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90화 (390/608)

제390화

“안 돼.”

말을 꺼내기 무섭게 돌아오는 음성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는 라피스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덤덤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진짜로 화났을 땐 오히려 차분해진다. 그 증거로 눈동자에선 붉은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냉기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툭하면 사고만 치는 주제에 또 어딜 싸돌아다니겠다고? 너 나랑 뭐라고 약속했어?”

“정화진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여기 있겠다고…….”

“그럼 네가 지금 얼마나 터무니없는 요청을 한 건지도 알겠네.”

“그렇기야 하지만 말이지…….”

그 약속을 할 땐 단단히 화가 난 라피스의 마음을 달래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이사나나 알리사 쪽의 상황을 살피거나 관여하는 건 조금 불편해지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실제로도 아직까지는 그렇게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물의 방진의 진행이 생각보다 더 지지부진한 것 같았다. 원래 예상하던 기간에서 이틀이 더 지났는데 지금쯤이면 완성했어야 하는 진이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참여하지 못한 게 원인인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합류하고자 한 건데 라피스가 그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내가 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속을 것 같냐?”

“그건 일부러 속인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한테 말할 틈이 없었다니까.”

“웃기지 마. 좌표 계산 없이 공간 이동도 할 수 있는 녀석이 내게 잠깐 들를 틈이 없었다고? 지금처럼 내가 반대할 게 뻔해서 일부러 피한 거겠지.”

“음…….”

“거봐. 아니라곤 못 하겠지? 아무래도 네 뇌리에는 내가 꽤나 질척거리는 놈으로 박혀 있는 모양인데, 원하는 그대로 해 줄게.”

“……이왕이면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쪽으로 가 주면 안 될까.”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거기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면 네가 라피스가 아니라 라피스 가죽을 뒤집어쓴 다른 놈이겠지. 지극히 예상한 결과이다 보니 발끈할 여력도 없었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자니 라피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꽤 익숙한 얼굴이라 대충 그 의미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 태진이도 곧잘 내게 저런 표정을 짓곤 했었다. 해석하자면, 네놈이 뭘 잘했다고 한숨이냐는 표정이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고 보면 태진이도 내가 하려는 일마다 반대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타입이었지. 그런데 여기선 라피스가 그러다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혹시 내게 친구의 잔소리를 끌어내는 맥 같은 게 흐르나? 아니면 잔소리쟁이를 친구로 두게 되는 운명이라든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런 표정이야?”

“내가 무슨 표정인데?”

“뭔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

“……정말 그럴지도.”

멍하니 대답한 말에 라피스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동정심을 유발하려 한다고 여긴 듯했다.

“원할 때마다 바꿀 수 있으면 애초에 약속이란 걸 왜 해?”

“그래서 양해를 구하는 거잖아.”

“그렇게 치면 난 안 된다고 양해를 구하는 건데?”

“……야.”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돼. 네 마음 편하게 하자고 더는 싫은 걸 맞춰 줄 생각은 없어. 그건 지금까지 해 준 거로도 충분한 것 같거든.”

묘하게 반발심이 생기는데 할 말은 없었다. 그동안 라피스가 많이 양보하고 참은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본인은 팔자에도 없던 마나 기둥 신세가 돼서 꼼짝도 못 하게 됐는데 그동안 다른 사람들끼리는 어울린다면 서운하기도 하고 화도 나겠지. 굳이 갈 필요도 없는데 부러 가려는 상황이니 더 못마땅한 것도 당연했다.

“이번엔 네가 양보해. 정령왕 역시 언령의 힘을 지닌 존재. 그 입이 담는 말은 의미가 있어야 해. 넌 분명 내 곁에 있겠다고 했어. 약속을 지켜.”

텄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절대 물러설 녀석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근데 표현은 좀 정확히 해 주지 않을래. 그냥 앞으론 혼자 다니지 않고 너랑 같이 다니겠다고 한 것뿐이거든.”

“그게 그 뜻이지.”

“아냐, 좀 많이 다른 느낌이야. 삼계탕에 치즈를 끼얹으면 전혀 다른 맛이 되잖아?”

“삼…… 뭐?”

“조리법이 중요하다는 거지.”

진지하게 강조하는 나를 라피스가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애매한 표정이었는데 이번에도 의미가 쉽게 읽혔다. 대체로 과거 태진이 저런 표정을 지었을 때 하던 말은 늘 하나였다.

‘저건 대체 커서 뭐가 되려나.’

……사람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같으면 의기투합한다던데. 왜 이 순간에 그 말이 떠오르는 걸까. 태진이와 라피스는 전혀 다른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둘이 만나면 의외로 잘 지낼지도 모르겠다. 그리운 친구의 행적을 이런 걸로 떠올리게 되다니 뭔가 서글퍼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건 함께한다.’

화가 난 라피스를 달래기 위해 무심코 한 약속은 그대로 내 발목을 잡았다. 딱히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건 무료한 일이고, 라피스는 필요한 말을 할 때가 아니면 과묵한 편이었다. 그래서 난 그를 방치해 두고 아예 대놓고 일행의 상황만 살폈다.

