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신족만 상대하는 거였다면 내 천사들이 그렇게 다 죽지는 않았을 거야. 대전에 참가한 신들도 사실 다 고만고만했어. 그 흐름을 일방적으로 바꾼 게 너와 네 룬이었지.”
“그, 그건…… 그건 전쟁이었고…… 난 신계의 수호지기로서 천마대전을 수습할 의무를…….”
“알아. 그러니 봐준 거잖아. 그래도 빚은 빚이지. 너도 그래서 한동안 날 피해 도망 다닌 거 아닌가?”
“…….”
들끓었던 기세가 한순간에 파시식 식었다. 마신이 그때 일을 언급하면 루세프는 늘 할 말이 없어졌다. 마족이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사실 그들을 도발한 건 신족이 먼저였다. 마신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마왕에게 지나가던 신족 하나가 버림받은 자들이라며 조롱한 것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본계였던 신계에서 쫓겨나 새로운 세계로 몰아넣어진 탓에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평소 혈기 왕성한 종족에겐 불씨가 되기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런 사정을 다 알면서도 루세프는 마족에게 잔혹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계의 수호지기로서 마족은 단지 습격자에 불과했으니까. 신계에 속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마족의 창조주이기도 한 마신에게는 달갑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마신은 방관을 택했다. 그가 대전에 참여하지 않는 게 최고신들과 약속한 마계의 존속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마신의 천사들이 나섰고, 첫 번째 천사인 유비아만을 제외하고 모두 희생됐다. 이후로 카노스는 다시는 천궁의 방에서 천사를 데려오는 일이 없었다. 루세프는 기운을 누그러트리면서도 불만스럽게 카노스를 응시했다.
“근데 봐줬다고 하긴 좀 그렇네. 이미 룬의 혈통에 저주를 내렸잖아.”
“그랬던가?”
“뭘 모르는 척이야? 원래 룬은 여러 혈통에서 전반적으로 태어나게 되어 있었어. 기존 룬이 자격을 포기하거나 잃으면 그 힘은 자연스럽게 다른 이가 룬이 되어 넘어가는 형식이었지. 그런데 네가 그걸 하나의 혈통으로 고정하고 그게 끊기면 다시는 룬이 태어나지 못하게 해 놨잖아! 심지어 룬의 힘도 다른 종족에게 넘어갈 수 있게 해 놓고! 그래서 유니콘들이 룬의 핏줄에 집착하다 못해 감시까지 하게 되고!”
“대신 마계 쪽에도 그만큼 불이익을 줬지. 번식을 완전히 내 통제하에 두고 태어나는 수를 제한하기 시작했으니까. 게다가 그 문제라면 해결할 방안도 같이 준 것 같은데?”
“해결 방안? 네가 언제 그런 걸…….”
영문을 알지 못해 눈을 깜빡이던 루세프가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 저주를 내리면서 카노스가 한마디 덧붙인 적이 있었다.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두 종족에게 내려진 저주가 모두 풀릴 거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조건이라는 게 굉장히 황당해서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지웠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성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룬이 마신의 피를 마시는 거?”
“잘 아네.”
“그걸 말이라고 해? 네 피를 마시게 하라는 소리잖아! 그걸 순순히 내주기는 할 거고? 널 덮치기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어머나, 덮칠 거야? 그냥 달라고 하면 주려고 했는데.”
“못 믿어! 아, 아니, 게다가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걸 줘도 어떻게 마시게 하냐! 유니콘에게 상성이 완전히 다른 마신의 피는 독이야! 그게 죽으라는 소리랑 뭐가 달라?”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그것 봐! 일부러 약 올리려고 하…… 엉?”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치던 루세프가 이어진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눈을 깜빡거렸다.
“룬을 마족으로 만들면 되거든.”
“그게 되겠냐!”
“응, 돼.”
“뭐?”
“우리 정의의 신께서는 마족이라면 치를 떨게 싫어하니 관심도 없겠지만, 마족에게는 계약이라는 체계가 있어. 계약자가 누구든 자신의 기운을 공유할 수 있지. 그래서 계약자 역시 마족에 가까운 성질과 힘을 지닐 수 있게 돼.”
“……! 즉, 그건, 그러니까…….”
“룬이 마족과 계약만 하면 되는 거였어.”
“허.”
맥이 풀린 루세프가 신음을 흘렸다. 마신이 내린 저주는 오랜 세월 그를 번민하게 한 고민거리이자 근심의 대상이었다. 유니콘은 본래 번식력이 약한 종이다. 그 와중에 룬이 태어나는 혈통까지 하나로 고정되면서, 한 세대에 고작 한두 명에 불과해진 룬의 핏줄이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그걸 지켜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거였다고?
