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앗! 혹시 이 아름다운 소년이 새로 태어난 엘퀴네스인가? 만나서 반가워. 난 디아곤이야. 드래곤 일족의 수장이자 여기 있는 라피스와 메테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직후 날 인지한 디아곤이 성큼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성격 좋아 보이는 서글서글한 미소가 얼굴에 만연한 채였다. 얼굴도 젊은데 말투도 호쾌해서 그런지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친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위치인데, 그냥 또래 친구가 자신을 소개하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얼떨떨했다. 내민 손을 맞잡았더니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안녕하세요. 엘퀴네스입니다.”
“와, 이번 물은 성격 좋구나.”
“……네?”
“전엔 악수를 청해도 무시당했었거든. 싸늘하게 내려다보기만 하는데 얼마나 오금이 저리던지. 솔직히 그 기억이 트라우마라 지금도 속으로 살짝 쫄았어.”
……당연히 그랬겠지. 나도 모르게 그 뒤편에 서 있는 엘뤼엔을 바라보았더니 그가 피식 웃었다. 디아곤은 눈앞에 있는 내게 집중하느라 아직 자신의 뒤에 누가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아 참, 말은 편하게 해줘. 난 서로 예의 차리지 않는 관계가 좋거든. 내가 무례하게 구는데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면 너무 민망하단 말이지.”
“음, 그래도 나이가…….”
“우리 같은 존재에게 그런 게 의미 있나? 게다가 나이 차로 치면 트로웰과도 엄청나지 않아? 이미 고려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 음, 하긴. 알겠어. 그럼 디아곤도 날 엘이라고 불러줘.”
“하하, 좋아, 엘. 역시 마음에 들어. 이번 미네르바는 대차게 까더라고. 자신의 존댓말은 컨셉이니 건드릴 생각 하지 말라더라. 다른 의미에서 그것도 트라우마가 될 뻔했어.”
유쾌하게 웃은 디아곤이 능청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화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성격이 정말 좋은 드래곤이라는 생각이 커졌다. 어쩌다 이런 호남에게서 라피스 같은 까칠한 자식이 태어났는지 희대의 난제로 여겨질 정도였다.
“내 못난 자식 놈이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고 있다는 건 들었어. 그렇게 물의 왕과 계약하려고 하더니 기어코 소원을 성취했다지? 의외로 잘 지내고 있다 들었는데 엘을 만나 보니 이유를 알겠네. 이런 성격이면 오히려 카닐이 꼼짝을 못하지. 계약 과정에서 심한 폐를 끼쳤다 들었는데 관대하게 넘어가 줘서 정말 고마워. 내 아들이지만 쟤가 진짜 보통이 아니긴 해.”
“세대를 걸쳐서 민폐였지.”
그때쯤 이어지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엘뤼엔이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일부러 끼어들었다기보다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야 첫 소환에서 한 번 겪은 것뿐이지만, 그는 정령왕 임기 내 몇백 번이나 라피스에게 소환당했으니 사실 더 크게 시달린 쪽이긴 했다. 그런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그답지만.
“맞아,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거…… 헉? 엘퀴네스?”
무심결에 수긍하던 디아곤이 뒤를 돌아보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제야 엘뤼엔의 존재를 인식한 것이다. 이전의 그를 아는 이라면 당연히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 나오자 엘뤼엔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은 엘뤼엔이다. 매번 알려주기도 슬슬 지겹군.”
“뭐? 엘뤼엔? 설마 그 저주와 형벌의 신 엘뤼엔? 그게 엘퀴네스였다고? 엘퀴네스, 신이 됐어?”
“그 눈은 장식인가?”
“성격을 보니 맞네!”
두 눈을 부릅뜬 디아곤이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거의 삿대질을 하듯이 가리키던 손가락은 엘뤼엔이 얼굴을 찌푸리자 바로 내렸지만, 그를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살피는 것만은 멈추지 못했다. 그동안 메테라고 불렸던 또 다른 블랙 드래곤은 그냥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목례를 건네 왔다.
“메세테리우스입니다. 메테라고 불러 주십시오.”
“아. 반가워요.”
“물의 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은혜에 기대어 사는 일원으로서 오늘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아, 네…….”
쾌활한 아버지에 비해 그를 꼭 닮은 아들은 지나치게 정중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라피스의 형이라면 블레스터를 이 땅에 다시 내보낸 장본인이다. 카리브디스 공작과 싸우다 대패한 것으로 알려진 드래곤이기도 했다. 관련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누가 라피스의 혈육 아니랄까 봐 성격 한 번 유난한 드래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그는 상당히 숫기가 없어 보였다. 유난히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긴장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긴 정령왕들과 신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에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디아곤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초면의 정령왕을 편히 대하는 게 흔한 경우는 아닐 테니까.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어 보였는데 이제 보니 라피스가 부친의 뻔뻔한 면을 닮은 건가 보다. 그리고 이 순간, 부친의 기질을 고스란히 닮은 아들이 다시 줄행랑을 치려 했다.
