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87화 (387/608)

제387화

조금 기억을 되짚은 끝에 데르온은 그의 이름을 뱉어냈다. 지금껏 딱히 부를 일이 없다 보니 그 이름을 입에 담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상대도 조금 생경하다는 듯이 웃었다.

“빨리도 알아채네.”

“네가 어떻게 여길……. ……! 혹시 엘 님이 오신 건가?”

“아니, 나 혼자 왔는데.”

능청스러운 대꾸에 데르온은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상식에 유니콘인 시벨리우스가 자의로 그들을 찾아올 일은 없었다. 게다가 밖은 바람의 장벽이 펼쳐져 있는 상태였다. 짧은 고민 끝에 그는 가장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다.

“엘 님이 우리 상황을 알아차리셨군. 그래서 널 대신 보낸 건가?”

“왜 뻔히 보이는 상황을 모르는 척할까? 그렇게라도 외면하고 싶은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닌데, 정말 나 혼자 왔어. 엘은 이쪽 상황은 아직 모르고 있을걸?”

“대체…….”

정체를 확인한 후 한층 흐려졌던 경계가 다시 강해졌다. 데르온은 다시 검을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노골적인 경계를 보고서도 시벨리우스는 그저 웃기만 했다.

“엘 님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너흴 찾아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

“무슨…….”

“괜찮아, 괜찮아. 안 잡아먹어. 그냥 편히 있어. 어차피 그 꼴로는 뭘 하려고 해도 별로 소용없을 텐데.”

데르온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왠지 공격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단지 그가 친숙한 존재라는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거역하기 힘든 느낌이 들었다.

‘뭐지? 마치 몸이 멋대로 경계를 푸는 것 같은…….’

데르온이 제 상태에 당황한 동안 시벨리우스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스쳐 지나갔다. 완전히 무방비하게 보냈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가 경악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땐 시벨리우스는 이미 고치를 이루고 있는 아스를 살피고 있었다. 잠결에도 낯선 기척을 느낀 아스가 가늘게 눈을 떴다. 흐릿하게 응시해 오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시벨리우스가 빙긋 웃었다. “그래, 그래, 착하다.” 달래는 듯한 음성이 이어지고, 아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빠르게 잠에 빠져드는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그 모든 광경을 데르온은 그저 아연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흠, 시도는 좋았는데 아스의 힘이 너무 크다 보니 데르온의 보조가 불안정하구나. 이대론 몸이 힘들기만 할 거야. 이건 사실 경험의 문제지. 데르온, 좀 더 분발해야겠네.”

“이봐. 대체…….”

“좋아. 모처럼 왔으니 이건 내가 도와주도록 할까.”

데르온이 나서기도 전에 시벨리우스가 아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어루만졌다. 마치 기특한 아이를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 순간 이어진 광경에 데르온이 숨을 삼켰다. 아스의 주변으로 실타래가 확 뻗어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곧 아스의 모습이 그 안에 완전히 파묻혀 사라졌다. 지금까지 듬성듬성 몸이 드러났던 것과는 다른 완벽한 고치 상태였다. 데르온은 분노하려던 것도 잊고 그저 멍해졌다. 아스가 완벽한 성장에 들어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네 기운은 갈무리해도 돼. 지금부턴 이 공간을 지키는 것만 신경 쓰면 될 거야.”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힘들군. 유니콘이…… 이런 것도 가능한가?”

“일반적으로는 안 될걸. 기본적으로는 안에 뭘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이건 지금만 되는 특별 한정 서비스.”

“무슨…….”

그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다 말고 데르온이 얼굴을 굳혔다. 시벨리우스에게서 다른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기운이었다. 심지어 익숙하기까지 했다. 당연했다. 그의 주군인 아스의 기운이었으니까.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스와 계약했어.”

“뭐?”

“내가 일방적으로 진행한 거라 가계약이긴 하지만. 효과는 비슷하긴 하니까 얼마간은 쓸 만하겠지. 나중에 아스가 저 안에서 나오면 정식으로 계약하게 해 줘. 아무래도 그게 더 안전할 거야.”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싫은 표정 하지 마. 아스에게도 나쁜 일만은 아냐. 지금까지 유니콘과 계약한 사례가 없으니 너흰 그 가치를 잘 모르겠지만. 이거 여러 가지로 의미가 꽤 크거든. 상황이 좀 복잡한데 나머진 얘한테 들어. 알아서 다 설명할 거야.”

“얘라니…….”

“너희가 알고 있는 이 몸의 본 주인. 난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하거든. 너무 귀찮게 불러대서 더 시간을 끌 수가 없네.”