얼빠진 그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던 카노스가 그에게 성큼 다가가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당황해서 시선을 내린 루세프는 제 손에 쥐여진 것에 눈을 깜빡거렸다. 카노스가 건네준 건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 안에 황금 가루를 섞은 듯한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루세프는 본능적으로 그게 마신의 피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거…….”
“내 마음이야.”
“미친……. 장난하지 말고. 이걸 네가 지금 나한테 준다는 건…….”
“눈치챘어? 응, 맞아. 네 룬이 내 마족이랑 계약했거든. 그것도 장래가 촉망한 차기 마왕이랑.”
“……허?”
어이없어서 헛숨만 삼키는 루세프를 향해 카노스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지난 인과가 드디어 끝났다는 거지.”
“웃기지 마! 내 룬이 누구 맘대로 마족이랑! 차기 마왕이고 뭐고 본 적도 없는 놈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냐! 게다가 아직 시벨은 나랑 교감도 안 해본 아이라고! 길을 만들어 두지도 않았는데 성질이 달라지면 내가 그 아일 찾는 데 또 시간이 걸린단 말이야!”
“그건 네 사정이고.”
“안 돼! 이건 무효야! 난 이 계약 반대야!”
“마신의 은총을 그렇게 거절하면 못 써요. 저주가 풀리는 게 싫으면 피를 안 주면 되잖아? 그래 봤자 이미 한 계약이 해지되진 않을 거지만.”
“야이@$$%E^;ㄱ;마!!”
충격에 사고가 정지한 루세프는 마지막에 가선 제대로 된 언어도 구사하지 못했다.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면 할수록 카노스의 얼굴에 피어난 웃음꽃은 점점 더 진해져 갔다. 그 광경을 난처한 얼굴로 지켜보던 섀넌이 문득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카노스.”
“음? 아아.”
그와 같은 것을 느낀 카노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만연하던 미소는 어느새 완전히 걷힌 채였다. 신계 전체를 아우르는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처참하도록 슬프고, 아프도록 비장하며, 아주 짧은 희극 아래 더없이 처연한 흐름을 담은 기운.
운명의 여신 라데카의 기운이었다.
* * *
공간 안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보이는 거라곤 끝을 짐작할 수도 없는 지붕까지 한없이 쌓아 올린 선반과 그 위를 빈틈없이 채운 유리병들뿐이었다. 각기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유리병 속엔 희미한 빛 덩어리가 하나씩 담겨 있었다. 이 안을 밝히고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그 기묘한 공간 속 한가운데 한 사람이 고요히 서 있었다. 칠흑처럼 짙은 흑발을 길게 늘어트린 여인이었다. 물끄러미 선반을 응시하는 여인은 건조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조각처럼 단아한 이목구비와 부서질 듯이 가녀린 체형, 신비한 기운을 풍기는 보라색 눈동자, 피부는 지나치게 희어 마치 달빛이 스며든 듯했다.
“페르데스 님.”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여인―페르데스가 유리병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흑발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망자와 안식의 신인 아레히스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닙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저 유리병 안에 있는 게 다 혼인가요?”
“네, 맞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기력을 잃어 윤회가 불가능한 혼들을 재생시키기 위한 공간입니다. 악신에게 힘을 빼앗긴 혼들도 전부 이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페르데스는 다시금 주위를 돌아보았다. 유리병 속의 빛은 모두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약하기만 했다. 그때 아레히스가 들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 부탁하신 장부입니다.”
“아,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렇지 않아도 찾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상급신분들도 막 신이 되신 직후엔 다들 한두 명씩 찾아보시더군요.”
장부를 넘겨받은 후에도 페르데스는 그걸 바로 열어보지 않고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제11열. 1945043019530305번.> 표지에 낙인처럼 새겨진 붉은 글씨를 손끝으로 살짝 쓸었다. 그렇게 몇 번 배회한 끝에 그녀는 곧 장부를 펼쳐 들었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채워진 글자들이 나타났다. 그건 한 영혼에 대한 상세 기록이었다. 혼의 첫 생성 시기와 첫 삶, 윤회 때마다 부여받은 새 이름과 그 삶의 기록. 각 삶의 기록 말미엔 사망 후 재판을 받은 결과도 함께 적혀 있었다.
장부의 주인은 처음은 무던한 삶으로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업이 쌓이면서부터 전반적으로 타락의 길을 걸어갔고, 갈수록 재판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 부근쯤에서 페르데스는 자신이 찾던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아인 이드리스.’
이름을 읊은 것만으로 아주 쉽게 지난 기억이 따라붙었다.
<미네르바. 당신을 은애합니다.>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스치는 것 같은 착각에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가슴을 처음으로 두드렸고, 이후로도 몇 번이고 수없이 파문을 일으켰던 목소리였다. 잊으려 해도 완전히 지울 수 없었고, 지금도 보기 싫은 흉터처럼 남은 기억이다. 신이 되면서 불필요한 기억을 제거할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련 따위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지웠어야 했던 걸까. 페르데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걸 느낀 아레히스도 대강 상황을 짐작한 표정을 지었다.