“난 이만 꺼질게. 알아서들 일 봐.”
“카닐, 안 돼! 기다려!”
“카닐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젠장, 놔! 이거 안 놔?”
“메테! 당장 네 동생의 머리를 후려쳐! 이대로 기절시켜 버려!”
“……저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네요, 아버지.”
달아나려는 라피스의 허리를 디아곤이 끌어안고, 메테가 그걸 거드는 광경이 이어졌다. 서로 붙잡은 채 엎치락뒤치락하는 세 부자를 지켜보다가 나는 트로웰을 돌아보며 물었다.
“카닐이라는 이름도 괜찮은데 왜 저렇게 싫어해?”
“라피스는 원래 디아곤이 주는 건 다 싫어해. 이름이든 뭐든.”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
“쟤랑 사이좋은 쪽을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아?”
“아, 과연.”
이렇게 단번에 수긍해도 되는 일인가 싶지만 이보다 더 완벽하게 논리정연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때 디아곤을 억지로 떨쳐낸 라피스가 지친 얼굴로 다가왔다.
“본인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날조하지 마. 내가 그 애칭을 싫어하는 건 디아곤이 붙인 이름이라서가 아냐.”
“응, 알아. 그게 란타샤의 유희 명이기 때문이지.”
“란타샤?”
“디아곤의 반려. 라피스와 메테를 낳은 레드 드래곤이야.”
즉, 라피스의 어머니가 유희에서 쓰는 이름이 바로 카닐리언이라는 뜻이다. 라피스의 아명과 연결된 이름이라지만 레드 드래곤이라면 같은 보석에서 이름을 따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닐리언이 먼저고, 사도닉스를 거기서 따와서 붙인 이름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아들을 부인의 애칭으로 부른다고?”
“라피스가 디아곤이랑은 하나도 안 닮았지? 대신 란타샤를 닮았어. 지금 란타샤는 수면기에 들어간 상태라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됐거든. 그래서 종종 그리움의 표현을 아들에게 대신 하는 거지.”
“음.”
“좀 그렇지? 아버지란 자가 내게서 어머니를 찾으면 나라도 싫긴 할 거야.”
그건…… 확실히.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누군가를 자신에게 대입하는 것도 좋지 않은데 하물며 어머니 대신이라니. 이번만은 라피스 편을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니 라피스가 트로웰을 사나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다 알면서 모함하는 이유가 뭐야?”
“그게 재밌으니까.”
“누차 말하는 건데, 정령왕들 성격엔 하나같이 문제가 있어. 그중에서도 네가 제일 짜증 나.”
“그렇게 폄하할 건 없잖아. 너한테만 이러는 건데.”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대부 속을 썩이는 나쁜 아이라 그래.”
“하! 내가 뭘 어쨌다고?”
“굳이 따지자면 태어난 순간부터 그랬지.”
“웃기지 마. 난 정상적으로 부화했고, 성장도, 배우는 것도 빨랐거든? 나처럼 훌륭한 헤츨링이 어디 있었다고. 대부도 흔쾌히 맡았다고 들었어! 메테는 거절했으면서 나만 대자로 삼은 건 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 아냐?”
라피스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따졌지만 트로웰은 그저 신나게 웃기만 했다. 대자를 놀리는 게 어지간히 즐거운 것 같았다. 이후엔 디아곤이 다시 덮치는(?) 바람에 흐름이 다시 그쪽으로 넘어갔다. 라피스는 추행하는 아저씨처럼 달라붙는 디아곤에게 서슴없이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아, 왜 자꾸 이래?”
“카닐. 네게 할 얘기가…….”
“닥쳐. 내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면 패륜이 뭔지를 보게 될 거야.”
“……이미 패륜인 것 같지만.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라피스. 제대로 부르면 되잖아.”
“용건이 뭐야?”
그제야 저항을 멈춘 라피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어쩜 그런 모습도 카닐이랑 똑같니.” 일렁거리는 눈으로 그립다는 듯이 중얼거린 디아곤 때문에 또다시 실랑이가 시작될 뻔했지만. 조금 전보다는 한결 진정된 분위기였다.
‘그나저나 라피스만 대자로 삼은 거구나. 그건 또 몰랐네.’
