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화
“무슨 사이냐니…….”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는 건지 황당해하다가 나는 곧 기억을 돌이켜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디아곤에게 우리 관계를 자세히 설명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달리 소개할 상황도 아니었고, 디아곤도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미 알던 사이다 보니 재회에 더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엘뤼엔이 방어진을 세우는 것 때문에 미리 내려와 있는 건가 했거든? 근데 분위기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다면 친분 때문에 왔다는 말이잖아. 신과 정령왕이 교류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 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엘뤼엔이라니. 뭔가 좀 너무 안 어울린달까.”
“아하하, 그런가?”
“아마 다 그렇게 생각할걸? 엘뤼엔의 성격이 예전과 달라진 건가 했는데, 화를 낼 때 보면 또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근데 엘을 대할 땐 유독 다정한 분위기인 것 같단 말이지. 아니, 확실히 다정해. 대체 둘이 어떻게 친해진 거야?”
기대심을 담은 눈동자가 눈앞에 바짝 들이밀어졌다. 왠지 비법을 묻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내게 뭔가 특별한 기술이 있다고 믿는 듯한, 흡사 맹수를 길들인 조련사 취급이다. 엘뤼엔과 친한 게 그 정도로 신기해할 일인가 싶다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양심이 있지, 이건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나도 가끔 돌이켜 보면 기분이 이상할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오죽할까.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드래곤들도 대답을 기다리는지 이쪽을 빤히 주시하는 중이었다. 사정을 아는 라피스만 입을 다문 채 이쪽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그는 딱히 대답할 마음이 없는지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러자 오히려 망설임이 사라졌다.
“아버지야.”
“……엥?”
디아곤과 드래곤들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렇게 떠졌다. 판으로 찍어낸 듯 똑같은 반응을 보려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엘뤼엔이 내 아버지라고.”
“에에엥?”
돌아오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남들 앞에서 내가 정식으로 그를 아버지라고 소개한 건 처음인 것 같다. 막상 저지르고 났더니 뒤늦게 긴장이 되는 기분이었다. 물의 정령왕인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목이 타는 것 같기도 했다. 힐끔 눈동자를 굴려 엘뤼엔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조금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일직선에 가까웠던 입술선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왠지 두 뺨에서 열이 나는 듯해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쑥스럽고 민망하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가슴이 들떠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한 게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속이 후련한 것이 전보다 한층 더 세상에 당당해진 기분이었다.
“허어, 이건 또 몰랐던 사실이네. 정령왕을 상급신이 낳는 거였어?”
“…….”
이 와중에 디아곤은 엉뚱한 소리를 해서 주변의 눈총을 샀다. 사방에서 황당하다는 시선이 쏟아지자 그는 얼른 항복의 표시를 해 보였다.
“농담이야, 농담.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당연히 잘 알지. 다들 많이 놀란 것 같길래 분위기 좀 편하게 해보려고 한 거야. 이런 게 재밌잖아?”
“음, 재미는 모르겠고.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서 가장 참신한 반응이긴 하네.”
“하하, 근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친구라고 해도 신기할 텐데 부자 관계라니.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그, 그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건, 엘뤼엔이 먼저 제안한 관계인가 봐? 아, 이건 너무 뻔한가? 그 성격에 누가 청한다고 덜컥 아들로 삼을 리 없으니 당연히 엘뤼엔이 먼저 움직인 거겠지. 그 자체도 신기한 일이긴 하다만.”
“엘뤼엔이 먼저 제안한 건 맞긴 한데…….”
“역시. 제안에 응해서 시작된 거라면 네 쪽에선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네. 뭐, 사실 호칭이 뭐가 대수겠어. 라피는 친아들인데도 날 이름으로만 부르는걸.”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아들로 둔 아버지답게, 디아곤은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수긍했다. 그러나 그 어조에서 왠지 모를 섭섭함이 묻어나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게 딱히 날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마음이 찔렸다.
‘역시 호칭도 아버지라고 해야 하는 거겠지?’
손끝이 근질거려 반사적으로 깍지부터 꼈다. 의식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 초조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엔 아무렇지 않게 나왔던 말이 또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갑자기 누군가 내 머리를 꾹 내리눌렀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자 엘뤼엔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충분해. 무리하지 마라.”
