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65화 (365/608)

제365화

이사나는 마음속 깊이 탄식했다. 변명 같겠지만 사실 그때 그는 시큐엘을 하나만 소환할 예정이었다. 그랬어도 충분히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기억에 지배당하는 동물이었다. 나쁜 기억일수록 후유증도 오래가는 법. 과거 마물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그를 반사적으로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자기도 모르게 과하게 대처하고 말았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두 마리의 물의 늑대가 소환된 후였다. 처음부터 의도한 듯 태연한 얼굴을 하긴 했으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말 그대로 사고였다. 그러나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저 역시 정령을 복수로 소환한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날 폐하께서 소환하신 두 마리의 정령은 분명 상급 정령인 시큐엘이었습니다.”

“으음.”

그 순간 카웰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나 앞에 부복했다. 당황한 이사나가 눈을 크게 뜨는 것과 동시에 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한 몸 온전히 폐하께 바쳤습니다. 폐하께서 살리신 목숨, 제 삶은 폐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아니, 죽어서 뼈만 남은 이후로도 저는 폐하의 사람일 것입니다.”

“……형님.”

“감히 폐하의 깊은 뜻을 전부 헤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디 제게는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비장한 표정인 그는 마치 대답을 듣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자결이라도 할 기세였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난처함을 숨기지 못해 애매하게 웃던 이사나는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시기이긴 하지만 어차피 끝까지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요. 미리 말하지 않아 미안합니다.”

“그 말씀은…….”

“맞습니다.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습니다.”

“…….”

고요한 공간에 숨을 크게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카웰 공작이 경직된 것을 본 이사나가 가볍게 웃었다.

“이미 짐작했으면서도 놀라는 겁니까?”

“화, 황송합니다. 실감이 잘 나지 않는지라…….”

“하하, 이해합니다. 계약한 나도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요.”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질문해도 좋습니다.”

“혹, 정령왕의 정체가…… 폐하께서 곁에 두시던 엘이라는 소년입니까?”

이번엔 이사나가 숨을 삼켰다. 긍정이랄 수밖에 없는 반응에 카웰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실은…… 그를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엘을 의심했다고요?”

“설마 폐하께서 직접 소환하셨다고는 생각지 못하고, 유희 중인 정령왕을 만나신 게 아닐까 여겼습니다. 상급 정령사는 드물기도 했고, 그 외모가 도저히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 여겨 그냥 넘어갔었습니다.”

“으음, 그랬군요. 그래도 거기까지 추측했다니 굉장하네요. 역시 제국의 방패라 불리는 공의 감각은 무시할 수 없군요.”

“혹, 그가 폐하 곁을 떠난 이유가, 오늘 새벽의 급보와 관계되어 있습니까?”

이번에도 곧장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이사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군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를 적으로 만났을 상황을 가정하니 머릿속이 다 아찔했다.

“……형님, 진로를 잘못 택한 거 아닙니까? 예언가를 해도 되겠습니다.”

“황송합니다. 전서구를 보셨을 때 폐하께서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 것 같으셨습니다. 그때 혹시 대공의 상황을 이미 아시는 걸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습니다.”

“못 말리겠군요. 음, 나도 제대로 아는 건 아닙니다. 그쪽 일은 내 손을 떠난 지 오래거든요.”

“폐하께서 주도하신 일이 아니신 거군요.”

“세상엔 각자 알맞은 역할이 있는 법이니까요. 나와 엘은 가장 적합한 길을 걷는 중입니다. 인간의 전쟁은 인간에게. 그 밖의 것은 그 밖의 것으로. 대공은 이제 내 영역이 아닙니다.”

빙긋 웃으며 답하는 말은 담담했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뜻을 읽어낸 카웰 공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때 막사 입구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친위대장 케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 알현을 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알현?”

“라온휘젠 황태자와 아셀입니다.”

이건 또 피할 수 없는 사태로군. 이사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묻지 않아도 그들이 찾아온 용건이 훤히 보였다.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이제까지보다 더 깊은 내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도.

