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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364화 (364/608)

제364화

묵직한 목소리는 휴센에게 패하고 물러났던 금패의 용병 렉스의 것이었다. 다른 이보다 몇 배는 큰 덩치를 지닌 사내가 그렇게 소리치니 그나마도 눈치를 보고 있던 이들이 완전히 기세를 죽였다. 당황한 휴센이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며 황제가 빙긋 웃었다.

“그렇다는군요.”

“…….”

이제 명실공히 용병대의 부대장이 된 휴센이었다. 얼어 있는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린 후 황제는 똑같이 얼빠져 있는 샴페인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중책을 맡게 되어 휴센의 어깨가 무거울 겁니다. 다들 새 부대장을 잘 보필해 주길 바랍니다.”

“마, 맡겨 주십시오, 폐하!”

“그렇게 말해 주니 든든하군요.”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황제는 떠나는 것도 빨랐다. 마지막으로 휴센에게 격려의 말을 건넨 후 그는 곧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만남에서부터 작별까지 한바탕 폭풍우 같았던 시간이었다. 황제 일행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샴페인 용병들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다냐.”

“뭐긴. 휴센이 출세한 거잖아?”

“허어…… 단장, 아니 이제 부대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헐, 부대장이래. 소름 돋아.”

“휴센, 너무 낯설다.”

“전부 닥쳐. 어디 나만 하겠냐?”

제게 쏟아지는 말을 견디다 못한 휴센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매튜가 떠난 충격에서 아직 채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느닷없이 한 부대의 책임자가 되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제법 큰 역할을 한 존재이기도 한 렉스였다.

“모두에게 한마디 해 주시죠, 새 부대장.”

“……당신…….”

“편히 렉스라고 부르십쇼. 그러게 말했잖습니까. 부대장 같은 사람은 어떻게든 그 힘에 책임을 지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나도 예상 못 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부대장 팔자가 보통이 아닌가 봅니다.”

“…….”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도 휴센은 그가 청하는 악수를 받아들였다. 스치는 인연이 될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닐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훗날 휴센의 가장 충직한 수하가 되는 사내― 렉스와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 그런데, 부대장. 황제 폐하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부대장으로서 짧은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휴센에게 렉스가 질문을 건넸다. 휴센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고심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우연히…… 뭐, 그렇게 됐소.”

“헤에, 굉장하네요. 그럼 혹시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뭐가 말이오?”

“황제 폐하가 물의 정령사라는 거 말입니다.”

반응은 다른 곳에서 먼저 일어났다. 근처에 있던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 맞아! 얼마 전에도 마물이 나타났는데 그걸 황제가 물의 정령을 불러서 잡았다고 들었어.”

“그래서 그쪽 부대가 난리가 났다던데?”

제법 커다란 화제였는지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샴페인 용병들은 외각에 있을 때의 일이라 관련 소문을 접하지 못했지만 이미 알고 있던 부분이다 보니 그리 놀라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더 의아했다.

“내가 알기론 틀림없는 정령사셨소.”

“헉! 정말 정령사라고요? 그럼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것도 사실인 겁니까?”

“……정령왕이라니?”

그러나 그들도 이 얘기만은 금시초문이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정령왕이란 단어에 주변의 소란이 더 커졌다.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걸 알고 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황제 폐하가 상급 정령을 두 마리나 소환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게 무슨…….”

“제가 전에 있던 용병단에 이런 정보에 밝은 애가 있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워들은 게 많거든요. 정령 계약은 하나밖에 못 한다더군요. 다수를 부를 수 있는 건 계약 정령보다 낮은 정령들뿐이라나요? 그러니 폐하가 상급 정령을 둘이나 불렀다는 건, 그보다도 상위 정령과 계약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상급 정령보다 상위인 정령은 하나뿐이죠.”

“정령왕…….”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황제 폐하가 엘퀴네스의 계약자인가 싶은 겁니다.”

“엘퀴……?”

“물의 정령왕 말입니다.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휴센을 비롯한 샴페인 용병들은 잠시간 멍하니 서 있었다. 생각을 멈춘 그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부대장?”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표정을 바꾼 휴센이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음, 나도 거기까진 잘 모르겠소.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곧 알려지지 않겠소?”