형제니까 당연히 메테도 트로웰의 대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던 모양이다. 메테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하지 않았을까. 차별받는 아들이란 위치에 공감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왠지 마음이 쓰였다. 속성으로 치면 오히려 블랙 드래곤인 메세테리우스가 더 친근했을 거다. 그런데 그는 거절했으면서 레드 드래곤인 라피스를 대자로 받아들이다니. 트로웰이 무슨 의도로 그런 결정을 한 건지 궁금했다. 문득 바라본 그는 한창 대화 중인 부자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웃고 있는 표정인데, 이상할 정도로 얼굴에서 그늘이 느껴졌다. 아마도 눈빛이 가라앉아 있는 탓일 것이다.
‘트로웰?’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는 이가 아니다 보니 내심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그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 조금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웃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라 나는 작게 숨을 삼켰다. 그러자 시선을 느꼈는지 트로웰이 돌아보았다가 나를 발견하곤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알고 있는 여느 때의 그였다. 덕분에 서늘하던 분위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흐트러졌지만, 나는 조금 전의 모습이 여전히 잔상처럼 아른거려서 선뜻 웃을 수가 없었다. 비단 이 한순간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고 조금 전에도. 요즘 들어 일상에서 가끔 멈칫하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게 뭔지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미안, 지금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되감긴 녹화 테이프처럼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서글픈 듯,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던 그의 표정과 함께.
-넌 틀림없이 견디지 못할 거야.
그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경고였다. 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각오를 미리 주지하는 암시. 처음엔 ‘과거’의 문제라고 받아들였지만, 왠지 요즘은 그것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미는 불안감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나더러 정화진의 주초역할을 하라고?”
쾌활한 첫인상을 선보였던 디아곤은 본론을 꺼내기 시작하자 드래곤의 수장다운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찾아온 용건은 이프리트의 용건과도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진지하게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용인즉, 정화진을 고정할 방진을 드래곤의 몸에 새기기로 했다는 말이었다.
정화진을 고정하려면 마나를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는 중심축과 틀을 만들어야 하는데, 필요한 마나는 강제로 끌어온다 하더라도 그걸 버틸 수 있는 재질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드래곤의 육체를 주춧돌로 삼는 거였다. 마나의 생물이라 불리는 드래곤은 상당량의 마나를 거뜬히 받아들일 수 있을뿐더러, 마법에도 해박해 변칙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으니 이번 일에 매우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즉, 그 존재 자체가 살아 있는 마나 기둥이 되는 셈이다. 워낙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드래곤 일족도 선뜻 협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디아곤은 그 임무를 수행할 이들 중 하나로 라피스를 선정했다.
“왜 나야?”
“네가 불의 속성을 가진 드래곤 중에서 가장 강하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낸 라피스를 향해 디아곤이 간략히 대꾸했다. 아크아돈은 4대 정령왕이 주관하는 땅이라 마나도 그 형질을 따른다. 정화진에는 그 속성이 전부 균일하게 필요했고, 결과적으로 고정틀 역시 4개를 세우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각 속성을 최대치로 지닌 드래곤을 선별하기로 한듯했다.
“바람의 방진은 실버 일족의 아네아가, 물의 진은 블루 일족의 오칼이 맡을 거야. 대지의 진은 네 형이 할 거고.”
“메테가? 왜 디아곤이 아니고?”
“나는 일단 로드니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참여한 계획에 메테가 들어온다고? 오히려 균형이 안 맞지 않아?”
상대의 수준이 나보다 떨어진다는 말을 저런 식으로 할 수도 있구나. 하물며 제 형인데도 도발하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메테가 발끈하는 얼굴로 노려봤지만 라피스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에 오히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메테였다.
‘……왠지 점점 불쌍해지려고 하는데.’
내가 아는 형제 관계는 보통 형 쪽이 동생을 끌어가는 편이었는데. 형이 이렇게까지 밀려도 되는 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성이 신선하게 여겨지면서도 메테가 애잔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심정은 디아곤도 마찬가지였는지 짠한 눈으로 자신의 큰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뭐, 이 경우엔 네가 워낙 특이한 거니까. 너랑 비교해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건 나나 장로들 정도인걸. 지금 이 역할을 맡은 이들 중에선 아네아뿐이겠지. 오칼도 아직 미숙한 녀석이라 전체적으로 균형이 안 맞는 건 각오해야 해. 그 대신 부족한 쪽에는 최대한 보완할 수 있게끔 보조 마법진을 따로 만들 생각이야.”
“흐응. 뭐, 그러면 되긴 하겠네.”
더는 라피스의 재수 없음이 갱신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역시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모양이다. 얄미워도 이렇게 얄미울 수 있을까 싶게 구는 녀석을 보려니 내가 다 민망하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작 메테와 디아곤은 익숙하다는 듯한 얼굴들이라 새삼 혈연의 위대함을 깨달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