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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389화 (389/608)

제389화

“그러셨군요. 악신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원하시는 대로 인세를 경험해 보시다 오실 수 있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평온한 대답에 아레히스는 오히려 더 씁쓸해졌다. 명계는 무척이나 바쁘게 돌아가는 세계 중 하나고, 상급신인 페르데스는 중책이 예정된 바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이지만 이런 막중한 직위를 뒤로한 채 인세로 들어갔다간 뒤탈이 생길 게 뻔했다. 안타까워하는 그의 표정을 본 페르데스가 피식 웃었다.

“지금도 딱히 나쁘진 않습니다. 신이 되었기에 내 친구들을 도울 수 있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아, 그건 그렇습니다. 정화진을 만들고 계시죠. 그건 상급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또 만들러 가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레히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정화진이 상급신이란 상급신을 전부 빼앗아 간 탓에 명계의 행정 업무는 마비되기 직전이었다. 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로서, 그는 눈앞에 유능한 상급신을 두고서도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게 몹시 억울했다. 페르데스가 눈에 띄게 침울해진 그를 위로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아,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럴 겁니다. 이제 이틀 정도면 마무리될 거라는 예측이…….”

그 순간 페르데스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서로 마주 보는 두 신이 눈빛이 변했다. 주위에 기묘한 기운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짙은 의지를 담은 무언가가 장막처럼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이건…… 라데카 님의 기운입니다.”

얼굴을 굳힌 아레히스가 하는 말에 페르데스 역시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신의 기운이 다른 차원까지 장악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페르데스는 눈앞에 성큼 다가온 끝을 예감했다.

“운명의 시계가 움직이겠군요.”

* * *

거대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늘 닫힌 상태를 유지하는 문이 열리는 건 오직 누군가가 들어갈 때와 나올 때뿐이었다. 개방된 틈새에서 자욱한 안개가 퍼져 나오기 시작하자 지켜보던 이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늦게 그들 속에 합류한 페르데스와 아레히스 역시 초조함을 숨기지 않은 상태로 문 쪽을 주시했다.

이윽고 희뿌연 공간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모두가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기다리지 않은 순간이었다. 점차 뚜렷해지는 이는 한눈에 봐도 체형이 작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짙은 색의 검은 피부였다. 그에 비해 온 온몸을 풍성하게 덮어 내리고 있는 머리카락은 진주처럼 희었다. 잘 빚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소녀는 공중에 살짝 떠 있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라데카.”

먼저 움직인 건 가장 앞에 나와 있던 천신 이오웬이었다. 그러자 그 음성에 반응하듯 잠겨 있던 소녀의 눈꺼풀이 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드러나는 눈동자에 주시하던 신들이 모두 숨을 삼켰다. 본래 라데카의 눈동자는 빛을 흩뿌리는 것 같은 금색이었다. 그 신비로운 금안이 지금은 완전히 탈색한 것처럼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다.

“큭……!”

시련의 방은 검을 더 날카롭게 제련하는 것과 같다. 그 안에서 운명의 여신은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상태였다. 눈을 뜬 그녀에게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엄청난 무게가 위에서부터 강제로 짓누르는 것 같은 압력이었다. 그나마 상급신들은 의연히 참아냈으나 다른 이들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일부는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났고, 몇은 아예 주저앉기도 했다. 잘 견뎌내는 이들도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레히스는 마지막에 속하는 부류였다. 손의 떨림을 숨기지 못하는 그를 보고 페르데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레히스, 괜찮습니까?”

“예, 괜찮…….”

대답하려는 의도와는 다르게 아레히스는 끝말조차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안타까워진 페르데스가 그를 도우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아레히스에게 닿는 존재가 있었다. 붕대가 감긴 팔이 받치듯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페르데스의 눈이 커진 것과 마찬가지로 아레히스의 입도 벌어졌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는 놀라서 경직된 두 신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희멀건 한 피부에 그만큼이나 흐릿한 회색빛의 머리칼을 길게 땋아 내린 남자였다. 얼굴을 거의 다 가리다시피 한 안경 속에서 날카로운 눈동자가 얼핏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이런, 이런. 여긴 중급신이 놀러 올 곳이 아닌데요. 어느 멍청한 자들이 상황 파악도 안 하고 와 있나 했더니 하필이면 거기에 내 아들이 있군요.”

“섀넌 님.”

당황한 페르데스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읊었다. 그녀에게 살짝 눈인사를 보낸 섀넌이 다음으로 아레히스를 응시했다.

“명계는 어쩌고 네가 여기 있습니까? 일 안 하고 농땡이입니까? 그동안 담이 많이 커졌습니다?”

“아버지.”

“네. 네 아버지 맞습니다.”

느긋한 음성이 돌아오기 무섭게 아레히스의 안색이 깨끗해졌다. 페르데스는 직감적으로 섀넌이 무언가 조치했음을 깨달았다. 정작 아레히스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더는 압력이 느껴지지 않는지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해본 그가 섀넌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설마 아버지가 하신 겁니까?”

