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0화
왠지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트로웰은 왜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해 주지 않은 걸까? 그럼 좀 더 진지하게 라피스와 계약하는 걸 고려해 봤을지도 모르는데. 드래곤들이 나와 계약을 피하는 이유를 설명해 줬을 때도 그렇고, 라피스가 날 소환한 당시에도 내색한 적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디아곤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글쎄, 아까 라피스가 한 말을 들어보니까 난 알 것도 같은데.”
“응?”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네 성격엔 라피스와 그냥 계약하려고 했겠지. 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냥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네 진심과는 상관없이.”
“그건…….”
“그런 건 트로웰도 바라지 않았을 거야. 네 그런 성향을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을 테니까. 기본적으로는 라피스랑 같은 생각인 거지. 널 걱정한 거야.”
“으으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느낌인가?”
“글쎄, 하지만 걱정한다는 건 애정이 있다는 증거 아닌가? 단순히 신뢰의 문제로 다룰 일은 아닌 것 같아.”
부드러운 말에도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슬쩍 돌아본 곳에서 라피스가 마법진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상의를 벗은 채였는데, 정신없는 상황일 텐데도 그의 시선은 이쪽을 향해 있었다. 내가 디아곤과 다정하게(?) 대화하고 있는 광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디아곤도 그것을 느꼈는지 그를 향해 낼름 혀를 내밀었다. 당연히 라피스는 더 분노에 찬 얼굴이 됐다.
그 유치한 현장을 보고 있으려니 상황과는 관계없이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음으로 그가 돌단 같은 곳에 올라가 눕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덜컥 긴장이 들었다. 단지 마법진을 새기는 것뿐인데, 그 모습 위에 언젠가 목격했던 광경이 겹쳐졌다. 대공이 제물을 제단에 눕히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리던 그 날의 순간이. 그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나를 걱정하게 된 것처럼, 나 역시 그렇다는 걸.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게 단지 신뢰의 영역이 아니라는 디아곤의 말이 맞았다. 이건 조금 무서운 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 당연한 시간을 갑자기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뜻 모를 불안감. 라피스와 트로웰이 이런 기분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라면 내 지난 행동을 되짚어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게서 불안정한 부분이 보인다는 걸 테니까.
이윽고 마법진이 발동되면서, 그가 누워 있는 부분에서부터 서서히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넘실거리듯 찰랑거리던 것이 단숨에 차올라 라피스의 몸을 삼키듯 뒤덮는 광경이 빠르게 이어졌다. 피처럼 강렬한 붉은색의 빛이었다.
* * *
불의 진이 완성된 건 그로부터 나흘 후였다. 며칠간 움직이지도 못하고 마법진을 흡수해야 하는 쪽도 고생이었지만, 제작에 참여한 쪽이야말로 쉬지 않고 기운을 공급해야 하는 몹시 고된 여정이었다. 누워 있는 라피스를 가운데 둔 채 엘뤼엔과 이프리트가 양방향으로 섰고, 그런 그들을 중심으로 간격에 맞춰 선 드래곤들이 마력의 장막을 유지하는 광경이 며칠간 내내 이어졌다.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건 상극의 속성이라 불의 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나뿐이었다. 혹시 모를 훼방을 대비해 주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리를 지키긴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그냥 구경꾼이나 다름없었다.
동이 트는 시각, 엘뤼엔이 감고 있던 눈을 뜨는가 싶더니 그들을 감싸고 있던 빛의 장막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법이 완성되었다는 증거였다. 그와 동시에 장막을 유지하던 드래곤들이 무너지듯 아래로 쓰러져 내렸다. 깜짝 놀라 달려가서 보니 다들 완전히 탈진해서 몸에 남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디아곤, 정신 차려! 디아곤?”
“으으으…… 사, 살려줘.”
구명줄이라도 잡는 듯이 손을 뻗는 디아곤을 부축해 서둘러 치유력을 불어넣자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체력이 생겨 몸이 편해지니 오히려 마음 놓고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다른 드래곤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치유를 마치고 났을 땐 모두 건어물처럼 늘어진 모습이 됐다. 이게 결코 엄살이 아니라는 건 이프리트의 모습만 봐도 알았다. 어지간해선 절대 지칠 일이 없는 정령왕인 그가 매우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 잠시 정령계에 다녀올게.”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 사라졌다. 아무래도 아크아돈에서는 빠른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이런 와중에도 멀쩡해 보이는 엘뤼엔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섭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엘뤼엔, 괜찮아?”
“아아, 그래.”
