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78화 (378/608)

제378화

“그 녀석이 한 말이 맞아. 환생은 말이 안 돼. 그냥 닮았다고 여기고 넘길 게 아니었어. 애초에 분리해서 생각해선 안 되는 거였던 거야.”

“그 녀석? 그게 누군데? 지금 하는 말은 또 뭐고?”

“그렇잖아. 정령왕인 엘은 인간답고, 인간인 엘은 정령왕 같았어. 처음엔 벌어져 있던 차이가 점점 빠르게 좁혀지고 있어. 다른 게 아니라 어떤 경위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던 거야. 내가 본 게 그 결과였던 거였어.”

“저기, 시벨. 아까 전부터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알아듣게 얘기해.”

“하지만 그럼 오히려 그게 더 문제야. 엘은 왜 거기 있었을까. 그때 엘은 찾을 게 있다고 했었어. 그러면서도 그게 뭔지 정확히 내게 말해 준 적은 없었지. 피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어쩌면 일부러 설명은 하지 않은 건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게 뭐였을까. 그리고 그건 대체 언제 일어나는 일일까.”

두서없이 내뱉는 말만큼이나 시벨리우스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내게 정보를 전하려는 목적보다는 본인 스스로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다른 이들도 알아들을 리가 없어서 다들 당황한 표정이었다. 다행히 어수선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시벨리우스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잠시간 신음을 삼켰다가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소리를 해서 미안해. 지금은 나도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론이 나면 말해 줄게.”

심각한 표정이 그답지 않게 박력적이었기에 나는 그냥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갈 수 없었던 기묘한 대화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났다.

그 후로 다시 분위기가 평온해지고 잡담이 재개될 때까지 시벨리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즐기는 건지, 아예 먹혀버린 건지, 침묵 그 자체가 된 듯한 그를 두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졌다. 다행히 본래도 그는 대화에 즐겨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나만이 그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간간이 돌아보았을 뿐.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시벨리우스는 애매하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비슷한 표정을 이미 안다. 소멸진을 언급했을 때, 어딘지 시선을 피하던 이프리트도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는 대신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어차피 확인해야 할 부분도 있고, 아무래도 시벨리우스와는 조만간 제대로 얘기를 해봐야겠다. 애써 기분 탓이라고만 여겨왔는데 비슷한 불안감이 반복되니 확신이 섰다. 뭔가 나만 알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센 급류에 휘말린 것 같았다. 흘러가는 대로 떠밀리다 보면 어디로 종착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혼란한 표류의 한가운데였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 * *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는 동안 어느덧 언덕의 도입 부근에 이르렀다. 내려오고 있는 군대와 슬슬 마주칠 시점이었다. 예상대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불빛이 어른거리며 수많은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건 말을 탄 무리였다. 선두에 선 몇 사람을 제외하고 그들 대부분이 한 소속임을 증명하는 같은 형태의 자줏빛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카터스 황족의 특징이라는 라온휘젠의 머리 색과 똑같은 색이었다. 그것만 봐도 그들이 황실 소속의 기사라는 점은 분명했다.

행렬의 맨 앞엔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짙은 흑발에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전체적으로 꽤 과묵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를 발견한 아셀이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정말로 근위대군요. 근위대장인 알마스너 경이 선두입니다.”

“헐. 설마 그것까진 아니려니 했는데, 정말로……?”

뒤쪽에서 세리엄이 기함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라온휘젠 역시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근위대보다는 근위대장의 등장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알마스너라고 불린 흑발의 남자는 그냥 척 보기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얼핏 느껴지는 기운이 소드 마스터인 카리브디스 공작과 견줘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사람, 혹시 소드 마스터인가요?”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예상대로 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 폰 알마스너 후작입니다. 저래 보여도 70대인 노장이죠. 근위대의 상징 격인 인물로, 그 자체가 황실의 뜻을 대변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즉, 함부로 쓰지 않는 패라는 뜻인가. 그런 자가 움직였으니 다들 긴장할 만도 했다. 황제가 그만큼 강경한 뜻을 품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이윽고 입술을 깨문 라온휘젠이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나섰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황한 우리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갑자기 나타난 일행에 놀란 말들이 앞발을 치켜세웠다. “누구냐!”, “급습이다!” 사방에서 고함과 함께 병장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찰나의 시간, 근위대장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다들 멈춰라!”