“차라리 잘됐네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이참에 한꺼번에 해결하죠.”

사고의 여파가 여전히 해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일찌감치 항복을 선언한 이사나는 순순히 대세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황제의 막사 안, 진실을 규명하는 2차전이 열렸다.

지금부터가 본선이었다.

* * *

시벨리우스는 새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돌아보는 곳마다 온통 희뿌연 안개만이 가득했다. 시야를 방해하는 것을 걷어내기 위해 무심코 팔을 든 그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손바닥이 왠지 너무 작은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자 어린애처럼 짧은 다리와 작은 발이 보였다. 아무래도 몸이 작아진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해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기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시벨리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안개 속에 뭔가가 있었다.

“거기 누구 있어?”

큰소리로 외치자 안개 속에 있던 것이 반응을 보였다. 그를 향해 돌아서는 형체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작아진 탓인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키가 컸다. 낯설면서도 왠지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듯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안개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야?”

“……여기 있었구나.”

상대는 그와 만난 것이 몹시 기쁜 듯했다.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그를 친근하게 여기는 기색이 느껴졌다. 시벨리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으려다 흠칫해서 입을 꾹 악물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이가 반갑다니. 몸이 어려진 탓인가, 왠지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 나오려는 것 같았다.

“널 많이 찾았단다.”

한 걸음 가까워진 상대가 쓰다듬으려는 듯 두 손을 내밀었다. 닿으면 무척이나 기분 좋아질 것 같은 손이었다. 가슴 가득히 그리운 감각이 솟아올랐다. 저 손길에 몸을 내맡겼을 때의 감각을 알고 있었다. 단잠을 꾸고 난 듯이 포근하고 행복해지는 기분. 모든 걸 내맡기고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

‘……미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잠시 멍해졌던 시벨리우스는 곧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거의 지척에 이르렀던 손이 다시 훌쩍 멀어졌다. 상대는 섭섭한 듯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날 용서하지 못하겠니?”

“뭐?”

“미안하다. 믿지 않겠지만 난 널 많이 사랑한단다. 제발 용서해 주렴.”

이해할 수 없는 뜻 모를 소리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 왠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울고 싶어지는 기분을 참기 위해 시벨리우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핑 돌았다.

<속으면 안 돼.>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시벨리우스는 눈을 크게 떴다. 문득 제 몸에서 무언가가 빛나는 것 같았다. 그제야 그는 무언가가 자신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걸 발견했다. 사슬처럼 보이는 것은 자세히 보니 글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들이 전부 살아 숨 쉬듯이 규칙적으로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건…….”

워낙 익숙한 형태이기에 정체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건 문자로 이루어진 주술문이었다. 그가 반응을 보이자 감겨 있던 사슬이 기다렸다는 듯 풀어지면서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눈앞을 가득 채우는 문자의 향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날 이용하는 거야.>

<그 지겨운 시절을 잊었어?>

<또 같은 꼴을 겪게 될 거야.>

<나도 결국 방치되겠지.>

<……처럼.>

<그래. ……가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읽어갈수록 그의 눈동자에서 천천히 빛이 사라져 갔다. 아아, 그렇지. 이건 그저 속임수일 뿐이다. 나도 결국은 방치될 게 뻔했다. 그는 결국 ……도 버렸으니까.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일 리가 없어. 그렇지 않다면 이제 와서 날 찾을 리가 없잖아?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가까이 오지 마!”

비명처럼 내지른 고함에 다가오려던 이가 멈춰 섰다. 아니, 사실 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제 쪽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듯했다. 이 이상한 세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하나만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서러워졌다. 마치 몸 안에서 두 개의 자신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당신, 대체 누구야? 뭔데 내게 이래?”

문자로 된 사슬이 보호하는 것처럼 둥근 벽을 만들어냈다. 자신을 완벽하게 감싼 사슬의 벽을 바라보면서 시벨리우스는 깊이 안도했다. 이 안에 있으면 자신은 안전할 수 있었다. 상처받을 일도, 이용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구나.”

