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66화 (366/608)

제366화

갑자기 잠든 것도 이거랑 연결된 일일까. 시벨리우스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신체 기능도 정상이었고 기력이나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최근엔 전투도 없었기에 힘을 크게 소비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건강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심리적인 문제라 보자니 자신이 요즘 상당히 태평하게 지냈던 걸 생각하면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우연히 한두 번이면 몰라도 계속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는 건 원인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조짐은 무시하고 넘어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그저 추측에 불과했지만 오늘 의식이 날아간 것도 이 현상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버려 두면 다음엔 또 어디서 쓰러지게 될지 모른다. 그대로 생각에 잠긴 시벨리우스가 달리 원인이 될 만한 걸 심각하게 짚어 보고 있을 때였다.

“……!”

무심코 시선을 내리던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팔에 뭔가 사슬 같은 것이 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정말 한순간이었고, 다시 확인했을 땐 사슬 같은 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시벨리우스는 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은 뜨거워지는 데 비해, 머릿속은 얼음물이라도 부은 것처럼 차가웠다.

‘단순한 착각이었나? 그게 아니면…….’

“시벨 씨,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알리사가 말을 걸어오고서야 그는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내심 느긋했던 기분은 이제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괜히 알리사까지 불안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때마침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그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익숙한 기척이라 처음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 뒤를 따라오는 낯선 기척이 신경 쓰였다. 도착하는 순간에 맞춰 문을 열자 두 사람이 놀란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한 사람은 이미 짐작한 것처럼 제 먼 후손뻘 되는 아이였고, 또 다른 한쪽은…….

“저건 왜 왔어?”

시벨리우스가 심드렁한 얼굴로 아셀 뒤에 있는 선홍색 머리칼의 남자를 가리켰다. 적나라하다 못해 무례한 호칭에 라온휘젠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으나 다시 잠잠해졌다. 중간에서 곤란해진 아셀만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드려야 할 말씀이 있는데, 같이 오겠다 하셔서요.”

“저 녀석이 널 불러낸 거랑 관계된 일이야?”

“비슷합니다.”

아셀은 조금 전 라온휘젠이 저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나갔던 참이었다. 한창 공부하던 중이었지만 최근 막사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던 황태자가 찾는다고 하니 시벨리우스도 두 말 없이 보내줬다.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아셀이 누구보다 친구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설마 같이 올 줄은 몰랐는데.’

시벨리우스가 만든 막사는 그가 허가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완벽한 그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이 공간에 타인을 들인 적은 없었다. 아셀이 오게 되었을 때도 일족의 혈통이니 나름 관계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냥 남이었다. 그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완벽한 타인. 다른 때였다면 거북하게 여길 일인데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다. 그냥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릴 때 먹을 걸 주곤 했던 다람쥐가 어느 날 친구를 데려왔었는데, 그때 느낀 기분이랑 좀 비슷한 것도 같았다.

“흠,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와.”

순순히 떨어진 허가에 아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반면 라온휘젠은 탐탁지 않은 기색을 드러내기만 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뚱하던 그의 얼굴은 이내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평범한 막사 안쪽에 저택 부럽지 않은 화려한 공간이 펼쳐져 있으니 당연할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이게 대체…….”

“놀랍죠? 시벨리우스 님의 능력이랍니다. 저도 처음에 봤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아셀이 제 자랑을 하는 것처럼 신나서 재잘거렸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 라온휘젠이 홀린 듯이 걸어가 이곳저곳을 매만졌다. 공간이 전이된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이 장소를 중심으로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진 느낌에 더 가까웠다.

“이건…… 어떻게 한 거지?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주술이야.”

시벨리우스의 대답에 라온휘젠의 눈이 커졌다.

“주술? 그건 상대를 저주하는 능력 아닌가? 주술로 이런 게 가능하다고?”

“그건 암흑 주술 쪽. 이런 게 가능하냐니. 주술에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무슨 마법사는 원거리 공격만 할 수 있냐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마법사인 그를 겨냥한 비유였다. 할 말을 잃은 라온휘젠은 입을 다물었다가, 그들을 빤히 구경하고 있는 알리사를 발견하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오세요, 태자님.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아, 그런 것 같군. 잠시 실례하겠다.”