그가 내린 명령에 사방이 빠르게 진정했다. 근위대장은 우왕좌왕하는 말을 진정시킨 후 훌쩍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눈앞에 서 있는 이를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엔 동요가 가득했다.

“황태자 전하.”

부르는 목소리에도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사위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다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정체가 누군지 알아본 듯했다. 설마 황태자가 눈앞에 나타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두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라온휘젠은 그 모든 시선을 묵묵히 받아냈다.

“오랜만이오, 알마스너 경.”

“전하께서 어떻게…….”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오. 지금 어딜 가는 길이오?”

“…….”

담담하게 이어진 질문에 근위대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표정을 굳힌 그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황태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행렬 틈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복장을 한 현자 다니멜이었다. 라온휘젠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표정이 야비하게 번들거렸다.

“아니지. 어차피 곧 폐위될 분인데 이제 태자라는 호칭은 과분할지도 모르겠군요. 지금은 반역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감히 황태자 전하께 반역이라니요!”

발끈한 아셀과 호위기사인 다이가 반박했다. 물론 그들의 험악한 기세에도 다니멜의 표정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발뺌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모든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정황이라니……!”

“태자 전하의 방에서 모반을 도모한 문서들을 발견했습니다. 게다가 스왈트 제국의 대공에게 가서 제안을 하셨다지요? 군대를 지원해 주면 황제가 된 후에 제국의 남서부를 내어주겠다고 말입니다. 대공이 직접 그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대공이 그렇게 말했다고?”

묵묵히 듣고 있던 라온휘젠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셀과 세리엄은 노골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응시하는 다니멜의 시선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다.

“전하께선 모르셨겠지만 대공과 나르젠 폐하는 젊은 시절 친분을 쌓은 관계이십니다. 그가 태자 전하의 동태를 주시하시는 게 좋겠다고 폐하께 염려의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일단 제안을 거절하고 돌려보냈으나 전하가 포기하지 않고 황제를 찾아간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간 쭉 같이 계셨던 걸 보니 그와는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시군요.”

“아닙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아셀이 크게 소리쳤다. 분노에 찬 그의 얼굴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전하께선 대공에게 그런 제안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건 전부 모함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스왈트 제국에 계셨던 게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니라면 대답해 보시지요. 태자 전하, 그간 황실엔 보고하지도 않으시고 아카데미를 떠나계셨지요. 지금까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계셨습니까?”

“…….”

당연한 말이겠지만 라온휘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그동안 스왈트 제국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황제한테 아무런 언질이나 허락 없이 다른 제국의 황제를 만난 건 확실히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선 이사나와 같이 있었다고 한 즉시 사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역의 목적이 아니라고 해 봤자 그걸 순순히 믿어줄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다.

‘게다가 아예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나는 근처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이사나의 기사들을 의식했다. 알리사와 시벨리우스야 자신의 의지로 따라왔다 쳐도, 그들이 함께한 건 이사나가 지시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 사이에 모종의 협력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선지 라온휘젠도 딱히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거짓 사이에 진실이 섞이는 바람에 그 자체로 압박이 된 상황이었다.

“어차피 전하께서 어떤 해명을 하시려 해도 별다른 의미는 없을 겁니다. 이미 히스 경의 밀서도 확보했으니까요.”

다니멜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어진 내용에 라온휘젠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히스의 밀서?”

“그렇습니다. 한때 전하의 호위기사였고, 전하께서 처리하신 바로 그 히스 경 말입니다.”

