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7화
놀란 알리사를 보며 아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금 전 황제의 막사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엘은 알리사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선에서 그녀를 도왔습니다. 애초에 그녀의 정령술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이런 서사를 만들어 낼 수도 없었을 겁니다. 이 전쟁에서 알리사의 공헌이 크다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단호한 울림을 담은 음성은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논란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랬구나. 이사나 씨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알리사를 보고 라온휘젠이 아셀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의미를 다분히 담은 시선에 아셀 역시 억울하면 너도 분발하라는 시선으로 화답했다. 예전이라면 무조건 그의 편에 섰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친우도 소중했지만 존경하는 주군이 될 이 또한 소중한 존재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매번 헛발질만 하는 쪽보다야 착실히 점수를 따고 있는 쪽을 응원하고 싶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설마 엘의 정체가 주제는 아닐 거고. 진짜 용건은 뭔데?”
시벨리우스의 말에 아셀은 다시 본래 목적을 상기했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폐하께서 대공에 대한 것도 알려주셨습니다. 겉으로 알려진 것들 외에, 그의 진짜 목적 말입니다.”
“아…….”
“전하에게 언급하신 바로는 그의 힘이 카터스 제국에도 닿아 있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아카데미 안에 일리야라는 신학회가 있는데, 그들이 대공의 산하였다는 정황 증거가 나왔습니다. 그게 진실인지, 연루되어 있는 자들이 누구이고 몇이나 되는지. 그 부분을 제대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이만 아카데미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두웅―
가슴 안에서 뭔가가 크게 흔들렸다. 시벨리우스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에 곧 당황했다. 그에겐 다행스럽게도 표정에서는 티가 나지 않았는지 다들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졸업하겠다고 했었지.”
“네. 졸업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가 꽤 있어서 가능하면 중퇴는 하지 않으려고요. 여기서 더 귀환이 늦어지면 퇴학당할 테니 지금이 돌아가기에도 적당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방어술이 완벽하지 않은데.”
“물론 알려주신 방식대로 수련은 계속할 겁니다. 요즘은 환시를 거의 안 겪는 편이기도 하고.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유려한 대답이었으나 시벨리우스는 점점 더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갔다. 미간을 잔뜩 구긴 그를 뒤늦게 발견한 아셀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시벨리우스 님?”
“가서 대공이랑 관계된 놈들을 조사하겠다며. 그놈 관계자면 어떤 미친놈들일지도 몰라. 행적을 따라가면 사념도 엄청 마주치게 될 거고. 아직 완벽하지도 않은 방어술로 그걸 다 버틸 수 있겠어?”
“아, 그건…….”
“게다가 그쪽엔 주술사가 있어. 너희들 납치됐을 때 발견한 주술의 흔적만 봐도 분명해. 주술사는 사념을 더 부풀리거나 폭주시킬 수도 있어. 그걸 네가 조심한다고 될 것 같아?”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말에 아셀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가 하는 말들이 전부 맞기도 했고, 왠지 화나게 한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난처해하는 그의 모습에 시벨리우스의 표정은 더 엄격해졌다.
“졸업이 걸려 있다니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것까진 말리지 않겠어. 하지만 그쪽 일에 기웃거릴 생각은 하지 마. 저 황태자든, 학교 총장이든, 다른 사람에게 전부 맡기고 넌 그냥 빠져.”
“그건…… 그럴 순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 이해 못 했어?”
“아뇨,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일리야가 정말 대공의 산하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네가 왜? 의협심 때문이라면…….”
“실은 제가 예전에…… 일리야와 어울렸던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시벨리우스의 눈이 커졌다. 알리사도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셀은 찌푸린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애매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채였다.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힘겨워하는 모습에 옆에 있던 라온휘젠이 살짝 헛기침을 내뱉었다. 염려하는 듯한 그의 시선을 보고서야 아셀은 겨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아셀 리글레오입니까?>
누군가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은 금방 잊히기 쉬운 기억 중 하나다. 하지만 아셀은 일리야를 처음 만난 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하고 있던 아셀은 사람 좋은 얼굴로 제 앞에 선 이들을 보며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일리야’라는 학회라 소개하며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아셀이 발표한 논문에 흥미가 생겼다는 이유였다.
