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1화
“키에에엑!”
쇠를 긁는 듯한 소음이 찌를 듯이 울려 퍼졌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형태조차 구분 지을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말마였다. 육중한 육체는 무너지는 순간까지 거대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근방에 자라 있는 나무마다 온통 가지를 떨 정도로 대단한 울림이었다. 반대로 괴물 앞에 내려서는 이들에게선 아무런 소리도 일지 않았다. 마치 중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듯, 깃털처럼 사뿐한 착지였다.
사방은 고요했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굳어 있는 분위기 속에서 태연한 건 괴물을 해치운 이들뿐이었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던 무기를 집어넣었다. 공중에 한 번 휘둘러 오물을 털어내고 본래의 위치로 돌려놓는 과정이 무도의 한 장면처럼 유려하게 이어졌다. “우와아아!”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제야 뒤늦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미쳤다. 저걸 단숨에 끝내네.”
“내가 지금 본 게 뭔지 모르겠다. 저게 가능하긴 한 거야? 다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술렁이는 사람들은 꿈이라도 꾼 듯한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방을 파괴하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괴물이 너무나 덧없이 쓰러진 탓이었다.
괴물이 나타난 건 몹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돌연 괴물로 변해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생김새인 데다가 통상적인 공격은 통하지도 않아 아무도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지원 병력이라며 다섯 명의 인원이 나타났다. 평소 부대 안에서 실력 있다고 알려진 이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대처하고 있는 무리에 섞이면 어느 정도 보탬이 되겠거니, 그 정도의 시선이 다였다. 설마 그들이 투입된 순간부터 현장을 통째로 주도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으로 끝낼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론!”
다들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가운데, 무리 사이에서 몇 명의 남녀가 달려 나왔다. 괴물이 그런 모습이 되기 전까지 그의 동료였던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괴물의 시체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아아, 아론!”
빠르게 마무리되긴 했지만 피해 규모가 큰 데다가 사망자까지 나온 참극이었다. 한때 동료였다 해도 그 원인인 괴물을 붙들고 우는 모습은 아직 공포심이 가시지 않은 이들에게 자칫 반감을 사기 충분했다. 그러나 지켜보는 이들 중 누구도 그 모습에 불만을 품지 못했다. 울고 있는 그들에게 괴물을 처치한 이들이 묵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고인을 위한 예우로써 부족함 없는 정중한 태도에 다른 사람들도 다들 애도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자연스럽게 흐름을 주도하는 장악력과 저절로 따르게 하는 권위.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타고난 리더들이었다.
곧 병사들이 다가와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하면서 다들 본래 자리로 흩어졌다. 괴물을 처치한 이들 역시 간단한 문답을 거친 후에 제 위치로 복귀했다. 끝까지 현장을 지킨 사람들이 수고와 감사의 의미를 담아 떠나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저 사람들이 그 유명한 샴페인이지?”
“맞아. 용병단 중에서 규모는 가장 작은데 실력은 길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그 샴페인.”
“다섯 손가락? 저 정도면 단연 최고 아냐? 제일 큰 용병단이라는 비어 용병단도 저런 느낌은 아니었다고.”
“내 생각도 그래. 소문이 과장된 건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한참 축소된 거였네.”
“저런 사람들이 왜 고작 용병질을 하는 거지? 이해가 안 되네. 나라마다 모셔 가려고 할 것 같은데.”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마다 동경과 존경심이 가득 차올랐다. 소수의 최정예. 공훈을 세우되 과시하지는 않는 여유. 괴물에게도 고인에 대한 예우를 지키는 기품. 모두가 지켜본 그들의 모습은 소설 속 용사들의 서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훗날 수많은 역사학자가 지목한, 잠룡(潛龍) 샴페인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역사의 첫 기록이었다.
* * *
“으아, 뒈지는 줄 알았네. 멀쩡하던 사람이 왜 괴물로 변하고 난리래?”
물론 역사가 꼭 모든 진실을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라서, 현실은 자못 다를 수도 있는 법이다. 그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인물 중 하나가 뒤늦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박할 정도로 호들갑을 떠드는 헤롤의 모습에 일행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를 나무라진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심경은 모두 비슷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괴물로 변한 것 자체도 그렇지만 그 정체가 더 문제였다.
“그거, 역시 마물이었지?”
“그 특이한 생김새를 봐. 오러를 써서 베어냈는데 순식간에 아물었잖아. 몸 안에 핵이 있었고. 틀림없는 마물이야.”