누군가 했더니 라온휘젠이 데리고 다니던 호위 중 한 명을 말하는 모양이다.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었던 거구나. 게다가 황태자가 처리했다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슬쩍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알리사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죽은 건 사실이지만 라온휘젠이 한 일은 아니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그와 관련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니멜을 바라보는 라온휘젠의 눈빛이 이전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날 암습하는 자들을 돕다가 실패하고 자결했소.”

“제가 아는 바와 다르군요. 충직한 히스 경이 태자 전하의 모반 정황을 알게 되어 막으려 했던 거겠지요. 그래서 증거인멸을 위해 전하께서 그를 죽이신 것 아니시겠습니까?”

“하?”

“전하께선 그의 입을 막으셨다 여기셨겠지만 아쉽게도 히스 경은 죽기 전에 소임을 다했습니다. 그가 보낸 밀서가 제게 무사히 도착했거든요. 폐하께서 모든 기록을 직접 받아보셨습니다.”

“기록이라…….”

“그간 태자 전하께서 보인 수상한 행적들 말입니다. 스왈트 황제와 쌓은 과도한 친분은 물론이오, 아카데미 교수진과 학생들이 반역에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들도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히스 경에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사람은 저희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 쪽이었을 테지요. 총장까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아들더러 아버지를 치라 부추기다니. 세상에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다니멜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셀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만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라온휘젠 역시 그냥 가볍게 웃기만 했다. 이 상황이 웃겨서라기보다는 너무 황당해서 자기도 모르게 지은 표정인 것 같았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어디 폐하께서 느끼셨을 상심만 하셨겠습니까.”

태연한 대꾸에 라온휘젠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다니멜은 그 시선에 기죽기는커녕 더 히죽 웃었다.

“폐하께선 크게 진노하셔서 반역자들을 일망타진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아카데미에 속한 모두가 오늘 그 반역의 대가를 치를 겁니다. 물론 태자 전하도 예외가 아니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라온휘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패배의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다니멜의 표정이 한껏 의기양양해졌다.

“자아, 뭘 하십니까, 알마스너 근위대장! 반역자가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당장 저자를 포박하고, 아카데미로 진격하여 악의 근원을 뿌리 뽑으십시오!”

한 손을 뻗으며 노래하듯 외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 말에도 근위대장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지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망설이는 그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 다니멜이 뭐라 더 말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라온휘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마스너 경, 회군하시오.”

“……!”

“아무래도 뭔가 깊은 오해가 있는 것 같소. 혐의에 대해선 내가 직접 폐하를 찾아뵙고 전부 해명하겠소. 아카데미로 진격하는 건 거두시오. 내가 반역자라면 나만 데려가면 되는 일이오.”

담담한 제안에 근위대장이 눈빛이 흔들렸다. 충분히 솔깃해하는 반응이었다. 어쩌면 그도 아카데미까지 치는 일은 과하다고 여기는 건지도 몰랐다. 그가 갈등하는 걸 느꼈는지 다니멜이 다급히 소리쳤다.

“들을 가치가 없는 말입니다, 알마스너 대장! 폐하께선 아카데미의 진압을 명하셨습니다!”

“아니. 학생들은 전부 무고하고,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소. 게다가 내가 정말 반역을 하려 했다면 이렇게 그대들 앞에 나와 있을 것 같소?”

“궤변입니다! 이미 모든 증거가 낱낱이 드러났음을 근위대장도 같이 들으셨잖습니까!”

“이대로 아카데미로 진격한다면 경은 그 손에 무고한 피를 묻히게 될 뿐이오. 아카데미엔 외국에서 온 귀족들도 많다는 걸 경도 알고 있을 거요. 폐하께선 지금 분노에 잠시 눈이 머셔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려 하시오.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알마스너 경뿐이오. 이대로 나만 데리고 회군하는 것으로 충분하오.”

다니멜과 라온휘젠의 말이 번갈아 이어졌다. 그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근위대장이 잠시간 침묵했다. 그가 판단을 내리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든 근위대장이 대기 중인 군대를 돌아보았다.

“전군, 회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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