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92화 (392/608)

제392화

전투는 이사나가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난전으로 흘러갔다. 황제의 기습으로 사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도 대공군의 공격은 매서웠고, 방어는 두텁기만 했다. 그들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저항했다. 미리 성문 하나를 뚫어두지 못했다면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아군과 적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혼란한 사이에서 이사나는 요령 좋게 피해 다니며 적당히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울려 퍼졌다.

“웨칸 공작이 죽었다! 웨칸 공작이 죽었다!”

기나긴 전투의 종료를 알리는 소리였다. 잡다한 소음이 가득한 중에도 그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울렸다. 무참하게 참수된 웨칸 공작의 시신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를 베어 효시한 건 카웰 공작이었다. 사령관을 잃은 군대의 끝은 정해져 있기 마련. 대공군은 빠른 속도로 무너졌고, 순식간에 힘을 잃고 흩어졌다. 곧바로 검을 버리고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자,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자가 아비규환으로 뒤섞였다.

“와아아아!”

살아남은 황제군 사이에서 승리의 함성이 쏟아졌다. 이사나는 가만히 서서 거친 숨을 다스렸다. 몇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체력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전투 초반을 함께 한 시큐엘은 마나가 바닥이 나는 바람에 중간에 돌려보내야 했다. 그 대신 궁여지책으로 소환한 나이아스가 그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폐하, 드디어 끝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곁에 있던 친위기사들이 벅찬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들처럼 웃지는 못했다. 아직 전쟁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후련하기보다는 마음 한 곳이 납처럼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유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시작은 난전이었고, 중반부터는 전세가 압도적으로 대공군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이때쯤이면 황궁에서 지원군이 오거나 후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원군이 오지 않은 건 병력이 부족한 탓이라 쳐도, 후퇴하지 않은 건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빠져나갈 틈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웨칸 공작은 끝끝내 달아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대공이 황궁에 없는 것이다. 풍문에 의한 것처럼 황궁을 비우고 달아난 것이든, 엘이 그를 처리한 것이든. 어쨌든 대공은 사라졌다. 그가 있었다면 웨칸 공작의 성격에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단 후퇴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고, 그렇기에 이 전투가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니 몸에서 힘이 빠졌다. 끝을 알면서도 죽음을 택한 웨칸 공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제 당당히 귀성하실 일만 남았는데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폐하?”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웰 공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그는 마치 살아 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사나는 놀라지 않았다. 자신의 꼴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형님.”

“설마 이걸로 다 끝났다느니, 뭔가 허무하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폐하께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으십니다. 당분간은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바쁘실 겁니다. 각오나 단단히 하십시오.”

엄격한 충고에 이사나는 그제야 쓰게 웃었다.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친위기사들도 겨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차례 분위기가 풀어졌을 무렵이었다.

“폐하, 하늘에서 이상한 게 보입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친위기사 중 한 사람이 헛숨을 삼키더니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든 이사나도 곧 눈을 크게 떴다. 하늘 위에 황금색을 띤 거대한 선이 그려져 있었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빛의 강 같기도 했다.

“저게 뭐지?”

“글쎄? 처음 보는 현상인데.”

“혹시 저게 말로만 듣던 극광이라는 건가? 극지방에서 볼 수 있다는 신기한 빛의 현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어.”

“여기가 극지방이냐?”

“그건……아니지.”

“그럼 극광 아니네.”

“그러게.”

기사들끼리 오간 대화가 허무한 결론을 맺는 동안에도 이사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의 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다.

‘엘.’

저 기이한 현상에 그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확신에 가까운 강렬한 예감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 * *

드디어 정화진이 완성됐다.

그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한 증거가 나타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던 하늘에 점차 하나의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파란 하늘 위, 금빛의 운무가 춤추듯 뻗어 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살짝 심호흡했다. 전체적인 형태는 한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한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쪽에서 세운 4개의 틀을 하나로 잇는 고리일 것이다. 자연적으로 생길 수 있는 현상도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하나의 뚜렷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평범하게 볼 수도 없었다. 그건 압도되리만치 광대한 성력이었다.

