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91화 (391/608)

제391화

스왈트 제국엔 나라를 수호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제국의 방패라 불리는 카웰 드 클모어 공작과, 황궁의 수호령이란 별칭을 지닌 루펠론 드 웨칸 공작이 바로 그들이었다. 한때는 한마음 한뜻으로 제국과 황실을 지키던 두 사람이었으나 제국의 후계를 정하는 시기에 이르러 서로 길이 갈라졌다. 클모어 공작은 첫째인 카일 황자를, 웨칸 공작은 둘째인 유카르테 황자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황태자가 된 것은 첫째 황자였고, 웨칸 공작은 이후로 중앙에서 밀려나 수많은 고초와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도, 틀렸다 여긴 적도 없었다.

웨칸 공작은 황제의 덕목은 곧은 정신과 선량한 인품이라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카일 황자는 그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였다. 대외적으로 카일 황자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긴 했다. 자신보다 약한 이를 돌볼 줄도 알았고 맡은 일에 책임감도 강했다. 성실하고 근면하며, 수하에 대한 상벌이 확실하고,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그야말로 황가의 피를 이은 사람다운, 이상적으로 타고난 지도자였다.―그러나 가슴 속에 새카만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는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통의 황자였으나 황제는 그의 모친인 황후보다 후궁들을 더 총애했다. 특히 유카르테 황자의 모친이자 1황비인 테미스 황비를 누구보다 극진히 여겼다. 문제는 테미스 황비가 야심가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인이 되고자 했고, 이를 위해 황후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지지 기반이 약했던 황후는 고립된 채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카일 황자는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다 지켜본 이였다. 그는 자신의 모친을 그렇게 만든 황제와 테미스 황비를 증오했다. 그 아들인 유카르테 황자는 물론이오, 다른 이복형제들에게도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황제가 되면 황실에 거센 피바람이 일어나리란 건 굳이 유추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유카르테 황자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지도자로서의 패기는 다소 부족한 편이긴 해도 머리가 명석했으며, 타고난 인품도 좋았다. 모친이 테미스 황비라는 점이 조금 흠이긴 했으나 오만한 그녀도 아들에게는 약한 편이었고, 유카르테 황자 또한 모친에게 휘둘리는 성정은 아니라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만하면 황실과 나라를 훌륭하게 이끌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예상보다 카일 황자가 더 빨리 피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에 뜻대로 가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웨칸 공작은 유카르테 황자를 더 굳건히 추대하게 됐다. 증오심에 사로잡혀 형제들의 피를 손에 묻히고 올라선 자가 어찌 올바른 지도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카일 황자는 결코 황제가 되어선 안 되는 자였다.

다행히 그들의 신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카일 황제의 치리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형장의 이슬이 되어 허무하게 사라졌을 때, 웨칸 공작은 이번에야말로 유카르테가 다시 비상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이사나 황제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그리 미안하지도 않았다. 본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가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것뿐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뿐이다. 분명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랬을 것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일까.’

웨칸 공작은 쓰고 있던 외알 안경을 벗고 피로한 눈가를 꾹꾹 문질렀다. 방 안은 그가 내뿜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꽁초가 그의 흡연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주치의는 꾸준히 금연을 권해 왔었고, 본인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여 몇 년 전부터 천천히 줄여가던 중이었다. 오늘 이렇게 많이 피운 걸 주치의가 알게 되면 크게 낙담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에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웨칸 공작은 다시금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책상에 놓인 낡은 쪽지를 습관처럼 펼쳐 들었다. 몇 번이나 접었다 편 자국이 남겨진 종이엔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건 요즘 퍼지고 있는 소문의 진위 확인을 위해 은밀히 황궁으로 보낸 수하로부터 받은 보고서였다.

<보고가 전부 사실이었음. 현재 황궁은 비워진 상태. 대공 전하의 행방은 알 수 없음.>

수십 번을 다시 읽어도 그 내용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볼 때마다 허망하기만 한 결과라는 점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증오에 먹혀 그 형보다 더한 괴물이 되었는가.”