“아, 하긴 그렇겠군요.”

휴센의 대답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한 렉스가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이후로는 이렇다 할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았기에 떠들썩하던 분위기도 곧 사그라졌다. 이윽고 주위가 한산해지자 그때까지 긴밀하게 눈치를 보던 샴페인 용병들이 빠르게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온전히 그들끼리만 남게 된 후에야 그들은 서로를 심각하게 바라보며 본격적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다들 어떻게 생각해? 폐하가 정령왕의 계약자래. 이거 왠지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아?”

“묘하지. 엄청나게 묘해. 폐하가 소환하시던 정령들이 강하고 아름답기는 했지만 말이야. 정령왕처럼 보이는 존재가 있었던가?”

“……소환하신 적은 없었지. 그냥 항상 같이 다니셨을 뿐.”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이 다녔다니?”

어딘지 넋이 나가 보이는 이릴의 말에 다들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대답한 건 쉐리 쪽이었다.

“……엘 말이야.”

“…….”

“그 애, 파란 머리카락이었지? 마치 바다를 그대로 옮겨 담은 듯이 신비로운 물색. 그거…… 물의 정령들과 비슷한 색 아니었나?”

이마를 짚은 휴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알면서도 회피하던 진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자각한 탄식이었다.

“……생김새도 평범하진 않았지.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잖아. 솔직히 인간의 외모는 아니었어.”

“하필이면 이름도 엘이야. 설마 그 엘이 엘퀴네스의 엘은 아니겠지?”

“하하하하. 설마…….”

설마일 리가 있냐!

그들은 동시에 머리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았다.

“아씨, 미치겠네.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왜 자꾸 심장에 나쁜 일들이 빵빵 터져? 이거 진짜냐? 황제 폐하가 어린 신관 지망생하고 다니시는 게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그 엘이 정령왕이었다고?”

“누가 나 좀 꼬집어 봐. 나 지금 눈 뜨고 꿈꾸냐?”

“그럼 우리 정령왕이랑 같이 다닌 거야?”

뒤늦게 강타하는 해일 같은 충격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난날의 행적들이 영상석을 되감는 것처럼 그들의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당시 그들은 황제보다 엘을 더 스스럼없이 대했었다. 장난이나 농담도 자주 했고, 대놓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 회상 속 장면들이 알아서 묫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자, 잠깐만 기다려 봐.”

“왜? 쉐리?”

“엘이 정말 정령왕이라면 말이야…… 매튜는 뭐야?”

“뭐?”

“매튜가…… 엘과 고향 친구라고 했잖아. 가족 같은 사이라고.”

“…….”

“…….”

이번만큼은 아무도 반응을 하지 못했다. 다들 동시에 호흡을 멈췄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경험을 했다. 그 순간 쿠웅!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악! 휴센이 기절했어!”

“휴센! 단장! 아니, 부대장! 어이, 정신 차려!”

“틀렸어! 이미 눈이 풀렸어!”

부대의 가장 구석진 천막 뒤편에서 한 무리의 소리 없는 비명이 퍼져나갔다. 같은 시각, 그 사실을 느낀 다갈색 피부의 소년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는 건 이들에겐 평생 알려지지 않을 이야기였다.

일상의 인연에 감사하라.

기적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 * *

「황제가 물의 정령사였다.」

뒤늦게 밝혀진 이 엄청난 사실은 황제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희귀한 편인 정령사 중에서도 드물다고 알려진 물의 계열― 심지어 그 안에서도 가장 귀한 상급의 정령사였다. 거기에 어쩌면 정령왕의 계약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진영 안이 온통 관련 이야기들로 떠들썩했다.

황제가 능력을 감추고 있었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한 수를 숨겨둔 그만의 전략일 것이라 해석하고 알아서 존경심을 품었다. 기실 최근 들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던 내전의 판도를 단숨에 뒤엎을 만한 소식임은 분명했다. 황제의 인품이 훌륭하다는 건 지닌 시간 동안 이미 넘치도록 확인한바. 자애로운 황제가 뛰어난 이능을 지닌 데다가 현명하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제국의 복이요, 자랑이었다. ―다만 한 사람,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이사나 본인에겐 의도치 않은 사고에 불과했지만.

