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 근위대장! 지금 제정신입니까!”
경악한 다니멜이 두 눈을 한계까지 부릅떴다. 근위대장은 그 모습을 모른 척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는 다니멜 쪽은 아예 돌아보지 않은 채 라온휘젠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정중히 말했다.
“황성까지 모시겠습니다.”
“…….”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한 건 정작 라온휘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트이는 길을 보고서도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설마 근위대장이 정말로 회군을 결정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직속 산하에 속한 사람이니, 내심으로는 당연히 다니멜의 뜻을 더 우선할 거라고 여긴 건지도 몰랐다.
“태자 전하?”
“아.”
이어진 음성을 듣고서야 라온휘젠이 천천히 숨을 토해냈다. 드디어 현실을 인지한 듯 하얗던 얼굴에 혈색이 감돌았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근위대장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긴장하고 있던 아셀과 다른 일행들도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든 당장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근위대장! 이대로 회군하면 반역이오! 이건 반역이란 말이오!”
돌아서는 근위대장의 등 뒤에서 다니멜이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비명 같은 절박한 목소리가 산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작전권은 전부 내게 있소.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다니멜 님도 내 결정에 따라주시오.”
“……큭!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거요! 폐하께 이 모든 사실을 낱낱이 고하겠소!”
군을 통솔하는 이가 강경하게 나오니 더는 어찌할 수 없었는지 다니멜은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직후 그는 바닥에다가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마도 공간 이동 마법을 쓰려는 것 같았다. 슬쩍 살펴봤더니 저절로 좌표가 읽혔다. 황성 쪽으로 이동하는 마법진이었다.
‘정말 황제한테 이르러 가는 건가.’
어이없어하는 동안 다니멜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혹시나 해서 기척을 끝까지 주시했는데 역시나 황성 쪽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침묵이 내려앉은 자리에 라온휘젠은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알마스너 경, 나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
“저는 태자 전하가 아주 어리실 때부터 지켜봐 왔습니다. 태자 전하의 성품은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압니다.”
내내 무뚝뚝하던 근위대장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안심하라는 뜻을 분명히 전달하는 표정이었다. 라온휘젠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곧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맙소.”
달싹이는 입술 사이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의 곁에도 좋은 분들이 있잖습니까.>
<전하께서도 먼저 알아봐 주시는 것부터 시작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알렉이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마도 같은 걸 떠올린 듯, 라온휘젠의 눈동자도 깊어져 있었다. 많은 것들을 자각하고, 수많은 감정을 실감한 눈빛이었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두 개의 별이 보였다. 수놓은 것처럼 흩뿌려진 별의 운무 속에서도 유독 밝은 별들이었다. 한쪽의 빛이 좀 더 밝아지면 다른 쪽도 기운을 얻는 것처럼 덩달아 밝아졌다. 그 모습이 마치 함께 독려하며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중 하나의 빛이 라온휘젠의 길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건 분명 좋은 쪽일 터였다.
* * *
라온휘젠이 가장 앞쪽으로 나서면서 회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빈틈없이 꽉 찬 무리 사이에 그가 걸어가는 방향대로 길이 트이는 광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관이었다. 양옆으로 갈라진 군대가 들고 있는 횃불이 표시등처럼 그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나와 다른 일행들 역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로 그 길을 뒤따랐다.
“으으, 왠지 긴장돼.”
황성까지 거리를 가늠해 보고 있는데 한껏 고개를 숙인 알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행렬 한가운데를 지나는 것이다 보니 지켜보는 시선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슬쩍 돌아봤더니 아셀과 세리엄도 분위기에 압도된 듯 전에 없이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도 이 상황이 편하진 않을 터였다. 황제와 만나서 이야기가 잘 풀리면 좋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꼼짝없이 반역죄를 뒤집어쓸 테니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일단 도와주긴 해야겠지? 시벨리우스 때문에 온 거긴 하지만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이 있는데 라온휘젠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진짜 반역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모함이라는 게 훤한 상황이라 더 그랬다.
‘……게다가 대공도 관여한 것 같고.’
그러고 보니 그와는 언제 말을 맞춘 걸까. 설마 카터스 제국의 황제가 대공과 친분이 있을 줄은 몰라서 이 연결점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사라진 대공이 카터스 제국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언젠가 트로웰이 했던 말이 떠올라 더 찝찝한 기분이었다. 나르젠 황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터라 황궁 쪽을 살피지도 않았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내부 상황을 살펴볼까 싶을 때였다.
‘응?’
