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화
황태자가 나간 방향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아셀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그, 그, 인사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어, 저, 정령왕님을 뵙습니다.”
“하하, 딱딱하게 뭐하는 거예요, 아셀. 그냥 편하게 대해요.”
“하, 하, 하지만, 설마 정령왕이실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해서…….”
“괜찮으니 예전처럼 대해요. 그냥 내 정체만 알았을 뿐이지 달라진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게 엄청 달라진 건데요…….”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말은 일부러 듣지 않은 척했다. 그때 아셀 옆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세리엄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기, 근데 정말로 여기서 저 먼 거리가 다 보이시는 겁니까? 사람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요?”
“아아, 네. 그러니까 대답했겠죠……?”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의 눈빛이 단숨에 선명해졌다. 머리에 전등이 달렸다면 이 순간에 불이 반짝 들어왔을 것이다. 굉장히 박력 넘치는 시선이라 그가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을 땐 나도 모르게 움찔할 뻔했다.
“아까 마음만 먹으면 누가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혹시 이 자리에서 어디든 전부 다 보실 수 있는 겁니까?”
“음, 뭐……정령들이 있는 곳이라면요.”
“그 말씀은?”
“내가 원할 때 그들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 정령왕이라는 거죠?”
“네, 맞아요.”
“진짜, 정말로 물의 정령왕인 겁니까?”
“아닌 것 같아요?”
“아, 아뇨.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왠지 믿어지지가 않는 기분이라…….”
뭐, 그렇겠지. 일단 겉으로는 누가 봐도 인간처럼 보이니까, 정령이라고 해도 선뜻 와 닿는 기분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아셀처럼 흔쾌히 믿는 경우가 흔치 않은 걸 테지. 딱히 불쾌할 것도 없는 일이라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래도 호기심을 드러내는 걸 보니 이제 긴장이 많이 풀린 모양이다. 생각하던 거랑은 흐름이 조금 달랐지만 분위기 전환은 성공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아, 근데 다니멜이면 알렉이 조사하려던 사람 아니에요? 현자 다니멜의 저택도 수색한다고 했었죠? 대체 누구기에 조사하는 건가 했더니 뭔가 있긴 한 모양이네요.”
“헉! 그, 그렇긴 한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
“그런 의미에서 여기 수로는 안 돌아봐도 돼요. 내가 어제부터 계속 살펴봤지만 딱히 수상한 건 없었어요.”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쭉 담담하던 시벨리우스도 이번엔 얼굴에 당혹감을 드러낸 채였다.
“어제라니. 엘, 우리보다 먼저 와 있었던 거야?”
“아, 응. 이쪽으로 오는 것 같길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지.”
“잠깐 들른 게 아니구나.”
날 응시하는 시벨리우스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을 만큼 내게 중요한 용건이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쓰게 웃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할게. 일단 지금은 황태자를 따라가 볼까? 저대로 보내기는 걱정되니까.”
시야를 확대해서 살펴보니 황태자는 현관 쪽을 향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곳에 나와 있는 총장과 직접 대면할 생각인 듯했다. 이미 걸음으로 따라잡기엔 거리가 꽤 벌어져 있었기에 일행은 극단적인 지름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창문을 이용하기로. 3층에 해당하는 위치라 그리 낮은 건 아니었지만 해 본다면 해볼 만한 높이였다. 기사들은 각자 알아서 자력으로, 알리사와 아셀은 시벨이 각각 양옆에 끼고 뛰어내리는 걸로 간단히 해결했다. 나는 모두가 무사히 안착한 것을 확인하고 홀로 남은 세리엄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할래요? 내가 도와줄까요?”
“아닙니다. 혼자 내려갈 수 있습니다.”
의연하게 답한 것과는 달리 세리엄은 바로 내려가지 않았다. 한동안 창가에서 망설이던 그가 다음 순간 심각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역시 도움이 필요한 건가 했는데 이어진 건 예상과 다른 말이었다.
“근데 진짜 정령왕 맞는 거죠?”
“…….”
정말 쓸데없이 철저한 성격이었다.
* * *
“아니, 그치만 너무 비현실적이잖습니까. 정령왕은 사료고 뭐고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미지의 존재란 말입니다. 유니콘처럼 허구의 대상으로 정의하는 정도는 아니라도 인간은 감히 접할 수 없는 신 같은 느낌이었다고요. 그런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모자라서 같이 웃고 대화하고 생활까지 했다니 현실감이 들 리가 없잖아요.”