“그럼 제가 아니면 누가 한심한 아들을 도울까요?”

“……웬일로 이런 선심을 다 쓰십니까?”

“저런. 아버지가 아들을 돕는 건 당연한 거죠. 그걸 왜 선심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네요. ……라는 건 당연히 그냥 해 본 말이고. 명색이 내 아들이라고 알려진 애가 이렇게 다 지켜보는 곳에서 빌빌거리고 있으면 창피하니까요.”

냉정한 대꾸였지만 불안하게 일그러져 있던 아레히스의 표정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리기까지 했다.

“하아, 깜짝 놀랐잖습니까. 하마터면 사망부를 확인해 볼 뻔했습니다.”

“이해를 못 하겠네요. 갑자기 그걸 왜요?”

“인도자 애들이 그러는데, 사망부에 이름이 오르면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한다더군요.”

“너 죽을 때 된 것 같다는 소리를 꽤나 재밌는 방식으로 말하네요, 내 아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도 섀넌은 그리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흡족하다는 얼굴이라 페르데스는 잠시 이 부자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을 느꼈다. 그러자 그녀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느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신경 쓰지 마. 쟤들은 항상 저래.”

“아, 그렇…….”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페르데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바로 옆에 어느새 훤칠한 키의 남자가 서 있었다. 새카만 흑발과 그 머리카락보다도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신―마신 카노스였다.

마찬가지로 뒤늦게 그를 인지한 신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통 라데카에게 쏠려 있던 시선이 어느새 그에게 집중된 걸 느낄 수 있었다. 정화진을 만드는 동안 자주 마주치는 상황에서도 이건 늘 변하지 않는 점 중에 하나였다. 신들은 최고신들을 다 어려워하는 편이지만(오히려 천신은 편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았다) 마신의 경우엔 주변을 장악하는 힘이 완전히 달랐다. 그는 어디에서든 나타나기만 하면 가장 이목을 끄는 신이었다. 그게 그가 지닌 마성의 특성 탓인지, 무한에 가까울 만큼 강대한 힘 때문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으나 여러모로 눈에 띄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본인은 워낙 익숙해서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여, 라데카.”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상큼하게 무시한 그가 발랄한 동작으로 라데카 쪽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오웬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으로 내려서는 중이던 라데카가 그 모습을 확인하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나오자마자 꼴 보기 싫은 얼굴을 보니 눈이 썩는 기분이구나. 내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야.”

고운 얼굴에서 나올 거라곤 생각할 수 없는 독설에 페르데스가 다시금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신들도 흠칫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창 자잘한 말다툼을 이어가고 있던 섀넌과 아레히스조차도 조개처럼 입을 다무는 순간이었다. 불안한 기류가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이는 오직 카노스가 유일했다.

“이야,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장장 2천 년 만의 재회인데 표현 한번 너무하네. 나처럼 잘생긴 신을 보면 눈이 정화되지 썩을 리가 있나. 신력이 강해져서 눈동자 색이 변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시력이 나빠진 거구나?”

“헛소리.”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걱정해서.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네가 꽤 보고 싶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린 집어치워라. 2천 년인지 3천 년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동안 만나지 못한 건 네가 날 피해 다녔기 때문이잖느냐. 내 과일을 훔쳐간 건 충분히 반성했느냐?”

“라데카, 네 말투 오랜만에 들으니까 더 웃긴 것 같아.”

“……그 주둥이는 자살하기 위한 주둥이냐?”

라데카의 하얀 눈동자에 불이 일자 카노스는 항복하듯이 두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물론 얼굴은 능청스럽게 웃고 있어서 누가 봐도 장난에 불과한 동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라데카가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네가 내 과일을 훔쳐 그자에게 전해 주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저런, 시련의 방이 많이 힘들었어, 라데카? 운명의 여신답지 않은 말을 다 하네. 그게 기폭제가 된 건 사실이겠지만 정말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물론 그건 처음부터 불화의 씨앗이었지. 그러니 더욱 조심했어야 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건 없었잖느냐?”

“그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지.”

“그걸 말이라고…….”

“정말인데. 네 과일은 보고 싶은 욕망을 비추기도 하지만, 잊힌 과거를 비추기도 하잖아.”

가벼운 말투의 대답에 라데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까지 카노스가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던 그의 내심을 읽은 탓이었다.

“그래서 후자에 더 기대를 걸었느냐?”

“원래 착한 아이였으니까.”

“……너도 가만 보면 참으로 미련한 성격이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라데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처음과 같은 적대감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불편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오웬 역시 모호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카노스는 그저 묘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라데카가 다음 순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 그저 피하지 못할 흐름인 거겠지.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모두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게 되었구나.”

