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93화 (393/608)

제393화

“너무 내 응석을 다 받아주는 거 아냐? 그러다 버릇없어지면 어쩌려고.”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웃으며 말했더니 엘뤼엔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진지해져서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내가 네게 부친을 대하는 예우를 갖추라 했던가?”

“어? 아니?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버릇없어지는 게 왜 문제지?”

“어…… 그래도 아버지니까?”

“그걸 제대로 인지하고 있으니 버릇이 없어질 일도 없겠군.”

어라?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반박할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더니 엘뤼엔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이.

“난 오히려 네가 버릇이 없었으면 하는데. 자식의 응석을 받아주는 것도 아버지의 역할이지.”

“……그러지 않는 아버지가 더 많을걸. 보통은 자식이 자신에게 공손하길 바라지 않나……?”

“굴종의 강요를 훈육으로 착각하는 자들과 비교하는 건 곤란한데.”

“그…… 실제로 너무 오냐오냐해서 애들이 안하무인으로 크는 경우도 흔하고…….”

“그 또한 훈육이 잘못된 사례지. 난 분별력을 잃을 정도로 어리석은 아버지가 아니니, 그 허용선을 네가 미리 가늠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선을 넘으면 싫어할 거잖아.”

“물론 좋지는 않겠지.”

“그, 그것 봐. 그럼…….”

“하지만 그게 널 싫어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

“네가 어떤 아들이든, 내가 널 거부할 일은 없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오랫동안 숨겨온 치부를 들킨 듯이 속이 화끈거렸다.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 난 그와 단절되는 게 무서웠다. 내게 꿀처럼 달콤한 아버지라는 존재가 나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날이 오게 될까 봐.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누구에게나 자랑해도 모자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버지를 알게 되어 버렸다. 이젠 그를 만나기 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엘뤼엔은 이미 내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려 한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내겐 어려운 문제를 그는 언제나 간단히 알아차리고 쉽게 답한다. 그런데 그 말엔 놀라우리만치 강한 힘이 담겨 있어서, 내가 믿고 싶게 만들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를 수가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예상치 못한 압력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엘뤼엔이 똑바로 시선을 맞춰왔다.

“엘, 넌 내 아들이다. 날 의지하려는 마음을 경계할 필요 없다.”

“……!”

“난 네 아버지고, 넌 내게 애정을 받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걸 잊지 마라.”

가슴 속에 거품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몽글몽글 부풀어진 풍선들이 단숨에 확 팽창해서 숨을 꽉 채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플 정도로 괴로웠지만 동시에 하나도 괴롭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주 놀고들 있네.”

이 순간 라피스가 끼어들어 빈정거리지만 않았다면 좀 더 이 기묘하고도 벅찬 감정의 여운을 길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분위기 망치는 일엔 재능이 넘치는 녀석이었다. 얼굴을 찌푸리고 한마디 하려는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엘뤼엔이 그보다 앞서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악!” 하고 짧은 비명이 터지더니 라피스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무언가 거대한 압력에 짓눌린 듯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엘뤼엔이 뭔가 한 것 같았다.

“엘, 네가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정확한 예시로 들어주마. 진짜 버릇이 없다는 건 저런 거다.”

“……아하하.”

“아, 젠장! 야! 이거 안 풀어?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이거 풀어!”

분기탱천한 라피스가 악을 쓰며 고함쳤지만 엘뤼엔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무시했다. 오히려 짓누르는 압력을 더 키웠는지 라피스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더 크게 내뱉게 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트로웰은 라피스 앞으로 쪼르르 다가가 버둥거리는 그를 쿡쿡 찌르며 구경했다. 구해줄 생각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이는(오히려 대놓고 농락하는) 그의 행동에 라피스가 있는 힘껏 짜증을 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악신의 정화를 바로 눈앞에 둔,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가한(?) 광경이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무서워질 만큼.

그리고 예고된 운명의 시각이 찾아들었다.

“엘.”

