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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372화 (372/608)

제372화

이게 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마음의 각오를 할 겨를도 없이 연거푸 터져 나오는 충격적인 내용에 나는 가만히 듣는 것밖에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혼란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어깨를 짚는 손길이 느껴졌다. 엘뤼엔이었다. “이게 다 사실이야?” 간신히 내뱉은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계 쪽에서 계속 조사하던 부분이었다. 경로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이쪽으로 좁혀지더군.”

“그, 그렇구나.”

“미안해, 엘.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이번에야 알았어. 정령왕의 소멸 시기를 이용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했는데, 설마 발설자가 우리 쪽이었을 줄이야. 면목이 없다.”

디아곤이 침울한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그 옆에서 오칼은 아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전 마족과 교류를 즐기는 편이었고, 그자는 오랜만의 방문객이었습니다. 대접하며 이것저것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분위기가 편해졌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나오게 된, 그냥 지나가듯이 흘린 말이었습니다. 설마 그자가 그 말을 듣고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고작해야 물의 정령왕이 곧 소멸한다는 내용이었다. 대다수가 들어도 그냥 그러냐는 반응밖에는 하지 못할, 딱히 상관할 수도 없고 관련될 수도 없는 정보. 설마하니 그 별것 아닌 내용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거라곤 아마 누구라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충격적이긴 했지만 오칼에게 화가 나진 않았다. 그에게도 이건 재앙 같은 경험일 테니까. 그의 할아버지가 본인도 알지 못하는 마법을 그에게 걸어둔 것처럼 말이다.

“고의가 아니었다 해서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지.”

그러나 엘뤼엔의 평가는 냉정했다. 말문이 막힌 듯 침울해져서 입을 다문 오칼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본 그가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번 일이 끝난 후에도 근신 처분을 받을 거다. 하지만 달리 바라는 처벌이 있다면 말해라. 그게 무엇이든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이뤄질 테니.”

말투는 담담했으나 담긴 내용까지 그렇진 않았다. 하물며 ‘형벌의 신’인 그가 거론하는 처벌이란 그 무게부터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창백하던 오칼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얌전히 내가 말을 잇기만을 기다렸다. 그 나름대로 무엇이든 감수하기로 마음을 정한 듯했다.

“으음, 한 가지만 확인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뭐지?”

“유니콘의 눈 말인데요. 설마 그들을 죽여서 구한 건 아니겠죠?”

난 굳어 있는 오칼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니콘의 눈이라는 게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보석은 아닐 것이다. 카류안이 원하는 만큼 구해다 주었다면 수량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유니콘을 공격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듣는 순간부터 내내 신경 쓰이던 부분이라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유니콘, 성마 일족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제가 그걸 모으기 시작한 건 이미 그들이 신계로 이주한 후였습니다. 그들이 사후에 남긴 것들을 모으기만 한 겁니다. 살아 있는 성마에게서 직접 얻은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칼은 펄쩍 뛰어올랐다. 단정하던 얼굴이 이것만은 정말 억울하다는 듯 울상이 된 걸 보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하네. 그럼 난 딱히 바라는 거 없어.”

“엘, 관용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으음, 하지만 본인도 충분히 자책하고 있는 것 같고. 어차피 근신도 한다며. 일부러 가담한 것도 아닌데 그 정도면 된 것 같아.”

“……내 아들은 성격이 너무 무르군.”

한숨을 내쉰 엘뤼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웃어주고 오칼을 돌아보니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관대한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아뇨. 당신이 나쁜 방법으로 유니콘의 눈을 모은 게 아니라 다행이에요. 내 친구 중에 유니콘이 있어서 좀 꺼림칙했거든요.”

“친구요? 아, 정령계를 방문한 유니콘이 있었습니까?”

“아뇨, 여기서 만났어요.”

“……! 아직 지상에 성마가 남아 있었단 말입니까? 놀랍군요. 글렌이 죽은 이후로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글렌?”

왠지 발음이 익숙해서 돌이켜보니 한 사람 짐작 가는 존재가 있었다. 비슷한 형태의 발음, 그리고 시벨리우스 외에 지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유니콘이라면…….

“혹시 리글레오라는 유니콘을 말하는 거예요?”

“아! 맞습니다. 그게 그의 본명입니다.”

