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74화 (374/608)

제374화

‘황태자가 어디 가서 이런 취급 받을 사람은 아닐 텐데.’

아니다 뿐인가. 신분도 능력도 어디 가서 빠질 일이 없는 사람이다. 솔직히 이동 마법 스크롤을 그가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꽤 놀랐다. 인간 중엔 공간 이동 마법을 할 수 있는 마법사 자체가 드물다고 들었다. 마법진을 스크롤에 저장하는 것 또한 누구나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고도의 기술일 것이다. 약관을 넘지 않은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 엄청난 일이었다. 천재라고 하더니 정말 대단한 마법사이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뭐하나. 그 굉장하다는 마법 실력이 정작 가장 잘 보여야 하는 사람에겐 아무런 감동도 끌어내지 못하는 것을.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사탕수수를 잘 정제해서 가장 깊은 단맛을 찾아냈더니, 그걸 맛보여줄 이가 이미 사탕과 크림으로 만든 과자 집에서 사는 격이었다.

남이 보기에 이럴 정도이니 본인의 속은 더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 라온휘젠은 뚫어지게 알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불타는 시선을 느꼈는지 알리사가 슬그머니 시벨리우스의 뒤로 숨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척척 빠르게 걸어온 라온휘젠이 알리사 앞에 똑바로 섰다. 그리곤 움찔하는 그녀에게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다음엔, 멀미가 나지 않게 고안해 보겠다.”

“네? 아, 네.”

“반드시 성공하겠다.”

“그러세요.”

“꼭 해낼 거다.”

“……? 힘내요.”

그제야 만족한 듯 라온휘젠이 상기된 얼굴로 물러섰다. 그 뒤에서 모두가 아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누군가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기엔 방이 전체적으로 어둡기도 했다. 랜턴을 들고 있긴 했지만 외부로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밝기를 최대한 줄인 데다가 두꺼운 천으로 덮어두기까지 한 상태라 바로 앞만 조금 비추는 정도였다. 모두에게, 특히 세리엄과 그 일행에게는 몹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빛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틀림없이 무엄한 시선을 들켰을 테니까. 그렇게 라온휘젠만 알지 못하는 한마음의 현장이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행동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왔다. 라온휘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리사가 피식 웃은 것이다.

“황태자님, 생각보다 재밌는 사람이네요.”

“……!”

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알리사를 돌아보았다. 라온휘젠도 꽤 놀랐는지 당황한 표정을 하다가 곧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쓰다듬었다.

“고, 고맙다.”

“푸하하, 왜 고마워해요?”

“그…… 재밌다는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라…….”

“그렇다고 인사까지 하는 거예요? 황태자님, 평소에 엉뚱하다는 말 많이 듣지 않아요?”

“아니, 처음인데…….”

“정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 엉뚱한 것 같은데?”

“으음, 기대에 못 미쳐서 미안하다.”

“내가 미쳐. 이번엔 사과예요? 아, 진짜 재밌네.”

딱히 대단한 대화도 아니건만, 누가 낙엽만 굴러가도 웃을 나이 아니랄까 봐 알리사는 눈물까지 훔쳐가며 웃었다. 라온휘젠을 바라보는 눈빛에 전에 없는 호의가 가득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편해진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라온휘젠이 보인 엉성한 면모가 경계를 풀게 한 게 분명했다. 헉, 잠깐. 이거 혹시 그건가? 상대에게서 생각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면 매력을 느끼게 되는 그런 효과?

‘설마 그런 뻔한 전개가…….’

아니지. 뻔하다는 건 그만큼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소리잖아.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게다가 라온휘젠도 어쩐지 얼굴이 붉은 것이, 왠지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동안엔 뭔가 의무적으로 알리사의 환심을 사려고 할 뿐 딱히 감정이랄 게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의 그는 동요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적인 부분이든 연애감정으로든 정말로 호감을 품게 된 것이 분명했다.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의 다른 버전인가? 날 재밌다고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머릿속에서 위험 경보가 울렸다. 사이가 나쁜 것보다야 친한 게 좋지만 이런 식으로 단계를 훌쩍 건너뛰는 건 위험하다. 그동안은 이사나가 워낙 알아서 잘하고 있어서(?) 별걱정을 안 했는데, 잠시 떨어지게 됐다고 바로 이런 흐름이라니! 역시 이쪽도 운명의 별은 운명의 별인 모양이다. 때마침 일련의 흐름을 끊어내는 사람이 없었다면 체면이고 뭐고 무작정 튀어나갈 뻔했다.