날 부르는 엘뤼엔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나는 살짝 숨을 삼켰다. 그가 펼쳐둔 화면 속에서 새로운 장면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마법진이 크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새카만 전류들이 그 위에서 마구잡이로 튀었다. 그건 곧 천천히 뭉쳐져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아니, 강제로 끌어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건 무언가가 마법진에 소환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그저 덩어리에 불과하던 것이 곧 선명한 형태를 이루기까진 순식간이었다. 완성된 형체는 사람에 가까웠다. 성별을 분간하기는 어려웠으나 잠든 것인지 의식이 없는 것인지 눈을 감은 상태라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발끝까지 흘러내린 새카만 흑발이 아플 정도로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저자의 정체가 뭔지는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때 본 것은 혼에 불과했고, 지금은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이의 것이 아닌, 마족 본연의 육체였다. 외형도 같았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짙은 마기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성공했어.

오싹한 한기와 함께 손끝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있지도 않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성공하다니. 그것도 숨겨놨다는 본체를 끌어낼 줄이야. 그의 마력을 카노스가 채취해 갔을 때만 해도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지금 눈앞의 결과가 더 믿기지 않았다.

“카류안.”

나는 무심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마치 제 이름에 반응한 것처럼 그자가 눈을 떴다. 피처럼 붉은 안광이 넘쳐나듯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크아아악!

광포한 소리가 사방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 * *

강한 바람이 불면서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뿌연 흙먼지가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심하게 일었다. 카류안이 포효한 직후의 현상이라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가 있는 정화진의 중심부는 여기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다. 상식적으로는 결코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거리였다. 그러나 이 바람이 그로 인한 파장이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그가 내지른 포효가 머릿속에서 바로 울렸다. 단순히 그런 기분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정말 그랬다. 아마 나만이 아니라 아크아돈의 전 인구가 조금 전 그 포효를 들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 다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인데 이런 힘이라니. 악신이란 게 정말 엄청나긴 한 것 같았다. 그런 존재가 무력하게 잡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크아아악! 크아아아!>

일렁거리는 화면은 카류안이 몸부림치는 장면을 끊임없이 비추고 있었다. 실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에 묶인 듯한 자세였다. 저항할 때마다 더 강하게 결박하는 구조인지 점점 팔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그 부분을 중심으로 타들어 가는 듯한 현상도 함께 나타나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정화가 시작된 것 같았다.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지켜보다가 엘뤼엔을 돌아보았다.

“왠지 몸이 태워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겠지. 실제로 타는 걸 테니.”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설마 추측이 정말 맞을 줄은 몰라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화하면 다시 평범한 마족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 거야?”

“설마. 저 녀석은 저대로 죽는다. 혼까지 파괴되는 온전한 소멸이 될 거다. 단지 소멸시키기 편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정화해두는 것뿐.”

“아, 그런 거구나.”

혼까지 소멸하는 거라니. 하긴, 살려두기엔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 크긴 했다. 내가 받은 피해는 둘째치고서라도 저 녀석 때문에 죽은 사람들만 몇 명인지 셀 수가 없을 정도니까. 살해한 수법도 악랄했던 데다가 그 과정에서 신을 기만하기도 수차례였다.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었다.

“정화가 다 끝나려면 얼마나 걸릴까?”

“빨라야 반나절.”

“헉, 그렇게 오래 걸려?”

“중첩된 업이 그만큼 많다. 전부 저주와 함께 쌓인 업이라 단시간에 정화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으음, 뭔가 무시무시하네.”

“애초에 악신이란 게 그런 거다. 저주 위에 피는 역한 꽃이지. 저건 특히 태생부터 더러웠고.”

“태생이 더럽다는 건, 마족이라서 그런 거야?”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군.”

“……좋은 마족도 있는데.”

왠지 아스와 데르온이 생각나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더니 엘뤼엔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탈선한 자식을 뒤늦게 자각하고 충격받은 부모의 시선 같기도 했고(정말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사기꾼에게 당하고도 눈치채지 못한 피해자의 순진함을 가련하게 바라보는 시선 같기도 했다(역시 이런 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엘, 하나만 물으마. 넌 카노스를 어떻게 생각하지?”