안개 속의 상대는 그저 서글프게 웃을 뿐이었다. 문득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자욱하던 안개가 조금 흩어졌다. 그때까지 사납게 상대를 노려보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무심코 입을 벌렸다. 얼핏 그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나는…….”

“……씨.”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련히 먼 곳에서 무언가가 왕왕 울렸다. 그것은 따갑게 찌르는 감각 같기도 하고, 부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후로 몇 차례 진동을 더 느꼈을 때쯤 시벨리우스는 누군가가 자신을 깨우고 있음을 자각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도. 그러나 정신이 돌아오는 속도만큼 감각이 따라오질 않았다. 마치 깊은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누가 부른다고 느끼는 게 착각일지도 몰랐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꿈인지, 모든 경계가 모호했다.

“시벨 씨! 정신 차려!”

“……!”

그 순간 결박에서 풀려난 것처럼 온몸의 감각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마치 감전된 듯한 충격에 헉하는 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눈을 떴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환한 빛이 먼저 쏟아져 들어왔다. 시벨리우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희뿌옇던 시야가 빠르게 뚜렷해지면서 주변의 것들을 점차 담아내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익숙한 공간 속에서 한 소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을을 옮겨 담은 듯한 짙은 주황색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시벨리우스는 그녀의 이름을 간신히 떠올렸다.

“알리사……?”

그를 바라보는 알리사의 얼굴은 왠지 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게 당황한 표정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벨리우스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괜찮아?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어?”

“세상에, 이 땀 좀 봐. 어디 많이 안 좋은 거 아니야?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도 돼? 나는 알아보겠어?”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쏟아져 들었다. 그녀가 하는 말 중 대부분을 시벨리우스는 처음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간 멍해져 있던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고, 곧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알리사의 말대로 자신의 몸이 젖어 있었다. 누가 일부러 물을 끼얹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전신이 흥건한 땀으로 축축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문제에 더 신경이 쏠렸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지금은 밤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이쯤 되면 잠든 게 아니라 거의 기절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피곤할 때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현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보고 알리사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뭐야, 의식하지도 못한 거야? 어느 순간 너무 조용하길래 돌아봤더니 자고 있더라고. 근데 땀을 얼마나 많이 흘리던지. 괴로워하는 것 같길래 깨운 거야.”

“으음, 그렇구나.”

시벨리우스는 굳은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때와 창밖의 밝기가 비슷한 걸 보면 그리 오래 잠든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낮잠이란 걸 자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보호 대상을 놔두고 그냥 잠들다니, 일족 최고의 무장이자 수호자인 세라핀이었던 몸으로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사이에 사고가 터졌다면 어땠을까 싶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단 정신부터 차릴 요량으로 시벨리우스는 축축한 머리를 쓸어넘겨 질끈 묶었다. 알리사가 그런 그의 이마를 짚어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은 없긴 한데.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걱정이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아, 괜찮아. 그냥 꿈자리가 좀 사나웠나 봐.”

“으으음.”

“왜?”

“시벨 씨, 요즘 계속 그 말 하지 않아?”

“무슨 말?”

“꿈자리가 사납다는 말 말이야.”

그 말에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지난 언행을 돌아보았다. 별생각 없이 입에 담아서 의식하지 못했는데, 최근 자주 말하는 느낌이긴 했다.

“결국 잠들기만 하면 악몽을 꾼다는 말이잖아.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데?”

“으음, 꿈에서…….”

“꿈에서?”

“……잘 기억이 안 나.”

잔뜩 기대하고 있던 알리사의 표정이 대번에 황당해졌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시벨리우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뭐라도 기억이 나면 좋을 텐데, 마치 씻겨나간 것처럼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어렴풋이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불렀다는 기분이 들긴 했으나 고작 그런 걸 악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딱히 뭔가에 놀랐다거나 두려운 감각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꽤 껄끄러운 기분은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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