그래도 예의상 물어본 말에 역시나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라피스를 살피고 있는 걸 옆에서 기웃거렸더니 그가 피식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한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는 동작이 다정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이어지는 말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두근거렸지만.
“하지만 이 짓을 앞으로 세 번 더 할 생각을 하면 카노스를 좀 죽여버리고 싶긴 하군.”
“…….”
그러고 보니 방진을 네 개 세워야 했었지. 지금 만든 불의 진이 처음이니 앞으로 세 개가 더 남았다는 소리다. 하나를 만드는 데 나흘이란 시간이 걸린 만큼 족히 보름에 가까운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나마 드래곤들과 정령왕인 우리는 속성에 맞춰 교체라도 하지, 그런 영향과 상관없는 엘뤼엔은 모든 과정에 전부 참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상급신이라도 그쯤 되면 녹초가 될 게 분명했다.
“그…… 괜찮겠어? 신계에 가서 추가 협력을 요청해본다든가 하는 건…….”
“글쎄, 그쪽도 이미 남는 노동력이 없을 거다. 고작 받치는 것뿐인 기둥을 세우는 데 이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거라면, 본진 쪽엔 더 많은 기운이 필요할 테니.”
“그 말은…….”
“정화진에 상급신들을 전부 갈아 넣고 있다는 말이지.”
“……진짜 엄청나네.”
이게 웬 고생길인가 했더니 신계 쪽 사정은 더 처참한 모양이다. 이래서야 신들을 원망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설마 상급신들을 다 동원해야 할 정도라니,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건지 새삼 실감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라피스는 돌단에 얌전히 누워 있는 채였다. 본격적으로 마법진 제작이 시작되면서부터 어느 순간 정신을 잃은 듯하더니 의식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걸리려는 모양이다. 진이 완성된 탓인지 시작하기 전 몸에 그려 넣었던 빼곡한 그림들이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라피스가 불의 진이 된 거지?”
“그래.”
확답을 얻은 김에 나는 마음 놓고 라피스의 상태를 살폈다. 신체적인 변화는 달리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몸 안에 예전에는 없었던 기운이 느껴졌다. 태양이 깃든 것처럼, 불덩어리가 고여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실제로도 상당히 뜨거워서 평범한 사람이 만지면 위험할 것 같았다.
“이건 거의 용암 수준인데. 이프리트를 미니어처화한 느낌 같아.”
“……누가 이프리트야?”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라피스가 눈을 떴다. 누가 눈치 백 단인 녀석 아니랄까 봐 이럴 때마저 깨어나는 타이밍이 귀신같았다. 곧장 날카로운 시선이 향하는 것에 혀를 차다 말고 나는 잠시 멈칫했다. 신체의 변화는 없는 줄 알았더니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눈동자 색이 전과 같지 않았다. 여전히 붉은 계열인 건 마찬가지이긴 한데, 이전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루비 같았다면 지금은 주홍과 노란빛이 섞인 홍염의 색이었다. 아마 불의 진으로 있는 동안만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래도 농담처럼 말했듯 확실히 이프리트에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물론 진짜 이프리트를 옆에 두고 비교하면 완전히 다르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기분이 그렇다는 얘기다.
“몸은 좀 어때?”
“젠장, 갑갑해.”
몸을 일으킨 라피스는 불쾌한 표정으로 가슴을 연신 문질러댔다. 전과는 다른 기운이 몸속에 자리 잡은 탓에 이물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사실 그만한 불을 품게 되고도 조금 불편한 정도인 게 더 신기하긴 했다. 타고난 화기 자체가 강하다더니, 과연 디아곤이 애원하다시피 매달릴 만한 성능(?)이었다.
“근데 너 그런 상태여서야 이제 마을은 못 가겠다.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가 될 거야.”
“뭔 소리야? 어차피 이 상태로 있을 땐 이 근방 못 벗어나. 방진은 위치를 고정해서 세운다는 걸 잊었어?”
“어? 그거 자율의사에 맡기는 게 아니라 아예 강제로 위치가 고정되는 거였어?”
“그래. 너는 안 느껴지는 모양이지?”
“응? 뭐가 느껴져?”
“지금 난 사방이 가로막혀 있는 기분이 들거든. 마나 기둥을 세운다더니, 내가 그 안의 핵이 되어 갇힌 모양이야.”
오호라 그런 구조인 건가.
라피스의 말대로 나는 그런 감각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생겼다니. 언젠가 라피스가 나를 그런 비슷한 환경에 가둬놨을 때가 떠올라서 조금 재밌기까지 했다. 가만, 그렇다면 나 혼자 가버려도 라피스는 여기서 꼼짝도 못 한다는 말인가?
