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화
“전하께서 들으시면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이사나 폐하께서는 제위에 막 오르셨을 때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이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공이 국정을 잘 치리하고 있었거든요. 폐하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고, 그래서 약한 모습을 많이 보이셨지요.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또래의 평범한 소년처럼 보였습니다.”
“……정말 믿기 힘들군.”
“전혀 의외지요? 그때의 저희는 충정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으로 폐하의 곁을 지켰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이라서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진심으로 섬기고 있으니까요.”
“마음이 왜 달라졌지?”
“대공이 그 추악한 본심을 드러낸 날, 폐하를 모시고 필사적으로 황궁을 빠져나가면서 동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때 폐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용맹하고 충직한 기사들이여, 죽어서도 너희의 이름을 잊지 않겠노라’고. 또한 ‘너희의 목숨이 아깝지 않을 황제가 되어 반드시 보답하겠노라’고.”
“…….”
“솔직히 이미 처참한 상황이라 곧 붙잡혀 다 죽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폐하의 말씀이 허세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런데도 그때 개안한 듯이 뜨거운 마음이 찾아들었습니다. 이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어도 좋겠다고요.”
“……묘한 일이군. 폐하는, 자네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기에, 그 모습을 보고 믿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알렉의 눈빛이 단숨에 초롱초롱해졌다. 기뻐하는 것이 역력한 그를 보고 라온휘젠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황제 폐하와 저희는 같은 순간에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로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저희끼리만 이 사실을 아는 건 아까우니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겠네요.”
“그대들이 먼저 신임할 모습을 보였기에 믿게 된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기쁜가?”
“공적을 알아주시는 것도 결국 신뢰의 표현이니까요. 생각보다 많은 기사가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한답니다. 의심은 손쉽게 머리를 파고들고, 믿음보다 더 빠르게 마음을 장악하죠. 그렇기에 누군가를 믿기로 하는 것도 상당한 결심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하기로 하셨으니 폐하께선 끝까지 저희를 믿어주실 테죠.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
라온휘젠의 눈동자가 다시금 흔들렸다.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걸 봐선 아무래도 이미 이사나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렉에게 감탄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이런 달변가인 줄은 몰랐다. 약간 경박한 편에 푼수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무나 황제의 친위대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까. 그의 뜻밖의 면모를 알게 된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누구든 자신을 믿지 않는 이를 따르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전하께서도 먼저 알아봐 주시는 것부터 시작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둘러보시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원석 같은 이들이 있을 겁니다.”
부드럽게 이어진 말에 옆에서 아셀과 세리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라고 불린 호위 기사도 동조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였다.
“주제넘은 말씀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알렉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에도 라온휘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불쾌했던 것 같지는 않고, 이래저래 상념에 잠긴 듯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인 알렉이 슬쩍 화제를 돌려 창가 쪽을 가리켰다.
“근데 아셀 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쪽 높은 곳에 보이는 큰 성은 뭡니까?”
“네? 아, 그쪽에서 보이는 거라면 아마 황궁일 겁니다. 저렇게 어두운데 그게 보이십니까?”
“이 정도도 알아보지 못하면 기사 작위는 반납해야죠. 여기서 황궁이 보이는군요. 생각보다 거리가 가깝네요. 마차로 가면 얼마나 걸립니까?”
“40분 정도 걸리는 편입니다.”
“헤에, 정말 가깝네요.”
바로 그때 알렉과 함께 황궁 쪽을 바라보고 있던 기사 한 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만요, 알렉 경. 저기에 횃불이 보입니다.”
“……엉?”
그 말에 따라 시선을 보내니 정말로 경사진 부근에서 횃불이 보였다. 수풀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 했는데, 얼핏 보이는 숫자만도 꽤 많은 편이었다. 중턱에서부터 시작된 희미한 불씨의 줄기가 뱀 꼬리처럼 아래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무리 지어 내려오고 있는 듯했다.
“군대로군요.”
차분히 살피던 알렉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라온휘젠이었다. 그가 황급히 창문가로 몸을 내밀었다.
“군대? 누가 황궁으로 진격한다는 건가?”
“아뇨, 반대입니다, 전하.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럼 설마 황실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저들의 목적을 짐작하시겠습니까?”
“아니, 모르겠군. 폐하께서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다. 대체 무슨 일이…….”
그 순간 아카데미의 건물 하나에서 강한 불이 켜졌다. 깜짝 놀란 이들이 모두 급히 몸을 숙이는 동안, 나는 몸을 더 내밀고 바깥을 살폈다. 경비대로 보이는 이들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고, 건물 안에서는 잠옷 차림을 한 사람들이 허둥지둥 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만나는 장소가 황태자의 숙소에서 가까운 편이라 바람을 타고 오는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이게 다 무슨 말인가? 군대가 오고 있다니!”
