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2화
“네가 감히 짐을 막았느냐! 알마스너까지 네 편을 들고 나서니 이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이냐! 네가 진정 반역이라도 하려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폐하께서도 제가 반역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계시는군요.”
“……네놈! 네가 감히 혈육들을 다 죽이고도……!”
“전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뻔뻔한 거짓말을!”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뭐라?”
“대체 유카르테 대공에게 무엇을 약속받으셨습니까? 그게 폐하의 자식들을 다 죽여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였습니까?”
“네놈!”
황제가 다시금 라온휘젠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거친 힘에 딸려 들어가면서도 라온휘젠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태자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 네가 지금 짐을 능멸하려 하는구나!”
“전 합리적인 질문을 했을 뿐입니다. 또한 이 모든 사태에 연루된 자로서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만하구나, 태자. 짐은 네게 그런 자격을 내린 적이 없다!”
“아뇨, 폐하께선 답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고, 거짓은 영원히 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전 폐하가 정도를 지키시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많은 황비를 들이신 것도 분란을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하심이 아니셨습니까?”
“…….”
“폐하께서 갑자기 이러시는 걸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하신 겁니까? 그래서 원하는 걸 얻기는 하셨습니까?”
“……원하는 것을 얻었냐고?”
그 순간 황제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그래, 그건 정말 기괴한 빛이었다. 왠지 한기가 일어 무심코 팔을 문지르다 얼굴을 찌푸렸다. 온도를 느끼지 못하는 내가 한기라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황제는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라온휘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멱살을 쥔 손 하나를 풀더니 라온휘젠의 얼굴을 건드렸다. 정확히는 다쳐서 피가 흐르는 부분을. 갑자기 다가오는 손길에 당황한 라온휘젠이 굳어 있는 동안 황제는 세상 다정한 얼굴로 그의 피를 닦아냈다.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이어지는 다음 광경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가 제 손에 묻어난 피를 혀로 살짝 핥았기 때문이었다.
“나쁘지 않군. 꽤 쓸 만한 마력이야. 다들 실망스러웠는데 네겐 기대해도 되겠어.”
“……폐하?”
“원하는 거라……. 원하는 건 아직 얻지 못했지. 부족하니 네가 보탬이 되어주면 좋겠구나. 날 도와주겠느냐?”
“……무슨…….”
라온휘젠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선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거의 반사적으로 달려나가 황제를 밀쳐낸 후였다.
“맙소사, 폐하!”
“폐하!”
밀려난 황제가 뒤로 넘어지면서 사방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악한 근위대가 나를 견제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든 소리였다. 근위대장 역시 내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사방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가운데, 난 라온휘젠 앞을 막아선 채로 황제를 노려보기만 했다. 얼결에 보호받게 된 라온휘젠이 당황해하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황제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황제는 주저앉아 있는 상태에서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암살시도니 시해범이니, 한참 동안 꽥꽥거리던 다니멜과 이황자가 그를 부축하려 했다.
“건드리지 마요!”
빠르게 건넨 경고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는 오히려 더 호들갑스럽게 황제를 부축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어찌 저런 무도한 자가 있단 말입니까! 감히 폐하의 옥체를……!”
아드리스 황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부축을 받아 일어서던 황제가 돌연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잡았기 때문이었다.
“폐, 폐하?”
아드리스 황자가 당혹감을 드러낸 것과 사태가 벌어진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직, 섬뜩한 소리가 울리더니 황자의 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가슴 부근에 황제의 다른 손이 박힌 것이 먼저였다. 그 손이 황자의 가슴을 뚫고 나가 등 뒤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움켜쥔 손안에 검붉은 덩어리가 보였다. 붉은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사람의 심장이.
“꺄……꺄아아악!”
등 뒤에서 알리사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제야 멈춘 것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드리스 황자는 제게 일어난 일을 바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가 멍하니 라온휘젠 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딱딱하게 굳은 라온휘젠과 그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황자의 눈에서 빠르게 빛이 사라졌다. 이내 황제가 손을 뽑아냈고, 그에게서 밀려난 황자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다. 쿠웅! 시신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쪽을 돌아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그 손에 든 심장을 씹어 삼키는 중이었으므로.
우적거리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아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다니멜은 황자가 살해당하는 순간부터 자리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충격이 크다 못해 아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동상처럼 얼어붙어 있는 모습을 보려니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그리고 왜 남의 경고를 들어먹질 않는 거야! 피하려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조금이라도 틈을 벌었을 거고, 그럼 내가 도와줄 수도 있었을 거다. 자업자득이라는 걸 알지만 입안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크흐.”
