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68화 (368/608)

제368화

‘뭐, 나도 언제까지 과거에 매어 살 수는 없겠지.’

번민의 주범이던 일족은 신계로 떠났고, 이후로 4천 년이나 지났다. 봉인된 탓에 세월의 흐름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한 사람의 핏줄이 몇 대에 걸쳐서 내려올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는데 이쯤 되면 변할 때도 됐다. 시벨리우스는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투둑-

착각이었을까. 어디선가 뭔가가 뜯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가 아무것도 이상한 점이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꽤 묘한 감각이었는데 딱히 경계할 만한 일은 아닌지 거슬리진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해방감이 드는 게 개운한 느낌도 들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으나,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왠지 오늘 밤은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일정 한계를 벗어난 존재란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롭기 마련이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상에 다른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으면 전체 일정을 크게 단축하는 공헌자가 될 수도 있다. 단지 상대 쪽은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 없이 갑자기 휘말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공간 이동을 당했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야.”

때는 트로웰이 대지의 방진을 세울 장소를 알아보겠다며 메테와 함께 자리를 떠났을 참이었다. 화기를 알아보러 갔던 이프리트가 막 귀환한 참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그녀가 지정한 장소는 트로웰이 예측한 장소와 같았다. 발랄한 디아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눈앞에 붉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불씨를 품은 채 우후죽순으로 솟아난 돌산, 석탄처럼 새카만 바위 무더기가 저마다 눈이 아프도록 새빨간 용암을 머금고 있는 풍경이었다. 사방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용액들이 온 사방에 붉은 길을 뻗어 나가다 못해 한데 고여 흘렀다. 영원히 식지 않을 듯한 불의 강이었다.

화산지대 트레이아.

불의 방진이 세워질 장소였다.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활화산이라는 트레이아는 동시에 가장 큰 화산지대이기도 하다. 과거 자연을 회복시키면서 전반적으로 아크아돈을 살피긴 했지만, 물을 회복하는 일에 더 집중한 편이라 불과 관계된 영역은 자세히 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처음 화산지대라는 말을 들었을 땐 한국에서 대충 매체로 흔히 접했던 광경을 떠올렸다. 예를 들어 조금 그을린 듯한 검은 땅이라든가,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는 바닥이라든가, 달걀이 삶아지는 온천 같은 것들 말이다. ……설마하니 재가 뿌옇게 휘날리고, 하늘이 온통 새카맣고, 분화구에서 연신 화염이 뿜어져 나오고, 넘실거리는 용암이 실시간으로 강물을 이루고 있는, 이런 과격한 모습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치 지옥도의 한 폭 같은 풍경인 게, 이곳만 보면 세계 종말이 일어나는 중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프리트의 불의 영역도 용암이 넘쳐나는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혹시 화산이 대폭발한 직후에 찾아온 것인가 했더니 원래가 항상 이런 상태란다. 그나마 이곳 터줏대감인 불의 정령들이 수위를 조절하고 있는 덕분에 흩날리는 재의 양이 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럴 땐 확실히 지구와는 구조가 다른 세상이라는 실감이 든다.

“……그래도 이런 건 미리 예고 좀 해주면 안 될까.”

눈앞의 풍경이 바뀐 순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각오를 다진다고 큰일이 가벼워지는 게 아니듯이, 알았다고 해서 놀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난 아직 소심한 편이라 이런 식으로 비상식적인(이 구성에선 이게 상식이겠지만) 상황이 벌어지면 일단 습관적으로 몸이 얼어붙는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디아곤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왜? 어차피 오려고 한 거잖아. 아, 혹시 직접 이동하고 싶었어? 하지만 각자 따로 이동하는 것보단 이게 더 편하지 않아?”

“그거야 그렇지만 말이지…….”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네. 자자,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자고. 난 일단 애들을 불러올게. 다들 계속 대기 중이었거든.”

“다들?”

“설계도가 복잡하고 방대해서 틀을 보조할 애가 다섯은 더 있어야 해. 그렇게 해도 완성하려면 일주일은 더 걸릴걸? 아, 상급신이 있으니 그보다는 짧으려나? 엘퀴……아니지, 엘뤼엔, 이쪽 일 도와주는 거지?”

디아곤의 말에 무심히 서 있던 엘뤼엔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만은 아무리 그라도 정해진 답을 피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선선히 떨어지는 허가에 디아곤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행이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침 물어볼 것도 있었어!”

“뭐지?”