낮은 목소리가 내게만 들릴 정도의 크기로 속삭였다. 잠시 말문이 막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디아곤이 그를 부르며 손짓했다.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하려는 듯했다. 엘뤼엔은 내 머리를 조금 더 쓰다듬고는 곧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치는 모습에 시선을 따라 옮기면서 나는 살짝 입술을 악물었다.
‘무리하는 거…… 아닌데.’
그런 건 분명히 아닐 텐데. 왜 아직도 그를 향해 직접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못하는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소개하던 순간 엘뤼엔이 지었던 미소가 떠올라서 더 마음이 심란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게 나았을까. 충동에 맡긴 내 안일한 마음이 일을 망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낙인처럼 새겨지는 것 같았다. 행복과 불행의 간격은 이토록이나 짧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뻔히 갈 수 있는 길도 택하지 못하는 멍청하고 한심한 녀석이었다.
* * *
4대 방진을 만드는 과정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바람의 진에 이어 땅의 진까지, 드래곤들의 헌신적인 참여 덕분에 모두 아무런 문제 없이 원활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 물의 진 하나만 남겨둔 가운데, 나는 그 장소로 정해진 카리프 해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라피스의 반대가 엄청났으나 어쩔 수 없었다. 방진을 만드는 과정에 정령왕의 참여가 필수는 아니긴 해도, 참여하면 더 높은 효율을 끌어낸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한사람이라도 더 손을 보태야 할 비상시기였다.
불의 진도 그렇고, 앞서 바람과 땅의 진을 만들 때도 전부 정령왕들이 참여했는데 나만 빠질 수는 없었다. 물론 라피스가 이런 사정을 헤아릴 만큼 배려심이 넘치는 성격은 결코 아니다 보니 설득하는 일에 애를 먹었다. 어차피 따라오지도 못할 거 그냥 가버려도 뭘 어쩌진 못했겠지만 뒷감당을 생각하면 사전 협의가 최선이었다. 결국 계약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거듭하고 나서야 툴툴거리는 녀석을 간신히 달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상전이 따로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칼이라 합니다.”
물의 진의 주춧돌로 정해진 블루 드래곤인 오칼은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회색빛에 가까운 피부라든가 얼굴에 새겨진 듯한 문양들, 손과 귀를 비롯하여 여기저기 화려하게 장식한 장신구들이 확 튀는 차림이었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찰랑거리는 짧은 기장의,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머리칼이었다. 날카롭고 서늘해 보이는 눈동자 또한 그 머리칼을 닮은 아름다운 푸른색을 머금고 있었다.
파란 머리칼이 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머리색이 파랗다 보니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 보니까 확실히 색달랐다. 혼자 이질적으로 확 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물의 속성을 가진 드래곤답게 느껴지는 기운도 많이 친근해서 호감이 절로 솟았다.
“새로 탄생하신 물의 왕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아, 나도 만나서 기뻐요. 엘이라고 불러줘요.”
반기면서 답하자 오칼이 잠시 멈칫했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워 보이던 외모에 미소가 깃드니 인상이 한순간에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내심 감탄하며 악수라도 청하려는데 옆에서 갑자기 불쑥 누군가가 끼어들어 내가 내민 손을 먼저 잡았다. 당황해서 본 곳엔 트로웰이 있었다. 그는 땅의 진을 완성한 후에도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고 물의 진을 만드는 현장까지 참여한 참이었다.
“트로웰? 왜…….”
힘을 많이 소모한 탓인지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그의 기운이 평소보다 많이 약했다. 기력이 확연히 떨어져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염려하는 걸 알았는지 트로웰이 괜찮다는 듯 두 눈을 곱게 휘어 접었다.
“오칼은 장로 라미아스의 직계 손이야.”
“라미아스?”
“드래곤 일족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고룡이지. 지금은 수면기에 들어가 있어. 그를 제외하면 현재 블루 드래곤 중에선 오칼이 가장 강해. 이래 보여도.”
“그렇구나.”
“……이래 보여도, 라는 말은 왜 들어가지요?”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었는지 오칼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트로웰은 그 반박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나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라미아스는 좋게 말하면 친화적인 거고 나쁘게 말하면 라피스 과였어.”
“라피스 과?”
“조금 또라이처럼 엘퀴네스한테 집착했다는 뜻.”
