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화
“그래서 아직도 그 야망은 그대로야?”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호수를 만들어 달란 재촉을 받은 적이 없다. 이사나의 여정에 함께 한다는 게 계약의 전제 조건이었던 만큼, 얌전히 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사실 처음엔 완전히 무시할 생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내키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간 신세 진 걸 생각하면 모르는 척하는 것도 좋은 대응은 아닌 것 같았다. 소망하는 대로 백 년까진 무리겠지만 몇 년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나름대로 큰 결심을 굳히고 있는데 라피스가 그런 나를 흘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제 됐어.”
“어? 됐다니?”
“너랑 계약한 후로는 상관없어졌어.”
“엥? 뭐야, 그게.”
“그러게. 나도 좀 신기해. 물의 정령왕과 계약하면 만족스러운 물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고작 그런 정도가 아니었지. 계약하는 순간 그냥 그 자체로 완성된 기분이었어. 다른 건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을 만큼.”
“그, 그래?”
“이미 최상의 물을 가졌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옆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의식하고 나니 조금 멀어진 라피스가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그 반응은.”
“……나 방금 소름 돋았어.”
“그렇게 감격할 것까진 없는데.”
“감격해서 그렇겠냐! 느끼해서다! 너 진짜 그런 이상한 표현 좀 쓰지 마!”
“이상한 표현?”
“가졌다느니!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온다느니!”
“아, 또 그런 얘기였어? 물건 취급한 거 아냐.”
“차라리 물건 취급이라고 해!”
“왜 이랬다 저랬다야?”
진심으로 황당해하는 표정을 보려니 뒷골이 당겼다. 예전에도 그랬듯, 내가 기겁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 녀석과 대화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가치관이 다른 녀석과의 대화는 정말이지 정신건강에 해롭다.
“넌 가끔 보면 사람 대하는 방식이 너무 민망해.”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자성하라는 의지를 담아 투덜거렸다. 그러자 도리어 라피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네 얘기겠지.”
“내가 뭘?”
“적어도 난 아무거나 다 취급하진 않아. 나한테 가장 걸맞다 싶은 걸 필요로 하는 거고, 내게 필요한 거니까 최고로 대우하는 거야. 근데 넌 하찮은 것에도 다 애정을 주잖아. 누구든 쉽게 친구로 삼고, 네게 이득이 될 게 하나도 없는 관계인데도 관심을 기울이지. 오히려 약해 빠질수록 더 가만히 못 두고.”
“그런 거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사나는 계약자니까 그렇다 쳐. 다른 놈들은 무슨 관계라고 그렇게 챙기는데? 하다못해 지나다 만난 엘프의 사연까지 해결하려고 안달이었잖아. 어떤 꼬마는 목숨을 내걸고 살리질 않나.”
“꼬마라면, 레이를 말하는 거야? 그건 나이아스가…….”
“나이아스는 네 일부 아냐? 너랑 뭐가 달라?”
정확한 지적에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이 절로 닫혔다. 확실히 나이아스는 내게서 파생한 존재이니 본질이 같기는 했다. 그의 판단이 곧 내가 내린 판단이라고 봐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우물거리는 나를 보고 라피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지랖도 정도가 있지. 넌 너무 애정을 남발하고 다녀. 내가 보기엔 그런 게 더 민망해.”
“으음, 그런가. 하지만 나도 그냥 그게 필요하니까 하는 것뿐일걸?”
“뭔 말이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면 날 좋게 봐주니까 기분이 좋잖아. 내가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고. 결국 그런 식으로 인정받고 싶은 내 욕구를 채우는 것뿐이야. 일종의 자기 현시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내가 이용하는 쪽인 거지.”
“…….”
라피스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그가 내게 실망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후회됐다. 슬쩍 눈치를 보는 동안 라피스가 짜증 난다는 듯 조금 거친 손길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듯한 진득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너 말이다. 진짜…… 아니, 됐다. 관두자.”
“뭐, 뭐!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다 됐고. 네가 굉장히 위험한 녀석이라는 건 알겠어. 쯧, 차라리 헤퍼서 퍼주는 오지랖인 게 낫지.”
“그게 무슨 소리야?”
“일단 말해 두겠는데, 넌 그런 거 안 해도 세상에 필요해.”
불쑥 이어진 말은 전혀 생각지 못한 내용이라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반응하는 것도 조금 늦었다.
“어? 아, 뭐, 그건 그렇겠지? 물의 정령왕이니까.”
“그걸 알면 남의 평가에서 네 가치를 찾지 마.”
“…….”