“이거 말이야. 대체 뭐라고 쓴 거야? 뭔가 따로 첨부된 설명 같은데 신어로 되어 있어서 읽을 수가 있어야지.”

난처한 얼굴로 디아곤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약간 팔랑거리는 종이 같은 것이었다. 굳이 ‘종이 같다’고 표현한 건 실제로 종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질 자체는 하얀 석판의 느낌에 더 가까웠는데, 그런데도 구겨질 것처럼 팔랑거리는 게 신기했다. 아무래도 인간 세상의 물질은 아닌 것 같았다.

내용물이 적힌 안쪽엔 마법진으로 보이는 문양과 계산식 같은 것이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아마도 신계에서 건네줬다는 정화진의 설계도로 보였다. 대부분 다 알아볼 수 있는 글자였는데, 디아곤이 가리키는 한 부분만 모르는 글자로 적혀 있었다. 어지간한 문자는 다 읽을 수 있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니 신어인 게 맞는 것 같았다. 같이 들여다본 이프리트도 읽을 수 없어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걸 응시하는 엘뤼엔의 눈빛은 서늘해졌다.

“……이 빌어먹을 놈이.”

“으응?”

돌연 흘러나온 살벌한 말에 나를 비롯해 그를 주시하고 있던 모두가 흠칫 놀랐다. 엘뤼엔은 석판인지 종이인지 모를 것을 금방이라도 구겨버릴 듯한 기세였다. 기겁한 디아곤이 얼른 뒤로 감추고 나서야 그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별거 아냐. 그냥 낙서다.”

“어? 그럼 이건 정화진이랑 관계……,”

“없어.”

“그럼 이게 뭐라고 쓴…….”

“관계없다고 한 말의 의미를 모르나?”

단호한 말투는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던 디아곤의 얼굴이 단숨에 핼쑥해졌다.

“아하하, 엘뤼엔이 그렇다고 하니 그럼 이 부분은 그냥 무시할게.”

냉큼 물러선 반응에 엘뤼엔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직후 디아곤이 자리를 떠난 틈을 타서 나는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눈빛은 한결 풀려 있었지만 여전히 불쾌해 보이는 듯한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거슬린 듯했다. 이럴 땐 화를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건드리지 않는 게 낫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아까 그 종이 같은 거, 신계에서 온 거지?”

“그래.”

“낙서 내용이 뭐였는지 물어보면 안 돼?”

“……그리 대단한 내용은 아니다.”

다행히 엘뤼엔은 선선히 대답했다. 슬쩍 돌아보았더니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이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만큼은 우리 둘 다 한마음 한뜻이었다. 응원하는 눈빛에 나도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그치만 궁금한데…….”

“별걸 다.”

“그래도…….”

미련을 뚝뚝 흘리며 말끝을 흐렸더니 엘뤼엔도 조금 찜찜했던 모양이다. 그가 조금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얌전히 있어.」”

“……응?”

“궁금해한 답이다.”

“얌전히 있으라고? 그게 낙서 내용이야?”

“그래.”

“그게 무슨 뜻인데? 아니, 누가 누구한테 쓴 거야, 그거?”

“내가 알 바 아니지.”

딱딱한 대답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난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발신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낙서가 겨냥한 수신자는 엘뤼엔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발신자는 어쩌면, 내가 아는 그 신일 가능성이 컸다. 엘뤼엔이 목걸이를 탈취한, 그래서 지금 신계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마신 카노스. 그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존재가 없었다. 그가 엘뤼엔의 행동 범위를 예측해서 메시지를 전한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보통은 돌아오라고 하지 않나? 얌전히 있으라는 게 무슨 뜻이지?’

이번 행동이 과격하긴 했으나 엘뤼엔은 기본적으로 사고 치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카노스 쪽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정반대로 그가 엘뤼엔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하니 뭔가 좀 이상했다. 아, 혹시 곧 목걸이를 찾으러 갈 테니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소리였을까? 그런 거라면 말이 되긴 했다.

하지만 왜일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상하리만치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 * *

사라졌던 디아곤은 정확히 30분쯤 후 다시 돌아왔다. 떠날 땐 혼자였던 그가 돌아올 땐 남녀로 구성된 다섯 명의 인원과 함께였다. 전부 레드 드래곤인지 그들 모두 라피스와 비슷한 색감의 붉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물의 왕께는 처음 인사드리네요. 반갑습니다.”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뜻밖에도 무척이나 정중했다. 이프리트도 그렇고 라피스도 그렇고, 불의 속성과는 항상 삐걱거리는 부분이 있다 보니 내심 긴장했는데, 그게 선입견이었음을 한방에 깨달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진짜 운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체로 친절한 사람들은 다 놔두고 유독 성격이 나쁜 녀석들하고만 엮였다는 거니까.