이릴의 대답에 휴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마물은 마기의 찌꺼기가 뭉쳐져 발생하는 생물로 마계에 속한 존재다. 중간계엔 나타나는 일이 거의 없어 알려진 정보도 드물었지만 샴페인 용병들은 운 좋게도(?) 과거에 접해 본 적이 있었다. 남부에 있는 죽음의 땅― ‘검은 숲’의 호위 의뢰를 맡았을 때였다.
마계와 비슷한 환경이라고 알려진 검은 숲은 실제로도 마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특히 마신의 영향력이 짙어지는 암흑절(마신의 탄생일 주간. 이 시기엔 달과 별이 뜨지 않는다) 주간엔 마계만큼이나 마력이 강해지는데, 그러다 보면 간혹 마물이 태어나기도 했다. 단지 꽤 깊은 안쪽에서나 벌어지는 현상이고, 태어나도 불완전해서 며칠 안으로 사멸하는지라 외부로 나올 일이 없는 것뿐이다. 워낙 은밀한 현상이라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하필 그 시점에 숲을 방문한 것이나, 길을 잃는 바람에 생각보다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간 건 어디까지나 샴페인 용병단이 특수한 경우였다.
어쨌든 그때의 경험 덕분에 그들은 오늘 마물을 상대하면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을 무사히 해결했다 해서 사태를 가볍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상급 마수인 베히모스가 나타났을 때도 이 정도로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마수는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짐승이었다. 베면 베였고, 자르면 잘리는 육체를 갖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인간의 힘과 무기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물은 그렇지 않았다. 그건 살아 있는 생물이면서도 몸은 그냥 점액질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베어지지도 않는 데다가 자르면 오히려 분열해서 더 늘어나기만 했다. 약점인 핵을 파괴하지 않는 한 무적이나 다름없는데, 그 핵의 위치를 알아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으나 만약 적의 간계라면 앞으로 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질 경우 황제 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붕괴할 것이다. 마목의 씨앗에 대한 것이나, 그걸 엘 쪽에서 이미 대부분 제거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근심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왠지 시작부터 느낌이 영 좋지 않은데. 이거 불길한 징조 아냐?”
“헛소리.”
마이티가 찜찜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걸 휴센이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들은 부대에 복귀한 후에도 신원 확인과 자대 배치 문제로 한동안 외각에서 대기하던 상태였다. 이제 겨우 복귀 절차를 밟아 이동하던 참이었는데 배치되기 무섭게 이런 일이 터지니 안 그래도 다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적도 아니고 아군이었던 이를 벤 것이라 더 그랬다. 하물며 전장에서는 사소한 푸념 한마디도 징크스가 되기 쉽다. 마이티는 평소에도 무신경한 말을 해서 일행의 빈축을 자주 사는 편이었지만 지금 같은 발언은 명백한 실수였다.
찔끔한 마이티를 다른 이들이 노려보는 동안 휴센은 조금 묘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가 펴 보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를 알아본 쉐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휴센?”
“좀 이상해서.”
“뭐가?”
“조금…… 너무 쉽지 않았나?”
두서없이 튀어나온 말에도 그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다들 어렴풋이 같은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어, 역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나 보네.”
“뭔가 좀, 생각보다 되게 쉬웠어.”
“마물인데…… 꽤 간단히 잡았지?”
한마디씩 뱉은 후 그들은 서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물은 정말 위험한 존재였다. 과거 검은 숲에서 마주쳤을 땐 거의 죽다 살아났다. 그나마도 매튜가 우연히 마물의 핵을 간파한 덕분이라, 그가 아니었다면 모두 그날 검은 숲에 뼈를 묻어야 했을 것이다. 그때 새겨진 공포와 절망감이 얼마나 컸던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다시는 검은 숲에 가지 말자는 맹세까지 했더랬다. 그런데 그렇게 무시무시하기만 하던 마물이 왠지 이번엔 너무 쉬웠다. 속도나 힘도 예전만 못한 것 같았고 약점인 핵의 위치도 훤하게 보여서 찾아내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기억하던 느낌이랑 너무 달라서 지금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는 게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마물이 약했다고 하기엔 피해 규모가 너무 컸다. 그들이 나설 때까지 제압에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결론은 하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물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강해졌다는 것으로.
