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60화 (360/608)

제360화

‘어째서지?’

그의 상식으로는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사나를 납치해서 마나 구속구를 채우게 했었다. 납치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분명 지시한 대로 처리했을 것이다. 그걸로 정령왕의 존재를 봉인했다고 여겼건만, 설마 중간에 실패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본래라면 제사가 진행될 때쯤엔 왔어야 할 수레가 도착하지 않았다. 연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미처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가 운 좋게 달아나서 정령왕을 소환했다면 이해가 안 되진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정령왕 일행을 연회에 초대한 건 그 전날의 일이었다. 그들 일행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감시자를 붙인 후에 이사나를 납치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순서는 정확히 기억했다. 한마디로 계약자인 이사나가 황제군 쪽에 있는데, 정령왕 혼자 수도에 올라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정령은 계약자와 서로 떨어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이제껏 당연하게 여겨왔던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을 잇고 나니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에 도달했다.

그런데 내가 왜 살아 있는 거지?

“깨어났는가?”

“……!”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유카르테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두컴컴한 공간 쪽에 거뭇거뭇한 형체가 어른거렸다. 아마도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을 이는 다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때쯤 깨어날 거라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만 깜빡 잠들어 버렸군.”

‘……누구지?’

친숙한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했다. 유카르테는 아직은 그림자에 가까운 형체를 차분히 살폈다. 상대는 대답 대신 근처에 있던 램프를 켰다. 부싯돌을 쓰지도 않았는데 그저 건드리는 것만으로 유리 구체 속에 빛이 들어왔다. 마법 램프는 귀족들 사이에선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런 마도구를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신분이 그리 낮지 않다는 증거였다. 물론 잠시 후 드러난 얼굴은 그저 낮지 않은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정체에 멈칫했던 유카르테는 곧 헛웃음을 삼켰다.

“이게 누굽니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나르젠 폐하.”

“오랜만이네, 대공. 그다지 반가운 재회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네.”

카터스 제국의 황제 나르젠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얼굴이었다. 유카르테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를 알아온 이후로 호의적인 태도를 받아 본 일이 더 드물었다. 이런 대접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다.

“폐하께서 여기 계시다는 건, 혹시 제가 카터스에 있는 겁니까?”

“짐작한 그대로네.”

“어떻게 된 겁니까?”

“한밤중에 누군가가 나를 깨웠네. 눈을 뜨니 ‘그’가 내 앞에 있더군. 자네를 내게 던져주면서 보살피라 했네.”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카류안, 그분이 나를 구한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흐름에 다소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한결 여유를 되찾은 유카르테는 못마땅한 표정의 나르젠 황제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신세를 졌군요. 폐하께서 당황하셨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하려고 했네.”

답하는 나르젠의 표정이 한껏 엄격해졌다.

“자네와 짐은 대외적으로는 서로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이네. 이 관계에 대해서는 평생 죽을 때까지 측근에게조차 알리지 않기로 약조하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얽히는 건 곤란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네.”

“매정하시군요. 그래도 서로 한배를 탄 사이인데 말입니다.”

“그건 자네가 황제가 된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

날카로운 음성에 유카르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유순해 보이던 얼굴은 눈빛이 달라진 것만으로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나르젠 황제도 지지 않았다.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자네가 달아나듯 이곳에 왔을 정도면 상황을 알 만하군.”

“그래서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시겠다는 겁니까? 참 대단하신 의리로군요.”

“말을 가리게. 자네는 내 관대한 처사에 감사해야 하네. 이대로 자네를 붙잡아 어린 황제에게 넘길 수도 있었네.”

“폐하께선 그러지 못하실 텐데요.”

의미심장한 대답에 나르젠 황제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다른 문제는 그렇다 쳐도, 황태자의 운을 제게 맡긴 걸 잊으셨습니까? 폐하께서 단단히 토라지신 걸 보니 비록 실패한 것 같지만 말입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네.”

“글쎄요, 황태자도 그렇게 생각할지 궁금하군요. 제가 의식이 없는 동안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지금쯤이면 첩자는 색출했을 테고, 운이 좋다면 그 너머의 관련자까지 낱낱이 파악했을 텐데 말입니다.”

“애초에 자네가 제대로 처리만 했어도!”

“그것 보십시오. 모르시는 일이 아니시잖습니까.”

“…….”

유카르테는 꿀을 먹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무는 황제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건장하지도 빈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을 한 중년의 남자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생김새였다.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긴 하지만 잘 배우고 자란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기품이라든가 위엄도 보이지 않았다. 기름을 잘 발라 정돈한 머리 모양과 화려한 옷차림만 없애면 누구도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유카르테는 확신했다. 사실 카터스 황가는 본디 대대로 외모가 다들 평범한 편이었다. 초대 황제의 유전자는 매우 강력해서,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도 태어나는 핏줄은 대다수 부계의 외모를 따랐다. 하필 초대 황제가 산적 출신인 탓도 있어서 황실은 그를 닮은 평범한 외모에 은근히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온휘젠 황태자는 달랐다. 모친을 닮은 그는 특출나게 빼어난 외모는 아니어도 어딜 가도 호감을 살 만큼은 준수했고, 자태가 좋아 타고나길 황족다운 기품이 있었다. 그는 넝마가 된 차림을 해도 귀족으로 보일 것이다. 준수한 외모에 탐이 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후계자. 부친이라면 당연히 자랑스럽게 여길 아들이겠으나 사람의 심리란 복잡한 법이다. 황태자가 황족의 특징인 금낭화색 머리칼을 지니고 태어난 건 천운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 황제는 틀림없이 그와의 혈연관계를 의심했을 테니까.