“…….”
평소 트로웰이 라피스를 어떻게 여기는 건지 익히 짐작이 가는 대답이었다. 어디를 가든 취급이 하찮다니, 이쯤 되면 라피스를 슬슬 불쌍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대다수가 자업자득이라는 점에서 두둔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라미아스는 수면기에 들어갈 당시 어린 라피스에게서 자신과 같은 면을 봤어. 그 녀석이 자라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가 될 거라는 것도, 엘퀴네스를 독점할 거라는 것도 알았지. 그에 위기감을 느낀 그는 잠들기 전에 자신의 손자인 오칼에게 마법을 걸어놨어.”
“마법?”
“물의 정령왕과 오칼이 접촉하면 라미아스를 깨우는 마법.”
뭐야, 그것뿐인가.
생각보다 별거 아닌 마법이라 긴장이 풀렸다. 오히려 고룡인 그가 깨어난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테니 더 좋은 쪽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트로웰이 웃으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엘, 난 말이야. 라미아스가 좀 더 자고 있었으면 좋겠어.”
“……응?”
“이건 엘 널 위한 것이기도 해. 그 녀석, 정말 귀찮거든.”
“그, 그래?”
“라피스가 둘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까?”
“……절대 안 건드릴게.”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게 오한이 이는 것 같았다. 아쉽지만 오칼과의 접촉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 일로 해야겠다. 다짐을 거듭하며 답한 말에 트로웰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졸지에 기피 대상 1위에 오르게 된 오칼은 기함하는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마법입니까? 전 지금 처음 들었는데요?”
“그럴 거야. 그 마법은 시전한 당사자가 언급하면 효력을 잃거든. 그래서 말을 못하고 그냥 잠든 거지.”
“그걸 트로웰은 어떻게 아셨는데요?”
“내가 모르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그렇네요. 큭, 할아버님, 대체 무슨 짓을…….”
오칼의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니 날벼락에 가까울 터였다. 그게 내심 안쓰러워서 미안해지려는데 트로웰은 오히려 더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오칼, 넌 우연이라도 엘의 손끝 하나 건드릴 생각하지 마. 이번 일에 책임감을 갖고 있다면 더는 엘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게 다 무슨 말이야?”
더는 폐를 끼치지 말라니. 왠지 돌아가는 대화 내용이 이상했다. 단지 할아버지로부터 일방적인 피해를 당한 것뿐인데 마치 그를 죄인처럼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물었더니 트로웰이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 이번 사건 관계자거든.”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마법진을 보조하는 다른 블루 드래곤들에게 주의 사항을 알려주고 있던 디아곤이었다.
“관계자라니?”
당황해서 오칼을 돌아보니 그가 침울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그가 마왕, 아니 이제는 전 마왕이 된 카류안과 한때 교류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카류안과 친했다고요?”
“아뇨! 절대 친한 건 아닙니다. 그냥, 손님과 상인으로 몇 번 거래를 한 것뿐이었습니다.”
“거래?”
“그가 유니콘의 눈을 수집한다고 해서…… 당시에 제가 그런 종류의 특별한 보석들을 취급하는 편이거든요. 같은 급의 마석과 교환해 주겠다고 해서 필요하다는 만큼 모아다 주었습니다.”
“그, 그래요?”
“그것뿐만이 아니잖아?”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디아곤이 한숨을 내쉬며 지적하듯이 말했다. 오칼은 슬쩍 입술을 깨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흐려진 얼굴 가득 후회와 자책이 가득했다. 그가 우물거리기만 하고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디아곤이 말을 이었다.
“그놈에게 엘퀴네스가 소멸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이 녀석이라나 봐.”
“……!”
“사실 정령왕의 소멸이나 탄생 같은 거사는 흔히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잖아. 게다가 마계에 사는 놈이 그런 걸 어떻게 그냥 알았겠어? 누구한테서 듣지 않고서야. 그때 오칼은 전대와 계약된 상태였던지라 소멸 시기 예측도 더 빨랐거든.”
“그 말은…….”
“아마 놈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이번 계획을 세웠겠지. 그래서 유니콘의 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걸 이용해 명계의 인도자와 접촉해 최면을 거는 것에도 성공했어. 그 인도자가 엘, 네가 태어나는 걸 방해한 거야.”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