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76화 (376/608)

제376화

“폐하께서 꽤 참신한 방법을 쓰시는군.”

담담한 얼굴로 전문을 읽어내린 황태자 라온휘젠이 종이를 그대로 구겨 던졌다. 그의 등장 자체가 너무 뜻밖이었던 탓에 유스티안 총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 산재한 모반에 대한 문제를 묻는다거나, 위험하니 몸을 피해야 한다고 알려야 한다거나, 하다못해 언제 돌아왔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모두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근위대는 내가 맞이하겠소. 혹시 모르니 여러분은 학생들을 데리고 피해 계시오.”

그저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을 뿐.

이윽고 황태자가 스쳐 지나가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그 뒤를 곧바로 따라서 이어지는 행렬이 있었다. 유스티안은 그제야 황태자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늘 함께하는 낯익은 일행과 더불어 처음 보는 사람이 세 명 정도 더 있었다. 그들 모두 후드를 쓰고 있어서 모습을 볼 순 없었으나 두 명은 꽤 어려 보였다. 체구가 작은 것을 보면 여성일지도 몰랐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황제의 과감한 행동을 봐선 이미 그는 황태자를 치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황태자는 반역의 진위와는 관계없이 일단 끌려갈 것이다. 군대가 여까지 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고, 그 시간이면 모두 아카데미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차라리 모두 같이 대피해서 일신을 도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제야 밀려드는 생각에 유스티안이 일행 쪽으로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그때 무심코 고개를 든 한 사람에게서 스치듯 눈동자가 비쳤다. 사방이 어둑한 중에도 선명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새파란 눈동자였다. 잠시간 시선이 마주쳤고,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아볼 수 없는 그가 입술 끝을 올렸다. 그 순간 유스티안은 자신이 하고 있던 생각을 전부 잊었다. 고작 그 짧은 한순간에 압도당했다.

그가 멍해진 사이 경비대가 주춤거리며 그들이 나갈 길을 텄다. 당당히 선 뒷모습들이 거뭇거뭇한 그림자에 삼켜지다 완전히 어둠 속에 파묻힐 때까지, 그곳에 있던 모두가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 밤에 많은 것들이 바뀔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 *

어둠의 장막이 깊이 드리운 시각, 별빛에 의지해 걷는 길은 고요하기만 했다. 빛으로 된 모래 가루가 흩뿌려져 있는 듯한 밤하늘, 볼을 잔뜩 부풀린 개구리와 풀벌레의 가냘픈 울음소리, 발밑에선 제법 자란 수풀이 폭신하게 밟히는 소리가 사박사박 울렸다.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제법 운치 있을 광경이었다.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상쾌한 공기 속에 희미한 불순물이 섞여 있었다. 기름과 나무가 타는 냄새였다.

“반역이라…….”

무심코 혼자 중얼거린 말에 앞서 걷던 라온휘젠의 등이 움찔 떨렸다. 이미 총장을 비롯한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된 후였다. 스치면서 봤던 그들의 희게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다들 학식이 높은 교수들일 텐데 느닷없이 닥친 상황 앞에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 깊은 자국 최고의 명문 아카데미가 하루아침에 멸문지화의 위기에 놓였으니 그들로서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황제가 의심이 많은 사람인가 봐요.”

“…….”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야 이미 뻔했다. 정쟁에서 중상모략이야 흔히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군대부터 일으킨 건 누가 봐도 황제의 인성 문제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는 상황도 거북한데 심지어 진압하려는 장소는 학교였다. 그중에는 외국에서 온 학생도 있을 것이다. 대체 뒷감당을 어쩌려고 이런 대책 없는 짓을 벌인 건지 몰라도 그런 황제 밑에서 자랐으니 저 황태자도 그리 평탄한 인생은 아니었겠구나 싶었다.

씁쓸한 기분을 삼키고 있는데 눈치 없이 옆에서 뭔가가 팔을 쿡쿡 찔렀다. 슬쩍 돌아보니 세리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눌러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아뇨, 그게…… 촉감이 인간이랑 똑같네요?”

“안 똑같으면요?”

“막 몸을 통과하거나, 젖는다거나 이러지 않네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물의 정령왕인 거 맞으시죠? 진짜로?”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해요.”

이젠 지겨울 정도의 질문이라 대답이 저절로 시큰둥해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세리엄만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탄성을 뱉어내는 중이었다.