설마 했더니 역시 짐작이 맞았던 모양이다. 오칼도 꽤 뜻밖인지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물의 왕께서 글렌을 어떻게 아십니까?”

“안다기보다는, 얼핏 이름을 듣기만 했어요. 아까 말한 친구가 바로 그 리글레오란 유니콘의 동생이거든요.”

“……!”

안 그래도 크게 떠졌던 오칼의 눈동자가 더 크게 떠졌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던 그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물기가 어린 푸른색 눈동자에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감정이 가득했다.

“글렌에게 형제가 있었군요. 일족과 인연을 끊었다고만 들어서 자세한 사정은 몰랐습니다. 그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그와는 어떻게 알아요?”

“마찬가지로 처음엔 거래로 알던 사이였습니다. 유니콘은 눈이 좋아서 특이한 광물을 잘 찾거든요. 글렌 쪽에서 제 레어에 몇 년마다 한 번씩 들르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발길이 뚝 끊겼죠. 살던 곳으로 찾아가 보니 이미 죽었다고 하더군요.”

“사인은 알아요?”

“아뇨. 무덤만 확인했습니다. 후손들도 전부 다 떠나서 어디로 이주했는지 알 수 없었던지라…….”

“그렇군요.”

“물의 왕께선 그의 사인을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알긴 했다. 과연 여기서 꺼내도 될 만한 화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들었을 당시엔 그냥 별다른 생각 없이 넘어갔었는데, 여기서 뜻밖의 연결고리를 찾은 듯했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오칼 역시 무언가 짐작한 것 같았다. 그가 자세를 곧게 세우고 나를 응시했다.

“비록 거래로 시작한 관계이나 글렌은 제가 마음을 열고 맞이한 몇 안 되는 지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늘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시는 부분이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음, 안 듣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제가 알아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새파란 눈동자가 고집스럽게 빛났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떻게든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자세한 걸 아는 건 아니에요. 그의 후손에게 들은 것뿐이라서요.”

“글렌의 후손이 아직 이어지고 있었군요.”

“네. 그들 가문에 시조의 마지막을 언급한 기록이 있는 것 같았어요. 마족에게…… 죽었다고.”

“……마족, 말입니까?”

대답하는 어조가 한층 무거워졌다. 한순간에 굳어진 낯을 보니 그 역시 나와 같은 것을 떠올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리글레오를 죽인 마족이 누군지, 그를 왜 죽였는지도.

“그자에게 리글레오에 대한 것도 말했나 봐요.”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오칼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조금 흐려진 정도였지만, 그 아래 피가 나도록 두 손을 꾹 움켜쥔 채였다. 이야기를 들어본 즉 그가 정확히 리글레오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주기적으로 거래하는, 친한 유니콘이 있다는 정도의 언급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정보라도 노리고자 하는 이에겐 훌륭한 단서이긴 했다.

“그자는 거래가 마무리되자마자 곧장 마계로 돌아간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글렌과는 꽤 오랫동안 교류했구요. 그의 방문이 끊긴 건 2백 년이 더 지난 후였죠. 그래서 지금까지 관계성을 전혀 의심해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실책입니다.”

설명하는 오칼의 두 눈에 노기가 가득 차올랐다. 그 말대로라면 정말 주도면밀하게 철저히 농락당한 셈이었다.

역시 답하지 않을 걸 그랬나. 죄책감과 후회로 점철된 얼굴을 보려니 입맛이 썼다. 안 그래도 충격이 클 텐데 여죄만 더 드러난 셈이다. 의미 없이 건넨 몇 마디가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가고 지인의 목숨마저 앗아가다니. 의당 치러야 할 값이라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대가였다.

솔직히 말하면 카류안이 그를 해치지 않고 놔둔 게 더 신기했다. 이만큼 구심점에 있는 존재라면 증거인멸을 위해서라도 은폐하려 했을 것 같은데,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걸까? 실제로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으니 그럴 만하긴 했다. 하긴 오히려 그가 죽었다면 일이 틀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렇다 할 연고도 없는 유니콘의 죽음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드래곤 장로의 직계 손인 오칼의 죽음은 반드시 시선을 끌었을 테니까. 그 차이가 리글레오의 죽음을 더 애달프게 만들었다. 오칼도 같은 기분이었는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어, 그…… 동생이라는 자는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직접 만나 사죄하고 싶습니다.”