“굉장해…….”

상급신의 신성력이 흐르는 빛의 길이라니. 웬만한 존재는 스치기만 해도 뼈도 추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지금 저 위에 먹구름을 만들면 아크아돈 전역에 성수를 뿌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과연 상급신을 전부 동원해서 만들어낸 방진다웠다. 비록 그걸 지켜보는 내 기분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정말 재수 없는 기운이네.”

때마침 옆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이 착잡한 기분에 정의를 내렸다. 정화진의 형태가 뚜렷해지는 동안에도 내게 기대 있던 트로웰이 어느새 조금 떨어진 채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역시 정화진의 기운이 거북한지 살짝 얼굴을 찌푸린 모습이었다.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사실 말이 좋아 정화진이지 이 정도면 아크아돈을 통째로 정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니, 단지 정화 정도가 아니라 불순물이 조금도 깃들지 않은 완전무결한 상태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른바 신계에 가까운 환경이 된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말하니 그저 좋은 의미 같은데, 신성한 땅엔 중간계의 생물이 살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다. 사태가 시급하니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가는 거지, 악신이라는 특수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절대 저런 게 아크아돈 상공에 뜨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다.

‘오, 나 방금 제법 정령왕처럼 생각했어.’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니. 마치 내가 이 세상의 수호자라도 된다는 듯한 태도였잖아? 퍼뜩 스치는 자각에 어깨가 저절로 으쓱여졌다. 물론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당연하게 의식해 본 적은 없었는데 조금 전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좀 멋졌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선 본성이 깨어나는 게 단점만 있는 건 아니구나 싶다.

하긴, 생각해 보면 알리사도 내가 점점 멋있어진다고 했었지. 그게 단순한 빈말이 아니었던 거였어. 후후후, 이렇게 조만간 카리스마 넘치는 물의 정령왕으로 거듭나게 되는 걸까.

“푸흡!”

그간 경계하기만 하던 부분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해보게 돼서 나도 모르게 들떴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참신한 헛소리를 한다 싶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격렬하게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돌아보니 트로웰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웃고 있었다.

“아, 역시 널 찾아오길 잘했어. 정말 넌 최고야, 엘.”

“응? 어? 갑자기 무슨……억! 호, 혹시 지금 내가 한 생각 들었어?”

그러고 보니 지금 트로웰이 평소보다 잘 들리는 상태라고 했었……던가?

머릿속에서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왜 항상 중요한 부분은 나중에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으나 이 시점에서 그가 웃을 만한 이유가 그것뿐이라 식은땀이 흘렀다. 더 비극적인 건 내가 아는 한 트로웰이 이런 점에선 무척 가차 없는 성격이라는 거다. 무슨 소리냐면, 상대방이 느낄 수치심을 생각하여 아는 걸 모르는 척해 주는 미덕과 자비로움 같은 건 한 톨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응, 네 말이 맞아, 엘. 방금 꽤 정령왕 같았어. 정말 멋있었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트로웰은 이제 대놓고 웃기 시작했다. 맑고 경쾌하게 퍼지는 웃음소리를 모르는 척 외면하며 나는 아련하게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화창하고 정화진도 무사히 완성됐건만, 쥐구멍을 찾아 온몸을 한껏 구겨 넣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슬픈 날이었다. 내가 왜 트로웰 앞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창피한 날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옆에서 라피스와 엘뤼엔이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그랬다.

그래도 트로웰을 웃게 했으니 차라리 잘된 셈인가. 나는 아직도 웃고 있는 그를 힐끔 살폈다. 기분이 좋아진 덕분인지 처음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보였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던 분위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고, 창피한 만큼 보상을 받은 기분이라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뭔가 이럴 때 쓰는 비유는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원래 뭐든 다 끼워 맞추기 나름인걸.

‘무슨 일인지는…… 아직 물어선 안 되겠지.’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호기심은 억지로 가라앉혔다. 겨우 좋아진 분위기를 다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생각이 들린 모양이었다. “물어봐도 괜찮아.”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트로웰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걱정하게 했네.”