돌연 공기가 부산해진다 싶더니 문득 주위에서 미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뒤따르고 있는 군대 안에서 산만한 흐름이 읽혔다. 한 무리가 슬그머니 행렬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차림도 그렇고, 분위기를 봐도 여러모로 근위대 소속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병사가 다 근위대장의 사람은 아닐 테니 어쩌면 다니멜에게 속한 무리일지도 몰랐다. 라온휘젠을 칠 작정이라면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일 것이다.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싶으니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기습할 예정은 없었는지 그들은 그저 다른 곳으로 묵묵히 이동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아카데미 쪽이었다.
‘……이런. 회군 명령을 무시하고 그냥 진격하려는 건가?’
목적이 너무 선명해서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예 대장의 명령을 어기는 쪽으로 갈 줄이야. 다들 얌전히 회군하는 분위기였던지라 이런 돌발 행동에 대한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낭패감에 얼굴이 굳어지는데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채웠다. 어차피 라온휘젠이 자발적으로 황궁에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혹시 황제가 그들에게만 따로 내린 명령이 있는 건가? 근위대장이 이런 결정을 내릴 거라는 걸 미리 짐작하고 조치해 둔 걸까?
‘어쨌든 이럴 때가 아니지.’
이대로면 라온휘젠의 누명이 벗겨지더라도 참사가 일어날 판이었다. 근위대장에게 상황을 알릴까 싶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워낙 은밀한 움직임이라 아직 아무도 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긴장한 상태인데 이 와중에 명령에 불복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면 괜히 일만 더 복잡해질 게 뻔했다. 순순히 믿지도 않을 것 같고, 소드 마스터도 느끼지 못한 기척을 내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설명하기도 곤란했다. 지금은 조용히 행렬을 이탈하는 무리가 막상 발각되면 어떻게 나올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들에게 동조해 회군에 항거하는 자들이 더 나올지도 몰랐다. 결국 선택할 만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알아서 그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것.
“미안, 나 잠시만 자리 좀 비울게.”
“엘, 어디 가려고?”
“들를 곳이 있어. 금방 다시 올 테니까 먼저 가고 있어.”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벨리우스에게 웃어준 다음, 나는 곧장 병사들 쪽에 섞여 행렬을 빠져나왔다. 공간 이동을 하면 소란이 일지도 몰라 도보를 택하는 대신 기척을 최대한 죽였더니 다들 내가 자리에서 이탈하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적당히 멀어진 후엔 형체를 아예 벗고 빠르게 아카데미 쪽으로 날아갔다. 본성이 깨어난 상태라 그런가, 적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지나치게 차가워졌다.
‘어쩔까. 가장 간편하게 처리하려면 역시 전부 죽이는 게 낫겠지. 아니, 잠깐. 그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좀 온화한 방법을 쓰자. 몸에 있는 수분을 전부 날려버리면…… 젠장, 이게 죽이는 거랑 뭐가 달라?’
자꾸만 생각을 장악하는 잔인한 충동과 싸우는 동안 아카데미로 향하는 무리를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후드를 쓴 것만이 아니라 복면까지 하고 있었다. 체형은 전부 달라도 정교하게 단련된 기세가 느껴지는 것만은 같았는데 다들 살기가 너무 짙었다. 근위대가 아닌 건 정말 확실하고, 평범한 무인도 아닌 것 같았다. 대체 정체가 뭘까 고심하고 있는데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획이 조금 틀어졌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같다. 교수들은 보이는 대로 죽이고, 아이들은 전부 생포한다. 행여 상처가 나지 않게 조심하라고.”
묵직한 음성에 따르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만 들으면 그들의 목표는 교수진의 처리고, 처음부터 학생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당연한 거긴 한데(교수들을 죽이려는 것도 정상은 아니지만) 왠지 느낌이 개운하지 않았다. 특히 ‘상처 나지 않게 조심하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은 이럴 때 다치지 않게 하라고 하지 않나? 그냥 표현의 차이일 뿐인가? 게다가 계속 들어보려니 대화가 점점 더 이상했다.
“1조가 공격하고 학교에 불을 질러라. 그 사이에 2조가 애들을 빼돌린다. 이동 스크롤은 전부 챙겼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명단에 들어간 놈들은 이미 다들 확인해 놨을 거다. 그놈들은 특별품이니 특히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것 잊지 말고. 늘 그랬듯이 이동하자마자 시작하도록 해.”
“예!”
‘명단? 특별품이라니?’
뭐야, 이제 보니 교수진을 없애려는 목적도…… 아닌 건가?
빼돌린다는 말도, 특별품이니 뭐니 마치 아이들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듯한 표현도 하나같이 귀에 밟혔다. 어째선지 이 대화의 끝을 이미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여차 싶으면 그냥 죽여서 심장만 척출해라.”
“……!”