“논문?”
“점성술을 공부하면서 쓴 논문이었습니다. 수호성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어느 특정한 달에 태어난 아이가 이능을 가질 확률이 높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걸 주제로 가볍게 써본 거였는데, 일리야가 그 내용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일리야는 신학 연구회였다. 신학 과정에 점성술이 포함된다는 걸 얼핏 들은 기억이 있던 아셀은 그들의 방문을 그리 경계하지 않았다. 몇 가지 묻는 것에 대답을 해 주었더니 이후로도 종종 찾아왔고, 한동안 그들의 자문 상담이 되어 주었다. 그들은 아셀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고, 아셀 역시 제게 잘하는 사람들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보니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별달리 문제 될 것 없이 평온한 관계였다.
틀어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 학기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방학 기간, 집에 돌아간 학생 중 몇 사람이 실종되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교내에서 일어난 사건도 아닌 데다 피해자들의 신분이 평민 계급이라 그리 큰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 같은 평민 계급으로서 동질감을 느낀 아셀은 조금 더 신경 쓰긴 했지만, 평소 친분이 있는 이들은 아니다 보니 관심을 오래 두지는 못했다. 학기 초라서 유난히 과제가 많을 때였고 다른 사람을 신경 쓰기엔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바쁘게 지내는 동안 사건에 대한 기억은 까맣게 지워졌다. 그가 우연히 실종자들의 기록부를 보기 전까지는.
“그 기록부라는 건…….”
“그들의 신상정보를 모아서 정리해 둔 학적부였습니다. 자료를 받을 게 있어서 교수실에 찾아갔다가, 실수로 건드리는 바람에 책 더미가 쏟아졌는데 그 안에 섞여 있었습니다. 정리하던 중에 우연히 내용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같은 달 출생이었습니다. 제가, 논문에서 다룬…… 특별한 기운을 타고난다고 주장한 바로 그 달 말입니다.”
“……!”
학생들의 출신지는 전부 달랐고, 실종된 전후의 정황도 갖가지였다. 태어난 달이 같은 건 단지 우연일 터였다. 그러나 너무 찝찝했던 아셀은 그때부터 일리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에게 호의를 보이던 이들이 갑자기 공격적인 태도로 변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협박하고 윽박지르는 게 마치 배신자를 대하는 투였다.
이미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아셀에게 그들의 그런 태도는 불길함을 더 증가시킬 뿐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제가 품은 의심을 공론화하려 했다. 하지만 아셀이 움직이는 것보다 일리야가 더 빨랐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들이 아셀의 병증을 근거로 그가 정신이상자라는 소문을 퍼트린 후였다. 그 탓에 그가 하는 말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셀은 실종자에 관해 질 낮은 풍문을 퍼트리려는 비열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눈에 띄고 싶어서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사방에서 그를 놀림거리로 삼았다.
그때부터 아셀은 본격적으로 교내에서 고립됐다. 이후,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라온휘젠이 곁에 둔 후로는 악랄한 소문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꺼리는 시선은 여전했다. 일리야는 그를 비방하고 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때때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셀을 아끼는 사람들은 일리야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그들이 실종 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기도 어렵고, 그 목적을 짐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연관성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리야가 대공의 산하라면, 그래서 정말 제물을 모으는 거였다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 후로도 실종자가 나왔어?”
“아뇨, 그래서 제가 예민했던 거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니 아마 다른 방법을 택한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학업을 포기하고 중도 자퇴하는 학생들이 꽤 늘어나는 추세였거든요.”
“학교를 떠났다면 그 후의 일은 주목받지 않았겠네. 설령 실종되었더라도.”
전달하려는 의미를 짐작한 시벨리우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셀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물의 정확한 조건은 모릅니다만, 타고나는 자질이 그 조건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마 지금까지 제가 준 자료를 토대로 제물을 선정했을 겁니다. 제겐 그걸 자세히 알아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지막 음성은 단호했다. 강아지처럼 순한 눈망울에 강렬한 의지가 깃드는 것을 보며 시벨리우스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더는 말릴 수도 없었고, 말린다 하더라도 물러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위험할 걸 뻔히 알면서 보내려니 속이 쓰렸다. 문득 제가 왜 이런 걸 신경 써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였다.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 해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갑갑했다. 그 기분은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나,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상당히 구겨진 얼굴이 됐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알리사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벨 씨, 우리도 따라갈까? 카터스 제국.”