“총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급히 전갈이 도착했는데! 폐하께서……! 폐하께서 이곳을 토벌하신다고 합니다!”
“뭐라고?”
울려 퍼지는 경악성에 몸을 굽히고 있던 일행들의 얼굴이 다들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립니까? 나르젠 폐하께서 왜 이곳을 토벌하신다는 거죠?”
“저들이 잘못 아는 거 아냐? 말이 안 되잖아. 여긴 아카데미야. 철부지 학생들과 꼬장꼬장한 교수들밖에 없는 곳이라고. 대체 뭘 토벌하겠어?”
아셀과 세리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라온휘젠은 선뜻 대답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내밀어 창밖의 상황을 다시 살펴본 알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저희가 이곳에 있다는 정보가 새나간 건 아니겠죠.”
“그렇다 해도 나르젠 폐하가 이러실 분은 아닙니다.”
“끄응, 그렇긴 하죠.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군요. 군대가 정말로 이곳으로 온다면 확실해질 테죠. 그러나 마냥 기다릴 순 없으니 저쪽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일단 저 혼자 다녀올 테니, 여러분은…….”
“아니, 알렉도 안 가도 돼요.”
나서야 할 적기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대답하면서 나는 순식간에 형체를 입었다. 모두가 실시간으로 경악해 가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저 정도 거리면 그냥 여기서도 살필 수 있거든요. 나한테 맡겨요.”
“……엘!?”
“에, 엘 님?!”
반응은 한 발짝씩 늦게 터졌다. 귀신이라도 본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나 완전 반갑죠?”
* * *
카터스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얀 아카데미」. 수재만 다닐 수 있는 명문 대학이라는 명성엔 역대 총장들의 화려한 경력도 뒷받침됐다. 대마법사였던 최초의 총장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얀 아카데미 총장 자리는 전부 마스터나 현자의 칭호를 받은 초월자들이 맡아왔다. 그러나 벌써 십수 년 차 자리를 유지 중인 현 총장 유스티안은 그런 오랜 전통을 무너트리고 최초로 오른 평범한 학자 출신의 총장이었다. 심지어 그가 총장을 맡게 된 경위도 어처구니없었다. 전 총장이 일방적으로 그를 후임으로 임명하고 떠나버린 탓이었다. 어디까지나 ‘총장의 선출은 전임자의 고유 권한’이라는 규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선임이었다.
아카데미의 수준을 결정짓는 요소엔 총장의 역량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일 것이다. 더군다나 명문이라는 위명이 아까우리만치 얀 아카데미는 벌써 십 년이 넘도록 별다른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 때부터 천재로 이름 높았던 황태자 라온휘젠도 막상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는 크게 눈에 띄는 성취를 보이지 못했다. 그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아 유스티안 총장은 늘 속이 쓰렸다. 하필이면 전 총장이었던 현자 필립이 역대 가장 유능했던 총장으로 활약한 사람이었기에 그 차이가 더 선명했다.
그렇게 대단하던 전 총장이 왜 갑자기 떠났는지, 왜 하필 평범한 유스티안을 후임으로 정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엉뚱한 선임 탓에 유스티안은 계속 그 자리를 탐내고 있던 현자 다니멜과 척을 지게 됐다. 황실 수석 마법사인 그의 미움을 사게 되면서, 아카데미에 대한 황실의 평가도 더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황태자가 말없이 휴학계를 내고 사라지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이 다니멜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야 했을 때 유스티안은 딱 죽고 싶은 심정이 뭔지 절절하게 느꼈다. 그날 그는 몇 시간 동안 다니멜로부터 폐부를 비꼬는 말은 물론이오,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할 거라는 으름장까지 들어야 했다.
본래 풍성하던 모발은 지난 십 년 새 거의 다 빠져 이제 숱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그는 매일 밤 정안수를 떠놓고 남은 모발이라도 건사할 수 있길 빌었다. 그러나 야속한 모발의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새벽녘, 느닷없이 울린 소음에 유스티안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아카데미에 위급한 일이 벌어질 때만 울리는 경보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등허리를 스치는 섬뜩한 감각에 그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무, 무슨 일인가?”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장치를 눌러 신호를 연결하기 무섭게 바깥쪽에서 절규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유스티안 총장님! 비상사태입니다! 저희 쪽으로 군대가 오고 있습니다!
“뭣?”