“세상에, 진짜 물의 정령왕이라니! 아셀, 다이, 너희 들었어? 진짜 정령왕이래.”

“아, 제발. 세리엄 님, 이제 그만하세요. 창피해서 제가 더는 못 보겠습니다.”

“아니, 그치만 정령왕이잖아. 정령왕이라고?”

……그냥 확 버리고 가 버릴까.

문득 이 주변이 평지가 아니라 논두렁이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밀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저기, 정말로 정령…….”

“나 정령 맞구요. 인간처럼 보여도 정령왕인 것도 맞구요.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물의 정령왕이에요. 한 번만 더 물으면 신나는 수로 탐험을 하게 될 거예요. 지하에서 강으로 흘러가 바다까지 떠내려가고 싶으면 한마디만 더 해요.”

“……이제 입 다물겠습니다.”

나직한 경고를 듣고서야 세리엄은 흥분을 감추고 조용해졌다. 역시 말보단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었다. 그래도 처음처럼 경직된 것보다는 지금 이런 모습이 더 낫긴 했지만.

“나 완전 반갑죠?”

산뜻하게 건넨 인사가 무색하리만치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공기마저 경직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무거운 적막이었다. 나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만 있는 사람들을 느긋하게 돌아보았다.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든 상태였고 아셀과 세리엄은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일인가 싶었는데, 솔직히 기척도 없이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나라도 기겁하긴 할 것 같았다. 너무 심하게 놀라게 했나 싶어 미안해졌지만 그만큼 성공했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한 기분이 차올랐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은근 성격이 나쁜 걸지도 모르겠다.

“계속 그렇게 얼빠진 얼굴로 있을 거예요?”

이제 정신 차리라는 뜻에서 한 번 더 말을 걸었더니 멍해 있던 자들이 다시금 헛숨을 삼켰다. 허둥거리는 이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시벨리우스였다.

“엘. 너 진짜 엘 맞아?”

“그럼 내가 가짜 엘이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아, 아니, 설마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해서…….”

“후후후, 내가 생각해도 내 등장이 좀 드라마틱하긴 했지.”

“드라……?”

“아, 여기선 없는 표현이겠구나. 매우 극적이라는 뜻으로…….”

“엘 님!”

적당한 표현을 설명하려는데 그 순간 알리사가 내게 와락 달려들었다. 받는 쪽의 부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멧돼지 같은 돌격이었다. 기습적인 공격이나 다름없는데도 밀려 넘어지지 않은 건 순전히 내가 정령왕인 덕분일 것이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가 피식 웃으며 내게 매달려 있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전히 씩씩하네, 알리사.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엘 님이 여길 어떻게 왔어?”

“그야 당연히 알리사가 보고 싶어서 왔지.”

“으아, 나도! 나도 진짜 보고 싶었어!”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는데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난 후로 이렇게 오래 헤어져 있었던 게 처음이긴 했다. 갑자기 떠나서 연락도 없었으니 많이 서운했겠지. 어른스러워도 아직 어린아이인데 미처 배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사나 씨한테 들었어?”

“아니, 이사나는 모르는 일이야. 우리가 만난 줄 알면 깜짝 놀랄걸?”

“그럼?”

“당연히 알아서 찾아온 거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있는 곳 하나 못 알아내려고.”

“그건 그렇네! 엘 님이니까!”

올려다보는 알리사의 눈빛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면박을 각오한 잘난 척이었는데 순수한 긍정이 돌아오니 되레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시금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고 있으려니 머뭇거리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어색하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상황을 살피다가 우리가 흩어진 걸 보고 걱정돼서 온 거야?”

“음, 뭐, 비슷해.”

“역시 그랬구나. 멋대로 계획을 변경해서 미안.”

“아냐,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던 거잖아. 기사들이 같이 있는 걸 보면 이사나도 동의한 일인 것 같은데.”

웃으며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 알렉이 시선을 마주해 왔다. 쓰고 있던 복면을 벗은 그는 격정에 차오른 사람처럼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엘 님.”

“오랜만이에요, 알렉.”

“예,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기서 엘 님을 뵙다니 꿈을 꾸는 기분입니다. 제가 쉽게 죽을 팔자는 아닌가 보네요.”