“……뭐?”
뜻밖의 제안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시벨리우스가 느낀 건 뜻 모를 청량감이었다. 오랜 체증이 일시에 내려가는 것처럼, 단숨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게 자신이 찾던 답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동시에 그걸 달갑게 여기는 자신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알리사?”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려 목소리를 가라앉혔더니 묻는 어조가 절로 딱딱해졌다. 덕분에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아셀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정작 알리사는 능청스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셀의 공부가 부족한 게 문제면 우리가 따라가서 도와주면 되잖아. 어차피 난 이제 여기서 할 일도 없는걸. 마지막 공성전은 난전이 될 거라면서 이사나 씨가 빠지라고 했거든. 앞으로 얼마나 대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우느니 아셀 따라서 카터스에 갈래.”
“하지만…….”
“괜찮지 않아? 만약 정말 대공이 관련되어 있다면 확인해 볼 필요는 있잖아. 이사나 씨도 어차피 알아볼 사람을 보내려고 할 것 같은데, 그 역할을 우리가 한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거야…….”
“어머나~ 내가 떠올린 거지만 정말 멋진 생각이야! 좋아, 결정했어! 우리도 카터스로 가는 거야! 내가 가면 시벨 씨는 무조건 가는 거지? 응, 그럴 줄 알았어. 이사나 씨한텐 내가 잘 말할게.”
“…….”
일방적인 결정이 내려지는 동안 시벨리우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가 막혀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그를 향해 알리사는 그저 생긋 웃었다. 그 표정이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장난기 어린 표정 속에 서려 있는 짙은 감정을 읽고 나서야 시벨리우스는 그녀의 진짜 의도를 깨달았다.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그게 누굴 위한 건지도.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소녀가 아직 본인도 깨닫지 못한 제 마음을 먼저 알아보았음이 분명했다. 자신이 아셀에게 정을 주기 시작했음을.
‘정말이지…….’
힘없이 웃은 시벨리우스는 조금은 착잡한 마음으로 아셀을 돌아보았다. 일평생 결코 좋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동족의 피를 이은 존재였다. 심지어 떠올리는 것조차 싫었던 형제의 핏줄. 단지 동정심으로 가르치는 것뿐, 정이 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변하고 있었던 거였다. 안개에 젖듯이 천천히 퍼져나간 감정이라 깨닫는 게 늦었지만 계기가 되었던 일만은 분명히 떠올랐다. 아마 유니콘의 혈통을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이던 아셀의 모습을 봤을 때였을 것이다. 그런 그를 돕기 위해 자신이 본신으로 돌아갔던 바로 그 순간에.
“시벨리우스 님?”
빤히 바라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아셀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다 큰 녀석이 우물거리는 게 좋아 보일 리가 없는데도 아셀이 그러는 건 나쁘지 않았다. 시벨리우스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너희 일행이 몇이었지? 전부 데리고 이쪽으로 건너와. 어지간한 건 다 있으니까 따로 짐을 꾸릴 건 없을 거야.”
“네? 그럼 정말 같이 가실 겁니까?”
갑작스러운 손길에 굳어 있던 아셀이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을 보고 시벨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알리사가 한 말 들었잖아.”
“그, 그치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네 일이나 신경 써. 가면서 훈련 강도를 더 높일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머뭇거리던 아셀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시벨리우스는 새삼스럽게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외형은 하나도 비슷한 부분이 없는데 같은 피가 섞여 있어서인지 향취라든가 분위기가 자신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먼 후손인 아셀이 이럴 정도면 그의 형이었던 사람은 훨씬 더 그와 많이 닮았을 것이다. 그게 어떤 느낌이었을지 조금 궁금했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그는 흠칫 놀랐다. 아무렇지 않게 형을 떠올리다니, 예전이라면 생각하지 못했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