“자자, 그럼 이제 다들 속은 진정된 것 같은데.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다음 일정을 짜보는 게 어때? 이대로 이 좁아터진 방에서 밤을 새울 게 아니라면.”

기특하게도 상황을 수습하러 나선 사람은 시벨리우스였다. 다행히 그가 끼어들자 알리사의 관심은 아주 쉽게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게 못내 아쉬웠는지 라온휘젠이 그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물론 그걸 뻔히 느꼈을 시벨리우스는 태연히 무시했다.

“그러고 보니 시벨 씨가 쓰는 주술엔 이동 능력은 없어?”

“아, 축지술이라고 비슷한 게 있긴 해. 하지만 그 술법은 내가 가야 하는 장소의 모습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쓸 수 있어. 게다가 나만 쓸 수 있는 거라 다른 사람을 데리고 이동할 수도 없고.”

“그렇구나. 좀 아쉽네.”

“……뭐, 접신을 하면 그 신의 능력이 어떤지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긴 한데…….”

이어진 말은 대답이라기보다는 그 혼잣말에 가까웠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을 알아들은 알리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접신? 그게 뭐야?”

“어? 들었어?”

“응, 신의 능력에 따라 뭘 할 수 있다고?”

“으음,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어. 어차피 난 못하는 거야.”

조금 씁쓸한 듯이 웃어넘기는 그를 보고 나는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룬의 혈통이 지닌 고유의 힘, 몸 안에 신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라고 했던가.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설명할 때도 시벨리우스는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아, 혹시 트로웰이 말하려던 게 이건가?’

그때 분명 룬에 대한 언급을 했었지. 그릇이라는 단어도 들렸던 것 같다. 혹시 룬이 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어중간하게 눈을 떴다고 했으니 어쩌면 시벨리우스가 고유 능력을 각성하는 중인 건지도 몰랐다. 아직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자세한 건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근데 능력을 회복하면 더 대단해지는 거 아닌가? 그걸 카류안이 알아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트로웰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사실 일행을 기다리는 김에 정령계에도 잠시 들러봤는데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대지의 영역은 완전히 검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겉으로 난 입구는 굳게 닫힌 채였고, 언령을 사용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시도하려 할 때마다 부드럽게 밀어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차분히 가라앉은 고요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역소환되면 계약자만이 아니라 정령왕 쪽도 타격을 받는다. 한동안 쉬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되는 줄은 몰랐다. 이프리트와 미네도 방진을 만들고 난 후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제 영역에서 쉬는 중이었으나 이런 형태는 아니었으니까. 그간 장난으로 라피스를 협박하는 용으로 자주 써먹었는데, 이제 농담으로도 역소환하겠다는 말은 못할 것 같았다. 트로웰의 경우엔 이미 기력을 많이 소모한 후에 역소환까지 겹쳐진 거라 상태가 더 악화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깨어날 때까지 당분간은 상황을 주시하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 * *

내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방 안은 본격적인 준비 과정에 진입했다. 가장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 건 알렉과 기사들이었다. 알렉이 문 근처를 살피는 동안 한 명은 다른 방을, 나머지 두 명은 창가 쪽을 살폈다. 딱히 지시받은 것도 없는데 각자 할 일을 맡아 흩어지는 이들을 나는 새삼스럽게 돌아보았다. 친위대 소속인 알렉이야 내가 당연히 아는 사람이지만, 나머지 세 명의 기사들은 모르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다들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었다. 이사나가 ‘비둘기’라고 부르는, 주로 페리스와 함께 움직이는 특수정찰대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잠시 후 다른 방을 살피러 간 기사가 돌아오면서 주시하고 있던 알렉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어 창가를 살핀 다른 두 명의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은 자신의 짐보따리 속에서 둘둘 말린 가죽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아카데미 교내와 근방의 구조를 간략하게 그린 지도였는데 내게도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지켜보는 동안 그들이 아셀의 설명을 토대로 지도를 만드는 걸 봤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의 숙소가 별채에 가깝다곤 하셨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이쪽은 사람이 하나도 없군요. 이 근방은 순찰하는 경비도 없는 것 같은데 원래 이런 형식입니까?”

“아닙니다. 태자 전하께서 모두 물리신 겁니다. 호위는 평소 곁에 두시는 이들만 두시겠다고 선언하시고, 대신 아무도 근방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죠.”

“그 호위라면 여기 계신 세리엄 경과 다이 경이겠군요.”