“사망자는 아론이란 용병입니다. 와인 용병단 소속이었으며, 평소 성실한 성격으로 주위 평가가 좋았던 걸 보아 인품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달리 수상한 행적은 없었습니다.”

보고를 듣는 이사나의 표정은 신중했다. 그의 손엔 두툼한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마물로 변한 용병의 조사 기록이 적힌 보고서였다.

“내가 확인하라고 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배급받은 식사 외에 다른 음식을 섭취했는지의 여부 말씀이시지요. 늘 함께 하는 동료들을 상대로 상세히 조사했는데 그런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이미 구겨진 이사나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졌다.

벌써 두 번이나 인간이 마물로 변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처음은 첩자 행위를 했던 자들이었기에 주목하지 않았으나 두 번째 희생자는 무고한 자였다. 어디선가 마목의 씨앗을 먹은 게 분명한데 과정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잠복기가 있는 것이니 군에 들어오기 전에 먹은 걸 수도 있지만, 만약 군량에 섞여 있는 거라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앞으로 또 몇 명의 피해자가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지금까지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빠르게 수습된 덕에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부턴 본격적으로 불안감이 퍼질 터였다. 동료를 잃은 탄식과 슬픔, 다음 피해자는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까지. 심리적인 위축은 상황을 빨리 수습하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마물 자체가 일으킬 피해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사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새벽에 받은 보고를 상기했다. 본래 오전에 열리는 참모진 회의가 오늘은 해가 뜨기도 전에 긴급 소집됐다. 수도에 심어 둔 정보원에게서 급보가 도착한 탓이었다. 전서구가 전달한 암호문엔 그럴 가치가 넘칠 만큼 파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공이 연회에서 귀족 자제들을 납치―살해하려다가 실패. 이후 도주, 생사 확인 불가. 행방 알 수 없음.」

암호문에 기록된 날짜는 사흘 전이었다. 황제군에게 놀라울 정도로 유리한 소식이었지만 워낙 비현실적인 내용이다 보니 참모진 대다수가 정보를 불신했다. 대공군 쪽의 교란 작전이 아니겠냐는 시선이 더 많았다. 사실이라면 가장 혼란에 빠져 있을 대공군에게서 아무런 동요를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이 타당한 근거로 꼽혔다. 그러나 이사나만은 그 정보가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잠적. 잠적인가……. 엘이 숙부를 처리한 걸까? 그게 아니면…….’

엘에게선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별다른 일이 없는 걸 수도 있지만, 설명할 시간도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걱정으로 속이 까맣게 타는데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갑갑했다. 물론 알아낸다고 해서 자신이 나설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사나는 생각을 전환했다. 걱정한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일단 군량에 낯선 곡물이 섞여 있는지 상세히 확인하고 발견하는 것마다 전부 회수하라 하세요. 최근 외부에서 받은 음식을 먹은 자들도 조사해서 격리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후로 몇 가지 지시를 더 건네는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만 두 번째인 긴급회의가 파했다. 한숨을 돌린 이사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나갈 거라 생각한 참모들이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용건이 있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황한 이들이 황급히 대답하곤 물러섰다. 달아나다시피 막사를 떠나는 자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이사나에게 곧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나갔음에도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웰 공작이었다.

“그들은 아마 떠도는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소문?”

“폐하께서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소문 말입니다.”

“…….”

이사나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최근 병사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제인 만큼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반응을 보이면 인정하는 셈이라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는데, 어째선지 오히려 소문이 점점 더 불어가는 듯했다. 이제 와선 수습을 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이사나로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사태였다. 모두의 앞에서 능력을 드러낸 이후, 그는 자신이 물의 정령사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이능은 대체로 다 그렇지만 정령술은 특히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가 드문 능력이었다. 정령에 대한 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고, 정령사 본인조차도 완벽하게 숙지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니 다들 그가 지닌 힘을 정확히는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한동안 정령사라는 사실 자체에만 집중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잠잠해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와 정령왕의 관계성을 짚어냈다. 아마 병사 중에 정령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었던 듯한데, 무리 지어 있는 군대의 특성상 소문이 빨리 퍼지는 환경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시작한 소문은 잠잠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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