내게 경고를 받고 의기소침해진 세리엄은 제 행동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다른 이들도 차마 대놓고 두둔하지 못할 뿐 동조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리사까지 물끄러미 응시하는 걸 보니 새삼 나에 대한 흥미가 짙어진 듯했다. 그런 시선은 저 멀찍이서 모습을 감춘 채 따라오고 있는 알렉과 기사들에게서도 느껴졌다. 귀찮았던 거지 딱히 그들의 호기심이 불쾌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뭐가 그렇게 신기한데요?”
“그냥 다 신기한데, 그래도 가장 신기한 거라면…… 역시 정령인데도 모습이 뚜렷한 거랄까요? 제가 그동안 봤던 정령들은 죄다 형태가 불투명했거든요.”
“정령왕은 여기서 구현하는 임시 육체의 완성도가 더 높아요. 일반적으로 정령은 이 세계에 간접적인 형태로 관여하게 되어 있지만, 정령왕은 예외죠.”
“임시 육체? 그럼 지금 모습이 진짜가 아니신 겁니까?”
“모습이야 그대로긴 해요. 하지만 원래는 육체랄 게 없어요. 기본적으로 정령은 영체에 가까우니까.”
“그, 그렇다는 건 눈에 안 보인다는 겁니까?”
“안 보이죠. 아까도 같이 있었는데 나 못 봤잖아요.”
“네? 그때 저희랑 계속 같이 있으셨던 거였습니까? 다른 데서 지켜보시다가 공간 이동해서 오신 게 아니라?”
“같이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여러분이 그 방에 나타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쭉 있었죠. 모습을 드러낼 때 육체를 입은 것뿐이에요.”
“허어…….”
충격이 컸는지 세리엄은 연신 헛숨만 삼켰다. 내겐 이젠 일상이 돼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듣기엔 육체를 자유자재로 벗고 입는다는 게 꽤 파격적인 개념이었나 보다.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아셀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어,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말해요.”
“영체면 제 눈에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저는 아니더라도 시벨 님이라면 알아보셨어야…….”
“아, 그거라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사령(死靈)이지. 자연체의 정령은 아무도 못 봐.”
설명을 이은 건 옆에 있던 시벨리우스였다. 아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네? 그런 겁니까?”
“정령은 영체이긴 해도 구조가 전혀 다르거든. 정령이 남기는 흔적이나 기운 정도는 유심히 살피면 우리도 볼 수 있긴 한데, 그런 걸 알아본다고 할 건 아니지. 정령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그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건 같은 정령들뿐이야. 신 중에서도 상급신 정도나 볼 수 있을걸?”
“그렇군요. 처음 안 사실입니다. 정말 신기하네요.”
“너한텐 다행스러운 일이야. 넌 보였어도 사령과 정령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을 테니까. 인생이 더 고단했을 거야.”
시큰둥한 말투에 그를 위하는 감정이 녹아 있다고 느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거다.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것 같더니 이제는 제법 곁을 내준 듯했다. 아셀이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동안 세리엄은 열심히 무언가를 꺼내 들고 필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중에, 그것도 이동하는 상태에서도 이 사실을 기록해야겠다는 열망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원래 저렇게 부담스러운 성격이었나? 털털해도 기본적으로는 선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캐릭터가 갑자기 바뀐 것 같았다. 내가 썩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는지 아셀이 대신해서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엘 님. 세리엄 님이 평소엔 안 그러는데 뭔가에 한번 집중하면 조금 집요해지는 경향이 있어서요.”
“뭐, 아셀이 사과할 건 없어요. 좀 황당하긴 한데, 생각해 보니 마법사들은 다들 어딘가 하나씩 나사가 빠진 것 같은 구석이 있는 것 같네요.”
그중 단연 최고인 건 라피스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정령왕을 가두는 결계 따위를 시도할 리가 없으니까. 주문에 대놓고 새장이라는 단어를 넣었다는 점에선 가히 변태적이기까지 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이제 마법사를 만나면 으레 그러겠거니, 편견의 시선으로 대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자 혼이 나간 듯이 기록에 열중하던 세리엄이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기, 마법학에 기본적으로 연금술이 들어가긴 하지만 전 마법사는 아닌데요.”
“그래요?”
“네, 저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학자로서 학문적인 부분으로 연금술에 접근한 거라서요. 이론에 집중한 쪽이죠.”
“하지만 당신한테서도 마력이 느껴지는걸요?”
처음엔 그걸 전사의 오러라고 생각했다. 사실 마법사의 마력이나 전사의 오러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형태의 마나라서 겉에서 대충 보기엔 다 그게 그거 같다. 아마 본인이 학자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살필 생각조차 안 했을지도 모른다. 생김새가 워낙 대놓고 전사여야 말이지. 그의 근육 가득한 체형을 보고 마법사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다. 하지만 작정하고 제대로 살피면 마나의 성질이 정확히 구분된다. 그가 지닌 건 확실히 마법사의 기운이었다. 내가 지적한 사실에 세리엄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뭐. 마법을 조금 배우기야 했습니다만…… 엄청 약할 텐데 그 정도의 수준도 알아보십니까?”