생긋 웃으며 유연하게 말을 걸어오는 알리사와는 달리 라온휘젠의 태도는 전에 없이 뻣뻣하기만 했다. 어색하게 인사를 마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안내받은 안락의자에 앉았다. 시벨리우스가 간단하게 다과를 마련해 가져올 때까지도 그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화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오랫동안 그를 옆에서 지켜봐 온 아셀은 그 표정을 보다 정확하게 해석했다. 저건 듬직하게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창피한 현장을 들켜 자괴감에 빠진 모습이었다. 덩치만 크지 아직 갈 길이 먼 그의 친우를 위해 아셀이 슬쩍 나섰다.

“근데 사실 저도 주술의 개념이 좀 생소하긴 합니다. 마속성의 신관들이 쓰는 경우는 봤지만, 일반적으로는 접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신관들만 쓸 수 있는 건 줄 알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주술은 영적인 능력이니까. 신관들이 주로 쓰긴 하지. 하지만 방식만 알면 누구나 접근할 수는 있어. 넓은 범위에선 네가 익힌 점성술도 이쪽이고.”

“네에? 그렇습니까?”

“별의 운행을 보고 세상의 흐름과 운명을 읽는 거잖아. 그건 보통 신의 영역과 연결되곤 하니까. 그래서 신관들도 점성술과 천문학을 배우지 않나?”

“그, 그렇네요. 신학 심화 과정에 두 과목이 들어간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연관성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뭐, 그런 거야. 그 밖에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알고 있는 것 중에서도 상당수가 사실은 주술인 경우가 많아. 대부분 조잡하게 써서 잘 발동이 되지 않을 뿐이지.”

“그건 제대로 쓰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거의 비슷해. 문을 여는 방법만 알면 일단 누구나 다 열 수 있잖아? 그거랑 마찬가지야.”

“세상에……! 그럼 아무나 주술사가 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어떻게 그런 이능이……!”

아셀과 라온휘젠이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터트렸다. 이능이란 본래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힘이었다. 누구나 할 수 없기에 귀하게 여겨졌고, 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주술사는 아무나 될 수 있다니, 시벨리우스가 선보인 힘의 위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심각할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다. 충격으로 온몸이 뻣뻣해진 두 사람을 보고 시벨리우스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이렇게만 들으면 거저 얻는 능력인 것 같긴 하지. 하지만 문을 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했잖아. 그게 딱히 쉽다곤 안 했는데.”

“아, 역시 나름의 수련이 필요한 거군요.”

“당연하지. 주술식은 대체로 발동 조건이 까다롭고 어려워.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 선뜻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물론 재능에 따라 발휘하는 힘의 차이도 천차만별이고. 게다가 이건 영적인 능력이라고 했잖아. 육체를 가진 이에겐 매우 거친 힘이라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에서 잘못 쓰면 굉장히 위험해. 생기를 다 빼앗겨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될걸. 그래서 보통 주술사는 방어술부터 먼저 배워.”

“방어술이면 혹시 제가 배우는 것 말입니까?”

“응, 맞아, 그거.”

“그렇군요. 정말 여러 가지로 놀랍네요.”

“이건 굉장히 기본적인 건데. 요즘은 주술사가 정말 드문 모양이네. 그래도 예전엔 제법 많은 편이었는데. 하긴 잘 다루지 못하면 위험한 힘이라 쭉 견제하려는 분위기이긴 했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시벨리우스는 문득 따갑게 와 닿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했다. 아셀이 부담스러울 만치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저기, 저도 방어술을 배우고 있으니 나중에 주술사도 될 수 있는 겁니까?”

“주술사가 되고 싶어?”

“할 수 있다면 되고 싶습니다.”

“흐음.”

“아, 안 됩니까?”

“뭐, 안 될 건 없지. 넌 타고난 재능도 있고.”

“제가 재능이 있습니까?”

“유니콘의 피를 받은 주제에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야. 영안까지 가졌잖아. 주술사에겐 그것만큼 최고의 재능이 없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으면 접근하기도 쉽거든.”

“그, 그럼……!”

“일단 방어술이나 열심히 익혀. 오늘 공부도 하다가 말았잖아. 내가 매일 어떻게 하라고 했지?”

“적어 주신 주술문을 매일 열 번씩 암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술문의 해독서도 수시로 반복해서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하라고 하는지는 알아?”

“그…… 주술문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맞아. 그거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시벨리우스는 설명을 이어갔다.

“주술은 기본적으로 말의 힘이야. 얼마나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느냐가 이 힘을 끌어내는 근원이지. 그 정확한 문장이라는 건 단순히 발음만 의미하는 게 아니야. 물론 발음도 중요하지만.”

“그러니까, 문장이 지닌 정확한 뜻을 이해하라는 말씀이시죠.”

