦게 미친 생각에 오칼은 살짝 신음했다. 마석은 다양한 종류의 마법 물품 가공에 쓰인다. 마법 생물인 퍼밀리어 역시 기본적으로는 마석을 활용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부서지거나 망가지면 그만큼 보완할 마석이 필요했는데 당시 상황이 워낙 시급한 탓에 갖고 있던 마석들을 있는 대로 전부 끌어왔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때 사용한 마석 중에 카류안과 거래해서 받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았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우나가 나와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내게 영향을 미치는 종류는 아니니까.’
오칼은 불안한 표정으로 우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급속도로 술렁거렸지만 주인의 걱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물고기는 그저 태연히 주위를 유영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서 평소와 다른 부분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평소와 같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퍼뜩 미치는 생각에 오칼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일단 결계를 쳐두지.」
형벌의 신 엘뤼엔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물의 방진을 완성한 직후 모두가 뻗었을 무렵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오칼을 못 미더워 했던 것 같았다. 신력을 거의 소모해 무척 지쳤을 텐데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자 했다.
「지금부터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라. 그럼 외부에서 널 찾을 수 없을 거다.」
실제로 그 말이 떨어진 직후부터 그곳에 있던 모두가 오칼이 사라졌다고 인지했다. 지금 오칼이 이 넓은 바닷속에 혼자 남아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우나는 분명히 주인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와 연결된 퍼밀리어이다보니 같은 파장이 흘러 결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직 아무런 일도 벌어지진 않았으나 찜찜한 기분이 차올랐다. 늘 귀엽기만 하던 우나의 모습이 오늘따라 불길해 보였다. 그때 우나가 그의 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우나?”
오칼은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주인이 부르는데도 우나는 계속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 방향엔 둥글게 뭉쳐 있는 물고기 떼가 있었다. 본래 이쪽에서 서식하는 어류가 아닌데 무슨 일인지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우나는 아무런 경계 없이 물고기 떼 사이로 섞여 들어가 제 친구를 만난 듯이 노닐었다. 평소에도 흔히 보던 풍경이라 긴장하고 있던 오칼은 가볍게 실소했다.
‘나도 참 너무 예민해졌네.’
한동안 물고기들과 어우러지던 우나가 다시 오칼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다른 물고기들도 방향을 틀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마치 우나가 물고기 떼를 이끌어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오칼은 이번엔 긴장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우나는 오칼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지금처럼 물고기들을 몰고 오곤 했다. 주인을 위로하는 우나만의 방식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제 주인이 퍽 우울해 보인 듯했다.
피식 웃은 오칼이 돌아오는 자신의 애완 물고기를 맞이하기 위해 한 손을 들었다. 퍼밀리어는 곧 주인의 일부, 결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닿는 것도 상관없을 터였다. 이제 부드러운 지느러미의 감각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 차례였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과는 다른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눈앞에 들어오는 광경에 오칼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우나가 자신의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
‘……우나에게 이빨이 있었나?’
판단이 느려진 상태에서 그는 잠시 멍하니 생각했다. 물린 부근에서부터 뭔가가 빠르게 퍼지는 감각이 들었다. 무심코 앞을 보자 우나의 뒤에서 몰려오는 물고기 떼가 보였다.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 입안에 한가득 자리 잡은 날카로운 이빨들이 선명했다.
“아.”
자각과 동시에 검은 떼가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물거품과 함께 와르르 덮쳐든 지느러미가 삽시간에 시야를 삼켰다. 부글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오칼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 * *
“할버크네요.”
차분히 떨어진 음성에 지켜보던 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깨 아래로 타고 내리는 머리칼은 화려한 은색,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자리 잡은 눈동자 역시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백금으로 빚은 듯한 여인―아네아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봐도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둥근 원이 그려진 검은 석판 위에 하얀 조각 말이 놓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제발 걸리지만 말라고 기원하고 또 기원하던 바로 그 칸 위였다.