“대충은요. 근데 별로 약한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마력의 양이 적기는 한데, 순도라고 해야 하나. 질이 꽤 좋아요. 그런 점은 여기 있는 황태자나 현자 다니멜이라는 사람보다도 뛰어난 것 같거든요.”
“……!”
“혹시 배우다 중단한 거라면 본격적으로 정진해 보는 게 어때요? 그 정도면 같은 마법을 써도 얻을 수 있는 효율이 다를걸요? 마력의 양도 조금만 수련하면 확 늘어날 거고요.”
물론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기준으로, 내가 보기엔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긴 하다. 라피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굳이 그런 사실까지 알려줘서 상처를 줄 필요야 없겠지. 대수롭지 않게 건넨 말에 세리엄만이 아니라 라온휘젠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생각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란 건지 둘 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을 아셀이 어딘가 미묘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리엄은 민망한 듯 무안한 듯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뭔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엘 님이 정령왕이라는 실감이 확 드네요. 그런 부분까지 파악하신다면 웬만해선 엘 님을 속이지도 못하겠군요?”
“음, 방심하지 않으면 그렇긴 하죠.”
“방심하기도 하십니까?”
“아하하, 그야 뭐.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죠? 근데 오히려 더 방심하게 되더라구요. 보이는 게 많다 보니 뭐든 적당히 넘어가게 된다고 해야 하나.”
그 과정엔 내 힘을 과신하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방심이 일을 키웠고, 지금까지 내내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치를 것이 더 남아 있겠지. 다시 생각해도 입맛이 썼다. 하지만 가장 나쁜 건 이런 짓을 저지른 카류안, 그놈이다. 대체 그 하나 때문에 몇 명이 피해를 입는 건지. 애먼 엘뤼엔과 라피스가 고생하는 것도, 트로웰이 역소환 된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방법이 놈을 소멸시키는 것보다 편하다고 해서 참는 거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진작 뒤엎자고 했을 거다. 대체 소멸진에 필요하다는 재료가 뭐길래 정화하는 방법이 더 쉽다는 건지 모르겠다. 원래 더러운 걸 깨끗하게 만드는 것보다 그냥 태워 버리는 게 더 간편하지 않나?
한창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왠지 주변이 고요해진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분위기가 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 편하게 대하던 이들에게서 다시금 겁먹은 기색이 느껴졌다.
“왜 그래요?”
“아뇨, 그게…… 엘 님은 표정이 사라지면 분위기가 엄청 달라지시네요.”
“그래요? 날 잘 모르겠는데. 너희가 보기에도 그래?”
아무래도 이런 건 더 자주 접한 사람에게서 확인을 구하는 게 낫겠지 싶어 나는 알리사와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알리사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일 때도 그렇고, 가끔 의미심장하게 웃을 때도 그래. 갈수록 더 자주 보는 것 같아.”
“으음, 그래? 정확히 어떤 느낌인데?”
“좀 날카롭고 무서운 분위기? 엘 님이 대단한 존재라는 걸 실감하게 되는 기분?”
이런, 혹시 또 본성이 나오고 있는 건가? 문득 스치는 자각에 절로 혀가 차였다. 돌이켜 보니 조금 전에 한 생각도 험악한 것 같긴 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상태라 이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다. 전엔 그래도 인지하는 게 빨랐는데 이젠 누가 지적하지 않으면 깨닫지도 못하는 수준이 되었나 보다.
이러다 성격이 더 나빠지면 어쩌지. 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니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무슨 기준으로 튀어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그나저나 확인을 구한 건 두 사람인데 한쪽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고개를 들어보니 왠지 조금 굳어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벨리우스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벨?”
“아, 음, 미안해, 엘. 그냥, 갑자기 조금 의문이 생겨서.”
“의문?”
“……네가 싫어할 만한 생각이야.”
시벨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바로 이해했다. 아마도 지금 내 모습에서 과거의 엘을 떠올린 거겠지. 한때 카노스가 흉내 냈던 ‘엘’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 아무래도 내가 본성을 드러낸 성격 쪽이 그와 더 가까운 것 같긴 했다. 서운하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이젠 크게 상심할 정도도 아니라서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상관없으니까 그냥 말해도 되는데.”
“들으면 정말 기분 상할 거야.”
“괜찮으니까 말해봐. 무슨 생각이었는데?”
“……엘이 왜 그곳에 있었을까, 라는 생각.”
“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서 눈을 깜빡였더니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고개는 날 향해 있는데, 생각에 잠긴 건지 초점을 잃은 시선이 어딘가 다른 곳을 부유하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