찌푸리고 있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데르온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장난스럽게 응시하던 시벨리우스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닿은 손길을 타고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선명하고도 확실한 존재감이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 머리 색도 제법 잘 어울리네.”

“아…….”

“잘해 주고 있어서 고맙다. 넌 앞으로도 잘해 낼 거야. 가장 기특한 아이야.”

“아아……!”

희미하게 웃던 시벨리우스가 곧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이 휘청이며 그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데르온은 서둘러 무너지는 몸을 받아냈다. 의식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그는 의식이 없는 시벨리우스를 끌어안은 상태로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카노스 님.”

* * *

“돌아오셨습니까.”

귓가에서 울리는 잔잔한 음성에 카노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뚜렷해진 시야 속에 황금과 흑요석으로 꾸며진 지붕이 보였다. 그의 궁처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는 침실 안이었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이가 머리를 조아렸다. 살짝 결을 내어 양쪽 어깨로 늘어트린 머리칼은 선명한 산호색, 눈동자는 피처럼 붉었다. 화사한 외모의 여인은 흑단처럼 새카만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다녀왔어, 유비아.”

빙긋 웃으며 건넨 말에 유비아라 불린 천사가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사무적인 건조한 태도였지만 그에 익숙한 카노스는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오, 강신은 처음 해 봐서 몰랐는데 이거 신 쪽에도 부담이 좀 있네. 몸이 나른해.”

“신력 회복을 위해 선과를 구해 오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야.”

“그러시다면 거두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신들이 방문해 계십니다.”

“아아, 그렇겠지.”

카노스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왕왕 떠들던 소리 때문에 돌아온 참이라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바깥에 있던 이들이 흠칫 놀라며 우르르 물러섰다. 그들 모두 유비아처럼 검은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제 신을 대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겁을 먹은 기색이었다. 이 또한 익숙한 카노스는 그저 무심히 그들 사이를 지나쳐 걸었다. 그 뒤를 유비아만이 고요하게 따랐다.

“카노스!”

홀로 내려서기 무섭게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단을 내려서는 그를 발견한 두 신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섀넌과 루세프, 그들의 이름을 속으로 한 번씩 읊은 카노스가 빙긋 웃었다.

“거참 시끄럽네. 내 이름이 카노스인 건 나도 잘 알아. 그렇게 지겹게 부르지 않아도.”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이미 잘 알지 않아? 루세프가 이미 다 설명했을 것 같은데.”

“너 이 자식!”

루세프의 두 눈에서 분노가 불꽃처럼 튀었다. 바로 덤벼들어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그런 그를 섀넌이 붙잡아 강제로 멈추게 했다.

“안 됩니다! 진정하세요, 루세프!”

“이거 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기분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 자식이 나와 내 아이의 첫 교감을 망쳤어! 안 그래도 첫 접신이라 몸에 부담이 클 텐데 다른 신이라니! 심지어 신 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인 기운을 가진 마신이!”

루세프는 거침없이 분노를 쏟아냈다. 이렇게 머리끝까지 화난 게 얼마 만인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상황만 생각하면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시벨리우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얼마나 기뻤던가. 몇 번이나 접선을 시도하고 문을 두드려도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초조했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경계가 흐려지며 시벨리우스의 무의식이 천천히 그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 마음에 쌓인 분노와 원망이 녹아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채운 봉인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이제 그와 처음으로 교감할 차례만 남아 있었는데. 그랬었는데!

“그 천금 같은 순간을 저 녀석이 강탈했다고!”

자신을 똑바로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며 카노스가 가볍게 귀를 후볐다. 그 태연자약한 행동에 루세프는 더 광분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야! 강신이 필요했다면 다른 때 해도 됐잖아!”

“글쎄, 다른 때는 오지 않았을걸.”

“뭐?”

“그때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카류안이 그 몸을 차지했을 테니까. 네가 먼저 들어갔더라도 힘으로 밀어버렸겠지. 설마 네가 지금의 그 아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가혹할 정도로 적나라한 진실 앞에 루세프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는 대신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사실 진짜 문제로 삼을 부분은 따로 있었다. 한층 흥분을 가라앉히자 비로소 본래 추궁해야 할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세프는 살짝 심호흡한 뒤, 카노스를 응시했다.

“내게 시벨의 존재를 알려준 거, 일부러냐?”

“흠?”