그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물론 과거보다 지금 실력이 더 나은 건 사실이었지만, 경험에 따른 요령이 쌓인 것이지 능력치 자체가 큰 폭으로 성장한 건 아니었다.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는 몸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됐던 것 같다. 그게 언제였더라? 기억을 짚어가며 제 몸을 주물러 보는 휴센을 따라 헤롤도 팔을 크게 휘둘렀다. 기분 탓인지 예전보다 근육이 더 유연해진 것 같았다. 평소 뻐근하던 부분도 이전만큼 걸리지 않았다.
“최근 들어 몸이 좀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있긴 했어. 살이 빠진 건가 했는데.”
“그렇게 먹어대면서 살이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 발상이 더 경악스럽다, 헤롤.”
“뭐! 왜! 뭐! 그럴 수도 있지! 뭔가 예전보다 소화가 더 잘되는 기분이었단 말이야!”
“아, 사실 그건 나도 그래. 먹는 것마다 고스란히 다 근력으로 간다는 기분?”
“정말? 나도 그랬는데.”
“나도.”
“뭐야, 그럼 다들 느끼고 있던 거였어?”
한 사람이면 몰라도 전부가 다 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당황해하던 그들은 곧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지? 우리 언제 뭐 좋은 거 먹은 적 있었나?”
“보약 같은 거 말이야? 우리 요즘 계속 거지였거든? 항상 똑같은 것만 해 먹었었는데 보약은 뭔 놈의 보약.”
“가끔은 식당에서 사 먹은 적도 있잖아. 그때 요리사가 실수로 집안 가보로 보관하고 있던 귀한 약초를 넣어버렸다거나……?”
“말이 되냐?”
“그게 아니면 이걸 뭘로 설명할 건데?”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평소랑 달랐던 거 뭐 없는지. 이상하던 점이라거나.”
“이상한 거라면…… 그 사제님이 이상했었지.”
이릴의 말에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부대로 복귀하는 동안 잠시 동행했던 엘뤼엔의 사제.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건 그 사제가 정말로 이상하긴 했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외모도.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묘하게 주변을 압도하는 그 분위기도. 거의 술만 주식으로 삼았던 점도.
“……그러고 보니 평소랑 달랐던 날이 하나 있긴 하네.”
마이티의 한 마디는 모두가 잊고 있던 기억을 재점화하는 불씨가 되기 충분했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상황을 떠올렸다.
그건 매튜가 우연히 합류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사제와 동행하기 시작한 이후, 샴페인 용병들은 될 수 있으면 편한 쪽으로 노선을 잡았다. 식비를 비롯한 모든 경비도 그들 쪽에서 전부 부담했다. 사제가 빈털터리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그에게선 돈을 받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미리 그러자고 합의한 것도 아닌데 다들 사제가 보태 주려고 할 때마다 극구 나서서 말렸다.
문제는 그들이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샴페인 용병단의 재정은 그 언젠가 헤롤이 돈주머니를 잃어버린 후로 늘 간당간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었으나 사제도 보는 눈이 있는데 그 뻔한 사정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선지 그는 뭐든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도 늘 가장 값싼 것으로만 고르곤 했다.
귀한 성수만 마시며 자랐을 것 같은 고결한(외모적으로나 자태로나) 사제가 싸구려 술만 마시는 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더 좋은 걸 권해도 그쪽에서 거절하니 민망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하루는 휴센이 큰마음을 먹고 비상금을 털어 평소보다 비싼 술을 주문했다.
“그렇게 질 나쁜 것만 드시면 입맛을 버리실 겁니다. 가끔은 좋은 것도 드셔야죠.”
아주 귀한 술은 아니었지만 당시 그들 형편에선 꽤 무리한 금액이었다. 그래도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거절하기도 전에 잔에 따라 권하니, 사제도 별수 없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그는 조금 묘한 눈으로 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술을 목 안으로 넘겼다. 남이 먹는 걸 지켜보는 건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땐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쁘지 않군.”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일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제야 모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인지한 사제가 빙긋 웃었다(여기서 다들 숨을 멈췄다).
“모처럼 호의를 받았으니 나도 그렇게 하지.”
빈 잔에 다시금 술이 채워졌다. 그 술잔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보고 휴센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저는 괜찮습…….”
거절하려는 그를 사제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든 아름다운 청안에서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휴센은 홀린 듯이 술잔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샴페인 용병이 술을 한 잔씩 받아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