‘아니, 오히려 제 핏줄이기에 더 싫어하는 걸지도 모르지.’

황태자가 어렸을 땐 그도 꽤 아들을 아끼는 부친이었다. 수많은 자식 중에서 유일하게 황가의 특징인 머리 색을 갖고 태어난 것도, 마법의 재능을 지닌 것도 모두 기껍게 여겼다고 했다. 하지만 성장한 황태자가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 존재를 위협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에게 황태자는 경쟁자일 뿐이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걸 가진 데다가, 가진 것은 더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그 자신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넘어선 질시의 대상.

제게 없는 것을 시기하는 이의 모습은 얼마나 추악한가.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취해 있는 이에게 상대의 의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뜻이 선량할수록 더 증오심이 깊어지기만 할 뿐. 한때 그런 대상이 되어본 적이 있던 유카르테는 나르젠 황제보다는 황태자에게 더 공감했다. 차라리 그쪽을 살살 구슬려 동업자를 갈아탈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그랬다면 일이 더 재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그의 속마음을 눈치챈 듯 나르젠 황제가 눈을 부라렸다. 제국의 황제답게 눈썰미만큼은 보통이 아니었다. 유카르테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어쩔 작정이지?”

황태자가 스왈트 제국으로 넘어간 건 원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평소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나르젠 황제는 이를 천금 같은 기회로 여겼다. 그들 사이에 본래 약조되어 있던 거래의 수단으로 삼기로.

지금 나르젠 황제는 유카르테를 돕는 대가로, 그가 황제가 된 후에 스왈트 제국 남서부의 풍족한 곡창지대를 넘겨받기로 되어 있었다. 대외적으로 내세울 만한 적당한 명분을 찾는 중이었는데 황태자의 무모한 가출이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유카르테가 내전에 휘말린 것처럼 황태자를 처리하면, 나르젠 황제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는 정당한 구실을 들어 군대를 일으킨다. 유카르테는 그 틈에 자신의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하고, 당당히 황제가 된 후에 카터스와 화평 조약을 맺는다. 그 대가로 곡창지대를 넘기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고, 분위기를 보아 황태자는 무사한 모양이다. 이사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을 때부터 내심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라 새삼 당황스럽진 않았다. 유카르테는 제 턱을 쓰다듬었다. 늘 매끄러웠던 피부가 며칠간 면도하지 않은 탓에 까끌까끌했다. 낯선 감촉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제국에서 사제나 미혼의 남자는 수염을 기르지 않는 것이 관례다 보니 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 왔는데, 이대로 길러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더 날카로워진 나르젠 황제의 목소리에 유카르테는 슬쩍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겉으로만 내보인 표정일 뿐 실제로는 아무렇지 않았다. 심각한 상황을 앞두고 딴생각을 한다는 건 여유를 완전히 되찾았다는 증거였다. 그를 노려보는 나르젠 황제의 시선이 못마땅하면 못마땅해질수록, 유카르테의 머릿속에서는 어떠한 계획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자네를 믿은 게 실수였네.”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서운하군요.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황태자의 일은 아쉬운 결과를 냈지만 곧 다른 기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기회? 황성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고 이곳으로 달아난 자네가 어떻게 말인가?”

“그건…….”

“행여나 내게 군대를 내어달라는 말은 할 생각 말게. 나는 어떤 식으로든 당위성을 잃을 생각이 없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좋은 방법?”

“일리야를 움직이게 해 주십시오.”

“무슨…….”

“아카데미 마법부의 재원 몇만 내어주시면 됩니다. 그럼 모든 게 간단히 해결될 겁니다.”

단숨에 뜻을 파악한 나르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왜 그렇게 질색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지금까지 쭉 해 오셨던 일입니다.”

“뒤탈이 없을 것 같은 상대만을 고르지 않았나? 하지만 마법부의 학생들은 대부분 귀족이거나 그들의 후원을 받는 자들이네. 그들은 안 돼.”

“대의를 위해 때론 모험도 감수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 흔적을 남기는 걸 보셨습니까? 모두 불행한 실종으로 처리될 겁니다.”

“그래도 그건 안 되겠네.”

단호한 대답에 유카르테가 난처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르젠은 그 모습을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무리 같은 뜻을 지녔다고 하나, 그는 최소한의 도의와 상식을 아는 자였다. 유카르테가 원할 때마다 사람들을 내어주면서도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젠 선을 넘으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귀족을 건드리다니! 평민 출신의 재원 몇이 사라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란이 벌어질 게 뻔했다. 그가 요구하는 인원이 한두 명일 리도 없었다. 애초에 이자와 손을 잡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르젠은 뒤늦게 후회했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도 유카르테에게 그리 좋은 감정이 없었다. 로아네즈 황후의 불행을 듣지만 않았다면 엮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네, 그 말은 사실이긴 한 건가?”