그녀의 한마디로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외면하고 있던 때가 다가왔음을 인지한 신들이 다들 얼굴을 굳혔다. 은백색으로 빛나던 라데카의 눈동자가 기이한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다. 라데카가 그 상태에서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우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그 앞으로 거대한 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계 침은 마지막으로 돌렸던 위치에서 멈춰 있는 채였다. 덩달아 주위의 시간도 멈춘 듯했다. 생기마저 사라진 듯한 공간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라데카는 불편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신들을, 그중에서 상급신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곧 시계를 역순으로 돌릴 것이다. 한번 돌린 후엔 다시 물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전에 마지막으로 묻겠다. 자원할 이가 있느냐?”

“…….”

“…….”

상급신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때 그들 틈에서 손을 드는 이가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한 루세프였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뭐지?”

“악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희생된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식인 거지?”

“그건 제가 대답하죠.”

섀넌이 손가락으로 안경을 곧추세우며 나섰다. 담담한 표정의 그를 아레히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희생하는 상급신은 악신을 소멸하는 진을 직접 만들게 됩니다. 소멸진 자체가 상급신 하나가 모든 힘을 전부 다 쏟아부어야 만들어지는 구조입니다. 그 진을 만들고 나면 자연스럽게 소멸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소멸하는 신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악신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낸 후유증으로 신의 자격이 박탈되고 평범한 혼이 됩니다. 그리고 그 혼은 신일 때의 기억은 지워지고 윤회의 고리에 갇혀 영원히 인세를 걸을 겁니다.”

“그 말은…….”

“중간계에만 속하게 된다는 것이죠. 어떤 형태로든 대차원엔 들어오지 못합니다.”

“어떤 형태로든……이라는 건, 죽은 후에 명계로 회수되지도 않는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사망한 즉시 윤회가 저절로 이뤄질 겁니다.”

모든 설명이 끝난 후엔 조금 전보다 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니 보상을 받아도 모자를 텐데 오히려 저주를 받는 구조였다. 아무리 사명감이 투철해도 선뜻 내킬 수가 없었다. 치러야 할 대가가 가혹한 건 아니었으나 그리 가볍지만도 않았다. 신적에서 벗어나고 싶은 신들은 많았지만 다들 잠시간의 일탈을 바라는 것이지 그 상태를 영원히 바라진 않았다. 하물며 명계조차 돌아올 수 없다면 대차원의 흐름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소리였다. 과거 알고 지내던 신과 교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신들 쪽에서도 그를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각해진 상급신들을 천천히 돌아보던 섀넌이 다시금 안경을 곧추세웠다.

“사실 전 그냥 라데카가 시계를 역순으로 돌리길 바랍니다.”

“아버지!”

기함한 아레히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그를 눈동자만을 굴려 힐끗 살핀 섀넌이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듣기에도 내키지 않는 조건에서 자원자를 받는다는 건 그 자체로 압박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운명의 시계는 공평하죠. 시계가 내세운 조건은 사실 해석 관점에 따라서는 상급신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항이고요. 끝내 누가 되는지 알 수 없는 게 서로 마음 편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게다가 지금 우린 정화진을 만드는 중입니다. 어차피 운명의 시계가 발동하든 자원자가 나타나든, 정화진이 성공하면 전부 없던 일이 될 겁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정화진에 사활을 거는 이유죠. 반드시 성공할 테니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창백하게 굳어 있던 아레히스도 겨우 안정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한층 차분해진 분위기 속에서 모두의 동의를 읽은 섀넌이 라데카를 돌아보았고, 라데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린 그녀가 시계추에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요한 공간에서 가느다란 여성의 음성이 울렸다. 쏟아지는 시선을 가른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이는 페르데스였다. 섀넌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페르데스, 할 말이 있습니까?”

“미리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운명의 시계를 돌리는 건 반드시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까?”

“그건 아니다.”

당황한 섀넌을 대신해서 이번엔 라데카가 대답했다.

“일주일 정도는 유예기간을 둘 수 있단다.”

“그렇다면 잘됐군요. 정화진의 완성도 이제 이틀 정도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시계를 돌리는 걸 그 뒤로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운명의 시계가 내세운 조건, 섀넌 님은 상급신이 전부 해당한다 하셨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라는 마지막 조건은 더 그렇습니다. 저만 해도 신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신의 업무를 시작하지 않은 상태라 사제와 신도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어버이가 된 적이 없지요.”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싶었다. 엘뤼엔을 이은 새로운 상급신이 태어난 거로구나. 한데 그대가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더 반길 일 아니냐?”

의아하게 바라보는 라데카의 시선에 페르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조건을 명확하게 만족하는 이들 중에 제 친구들의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만약 운명의 시계가 그들 중 하나를 소멸로 인도한다면 친구들은 많이 슬퍼하겠죠. 그 모습을 보는 게 저는 더 괴로울 겁니다. 가능하면 그 결정은 최후로 미루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기서 희생자를 정해야 할 텐데?”

되묻는 라데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이미 짐작한 표정이었다. 동시에 불길함을 감지한 아레히스가 다급히 그녀를 향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페르데스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에 단호한 결의가 서렸다.

“제가, 소멸진에 자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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