“장부를 찾으면서 저도 잠시 살펴봤습니다만, 그 혼은 짊어진 업이 꽤 많더군요. 특히 아인 이드리스의 삶에서 상당한 과업을 쌓았습니다. 염옥에 얼마간 수용되어 있었고, 석방 후로는 비슷한 윤회를 반복하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자가 미네르바 때의 계약자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것에 페르데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히스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과거 미네르바가 폭주할 뻔한 사건은 명계에서도 꽤 주목했던 일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시기 전후로 유난히 ‘길을 잃은’ 혼들이 제자리를 찾은 기록이 많았기 때문이다. 명계에선 그게 미네르바와 관련된 현상일 것이라 여겼다. 끝내 아무런 연관성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한동안 연구 대상이었던 탓에 아레히스는 본의 아니게 그 내부 사정까지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왜 폭주의 위기에 이르렀는지. 당시 인간 계약자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서도.
“혹시 그를 구제하고 싶으십니까?”
“…….”
“특별히 악질인 혼은 아니나 정령왕의 저주가 각인되어 있다시피 합니다. 아마 소멸에 이를 때까지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하지만 염라 소속이신 페르데스 님은 혼을 임의로 처리할 권한이 있으시니 원하시면 그를 구제하실 수 있긴 합니다.”
“아뇨, 아닙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페르데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립다거나 연민이 일어서 찾아본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문득 생각나더군요.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실례지만, 그가 무슨 말을?”
<당신은 너무 인간을 몰라서 답답합니다.>
다시금 귓가에 선명한 음성이 울렸다. 이따금 교감이 어긋났다고 느꼈을 때, 그쪽에서 투정을 부리듯 중얼거리곤 했던 말이었다.
<당신의 인간적이지 않은 부분이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자꾸 확인하게 해요. 그게 날 얼마나 슬프게 만드는지 모르겠죠. 당신은 끝내 날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그는 수많은 거짓말을 입에 담았지만 그 말만은 맞았다. 그 말대로 그녀는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전부 다 진심이었는데 알아보지 못한 것에 불과한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는 전부 의미 없는 고민일 뿐이다. 페르데스는 그런 이야기들을 입에 담는 대신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레히스.”
“네, 페르데스 님.”
“난 사실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아레히스의 얼굴이 뻣뻣해졌다. 페르데스는 미처 몰랐지만, 아레히스에게 그 말은 가벼운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저 이번엔 사기 안 쳤습니다.”
“예?”
“페르데스 님이 명계로 오셨을 때부터, 당신에게 신이 되시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솔직히 다 말씀드렸습니다.”
“네, 물론 기억합니다……?”
“아, 역시 그렇죠? 죄송합니다. 잠시 무거운 기억이 떠올라서 그만.”
헛기침을 내뱉은 후 아레히스는 묘한 얼굴로 페르데스를 바라보았다. 혼란을 수습하고 나니 비로소 눈앞의 상황이 보였다. 설마 그녀도 신이 아닌 인세의 길을 택할 생각이었던가. 엘뤼엔도 그렇지만, 페르데스 역시 누구보다 신에 어울리는 존재였기에 그 결정이 상당히 뜻밖이었다.
“왜 인간이 되고 싶으셨는지 여쭤 봐도 됩니까? 그들의 삶이라면 정령왕 시절에 이미 충분히 지켜보셨을 텐데요.”
“지켜보는 거로는 부족하더군요. 그 삶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제약이 많지 않습니까?”
“바로 그래서입니다. 제한이 있기에 그들은 늘 치열하죠.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아레히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의 삶은 매우 온건하고 잔잔하다. 정령계 안에 있으면 일상에 변화를 겪을 일이 없었다. 마음먹어 이루지 못할 것도 없고, 좌절하거나 한계에 부딪힐 일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변화를 겪어가며 분주히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매력적으로 보일만 했다. 아레히스도 가끔 비슷한 기분을 느꼈기에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알았다. 신의 삶도 바쁘긴 하지만 아무래도 유한에 속한 인간의 세계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직접 그 처지에 서서 그들을 이해해 볼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아가 보고 싶기도 했죠. 그래서 ……엘이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땐 조금 부럽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엘은 그녀가 평소 동경하던 모든 요소를 다 지니고 있었다. 정령왕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인간적인 면모들과 사고방식. 적극적으로 다른 이의 삶에 개입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들과 교감하는 모습에선 활기와 생명력이 넘쳤다. 똑같이 인간에게 소환되었지만 그의 유희가 시작부터 자신과 다른 양상을 보인 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자신은 유희를 하면서도 본인이 정령왕이라는 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다른 정령왕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엘만은 달랐다. 그는 정말 인간 같았다. 그는 유희가 아니라 진짜 인간의 사회에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섞여 있었다.
“그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