아직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카터스 제국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해 가는 중이었다. 그날 세리엄이 펼친 공간 마법은 그들을 다시 아카데미로 데려다 놓았다. 단체를 데리고 멀리 이동할 만큼 그의 마나가 넉넉하지 않은 것도 있고, 등잔 밑이 어둡다는 점을 고려한 시도인 것도 같았다.

황제가 건재한 상태였다면 조금 위험한 시도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황궁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현장에서 우리가 사라진 걸 금방 알아차렸고 사태가 어느 정도 소강되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라온휘젠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 상황을 수습하고 황제와 형제들이 전부 사망했음을 세상에 공표했다. 이황자가 황제와 형제들을 전부 살해했고, 도주하려는 그를 라온휘젠이 처리한 거로 무마한 듯했다.

살아남은 계승권자가 라온휘젠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순리로 그가 다음 황제가 됐다. 제국의 사람들에겐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황제가 바뀐 셈이었다. 그 탓에 불필요한 잡음도 상당히 따라붙었다. 특히 이황자를 지지하던 귀족들의 반발이 컸다. 그들은 부친과 형제들을 죽인 진짜 패륜아는 황태자고, 그가 자신의 죄를 이황자에게 덮어씌운 거라고 주장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이들은 모두 황태자 편이었으니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의심이었다.

아마도 이 부분은 그의 치리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터였다. 모든 정황을 다 밝히면 떼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려면 부친이 저지른 짓을 전부 다 밝혀야 한다. 라온휘젠은 그러느니 차라리 꼬리표를 달고 사는 쪽을 택한 듯했다. 아버지의 불명예를 짊어진 이사나처럼.

어쨌든 라온휘젠은 바로 대관식 준비에 들어가는 듯했다. 세리엄도 다시 황실 수석 마법사로 복귀할 예정인 것 같았다. 이사나의 친위대는 상황 보고를 위해 중간 접선 장소로 떠났고, 알리사는 아셀의 집으로 갔다. 처음엔 라온휘젠이 황궁에서 머물 곳을 내주려 했는데 아셀 쪽에서 결사반대해서 막았다. 마침 그 상황을 볼 수 있었는데 제법 재밌었다.

“알 만하신 분이 어디서 치사하게 가로채기를 시도하십니까?”

“어디가 가로채기지? 네 낡고 좁은 집보다야 황궁이 더 쾌적할 테니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것뿐인데.”

“제집도 충분히 쾌적합니다만? 그리고 편의 제공이라니 웃기지 마십쇼. 차기 황제가 대관식을 치르기 전부터 궁에 들인 여성 귀빈이라니. 이번 반려성이 알폰프 제국에서 태어났다는 건 황궁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노련한 시녀들이라면 알리사 님의 고향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고요. 주변에서 어떻게 나올지 뻔히 다 아실 분이 그렇게 말 하시다니. 양심은 좀 안녕하신지?”

“……아셀. 이사나 황제가 네게 뭘 약속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몇 배로 더 잘해 주겠다. 스왈트가 아니라 카터스를 위해 일해라.”

“죄송하지만 푯말 잘못 찾아가셨습니다. 제가 알리사 님을 보호하려는 건 어느 제국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알리사 님을 위한 거지요. 알리사 님을 일방적으로 끌어가려 한다면 그게 이사나 폐하의 뜻이라도 막을 겁니다.”

“마치 그녀의 보호자라도 되는 듯이 구는군.”

“비슷합니다. 시벨 님이 보호하는 분이니까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시벨 님은 제 가족이니, 그분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엔 제가 그분의 일을 대행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알았으면 썩 꺼지시죠.”

“황제한테 꺼지라니 경을 치고 싶나?”

“실례했습니다. 굽어 살펴 꺼져 주십시오.”

“아셀 너…….”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두 사람의 표정은 무척이나 험악했는데, 그에 비해 위기감이 없었다. 라온휘젠이나 아셀이나 서로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런 것 같았다. 그 대화가 알리사가 뻔히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긴장감에서 멀어지게 했다.

“알리사, 필요하면 언제든 궁에 머물러도 좋다. 근위대의 보호를 받게 해주겠다. 카터스 황실 근위대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이다.”

“지금 스피어의 딸이라 불리는 분에게 뭘 자랑하시는 겁니까? 알리사 님 혼자서 그 근위대를 다 상대할 수 있다는 건 알고나 하시는 말입니까?”

“……황궁엔 나와 세리엄도 있다.”

“이제부터 정무로 바빠지실 분들이 그런 걸 호언장담하시는 거 아닙니다. 알리사 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시간은 제가 제일 많습니다. 저와 함께 수도 구경이나 다니시죠.”