“통행세는 금화 300개입니다.”
그리고 야속한 음성이 이어졌다. 한동안 석판을 노려보던 아네아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졌어.”
“패배 인정입니까?”
“그래, 인정할게. 남은 돈을 다 끌어모아 봤자 은화 30개도 안 돼. 아까부터 나만 계속 비싼 땅에 걸리고 있잖아. 틀렸어. 난 파산이야. 더는 안 해! 못해!”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아네아는 평소의 고혹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내버린 모습이었다. 고고하기만 하던 계약자의 허물없는 행동에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무표정한 얼굴의 소녀―미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왜 이시올타에만 집중 투자하셨습니까. 분산 투자했으면 조금 더 승률이 올라갔을 텐데요.”
“저번 판에선 여기가 성지였으니까.”
그리고 그땐 이시올타를 미네가 갖고 있었다. 반대로 할버크는 아네아가 소유한 땅이었다.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아서 투자금을 몽땅 날려야 했던 땅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확히 반대의 상황이 되어 도리어 할버크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네아는 충격받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전패라니! 믿을 수가 없어. 미네는 대체 왜 그렇게 게임을 잘하는 거야?”
실버 드래곤과 바람의 정령왕. 계약한 이후로 돈독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두 존재는 인간 세상에서 유행하는 놀이를 해보는 중이었다. 넓은 석판 위에 아크아돈에 존재하는 도시 지명을 적어 둥글게 깔아 둔 다음 주사위를 굴려 나오는 숫자만큼 이동하면서 땅을 차지하는, 일종의 부동산 게임이었다. 오전부터 쉼 없이 이어지던 승부는 미네의 30전 30승이라는 압승으로 최종 마무리됐다. 전패한 아네아는 좌절했지만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한 미네는 조금도 놀라거나 뿌듯해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가 유리하다고 말했을 텐데요. 아크아돈에서 정령왕과 이런 운(運) 게임을 하려는 아네아가 이상한 겁니다. 아마 앞으로 몇 번을 하든 제가 다 이길 겁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경험하는 건 조금 다른 기분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정말 굉장해. 정령왕들끼리 게임을 하면 어떻게 될지 보고 싶어질 정도야.”
“보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프리트가 이깁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도 태연해서 오히려 아네아가 더 당황했다. 놀란 표정을 한 아네아를 보고 미네가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쉽게 대답할 줄 몰랐어. 정령왕들은 서로 우위를 정할 수 없는 관계일 텐데.”
“실제로는 그렇겠지만 놀이이니까요. 운으로는 이프리트를 이길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일 텐데요.”
“아,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의 고유 능력이 그런 쪽이었던가. 축복의 입맞춤?”
“넘치는 행운과 매력과 번영을 부여하는 능력입니다. 이프리트라면 이런 게임은 후반부에 들어와도 다 역전할 겁니다.”
그건 불의 속성을 지닌 레드 드래곤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레드 일족은 드래곤 중에서 가장 크게 번성한 일족이었고, 미룡과 영재의 배출도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 근원인 이프리트가 얼마나 대단한 운을 지니고 있는지는 굳이 시험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 이프리트가 1등이라 치고, 나머지 순위는?”
“이프리트가 편들어 준 순서대로겠죠.”
이 순간 아네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프리트와는 척을 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크아아악!」
바로 그때 잊고 있던 괴성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여전히 저 소리엔 적응되지 않는군요.”
미네가 불쾌한 어조로 중얼거렸고, 아네아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정화진이 발동하기 시작한 이후로 어느새 제법 시간이 흘렀다. 그때부터 시작된 소음은 온종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중이었다.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차단하고 싶어도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이 이런 의미 없는 게임을 시작한 것도 소음을 잊어보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가만히 앉아서 언제 끝날지 모를 정화를 마냥 기다리느니 조금이라도 즐거운 일을 해보자는 취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