낮게 실소한 웨칸 공작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섭정을 시작한 이후로 대공의 행보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점은 이미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대공은 날이 갈수록 손속이 잔인해졌고, 예전과 다른 성격을 보일 때가 많았다. 그가 지닌 마신의 문장이 진짜가 아니라는 건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때쯤 카일 황제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신탁이 내려진 당시 그 진위를 의심하던 마신관들이 있었다는 것, 그들이 전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는 것도. 그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이 실종되거나 망가졌다. 전부 대공의 뜻에 반하거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돌아가는 정황이 너무도 뻔하게 보였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내내 외면하고 있었다. 자신이 틀렸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지독한 일들을 겪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비틀린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선 때론 비정한 부분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 자체가 평소 자신의 신념에 모순되는 생각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지우고 말았다. 전부 거기서부터 시작된 오류였다. 그는 이제 그 오류의 대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를 견제한 탓에 조언은커녕 말을 섞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카일 황제와는 달리, 대공과 함께 한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다. 그는 대공의 최측근으로서 늘 곁에 있었고 아무 때나 독대할 수 있는 자격도 갖고 있었다. 처음 변화를 인지했을 때 외면하지 않았다면 더 깊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그가 괴물이 되어가는 걸 막지 못했다. 한때 카리브디스 공작에게 그럴 듯이 늘어놓은 훈계는 실상 전부 제가 들어야 할 말이었다. 대공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그 책임을 다할 수밖에.”

예고된 격전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가 있었다. 조금 전 황제가 보낸 마지막 투항 권고를 거절했다. 늦어도 내일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이 정해질 것이다. 이 끝이 뻔히 보이는 전쟁의 결말도, 자신의 마지막 역시.

웨칸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성벽 너머 언덕 쪽에서 황제군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몇 시간 전보다 한층 거리가 좁혀진 상태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아군 진영엔 전투를 앞둔 군대의 긴장감이 가득했다. 아직 아무도 대공의 배신을 모르는 상태였지만 진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끝은 이미 하나로 정해졌으며, 모두가 한배를 탄 운명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길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성이 모두의 무덤이었다.

* * *

웨칸 공작이 투항하지 않을 거라는 건 황제군 쪽에서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의 거부와 함께 황제군의 본격적인 진격이 시작됐다. 사실상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마지막 전투였다.

격전지인 마틴성은 수도의 최후 방어막답게 진입에 까다로운 조건을 전부 다 갖춘 요새였다. 요새란 그 자체가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시설인 만큼 안에 있는 쪽이 유리한 구조다. 여신의 딸인 알리사도 전선에서 물러섰기에 그녀가 선사하는 기적 같은 이능도 더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군의 사기는 하늘 끝까지 닿을 정도였다.

승전을 거듭하며 쌓은 자신감에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가장 큰 안정감을 주는 건 눈앞에서 진두지휘하는 황제 이사나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 황제가 뛰어난 정령사라는 사실도 밝혀진 참이었다. 그리고 이사나는 사람의 기대심리를 만족하는 방법을 잘 아는 지휘관이기도 했다.

“우와아아!”

진격의 시각, 이사나는 모두의 앞에서 시큐엘을 소환하여 그 등에 올랐다. 말 대신 신비로운 물의 늑대를 타고 이동하는 황제의 모습은 병사들이 열광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했다. 상급 정령은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힘을 소모하는 존재였다. 그런 정령을 불러내어 타고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이사나가 지닌 힘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군들의 시선에서는 이보다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한 과시인 셈이었다. 정작 그 모든 걸 계산한 장본인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쥐구멍이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런 걸 부탁해서 미안해, 시큐엘.”

―하하, 괜찮습니다.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이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원하는 방식으로 쓰십시오. 그게 왕의 뜻이기도 합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이사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부드럽게 웃었다. 이 자리에 없는 엘에게 격려를 받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시큐엘은 그의 일부이니 완전히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이사나는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성벽 위로 대공의 군대가 활을 재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화살의 범위에 닿을 거리였다. 이사나는 옆에 있던 카웰 공작과 눈빛을 교환했다. 결의에 찬 표정을 지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 작전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가자, 시큐엘!”