―어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그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겉옷을 입고 문을 나섰다. 마찬가지로 경보를 듣고 일어난 교수들이 잠옷 차림으로 그를 따랐다. 서둘러 현관으로 달려가니 경보를 울렸던 경비대가 새파란 안색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군대가 오고 있다니!”
“총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급히 전갈이 도착했는데! 폐하께서……! 폐하께서 이곳을 토벌하신다고 합니다!”
“뭐라고?”
너무 놀란 탓에 유스티안은 숨조차 삼키지 못했다. 이대로 딱 뒤로 넘어가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심장이 조금만 약했어도 그대로 멎었을지도 몰랐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폐하께서 이곳을 치러 군대를 보내셨다고?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으란 말인가? 대체 누가 그런 허무맹랑한 전갈을 보낸 건가!”
“시안 교수님이십니다.”
“시안 교수가? 그러고 보니 그가 지금 황궁에 가 있었지. 하지만 그는 허풍을 떠는 사람이 아닌데…….”
“그러니 사실이라는 겁니다! 새벽에 잠깐 깨셨다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고 급히 전갈을 보내셨다 합니다. 근위대가 움직였습니다! 근위대장인 알마스너 후작이 직접 지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쪽을 보십시오! 저게 다 군대입니다!”
경비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유스티안은 다시금 숨을 삼켰다. 멀찍이 보이는 황궁 쪽에서 희미한 불빛의 행렬이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새벽에 저만한 행렬이 움직일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로 군대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전갈을 받지 못했다면 급습을 당했으리라. 유스티안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버텨 세웠다.
“여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있는 곳이야! 대체 폐하께서 무슨 명분으로 이곳을 치신다는 겐가!”
“바, 반역죄라고 합니다!”
“뭣?”
“황태자 전하가, 학생들에게 선동되어 이곳에서 모반을 꾀하고 계신다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유스티안은 기가 막혀서 자기도 모르게 꽥 소리 질렀다. 그가 보아온 황태자는 조용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수업엔 충실했지만 세력을 만들거나 교우 관계를 쌓는 일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대체로 혼자 활동했고, 아끼는 몇 명만 곁에 두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학생들과 모반이라니 말이 될 리가 없었다. 이미 황태자였다. 전통성으로도 흠잡을 데 없고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까지 받는 명실공히 완벽한 후계자! 가만히 있어도 절로 황제에 오를 이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 그가 잠적했다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에 있지도 않은 황태자가 이곳에서 모반을 꾸밀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니멜, 다니멜 님에게 연락을 해봐야겠군! 뭔가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어! 당장 그분 저택으로 기별을 넣게! 어서!”
유스티안이 다급히 외친 말에 경비대는 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총장님.”
“그게 무슨 말인가!”
“황제 폐하 앞에서 태자 전하의 모반 정황을 증언한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현자 다니멜이라고 합니다.”
“……뭐, 뭐라고?”
“이걸 봐주십시오.”
경비대가 그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전갈의 내용을 상세하게 적은 전문이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유스티안은 빼앗듯이 종이를 받아들고 읽어내렸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종이를 움켜쥔 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현자 다니멜이 황태자가 아카데미 안에서 모반을 꾸민 혐의를 입증. 진노한 황제께서 황태자는 물론 그에게 불손한 사상을 심은 아카데미를 진압하라 명령하셨다고……. 심지어 신원을 불문하고 전원 사살하라는 명령이라니…….”
“총장님, 어찌할까요?”
“이, 일단 항복기를 올리게. 우리가 역도가 아니라는 걸 알려야 해. 근위대장인 알마스너 후작은 상식적인 사람일세. 오해가 풀리면 아무리 그런 명령이 있어도 무작정 진압부터 하려 들진 않을 테지!”
“예, 알겠습니다!”
“자네는 학생들을 모두 깨워 강당으로 모이게 하게. 만약의 경우 아이들을 탈출시켜야 할 거야.”
“예!”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는 중에도 유스티안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손바닥이 축축해지면서 쥐고 있던 종이가 젖는 것 같았다. 그가 손을 옷깃에 닦으려던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에게서 가볍게 종이를 빼앗아갔다.
“……이게 무슨 짓!”
분노해서 돌아본 유스티안은 그대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함께 있던 경비대와 교수들도 모두 입을 벌렸다. 그곳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훤칠하게 큰 키, 단정하면서 수려한 외모. 희뿌연 불빛에 드러난 머리칼은 짙은 선홍색을 머금고 있었다. 이 제국에서 단 두 명만이 지니고 있는 고귀한 색이었다.
“화, 황태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