“라피스, 오랜만이야.”

그들이 친절하다는 건 멀뚱히 서 있는 라피스를 챙기는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라피스 성격이 워낙 그렇다 보니(?) 다들 꺼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예상을 벗어나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그중 몇은 얼굴을 붉히는 걸 보아 단순한 호감을 넘어선 감정도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그들을 대하는 라피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아예 보지도 않고 무시하는 태도라 지켜보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정작 드래곤들은 익숙한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히려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기색이라 내심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생각보다 라피스가 일족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건 역시 엘뤼엔의 정체를 알았을 때였다. 간간이 교류하는 정령왕들과는 달리 상급신은 말 그대로 구름 위 같은 존재이다 보니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그가 전대의 엘퀴네스였다는 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전에 교류가 없었던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일일이 같은 반응을 보기 지겨워진 엘뤼엔이 뭔가 조치를 해둔 듯했다. 그 증거로 디아곤이 그 부분을 언급할 기세를 보이자 엘뤼엔의 눈빛이 곧바로 차가워졌다. 눈치 빠른 디아곤은 결국 끝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이후엔 본격적인 방진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설계할 방진이 워낙 컸기 때문에 드래곤들이 각자 구역을 나눠 흩어져서 그려야 했다. 왜 보조 인원이 다섯이나 필요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디아곤과 엘뤼엔이 가장 중앙 틀을 짜는 작업을 맡았고, 이프리트도 그 일을 거들었다.

그동안 라피스는 화기를 최고조로 올리기 위한 집중 훈련 같은 것에 들어갔다. 훈련이라고 해봤자 그냥 마법진을 하나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지만. 그마저도 할 일이 없던 나는 옆에서 얌전히 구경이나 했다.

“그러고 보니 라피스, 네 레어는 어디야?”

“저쪽.”

라피스가 가리킨 건 용암이 실시간으로 콸콸 쏟아지고 있는 분화구들 사이였다. 이 근방은 죄다 그렇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도저히 살아 있는 생명이 살 수 있을 만한 장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긴 벽에서도 용암이 흐를 것 같은데. 수맥이 닿아 있지도 않은 것 같고.”

“뭐, 그렇지.”

떨떠름하게 물어본 말에 아니나 다를까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황당해져서 쳐다보는 내게 라피스는 문제라도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넌 그런 곳에다 호수를 만들려고 했던 거였냐.”

“일단 성공은 했거든? 물이 증발되지 않도록 완벽한 냉각 기능을 갖춰놨었다고.”

“전부 말라버렸다더니?”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서 마법진이 깨졌거든. 설마 10년 사이에 말라버릴 줄은 몰랐지.”

“10년이 잠깐이라니 너다운 말이긴 한데, 마법진 설계할 때 그런 점도 다 미리 계산해두지 않아?”

“당연히 그렇게 했지. 그런데 내 예상 폭을 빗나갔어. 내가 틀릴 리는 없으니 아마 불의 정령들이 장난친 거겠지.”

어디서 남 탓을 하냐고 대꾸하지 못한 건 그 순간 라피스 주위를 맴돌던 자연체의 카사들이 핑글핑글 춤을 췄기 때문이었다. 들켰다며 몹시 즐거워하는 걸 보니 그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다. 말해 주면 그것 보라고 의기양양할 게 뻔해서 나는 조용히 못 본 척했다.

“근데 유지에 성공했으면 다시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

“뭐야, 그럼 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한테 부탁한 건데?”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그때 라피스는 제 능력으로는 호수를 다시 만드는 게 불가능해서 내게 부탁한다는 듯이 말했었다. 차가운 물을 유지해야 하니 분수대 역할까지 해달라고 했던 그 황당한 제안을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사실이니까. 내가 만드는 건 어떻게 해도 원하는 느낌이 안 나거든.”

“원하는 느낌?”

“조화라고 해야 하나, 활기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늘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 마법으로 유지하는 물에선 아무래도 인공적인 냄새가 사라지지 않더라고.”

“……너 진짜 까다롭다.”

“내 취향이 좀 고급이긴 해.”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을 능숙하게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황당해졌지만 여기서 새삼 발끈하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나는 곧 체념했다. 저런 성격으로 세상을 살려면 긍정적이어야 하긴 할 거다. 너무 긍정적이라 저런 성격이 된 것 같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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