“어? 카노스?”

“그래.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구분한다면 어느 쪽이냐?”

“굳이 말하자면 나쁘게 보지는 않는데……?”

“그러므로 네가 좋다는 기준은 기각 사유다.”

“…….”

카노스, 대체 엘뤼엔에게 어떤 이미지인 거예요…….

나는 조금 아련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냐하하 웃으며 발랄하게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카노스가 좀 짓궂은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좋은 점도 많은 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이렇게 얘기하면 엘뤼엔의 표정이 더 일그러질 것 같으니 참아야겠지.

어쨌거나 그동안에도 정화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카류안을 비추는 화면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라피스가 때때로 마나가 순환되는 감각을 불편해하는 것 말고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시간이었다. 단지 계속 지켜보다 보니 한 가지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뭐가 이상한데?”

“카류안이 좀…… 얌전한 것 같아.”

“저게 얌전하다고?”

라피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화면에 시선을 던졌다. 그 속에선 몸부림치는 카류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중이었다. 그때마다 우리가 있는 곳에도 크고 작은 바람이 불었다. 누가 봐도 얌전하다고 할 만한 광경은 아니긴 했다.

“아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말이야. 전에 봤을 때보다 뭔가 덜 무서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위력이 약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붙잡혀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 아냐?”

“나도 처음엔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랬는데?”

“저 녀석,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안 하지 않았어?”

그 말에 내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이해한 듯 다들 표정이 심각해졌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화면 쪽을 응시했다. 한번 깨닫고 나니 위화감의 정체가 명백하게 보였다. 소환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내 카류안은 주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을 뒤틀며 그저 막무가내로 비명을 지르기만 할 뿐, 다른 방식으로 벗어나려는 시도가 읽히지 않는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아무런 지능이 없는 짐승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를 볼 땐 늘 한 수를 감춰둔 듯한, 교활하고 위험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지금은 그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발악하더라도 저런 모습은 아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완전체는 아닌 것 같군.”

한동안 살피는 듯하던 엘뤼엔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못마땅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나는 조금 긴장해서 물었다.

“완전체가 아니라니?”

“혼을 여러 군데로 나눠서 흩어놨어. 그걸 본체로 전부 끌어모으진 못한 것 같다. 놈의 의식은 아직 다른 육체에 깃들어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안 좋은 거 아냐?”

카류안이 손을 써둔 육체가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해둔 부분이었다. 본체가 소환된 거로 해결된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나 보다. 걱정되어 물은 말에 엘뤼엔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파편은 파편일 뿐. 본체가 사라지면 함께 스러질 것들이다. 이미 본체가 정화에 들어갔으니 그쪽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상태는 아닐 테지.”

“다른 쪽에 의식이 있다면 정화진을 찾아와서 방해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렇겠지. 일단 놈의 계약자부터 찾아야겠군.”

“계약자?”

“신을 담는 육체를 찾는 건 쉽지 않다. 멀쩡히 오랫동안 사용하려면 파장이 잘 맞아야 하는데 그 조건을 맞출 수 있는 건 계약자밖에 없지. 그러니 가장 쓸모 있는 조각은 계약자에게 심었을 거다.”

계약자라면 유카르테 대공이었다. 그날 재단에서 사라진 이후로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마지막까지 그가 복병으로 남으려는 모양이다. 내 표정이 너무 어두워졌는지 트로웰이 다가와 말했다.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엘. 정화진의 위치는 가려져 있으니까. 반나절 안에 파악하는 건 불가능해. 설령 알아낸다 해도 파괴할 만한 힘도 없을 거고.”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걸까.

나는 다시금 눈앞의 화면을 응시했다. 카류안이 격렬하게 날뛸 때마다 그를 붙잡고 있는 마법진이 함께 출렁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만 보였다.

그게 단지 내 기분 탓이기만을 바랐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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