“그 말?”

“로아네즈 황후 말이네. 그녀를 죽인 게 정말 카일 황제인 건가?”

마침 기회가 좋았기에 나르젠은 마음에 품고 있던 걸 질문했다. 그를 이곳까지 오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태자 시절 이국의 땅에서 만난 로아네즈는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유일한 여인이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은 자신이 사랑받는 만큼 다른 이들에게 돌려줄 줄 알았다. 그가 그녀를 알았을 땐 이미 서로 약혼자가 있었지만, 끌리는 마음을 쉽게 접을 수가 없었다. 훗날 귀국하여 황제가 된 후에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은 그를 몹시 혼란하게 만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둘째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라 더욱 충격이 컸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가 유카르테와 연이 닿았다. 그 시절에도 로아네즈와 남매처럼 친했던 이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유카르테는 그가 상상도 하지 못한 충격적인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남편인 카일 황제가 잉태 중인 아내를 살해했노라고.

“카일 황제가 자네와 로아네즈 황후의 관계를 의심한 건 사실이지. 잉태한 아이의 핏줄을 믿지 못해 사산을 유도하려고 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카일 황제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네. 내가 아는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제 손으로 해칠 만한 위인은 아니었네. 주변의 정황을 봐도 그녀의 죽음엔 의혹이 많더군.”

“조사하셨습니까? 절 믿지 않으셨군요.”

“난 뭐든 확실히 하고자 할 뿐이네.”

길이 틀어졌다면 바로 잡으면 된다. 그는 이제라도 진실을 알 생각이었다.

“이렇듯 궁금해하시니 사실을 말씀드리죠.”

대답하는 유카르테의 표정이 나른했다. 선량함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응시하는 포식자와 같았다. 긴장한 나르젠이 자기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을 때였다.

“맞습니다, 선황제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그가 아무리 비열한 위선자라도 사랑하는 아내를 죽일 수 있는 위인이 아니지요.”

“그럼 그녀는…….”

“로아를 죽인 건 접니다.”

“……!”

나르젠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전혀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충격 탓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을까 이미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그걸 무시한 건 그와의 협력이 제게는 손해 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찝찝한 부분만 참아주면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황태자를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 있었고, 평소 탐내던 풍요로운 땅도 얻을 수 있었다.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관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분이 있었기에 쥐고 있을 수 있는 수였다. 진짜 살인자가 고백한 이 상황에서 관계를 지속할 순 없었다. 오히려 그는 나르젠의 약점이 될 것이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검집을 쥐었다.

“자네와는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단숨에 끌어올린 기세는 그의 뜻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유카르테는 당황하지 않고 웃었다.

“폐하가 실수하신 게 뭔지 압니까?”

“자네의 말을 믿었다는 거겠지.”

“하하, 저를 꽤 순진하게 보시는군요. 믿은 척하셨다는 것 다 압니다.”

“…….”

“폐하의 실수는 말입니다. 절 믿지 않으셨으면서도 제가 의식을 잃은 동안 처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순간 나르젠은 짧은 숨을 토했다. 목에서 강렬한 압력이 느껴지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리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실제로 그는 점점 공중에 뜨고 있었다. 발밑에 닿는 감각이 사라져 있었다. 나르젠은 필사적으로 몸을 버둥거렸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에 유카르테의 모습이 들어왔다. 태연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 위로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장발이 아닌데도 긴 흑발이 나부끼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무언가가 덧씌워져 있는 것 같았다. 두 팔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날카로운 손톱이 기어 나오는 듯이 꿈틀거렸다. 그게 그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광경이었다.

한동안 계속되던 버둥거림이 잦아들었다. 조용해진 나르젠 황제는 마치 넋이 나가 있는 듯이 멍한 표정이었다. 허공에 떠 있던 그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졌다. 발이 닿자마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유카르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말 들리나?”

“……명을 내리십시오.”

원했던 반응에 유카르테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카류안이 자신을 살렸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그는 저절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조금 더 인간에서 벗어났노라고.

“우리는 또 기회를 얻었군요.”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뻐하는 것이 자신인지, 혹은 그에게 깃든 카류안의 일부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무엇이든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을 이해해 주는 건 아무도 없었다. 친혈육처럼 여긴 여인이든, 제가 거두어 키운 수하이든. 결국은 모두 자신의 곁을 떠나 적이 되는 관계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제 삶에 비틀림이 생겼다. 자신은 그 비틀림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멈출 수 없는 거야, 로아.”

고즈넉한 공간 안에 낮은 음성이 흐트러졌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붉은빛이 새어들었다. 유카르테는 거리낌 없이 커튼을 열어젖혔다. 눈앞까지 떨어진 태양이 최후의 숨을 토해내듯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일몰의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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