돌아오는 반응이 냉담해서 움찔 몸이 떨렸다. 어쩌면 조금 뜨끔한 것도 같았다. 라피스는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이어지는 목소리 또한 여전히 냉랭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를 맡기면 진짜 자신은 사라질 수밖에 없어. 그냥 남의 기대심리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지. 물론 그건 절대 완벽할 수 없는 거울이야. 언젠가는 반드시 지칠 거고, 그게 아니어도 변질하게 되어 있어. 특히 너 같은 존재가 남에게 휘둘리는 건 정말 위험해. 악용당하면 세상을 망칠 거다.”
“그, 그런 정도는 구분하거든?”
“구분한다고 믿는 거겠지. 네가 지금은 인간들의 규칙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경계는 점점 흐려질 거야. 애초에 넌 인간이 아니고, 인간의 규칙은 모순이 많거든. 그 선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도 네가 구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어?”
“그건…….”
마음 같아서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경험하지 않은 부분을 선뜻 단정할 수는 없었다. 무거운 돌덩어리가 얹어지는 듯한 기분에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크흐흡!”
그때 어디선가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서 돌아봤더니 디아곤이 어딘지 감격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뭐, 뭐야, 디아곤. 왜 그래?”
“아니…… 라피스가 누군가를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다니. 내 두 눈으로 이런 광경을 본다는 게 꿈만 같아서.”
“……다정?”
지금까지 대화 중 어디가 다정한 부분이 있었는데? 말투는 물론 표정도 엄청 딱딱하기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혼나는 기분에 더 가까웠던지라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이 읽혔는지 디아곤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정한 거지. 관심이 없으면 조언 같은 걸 할 리가 없거든.”
“그, 그런가.”
“그렇다니까. 특히 라피스는 말이야. 실험용으로 독약을 만들어두고도 다른 설명 일절 없이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만 한 녀석이라고. 드래곤이 먹어도 치명적인 극독이었는데!”
“……먹었구나.”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났었단 말이야. 그런 위험한 독약에 좋은 향기를 첨가한 건 반칙 아냐? 그거 먹고 내가 진짜 몇 년을 개고생……아니, 여하튼! 그 정도로 쟨 남의 사정에 관심이 없어. 그런데 엘 네겐 그러면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잖아.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디아곤이 뭐라고 하건 라피스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완벽하게 무시로 일관하는 그를 보려니 중간에 있는 나만 민망해졌다.
“으음, 뭐, 내가 세계를 멸망시킬까 봐 그런가 보네. 아하하…….”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쟤가 어디 그런 걸 염려할 성격이야? 어릴 때부터 입버릇이 ‘세상 같은 건 주기적으로 한두 번씩 멸망해도 되지 않아?’였던 녀석이었어, 쟤가! 누가 들을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그게 아니면…….”
“그야 당연히 널 걱정하는 거지.”
슬쩍 돌아봤지만 라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니라고 할 녀석이니 여기선 긍정의 뜻이려나? 가슴 속에서 단단하게 뭉쳐졌던 무언가가 순간 말랑해졌다.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한 곳에서부터 따뜻한 열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감각을 음미하기엔 옆에서 방해하는 기운이 너무 컸다.
“라피스가 남을 걱정하다니! 이건 기적이야! 기뻐해 줘, 카닐! 우리 아이가 이렇게 멋있게 컸어!”
문제의 방해자는 제가 내뱉은 말에 나보다 더 감격한 디아곤이었다. 어느새 손수건까지 꺼내 들고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솔직히 라피스를 도발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점점 살벌해지고 있는 것만 봐도 단순한 짐작만은 아닐 것이다. 저러다 패륜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다 보니 감동 같은 건 챙길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라피스가 폭발하기 전에 상황이 먼저 해결됐다. 때마침 이프리트의 노성이 울려 퍼진 덕분이었다.
“디아곤! 거기서 뭐하는 거야? 불러오랬더니 왜 수다를 떨고 앉아 있어?”
“아차, 그렇지!”
그제야 용건을 떠올린 듯, 디아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불의 방진은 그가 만드는 중앙 쪽의 마법진에서 모든 의식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갈 차례라 마법진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라피스가 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전달하러 왔으면서 아예 잊고 있던 것이다.
“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피스를 향해 디아곤이 생글생글 웃으며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런 그를 강하게 노려본 라피스가 마법진 쪽으로 성큼성큼 이동했다. 그가 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나는 디아곤을 돌아보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애정 표현 방식이 너무 나쁜 거 아니야?”
“그래? 그런가?”
“적어도 라피스는 질색하는 것 같은데.”
“쟨 어차피 내가 뭘 해도 싫어할걸. 뭐, 이 정도는 해줘야 균형도 맞고.”
“균형?”