그러나 싱글거리는 그와는 달리 뒤에 서 있는 다른 기사들은 여전히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뽑았던 검은 다시 집어넣은 상태였지만 한눈에 봐도 경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몹시 긴장한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눈 적은 없어도 전장에서 몇 번 마주쳤으니 내 얼굴을 몰라볼 리는 없을 텐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황태자 일행 쪽도 비슷해서, 다들 동상처럼 얼어 있는 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처음엔 내 등장 방식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아셀을 보고서는 생각을 바꿨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내가 다양한 이능력을 갖고 있다는 걸 이미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그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게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나를 바라보는 그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전조였다.

“흐음?”

일부러 빤히 바라봤더니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게 눈에 보였다. 필사적으로 피하는 시선에 수많은 감정의 동요가 읽혔다. 두려움과 거북함, 그러면서도 숨기지 못하는 격렬한 흥분과 호기심. 그건 마치 사람이 아닌 미지의 무언가를 대하는 듯한…… 아, 그렇구나?

“내가 누군지 알았나?”

“……!”

경직된 공간에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굳이 듣지 않아도 대답을 알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그래, 내가 정령왕인 걸 알았구나. 이제야 이들의 뜻 모를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이사나가 시큐엘을 소환한 적이 있었지. 상급 정령을 한 번에 둘이나 소환하기에 누군가는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겠거니 했는데 역시 그때 전부 들통났던 모양이다.

어쩐지 카노스에 대한 언급도 편하게 하더라니, 내친김에 전부 공개하기로 한 건가? 이제 딱히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니 나로선 나쁠 건 없었다.

단지 지나치게 얼어붙은 이 분위기는 어떻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냥 한마디 했을 뿐인데 이제 사람들은 숨도 거의 쉬지 않는 상태였다. 딱히 정령왕이란 존재가 공포의 대명사인 것도 아닌데 뭘 저리 기겁하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인간들 사이에 내가 모르는 속설 같은 거라도 있나? 정령왕을 알아보면 죽는다거나, 지옥으로 끌려 들어간다거나, 삼대(三代)가 저주를 받는다거나? 전부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한데 다들 지나치게 겁을 먹은 걸 보니 고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째선지 알렉은 물론이고 알리사까지 굳은 것 같았다(시벨리우스도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뭔가 표정이 묘했다). 이것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어서 나는 넌지시 알리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왜 그래?”

“아, 아니. 엘 님 분위기가…… 또 그 느낌이라…….”

“그 느낌?”

“뭔가 두근두근한 느낌?”

그건 또 뭐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라 미간을 좁혔더니 알리사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뭐, 나중에 다시 물어볼 기회가 있겠지. 일단은 화제를 바꿔볼 요량으로 나는 그쯤에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을 넘어 어른거리는 횃불이 있는 곳을 집중하니 카메라 화면이 당겨지듯 그곳의 광경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어디 보자. 군대 맞네요. 숫자는 기사만 한 삼백 명 정도?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근위대인가? 마법사에 일반 병사들도 있어요. 꽤 본격적인 규모인 것 같은데요?”

“……?”

내가 하는 말을 방 안의 일행들은 한동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치 주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만 멀뚱히 깜빡거리는 그들을 향해 나는 창 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쪽 상황. 궁금했던 거 아니었어요?”

“아!”

그제야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못 박힌 듯 꼿꼿하던 자세가 한순간에 풀어지면서 각자 취하는 행동도 달라졌다. 특히 라온휘젠의 반응이 가장 빨랐다.

“지금, 마법사도 있다고 하셨습니까?”

본인이 마법사인 탓인지 그가 주목하는 부분도 그쪽이었다. 다급히 이어진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에 보이는 광경을 설명했다.

“검은 망토 로브 차림이고 허리에 굵은 띠를 두른 이들이 있어요. 스왈트에선 이런 복식은 주로 마법사가 하던데, 카터스는 다른가요?”

“아뇨, 같습니다.”

“그럼 마법사들이 맞겠네요. 하지만 전부 다 진짜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아요. 마력을 가진 이들도 있고, 없는 이들도 있거든요. 아, 그래도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마법사가 확실해요. 저 중에선 제일 강한 마법사겠네요.”

“그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나이는 60대쯤 되어 보이고, 노인치고는 풍채가 좋아요. 회색 머리인데 이마가 조금 벗겨진 형태고, 갈색 눈동자네요.”

“……다니멜.”

돌연 라온휘젠의 눈빛이 형형해지는가 싶더니 그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전하!” 놀란 호위가 그를 따라 나가면서 자리는 강제로 파장을 맞이했다. 너무 순식간이라 아무도 그를 말릴 틈이 없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남은 사람들과 함께 어리둥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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