“어이,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그냥 측근이거든? 본직은 이 아카데미의 연금술 과목 강사고!”

당연하게 붙은 기사의 호칭에 묵묵히 듣고 있던 세리엄이 발끈해서 대꾸했다. 알렉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외견의 자태는 너무나도 훌륭한 전사의 그것인지라 그만……. 그러게 왜 그리 헷갈리는 체형을 갖고 그러십니까? 누가 봐도 세리엄 님을 연금술사로 보진 못할걸요.”

“타고난 근육질인 걸 어쩌라고!”

“실제로 싸움도 잘하시면서.”

“그야 있는 재능을 썩히는 건 아까우니까 좀 배워서 그런 거지.”

“그건 좋은 자셉니다. 그러니 그냥 이참에 직업을 바꾸시죠. 그게 더 적성에도 맞으실 것 같은데.”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연금술을 그만두면 범국가적인 손실이거든?”

“뭐 그게 사실이래도 전 딱히 상관없는데요?”

“아차! 넌 스왈트 제국 놈이었지!”

그간 꽤 친해진 듯 거침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이들 사이에 친근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는데 이제 보니 황태자의 두 호위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걸 봐선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듯했다.

“뭐, 어쨌든 덕분에 일이 편해졌으니 저희로서는 다행이네요. 황태자 전하의 숙소가 이쪽에 있다고 하셨으니 총장의 집무실이 있는 본관은 왼쪽으로 가야겠군요. 현자 다니멜의 자택은 정문에서 바로 보인다고 하셨죠?”

“네, 혼자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라 알아보기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바로 출발하시려는 겁니까?”

아셀의 질문에 지도를 살피던 알렉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정탐부터 할 겁니다. 교내 순찰 인원과 교대 시간을 파악해야 하니까요. 다니멜의 현재 위치와 경호 인력의 동선도 알아봐야 하고요.”

“죄송합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좋을 텐데 저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해서…….”

“아닙니다. 지금까지 주신 정보만으로도 이미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셀 님이 아니었으면 이곳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만 한참 진을 뺐을 겁니다.”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킨 알렉이 입고 있던 겉 망토를 벗었다. 그러자 새카만 일색으로 무장한 복장이 드러났다. 나머지 세 명의 기사들도 모두 같은 복장인 걸 보아 잠입을 위해 일부러 맞춘 듯했다. 복면까지 꼼꼼하게 착용하고 나니 그들은 눈만 덜렁 내놓은 상태가 됐다. 어디 가서 암살자라고 오해받기 딱 좋은 차림이었다. 서로 고개를 끄덕여 준비를 마쳤음을 알린 후 알렉이 다시 창가의 커튼을 들춰 바깥을 살폈다.

“어디 보자. 자정을 약간 넘겼던가요? 슬슬 경계가 가장 느슨해질 시간이군요. 미리 말씀드린 대로 매일 아침 여기 창틈으로 표식을 남겨 두겠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면 저희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는 유쾌하게 말했지만 듣는 입장에선 결코 가볍게 들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모두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라온휘젠 역시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 마법 도구는 아무것도 안 가져갈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보조 도구를 내주겠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괜찮습니다.”

“내 실력을 못 미덥게 여기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마법 물품은 마나의 흔적으로 제작자를 추적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잡히거나 죽을 경우를 대비해 황태자 전하와 연결점이 될 만한 건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게 좋습니다.”

“……!”

“혹 운 좋게 저희 시신이 버려지는 곳을 알게 되신다면 유품이나 추려 폐하께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육신은 이곳에서 스러지더라도 저희의 기상만은 주군 곁에 있을 수 있을 테지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이어진 말에 라온휘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무겁던 분위기가 더 깊게 가라앉는 순간이기도 했다. 알리사의 얼굴이 울상이 된 걸 보고 알렉이 얼른 두 손을 흔들었다.

“아, 물론 절대 쉽게 죽을 생각은 없지만 말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사실 그냥 조사만 하는 것뿐인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죠.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네 같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니, 황제 폐하가 부럽군.”

“전하의 곁에도 좋은 분들이 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너무 적지.”

라온휘젠이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알렉이 슬쩍 눈을 접어 웃었다.

“전하, 주제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뭐지?”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속한 친위대의 경우입니다만. 저희는 황제 폐하의 기사이기에 당연히 그분을 지킵니다. 하지만 임무라는 점을 떠나 진심으로 그분을 섬기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라온휘젠이 두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나도 이 부분은 들어볼 기회가 없던 얘기라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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