이사나의 외침과 함께 그를 태운 시큐엘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적군은 물론이오, 미리 상황을 고지받지 못한 아군 진영에서도 당황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성벽으로부터 무수한 화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큐엘이 성벽을 타고 오르는 것이 더 빨랐다. 적당한 곳에 안착해서 자리를 잡은 건 그보다도 빨랐다.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병사를 밀쳐서 떨어트린 후, 이사나는 차분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성벽에 있던 병사들은 모두 귀신을 본 얼굴로 굳어 있었다. 설마 황제가 단독으로 (그것도 상급 정령을 타고) 성벽을 오를 줄은 그들 중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사나는 그들 사이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웨칸 공작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오랜만입니다, 웨칸 공작. 한때 황실의 수호령이라 불리던 그대와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다니 유감입니다.”

“……못 보던 사이 신묘한 재주가 느셨군요.”

“덕분에 기연을 만났거든요. 어떻게 보면 감사할 일이네요. 황궁을 나가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테니.”

“…….”

여유로운 대답에 웨칸 공작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가 손을 들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일제히 이사나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주위에 포진한 마법사들도 주문을 마치고 시동어를 준비한 상태였다.

“폐하의 재주가 대단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혼자 올라와서 뭘 어쩌실 작정입니까? 마법사는 이쪽에도 있습니다. 폐하가 아무리 뛰어난 정령사라 해도 혼자서 저흴 다 상대하실 순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가 죽으면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목적도 전부 끝나겠지요.”

“물론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시면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신 겁니까? 아무리 연치가 어리시다지만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글쎄요. 무모하다니 잘 모르겠군요.”

이사나는 조금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혼자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사방에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냐!” 웨칸 공작이 눈을 부릅뜨고 묻자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각하! 동쪽 문이 열렸습니다!”

“뭣?”

“슈텔 남작이 배신했습니다! 그의 병사들이 동쪽 문을 부쉈습니다!”

“……!”

입을 벌린 웨칸 공작이 빠른 속도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 건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표정이었다. 이사나는 다시금 웃었다.

“어느새 슈텔 남작을 포섭하셨습니까? 저들에게 시간을 벌어 주시려 한 것이었군요.”

“네, 맞습니다.”

“설마 폐하께서 직접 미끼를 맡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한 겁니다. 전략이라는 건 상대가 알아차리기 힘든 방법을 쓸 때 효과가 가장 좋은 거 아닙니까? 덕분에 최소한의 힘으로 가장 큰 효율을 끌어낸 것 같은데요.”

때마침 그 말에 화답하는 것처럼 성벽 아래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지척에 다다른 황제군이 내지른 함성이었다. 이사나는 웨칸 공작의 낯빛이 더 굳어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지금도 보세요. 그저 성벽을 올라온 것뿐인 나를 신경 쓰느라 뒤에서 달려오는 군대의 견제는 완전히 잊고 있군요. 이쯤 되면 어느 쪽이 더 무모한 것 같습니까?”

“…….”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겁에 질린 병사 하나가 이사나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습적인 공격이었으나 이사나는 능숙하게 대처했다. 파고드는 검을 빠르게 피한 후 역으로 베어내고 찔렀다. 예상치 못한 노련한 검술에 견제하고 있던 이들이 다시금 긴장했다. 그들의 경직된 분위기를 보며 이사나가 가볍게 웃었다.

“내가 배짱만으로 혼자 왔다고 생각해서도 곤란한데요. 하지만 당신들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예상한 수준이군요. 역시 무모한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명백한 도발이었다. 발끈한 병사들의 표정이 급속도로 흉흉해지며 사방에서 살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주위를 돌아보는 이사나의 눈빛 또한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제 이 지겨운 전쟁을 끝내죠.”

그 말을 끝으로 병사들이 일제히 이사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본격적인 교전의 시작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