두 사람의 공방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점점 더 유치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그 광경을 어이없어하며 바라보던 알리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보고 흐뭇해하는 두 남자를 보며 나는 대충 그들의 의도를 깨달았다. 스왈트에서 내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후로,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시벨리우스는 알리사의 보호자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많이 불안할 거다. 아마 그래서 두 사람은 그녀의 곁에 자신들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본인들의 마음을 다잡는 효과도 노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니 찜찜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겠지. 마지막 상황이 워낙 다급하기도 했으니 낙관적으로 해석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럴 때 내가 가서 다 설명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냐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보니 상황을 살필 때마다 한숨만 늘어갔다. 거리가 가까우면 시큐엘을 소환해서 대신 소식을 전하기라도 할 텐데. 하필이면 화산지대가 너무 오지에 있어서 제한 범위 밖이었다. 이건 라피스의 마나가 아무리 풍부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속상한 기분에 라피스를 다시 노려보았더니 눈을 감은 채 벽에 기대어 있던 그가 바로 눈을 떴다. 들켰나 싶어 움찔하다가 들키면 또 어떤가 싶어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내 쪽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됐다.”

“어? 뭐가 돼?”

“물의 진.”

“……!”

“지금 완성됐어. 느껴져.”

라피스가 자신의 가슴 부근을 느릿하게 쓸었다. 신기한 걸 만지는 듯 이채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라피스에게선 보기 드문 표정이기도 해서 나도 덩달아 신기해졌다.

“어떤 느낌이야?”

“몸속에서 거대한 통로가 연결된 느낌? 또 하나의 길이 열린 것 같아. 방진 역할 따위 희생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성장할 수 있겠어.”

“헐, 넌 지금도 너무 강하잖아. 근데 거기서 더 성장한다고? 그쯤 되면 아예 신급 아냐?”

“글쎄, 하지만 여러 가질 시도해 볼 순 있을 것 같아.”

그게 뭐냐고 물어보는 것도 겁난다. 왠지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외면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일 것 같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물의 진이 완성됐다는 건 엘뤼엔도 자유가 됐다는 말이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이쪽으로 건너와 주지 않으려나?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엘뤼엔인가 싶어서 돌아본 곳엔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새카만 머리카락과 초콜릿처럼 달콤해 보이는 피부가 보였다. 빛을 머금은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어? 트로웰?”

“안녕, 엘.”

그는 역소환 된 후로 대지의 영역에서 잠들어 있던 트로웰이었다. 생각보다 휴식이 길어지는 것 같더니 드디어 안정된 모양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그 앞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나왔구나! 몸은 좀 괜찮아?”

“응, 보다시피 멀쩡해. 혹시 걱정했어?”

“당연하지. 얼마나 놀랐다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된다. 눈앞에서 부서지듯 사라져 가는 모습이라니, 가급적이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이렇듯 멀쩡한 모습을 다시 보니 감동스러울 정도다. 반가움을 드러내고자 한껏 웃어 보이는 나를 그가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데 왠지 모르게 몸이 저절로 긴장했다. 평소에도 신묘한 광채의 금안이 오늘따라 더 짙은 기운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늦지 않게 잘해 낸 것 같네.”

“앗, 혹시 내 과거가 읽혔어?”

“응.”

“헉, 정말로?”

설마 정말 그렇다고 할 줄 몰라서 숨을 크게 삼켰더니 그가 피식 웃었다.

“원래 이렇게 잘 보이진 않는데 오랜만에 영역에서 쉬어서 그런가. 감각이 좀 예민해진 것 같아. 평소보다 더 잘 보여.”

트로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나른했다. 아직 잠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꾸벅거릴 듯 멍해 보이는 얼굴이 여느 때의 그에게선 볼 수 없는 느낌이라 왠지 조금 귀여웠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지나치게 잘 보여서 짜증 나.”

“어?”

“덕분에 싫은 것까지 알아버렸어.”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왔다. 묵직한 감각과 함께 밀려드는 기운에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지독하게 쓰리고 아픈 기운이었다. 가슴이 온통 저릴 정도로.

“엘, 내게 다시 눈물 좀 빌려줘.”

“……트로웰?”

“울고 싶은 기분인데 혼자서는 울 수가 없어. 네 도움이 필요해.”

꺼질 듯한 음성에서 희미한 울먹임이 느껴졌다. 불안한 기분에 나는 다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전에도 한 번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워낙 특수한 경우였고, 그때와 같은 일이 또 있을 리가 없다. 맞아, 그럴 리가 없잖아. 트로웰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그의 기분을 정확히 알지도 못했지만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라피스를 돌아보니 그 역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트로웰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쪽도 준비가 끝났나 보네.”

“저쪽이라니?”

“신계 쪽. 차원의 벽 너머로 형성된 힘이 우리가 만든 틀과 이어지기 시작했어.”

“그렇다는 건…….”

“때가 이르렀다는 뜻이지.”

그 순간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친근할 정도로 익숙해진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울림. 들을 때마다 내게 애틋함을 안겨주는 음성이었다. 라피스의 뒤쪽에서 나타나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트린, 빛을 담아낸 듯한 백금발이 보였다.

“엘뤼엔……!”

“그래, 아들.”

담담한 화답을 듣자 가득 차오르던 불길함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엘뤼엔은 내게 가볍게 미소 지어 보이곤 라피스처럼 하늘을 응시했다. 따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기묘한 흐름이 느껴졌다. 형태는 보이지 않았는데 거대한 무언가가 머리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촘촘한 그물망이 펼쳐진 것 같기도 했다.

“정화진이 완성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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