잠시 후 심장 하나를 온전히 삼킨 황제가 비척비척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속도가 현저히 느려져서 마치 좀비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피투성이가 된 입가를 한 채 고개를 드는 그의 두 눈은 이미 광기에 잠식된 지 오래였다.
“역시 부족해. 아직도 부족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황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인형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 동력이 되는 연료가 이젠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정체를 드러낸 탓일 수도 있고, 인간의 길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탓인지도 몰랐다. 여하튼 황제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움직임이 갑자기 둔해진 것도 그래서인 듯했다. 황제의 두 눈에 돌연 검은 물이 차오르더니 아래로 줄줄 흘러나왔다. 눈만이 아니라 코와 귀, 입에서도 검은 잉크 같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속에서 코를 찌를 듯한 악취가 느껴졌다.
“엘, 저거…….”
시벨리우스가 굳은 얼굴로 떼는 운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여기서 벗어나요.”
그 말에 시벨리우스가 냉큼 알리사와 아셀을 챙겨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슬금슬금 황제와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반응 없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라온휘젠뿐이었다.
“태자 전하. ……전하?”
근위대장이 부르는 소리에도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새하얗게 굳어 있는 그는 검은 물을 토해내는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형제들이 전부 죽고, 눈앞에서 아버지가 동생을 끔찍하게 죽이는 광경까지 봤으니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그의 뺨을 가볍게 쳤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또렷해졌다.
“내 말 들려요?”
“아…….”
“이동 마법 할 수 있겠어요? 내가 시간을 벌어줄 테니까 최대한 멀리 달아나요.”
“황제 폐하가…….”
“아뇨. 저자는 황제가 아니에요.”
단호하게 건넨 대꾸에 라온휘젠이 멍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황제가 아니었어요. 단순히 정신 지배를 당한 수준이 아닌 것 같아요. 몸의 주인이 아예 바뀐 거로 보이네요.”
“무슨…….”
“당신의 아버지인 진짜 황제는 이미 죽었다는 뜻이에요. 저건 그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거예요.”
라온휘젠의 눈이 커졌다. 뜻을 이해하긴 했으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 멍하기만 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정신 차려요. 이제 당신이 살아남은 유일한 황손이에요. 당신까지 죽으면 카터스 황실은 끝나요.”
“……!”
그 말에 헛숨을 삼킨 건 라온휘젠만이 아니었다. 근위대장 역시 새삼 깨달은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라온휘젠은 다시금 황제(였던 자)를 돌아보다가 다음으로 바닥에 있는 형제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온기를 잃은 채 핏물에 젖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때 돌연 가까이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정확히 라온휘젠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장벽을 만들어냈다. 콰아앙! 찰나의 순간 부딪쳐 오는 묵직한 기운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장벽을 유지하는 팔이 저릿해질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었다.
“엘!”
당황한 시벨리우스가 외쳤다. 괜찮다는 뜻으로 다른 손을 들어 보이자 안도하는 그의 숨소리가 이어졌다. 그동안 굳은 얼굴로 눈앞에 세워진 물의 장벽을 바라보던 라온휘젠이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가슴 앞에서 손이 멈춰 있는 걸 그제야 인지한 탓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번에 심장을 뺏기는 건 그였을 터였다.
“물러나요.”
다행히 이번엔 경고가 확실히 먹혔다. 라온휘젠이 엉거주춤하게 뒷걸음질 치자 근위대장이 서둘러 그를 제 쪽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곧 시벨리우스와 나머지 일행이 있는 쪽으로 합류했다. 그동안 나는 계속 장벽을 유지한 상태로 그 너머에 서 있는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황제인데 원래의 그보다도 늙은 모습이었다. 아니, 그런가 싶더니 다음 순간엔 아예 더 젊은 외모로 변했다. 거의 초 간격으로 시시각각 형태가 달라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아예 다른 외형으로 변해간다는 느낌이었다. 남색이었던 눈동자도 점점 그 색이 달라지고 있었다. 마치 기존의 조형을 뭉개고 새로운 형태를 덧입혀가는 과정 같았다. 어쨌거나 그 정체만큼은 명백했다.
“카류안.”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그의 눈동자가 완전히 붉은색으로 변했다. 크크크큭, 그가 목 안을 긁는 듯한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또 너로군.”