“너…….”
단지 생각만 해봤을 뿐인데 라피스의 눈빛이 단번에 살벌해졌다.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눈치 하나만큼은 정말 기막히게 빠른 녀석이다.
그때쯤 쓰러졌던 드래곤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고도 비몽사몽해서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디아곤이 상의를 챙겨 입는 중인 라피스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이야, 불의 진이 제대로 만들어졌구나! 정말 다행이다.”
“뭘 새삼스럽게?”
“실은 마지막에 가선 거의 기억이 안 났거든. 쓰러졌다는 것만 알겠더라고. 아, 그래도 엘이 치유력을 써준 것만은 선명하게 떠올라.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았지 뭐야!”
호쾌하게 웃은 그가 내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도움이 넘치도록 되다마다! 엘퀴네스의 치유력은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마법이나 성력하고는 확실히 다르네! 바짝 말라 죽어가는 화분에 한줄기 은총 같은 단비였달까. 그 청량감, 정말 기분 좋았어. 라피스가 엘퀴네스한테 집착하는 기분을 조금 이해할 것 같더라고.”
아마 디아곤은 그 말을 할 때 자신의 뒤쪽에서 라피스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는 건 꿈에도 모를 것이다. 제 말의 위험 수위를 깨닫지 못한 그는 그대로 뒷말을 이어가기 바빴다.
“그 정도로 정말 죽는 줄 알았다는 뜻이야.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린 거지? 중간부터 감각이 아득해져서 계산이 잘 안 되네.”
“오늘로 나흘째였어.”
“나흘!”
놀란 건 디아곤만이 아니라 다른 드래곤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시간 개념이 모호해지긴 마찬가지였는지 당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려서가 아니라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난 거네. 체감상으로는 10년도 더 걸린 기분이었는데 말이야. 그만큼 빨린 끝난 건 엘뤼엔이 도와준 덕분이겠지. 그런데도 이렇게 힘들었다니, 내 판단 착오야. 하마터면 드래곤 여럿 잡을 뻔했네. 다른 진을 만들 땐 보충 인원을 더 데려가야겠어. 여섯으로는 너무 벅차네. 으음, 지금 연락되는 그린이랑 실버 놈들이 몇이나 더 있더라…….”
“그린이랑 실버면 둘 다 바람 속성의 드래곤들이지?”
“맞아, 다음에 만들 방진이 바람의 진이니까.”
“어? 이것도 만드는 순서가 있었어?”
“그럼 당연하지?”
그것도 몰랐냐는 듯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간 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과만 어울려 지내다 보니 이런 반응도 꽤 오랜만이었다. 이제 와선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데 미숙한 정령왕이라는 걸 드러내는 게 조금 창피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런 내 머리를 따듯한 체온이 덮었다. 올려다보니 엘뤼엔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4대 속성을 활용하는 주문을 만들 땐 순환의 규칙이란 게 있다.”
“순환의 규칙?”
“「불꽃이 타올라 바람에 몸을 싣고 초목을 태우면 물로 덮는다」.”
“그게 무슨 뜻이야?”
“딱히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냐. 그냥 초대 정령왕들의 소멸 순서라더군.”
“……!”
생각지 못한 말이라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러고 보니 초대 정령왕 중에서 물의 정령왕이 가장 마지막에 소멸했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 엘퀴네스가 바로 지금의 카노스이기도 했다.
“최초란 건 기준을 만들지. 초대 정령왕들은 이 세계에 보이지 않는 많은 규칙을 만들어냈다. 특히 그들의 소멸 시기는 향후 정령왕들의 평균 수명에도 영향을 미쳤고.”
“평균 수명?”
“불의 정령왕은 대체로 평균보다 소멸 시기가 빠르다. 반대로 물의 정령왕은 평균보다 긴 편이고.”
“헉. 초대 이프리트가 가장 먼저 소멸하고 물이 가장 나중에 소멸해서 그런 거야?”
“그래. 이변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들 대체로 그런 흐름을 타게 되어 있다. 그만큼 강력한 순환의 고리지. 굳이 지키지 않아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가능하면 맞추는 편이 더 좋은 효율을 끌어낸다더군.”
“으음, 그렇구나. 뭔가 좀 신기하네.”
이 세계는 왠지 알아 갈수록 더 알아 가야 할 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곱씹고 있는데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디아곤을 비롯해서 드래곤들이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니, 둘이 뭔가…… 그림이 좋네.”
“엥?”
“사실 진작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말이야. 엘뤼엔이랑 엘은 무슨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