나도 모르게 훅하고 숨을 삼켰다. 자연체의 상태라 아무에게도 들리지는 않을 테지만, 설령 들었다 해도 상관없을 만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 대장인 남자가 한 말만 귓가를 빙빙 맴돌았다. 그동안 그는 동료들에게 작은 포대를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다.
“도려낸 심장은 최대한 빠르게 이 안에 담으면 된다.”
“이게 뭡니까?”
“특별히 마법으로 가공 처리한 자루다. 이 안에 넣으면 몇 시간 정도 살아 있는 상태가 유지된다는군. 그 상태에서 정화 의식을 치르면 효과도 똑같다는 모양이야.”
“헤, 신기하네요. 이 자루가 몸의 역할을 하는 셈이군요? 여분은 더 없습니까? 다 이걸로 옮기면 편할 텐데.”
“아쉽게도 지금 나눠준 것뿐이야. 재료를 구하기가 힘들어서 더 만들 수 없었다더군. 한 자루에 하나씩밖에 넣지 못하니까 신중하게 사용하도록. 정말 급한 순간에만 써야 할 거다.”
“할 수 없네요. 주의하겠습니다.”
‘미친.’
질문이고 대답이고 하나같이 정상적인 게 없다. 주먹을 움켜쥐려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한 가지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생포, 정화 의식, 심장. 여기까지 들었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저들의 목적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을 악신의 제물로 삼으려고 한 거였어.’
목 안에서 쓴 물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학교는 예전부터 대공이 노리던 장소긴 했다. 연령이며 신분에 능력까지, 제물에 걸맞은 조건을 갖춘 이들을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이만큼 합당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반역을 진압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목이 들이 밀어질 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설마 그것만큼은 아니리라 믿었다. 마신관도 아니고 카터스의 황제가 주도하는 일이었으니까. 아들이 반역했다는 의심에 분노한 나머지 이성을 잃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악신을 만들기 위해 산 제물을 모은다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상식적이잖아.
정말 대공이 이곳에 있는 건가. 카터스의 황제도 이 끔찍한 일을 돕고 있었던 거야? 제국의 자부심인 아카데미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고, 죄 없는 아이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그걸 제 아들인 황태자에게 전부 뒤집어씌우면서까지?
‘아, 황태자!’
순간 미치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황성 쪽을 돌아보았다. 만약 황제가 정말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 거라면 애초에 반역의 명분은 핑계에 불과했다. 어떤 해명을 하더라도 라온휘젠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때마침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관련 잡담이 이어졌다.
“근데 설마 이 시점에 황태자가 나타날 줄은 몰랐네요. 대체 언제 돌아왔을까요? 오늘 오후에 파악했을 때만 해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뭐, 그쪽은 내버려 둬. 알아서 죽을 자리 찾아왔는데 황제가 어련히 처리하겠지.”
“하긴, 지금 황태자에겐 황궁이 가장 위험하죠. 근데 근위대장도 같이 가서 어쩝니까? 애초에 그자가 걸리적거려서 핑계를 만들어 내보낸 거였잖습니까.”
“시간은 충분히 벌었으니 지금쯤이면 상관없을 거다. 차라리 우리에겐 더 잘됐어. 눈치가 빠른 작자라 안 그래도 끝까지 속일 수 있을지 자신 없었는데 말이야. 머리 굴릴 필요 없이 속행하면 돼.”
“그것도 그렇네요. 그가 황궁에 도착할 때쯤이면 우리 쪽도 끝날 테니 그자는 이동만 하다가 시간을 다 버리겠군요.”
“하하, 그런 셈이지. 여하튼 이번 일만 성공하면 모든 게 끝난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자고. 일리야를 위하여!”
“일리야를 위하여!”
건배를 들듯 구호를 외치는 자들의 모습은 경쾌했다. 지금부터 무고한 아이들을 죽이러 가는 이들의 모습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래서 더 혐오스러웠다. 가슴 안이 점점 차게 식어가는데 이게 본성 탓인지, 내가 지금 너무 화가 난 탓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둘 다 해당하겠지만. 반면에 머리는 유난히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선지 평소엔 잘 눈여겨보지 않던 부분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그들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사념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엔 옷에 얼룩이 진 건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람에겐 잘 붙지 않는 건데 저렇게 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른 건지 모르겠다. 아마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상태인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더러운 건 빨아야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어느 순간 빗방울이 떨어졌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먹구름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에 출발하려던 이들이 혀를 찼다.
“아니, 이게 웬 비야?”
“일을 서둘러야겠어.”
허둥거리던 그들이 달려나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럴 것이다. 조금만 자리를 벗어나도 비가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그들이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나는 천천히 형체를 드러냈다. 때마침 대장인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얼굴에 천천히 경악이 서리는 것을 보며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들 체험해 볼까요? 신나는 수로 탐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