“애들이 라피스한테 다 쩔쩔매는 것 같지 않았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조금 전 드래곤들이 라피스를 대할 때의 태도를 말하는 모양이다. 대체로 호의적인 모습이었고 조금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쩔쩔매는 모양새 같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디아곤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라피스는 드래곤 중에서도 좀 특별한 녀석이야. 성격이 저 모양인데도 아무도 저 녀석을 거역하지 못해. 본능적으로 저 녀석 앞에선 그냥 기가 눌리는 거지. 솔직히 누가 방해한다고 해도 말이야,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면 서러워할 드래곤들이 아무도 물의 정령왕과 계약하지 않으려 한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음, 그러고 보니…….”
“트로웰이 그러는데, 라피스가 상당히 강한 기운을 타고났다더라고. 마법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상대를 현혹하고 무의식을 지배하는 힘을 가졌다던가.”
“헉, 그래?”
“저 외모만 봐도 보통은 아니잖아? 레드 드래곤치고도 타고난 화기가 너무 강해서 어릴 땐 본인도 잘 감당하지 못했어. 정확한 이유는 드러난 적 없지만 난 쟤가 물에 집착하게 된 것도 그걸 원인으로 보고 있어. 실제적인 효과는 거의 없어도 상극인 물이 닿으면 뭔가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을 테니까.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거겠지.”
그건 또 몰랐던 이야기다. 지금까지 비정상이라 여겼던 행동에 사실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괜히 사정도 모르면서 못 할 짓을 한 기분이랄까.
“아무튼 저 녀석의 그런 영향력은 좀 위험해. 그나마 천성이 무심하고 누군가와 얽히는 걸 싫어하는 편이니 망정이지. 조금만 교류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어도 손쉽게 추종자를 만들어냈을 거야. 추종자가 많아지면 신격화되기도 할 거고, 그럼 신들이 주목하게 되지. 그건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아. 그래서 내가 최대한 타박하거나 골리듯이 말해서 분위기를 바꾸는 거야. 그나마 혈연 사이엔 영향이 좀 덜하거든.”
“으음, 그 정도인가? 그렇게까지 심각해 보이진 않는데.”
“하하, 아마 엘은 못 느꼈을 거야. 정령왕은 이 세상의 중심이니까. 너한테까지 영향을 줄 리는 없지.”
“그런가? 그치만 다른 일행도 나와 비슷한 태도였는걸. 다들 라피스한테 기죽지도 않았고.”
물론 인간인 이사나와 알리사는 조심스럽게 대하긴 했지만 그거야 정체가 드래곤인 데다 성격도 까칠한 녀석을 편하게 대할 수 없었던 탓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등하다고 할 수 있는 시벨리우스는 단지 기가 죽지 않는 정도만이 아니라 늘 노골적으로 신경전을 벌였다. 데르온 역시 감추지 않고 호승심을 드러냈었고, 아스도 신세를 졌기에 예우를 보이는 정도의 선이었다. 라피스의 영향력이 정말 모두를 지배하는 힘이라면 그들도 전부 휘둘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아, 그건 네 덕분이야.”
“응? 나?”
당황해서 물은 말에 디아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계약했으니까. 그 덕분에 정령왕의 기운이 섞여서 마력의 성질이 조금 달라진 거야. 일종의 정화 효과지. 솔직히 나도 이번에 보고 라피스 분위기가 편해져서 좀 놀랐어. 뭐, 이미 현혹된 애들은 그래도 여전히 영향을 받는 것 같지만.”
“으음, 그렇게 말해도 뭔가 실감이 잘 안 나는데.”
“경험한 적이 없으니 물론 그럴 거야. 참고로 트로웰이 대부가 되어 준 것도 비슷한 효과를 노린 거였어. 그땐 갓 태어난 상태라 정령 계약이 불가능하니 그 대신 깊은 관계성이라도 맺자고 한 거지. 그렇게만 해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더라고.”
아, 그래서 라피스가 태어난 후에 대부가 된 거였구나. 궁금했던 부분 하나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풀려서 얼떨떨했다. 디아곤은 멋쩍은 듯이 뒷머리를 긁었다.
“뭐,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긴 하지만…… 여하튼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 일족은 진작에 어떤 식으로든 파탄 났을 거야. 그랬는데도 쟤를 두고 일어난 치정극이 셀 수가 없을 정도니까.”
“치정…….”
“아직 헤츨링인 꼬마한테 구혼자가 얼마나 붙던지. 그래서 매번 드레스만 입혔어. 한쪽 취향이라도 줄여보려고. 별 효과는 없었지만.”
“아하하……. 왜 트로웰과 계약하지는 않았어? 나중에라도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라피스 쪽에서 거부했어. 걔가 워낙 엘퀴네스 순애보인 데다가 정령 계약이란 건 강제로 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라피스는 이 상황을 모르거든. 본인이 의식하면 더 기운이 강해진다고 해서 말하지 않고 있어. 그러니 엘도 비밀로 해 줘.”
“헉, 그렇구나. 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