벌어진 입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 그의 음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대한 가깝게 구현했을 테니 비슷하긴 할 터였다.
“엘퀴네스.”
단지 이름을 불렸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황제, 아니, 카류안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점차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그게 뺨을 넘어 눈 옆으로까지 이어졌다. 공포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기괴한 광경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이 저마다 질린 표정을 짓는 가운데, 나 역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나 혼자 상대할 수 있을까?’
충격을 받아낸 팔이 아직도 저렸다. 악신으로 각성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의 상급신에 가까운 힘이었다. 죽이는 건 일단 어려울 거고, 제대로 제압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혼자면 모를까,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카류안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다는 점일까. 아무리 힘이 강해졌어도 신체 능력은 마족일 때에 미치지 못할 테니 내 앞에서 섣부른 행동을 하진 못할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카류안이 황제의 육체에 들어간 이유가 궁금해졌다. 제물을 수급할 목적이라면 세르피스 때처럼 정신을 조종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도 굳이 직접 들어갔다는 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어쩌면 본래의 몸에 뭔가 문제가 생겼거나, 쓰지 못하게 된 건지도 몰랐다. 그건 현재 그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크으으!”
“……!”
돌연 그가 몸을 굽히더니 다시 검은 물을 왈칵 토해냈다. 잠시간 어느 형태를 만들어가는 듯하던 얼굴은 그대로 무너져 괴물처럼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간의 육체가 그의 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듯했다. 저런 상황에서도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 역시 한가지 결론으로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거다.
“크흑, 장악하기 쉬운 것들은 죄다 형편없이 약하군. 빌어먹을 마신의 금제! 그것만 아니었어도……!”
한동안 고통스러워하던 카류안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내 짐작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본래의 육체엔 마신의 금제가 걸려 있고, 그걸 풀어낼 방법이 없자 다른 이의 몸을 빼앗아 쓰기로 한 모양이다. 아예 육신을 버리지 못하는 건 아직 원하는 힘을 충분히 모으지 못했기 때문일까. 육신이 있어야 제물이 효력을 보는 구조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카류안이 희번들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조급함 때문일까. 그는 돌아가는 상황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린 인간의 피가 필요해. 아주 특별하고 어린 인간의 피가……!”
주술을 외우듯 같은 말을 반복하던 그가 어느 순간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일행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황태자 라온휘젠을 주축으로 한창 공간 이동 마법이 전개되고 있었다.
“저건 마법사고, 저건 정령사지…… 그리고 저건…… 아아, 그래. 유니콘과 섞였다고 했던가.”
황제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듯 카류안이 느릿하게 한 사람씩 살폈다. 제물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 근위대 기사나 세리엄 등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라온휘젠에서 알리사, 마지막으로 아셀을 향한 시선에 강렬한 희열이 피어올랐다. 그가 목표를 정했다는 걸 단숨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이거 괜찮군! 인간이 지닌 유니콘의 피!”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가 튀어나가려고 하기에 나는 재빨리 그 앞에 물의 장벽을 세웠다. 카류안이 흉하게 뒤틀린 눈을 깜빡거리다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내 존재를 다시 인지한 듯 그의 얼굴 가득 불쾌한 표정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강한 압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날 방해하지 마라, 엘퀴네스!”
“큭!”
이번엔 내가 방어하는 것보다 그의 공격이 미치는 게 조금 더 빨랐다. 목이 조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순식간에 꽤 멀리까지 밀려 나갔다. 벽에 부딪히는 감각이 들었고, 이후엔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잠시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빠르게 몸을 보호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잘못하면 역소환되었을지도 모를 만큼 엄청난 압력이었다. 혀를 차고 있는데 멀찍이서 일행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
“엘 님!”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
빠르게 대꾸해 주는 동안에도 날 짓누르는 기운은 힘을 더해가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가만히 있진 않아서, 곧바로 물을 일으켜 그를 가뒀다. 어항에 갇힌 꼴이 된 그는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인간의 몸이라 그런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꿈틀거리던 몸이 이내 축 늘어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죽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의식을 잃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를 짓누르는 압력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상황을 살피려는 그때 문득 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창 마법진이 발동하고 있는 곳에 다니멜이 다가가고 있는 광경이었다. 약간 표정이 멍해 보이는 듯한 그에게서 카류안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었다.
“시벨! 뒤!”
일행은 나를 보느라 아직 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크게 외쳤더니 시벨리우스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가 코앞에 다가온 다니멜의 존재를 인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