“맞아. 이해가 깊어질수록 네 말은 언령화 될 거야. 나중엔 굳이 주술어가 아니라도 약간의 힘을 실을 수 있게 되지. 조심하지 않으면 본인이 뱉는 말에 스스로 화를 당하는 경우도…….”

설명은 끝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뭔가에 당황한 듯한 시벨리우스가 멈칫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뭘 떠올렸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열심히 듣고 있던 아셀도, 덩달아 집중하던 라온휘젠도 어리둥절해졌다.

“시벨리우스 님?”

“……어? 뭐?”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음, 아냐. 그냥 잠시 딴생각이 나서……. 뭐, 일단 주술에 대한 건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원래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 않아? 뭐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참! 그랬었죠!”

그제야 용건을 떠올린 아셀이 허둥거렸다. 쯧쯧 혀를 차며 차를 마시던 시벨리우스는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그대로 기침을 내뱉었다.

“폐하께 전부 듣고 왔습니다! 엘 님이 정령왕이시라면서요!”

“……풉! 아, 미안.”

“…….”

그가 입으로 쏟아낸 찻물은 정면에 있던 라온휘젠의 얼굴에 고스란히 튀었다. 잠시 침묵한 라온휘젠이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묵묵히 얼굴을 닦아냈다.

“이런 얘기는 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 않을래? 아니, 그보다 이사나한테 다녀왔어?”

“네! 폐하께서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소문이 파다하잖습니까. 알고 보니 태자 전하가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진실을 확인하자고 했습니다.”

“……보면 의외로 담이 참 세다니까. 그래도 용케 이사나가 제대로 답해 준 모양이네. 하긴 이제 숨기기만 할 때는 지났지. 진실을 알아서 속은 좀 시원해?”

“시원할 리가요! 제가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엘 님이 정령왕이시라니!”

“뭘 새삼 놀라? 엘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하, 하지만 정령왕일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단 말입니다! 정령왕은 신에 가까운 존재잖습니까! 인간의 상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드래곤이라고 오해했어? 인간의 상식에서 제일 대단한 종족이 그건가 보지?”

“그야, 아무래도……. 모험 소설에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뭔가 어릴 때부터 키워온 로망 같은 것이…….”

“별것이 다.”

“별것이라뇨! 그렇지 않습니다! 드래곤의 유희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부분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전해 주는 지혜와 능력은 악마의 보물이라 불립니다. 제국을 한순간에 흥하게도, 망하게도 하니까요! 그 생생한 기록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존재를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전하? 마법사들한테는 특히 동경의 존재잖습니까?”

수선을 떨며 동의를 구하는 아셀에게 라온휘젠 역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시벨리우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 너희가 참 좋아하더라고 라피스한테 전해 줄게. 걔가 달가워할지는 모르겠다만.”

“네? 라피스 님이요?”

“걔가 드래곤이거든. 네가 갈망하는 그 유희 중인 드래곤.”

“…….”

“…….”

상상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지? 이어진 말에도 두 사람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령왕에 이어 드래곤이라니. 게다가 눈앞에 있는 이도 사실은 전설의 유니콘이다. 그러고 보니 마족들도 있었다. 아셀은 연신 마른세수를 하다가 허공을 바라보는 둥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아예 혼이 나간 라온휘젠은 “드래곤이라고……드래곤이 내 눈앞에 있었다고?” 라는 말만 고장 난 기계처럼 반복하는 중이었다. 한참 만에 혼란을 가라앉힌 아셀이 심각한 표정으로 알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알리사 님은 어느 종족입니까?”

“엥? 나?”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신족이라고 하셔도 절대 놀라지 않겠습니다.”

“응, 맞아. 신족이야.”

“……! 정말이요?!?!?”

“농담.”

“…….”

경악으로 달아오른 공기가 한순간에 푸시식 식었다. 얼빠진 두 남자의 표정으로 보고 알리사가 푸하하 웃었다.

“안 놀란다더니 놀라네. 안타깝게도 난 그냥 인간이랍니다. 평범해서 실망했어?”

“그, 그럴 리가요.”

“왜, 실망했을 것 같은데. 엘 님이 정령왕인 걸 알았으니 그동안 내가 일으킨 기적들이란 게 어떻게 된 건지도 알았을 거 아냐.”

“네? 뭐가 말입니까?”

“그야…….”

“엘 님이 도와주셨다고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알리사 님의 정령술이 고강한 것도 사실이라고요.”

“이사나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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