“아, 아냐. 근데 내가 정말 물어봐도 괜찮은 거야?”

“응, 그냥 별거 아니었어. 이미 알고 있던 걸 재확인한 것뿐이거든.”

“재확인?”

“그 녀석은 내가 바라는 것과 항상 반대로 간다는 거.”

반대로 가다니. 그 녀석이라는 건 또 누구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트로웰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 이상 알려줄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보다 엘, 저길 봐.”

트로웰이 하늘을 손짓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화제를 돌리려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금빛으로 빛나던 선이 선명한 붉은색으로 바뀌어있었다.

“정화진 색이…….”

“발동했군.”

무심코 중얼거린 말을 다른 목소리가 이었다. 엘뤼엔이었다.

“엇? 정화진이 발동했다고? 그럼 지금부터 악신을 정화하는 거야?”

“그래.”

나는 다시금 하늘을 바라본 후 라피스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심장 부근을 문지르는 중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마나 순환이 갑자기 빨라진 탓이라고 했다. 정말 정화진이 발동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신들은?”

“신계에서 틀을 유지하고 있겠지.”

아, 직접 나타나진 않는 건가. 엘뤼엔이 이곳에 있으니 당연히 다른 신들도 등장할 줄 알았다. 예를 들면 카노스라든가, 마신이라든가, 최고신이라는 신 말이다. 하지만 하늘은 처음과 다를 바 없이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발동했다는 정화진도 색이 변한 것 빼고는 딱히 두드러지게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좀 싱겁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더니 엘뤼엔이 다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정화진이 발동하면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줄 알았군.”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봐.”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아니,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하잖아. 다들 그 고생을 하면서 틀을 세웠으니 뭔가 화려한 연출을 기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다못해 악신이 사로잡히고 정화되는 순간만큼은 지켜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하염없이 멀건 하늘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닭 쫓던 개가 된 것 같아.”

지금 상황을 이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는 말은 없을 거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다 같이 사방팔방 부지런히 뛰었는데 갑자기 우리만 주요 일정에서 배제된 기분이었다. 시무룩해져 있자니 엘뤼엔이 다시 웃었다.

“네가 기대하는 일들이 일어나긴 할 거다. 여기선 보이지 않겠지만.”

“어? 왜?”

“정화는 진의 한가운데서 이뤄지거든. 하지만 정화진은 보다시피 상당히 크지.”

“아!”

한마디로 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진행된다는 말이었다. 나는 정령의 눈을 통해 현장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화진의 신성력이 너무 강해서 정령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직접 가 보면…….”

“그건 안 돼. 위험해.”

조심스럽게 꺼내본 말은 제대로 끝맺기도 전에 트로웰에게 가로막혔다. 정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접근하는 게 좋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기하는 신세인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조금 시무룩해져 있는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엘뤼엔이 조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아들은 가장 쉬운 방법은 생각하지 못하는군.”

“응?”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유능한 아버지라는 거지.”

그 말과 함께 엘뤼엔이 손을 뻗더니 천천히 허공을 쓸었다. 그러자 그 손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부터 무언가 닦이는 것처럼 다른 표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영사막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놀라서 눈을 깜빡이고 있는 동안 그 안에서 정말로 뚜렷한 영상이 나타났다. 어딘지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었지만 넓은 들판이 펼쳐진 모습이었다. 그 위에 붉은색의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그게 하늘을 가르고 있는 정화진의 고리와 이어져 있다는 건 금방 알아차렸다.

“어…… 이거 혹시 정화진 한가운데야? 지금 그게 보이는 거야?”

“보다시피.”

헐, 과연 상급신.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허공을 가볍게 쓰는 것만으로 티비 같은 화면을 출력할 수 있다니. 정령은 내가 볼 순 있어도 남에게 보이게 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굉장히 신기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달리 맞춰야 할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으려니 엘뤼엔이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표정이 평소보다 좀 더 즐거워 보이는 게 왠지 기분 탓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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