“음, 그건 내가 선뜻 답할 만한 건 아닌 것 같네요. 일단 얘기는 전해 줄게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제 감정만 앞섰던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지금 가장 심경이 복잡한 사람은 오칼이겠죠. 충분히 이해해요. 단지, 이쪽에도 밟아야 할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시벨리우스에겐 이 내용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모르겠다. 형에 대한 건 달리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는데 좋은 것도 아니고 하물며 나쁜 소식이라니.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어도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충격을 받았던 그였다. 심지어 그를 죽인 마족의 정체가 카류안이라는 걸 알게 되면 태연히 넘기기는 힘들 것이다.

‘방진이 완성되는 대로 잠시 그쪽에 들러 볼까. 지금쯤 그쪽 상황은 얼마나 진척되었으려나?’

내친김에 나는 그 자리에서 ‘물의 기억’을 전개했다. 봐야 할 범위와 장소를 이미 정해 둔 상태인데도 워낙 먼 거리다 보니 초점을 맞추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전투는 여전히 대치 상태인지 별달리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낯익은 구조를 중심으로 따라가니 곧 이사나가 자신의 막사 안에서 한창 회의 중인 광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친 곳 없이 건강한 모습을 보니 내심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 봐도 시벨리우스와 알리사가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막사 자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뭐지?’

처음엔 단순히 막사의 위치가 바뀐 건가 싶었다. 시벨리우스가 꼭 고정된 장소에만 막사를 짓는 건 아니었으니까. 슬슬 전면전을 앞둔 만큼 알리사의 안전을 위해 후방으로 자리를 옮긴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짐작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어느 곳에서도 그의 막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직접 보는 것보다 감이 둔한 상태라지만, 이렇게까지 못 찾는 건 이상했다.

“누굴 찾아, 엘? 그 시벨리우스라는 녀석?”

혼란한 기분으로 허둥거리고 있으려니 트로웰이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끄덕인 내게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마 네가 찾는 이들은 그곳에 없을 거야. 가까운 미래에 한 장소에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거든.”

“어? 거기가 어딘데?”

“대형 건물이 여러 채 세워진 곳이야. 인간들이 다니는 교육기관 같아. 전경을 보니 아마 카터스 제국에 있는 것 같은데.”

“카터스?”

그 녀석들이 그사이에 카터스 제국으로 이동했다고?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라 얼떨떨했다. 하지만 카터스 제국에 있는 교육기관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라온휘젠와 아셀이 다닌다는 아카데미. 그들이 난데없이 갈 만한 연결점이라면 그 하나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둘러봤을 때 그 둘의 모습도 보지 못한 것 같다. 아니, 확실히 없었다. 대체 내가 살피지 못한 동안 일이 어떻게 돌아가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근데 갑자기 그게 보였어?”

“음, 아니. 정확히는 다른 걸 알아보려는 중이었는데 얻어걸린 거야.”

“다른 거?”

“……일을 좀 더 서둘러야겠어.”

그 순간 이어진 목소리는 왠지 평소와 다른 울림을 담고 있었다. 어디를 응시하는 건지 초점을 잃은 그의 두 눈이 왠지 멍했다. 그 모습이 햇빛에 부서지듯 조금 흐릿해 보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다 곧 크게 부릅떴다. 흐릿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그 모습이 흐려지고 있었다.

“트, 트로웰! 몸이……!”

“어? 아아.”

트로웰도 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조금 늦게 깨달은 듯했다. 점차 투명해지는 몸을 내려다본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를 감싸고 있던 마나가 거칠게 역류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증상은 내가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역소환?’

왜 그가 갑자기 역소환되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굳어버린 나만큼이나 다른 이들도 모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장본인인 트로웰은 이미 짐작한 듯이 태연했다. 그는 얼어 있는 나를 보고 쓰게 웃었다.

“미안.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아서 악신과 연결된 미래를 읽어보려고 했거든. 기운을 소모한 상태에서 너무 무리했나 봐.”

“아무리 그래도 역소환이라니…….”

“그자의 힘이 그만큼 더 커졌다는 거겠지. 무언가가 위험하다는 느낌은 있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일단 엘, 그 유니콘부터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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