“넌 ‘죄인’이 다른 육체를 찾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놈의 눈에 능력을 각성한 시벨은 최상의 먹잇감이 될 게 뻔했지. 지금은 룬을 봉인한 상태로 두는 게 더 안전했을 거야. 그런데도 굳이 나한테 그 아이를 알려줘서 내가 접선하도록 만들었지. 그래서 결국 봉인이 풀렸고. 죄인이 발견하도록 만들었어.”

섀넌이 눈을 크게 뜨고 카노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평소 나쁜 장난을 할 때면 늘 짓는 표정이었다.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처음부터 다 계획한 거지?”

“맞아.”

“카노스!”

기함한 섀넌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런 걸 긍정할 바엔 차라리 대답을 외면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길길이 날뛰는 루세프가 걱정되어 따라온 참인데 상황이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루세프 역시 욕설을 내뱉었다. 분노로 머리가 하얗게 비어 가는데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솔직히 아무것도 몰랐다고 할 자신은 없었다. 내내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다. 마신 카노스는 그리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대체로는 짓궂었으며, 타인에게 무심했고, 냉정하게 표현하면 잔인한 편에 속했다. 그는 늘 쉽게 남을 농락하고, 누군가의 간절함을 무기로 이용하는 신이었다. 그런 그가 굳이 시벨리우스의 생존을 순순히 알려준 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걸 무시하고 있던 건 자신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토록 행방을 찾았던 아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대체 왜…….”

“숨어 있는 카류안을 끌어낼 방안이 필요했어. 지금 그 아이는 신에 가까우니 ‘문’이 열리면 느낄 거고, 그럼 반드시 노리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지. 설마 그 아이 눈앞에서 각성할 줄은 나도 몰랐지만.”

“그 아이, 그 아이. 아까부터 거슬리는데, 죄인을 친근하게 부르는 건 그만둬.”

으득 깨문 입술 사이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뚜렷하게 노려보는 눈동자에서 새파란 안광이 일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악신의 각성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으니까.”

“루세프, 그런 말이 어딨습니까.”

자극적인 도발에 당황한 섀넌이 급히 루세프를 제지했다. 정작 카노스는 흐트러짐 없이 웃는 얼굴 그대로, 그가 쏟아내는 분노를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에 루세프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뭐라고 말 좀 하지?”

“어라, 대답이 필요한 거였어?”

“너…….”

“대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카노스가 나른하게 두 눈을 휘어 접었다.

“카류안의 뿌리가 마족에 있는 한, 그 아이를 뭐라고 호칭하건 그건 내 마음이고.”

“…….”

“내가 악신을 도왔다면 이미 모든 게 다 끝났겠지. 이렇게 멍청할 정도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이 당연한 사실을 굳이 짚어야 하나?”

루세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분한 얼굴로 다시금 주먹을 움켜쥐는 그를 섀넌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점점 험악해져만 가는 분위기가 해소된 건 뜻밖에도 카노스에 의해서였다. 그가 지나가듯이 하는 말에 한없이 날을 세우던 루세프의 기세가 멈췄다.

“네 룬과의 첫 교감을 빼앗은 건 유감이긴 한데. 내게 진 빚을 갚았다고 생각해.”

“……뭐?”

“우리, 해야 할 정산이 있었잖아?”

“무슨…….”

루세프는 벌렸던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카노스 뒤에 묵묵히 서 있는 검은 날개의 천사―유비아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날개는 마신의 천사들이 지니는 고유 상징이고, 마신의 궁처에 있는 천사들은 전부 같은 색의 날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자세히 파고들어 가면 그들을 진짜 마신의 천사라고 할 수 있을지 애매해진다. 이곳의 천사들에게선 카노스의 기운만이 아니라 다른 기운도 함께 느껴졌다. 그가 다른 신들에게서 강제로 강탈해 온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마신이 강제로 불어넣은 신력으로 날개 색은 바뀌었지만 그들의 본 주인은 여전히 따로 있었다.

그러나 유비아만은 달랐다. 그녀에게선 마신의 고유 기운만이 느껴졌다. 이 궁처 안에서 마신의 신력으로만 탄생한 순수한 그의 천사는 오직 유비아 하나뿐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한때는 유비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12명의 상급 천사들이 존재했다.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건 천마 대전을 거치면서였다.

“그때 네가 죽인 내 천사와 마족들이 몇이었더라?”

“…….”

빙긋 웃는 얼굴에 루세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천마대전은 신족과 마족의 전쟁이었다. 당시 모든 신족이 마족을 사살하는 데 참여했지만 마신의 천사들만은 마족을 보호하려 했다. 다른 신족의 시선에선 자연스럽게 그들 역시 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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