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7화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무작정 대공을 찾는다고 나타날 것 같지도 않고. 일단 이사나와 합류해야 하나.”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엘. 인간들 틈에 들어가면 행동이 더 제한될 거야. 당분간은 이대로가 낫겠어.”
고심하고 있는 내게 트로웰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일정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곧 해야 할 일이 생길 것 같거든.”
“해야 할 일?”
“응, 저기.”
대답과 함께 그가 팔을 뻗어 전방을 가리켰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돌아본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가리킨 부분에서 공간의 일렁거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곧 화르륵 강렬한 불길과 함께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선명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주홍색과 노란색, 붉은색이 혼합된 색들이 열기를 품은 것처럼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라피스의 붉은색이 보석 같다면, 그의 붉음은 곧 태양이었다. 세상의 빛과 온도를 다스리는 축복의 상징. 태양 그 자체이기도 한 존재.
“이프리트?”
예상치 못한 등장에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감겨 있던 이프리트의 눈이 떠졌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 사이로 머리카락과 꼭 같은 빛깔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이었다.
“너 왜…….”
“아,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말을 걸기 무섭게 사나운 음성이 몰아쳤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프리트는 왠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물론 나를 대할 땐 늘 그런 모습이긴 했지만, 주로 내가 찾아가서 겪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었다. 굳이 찾아와서 신경질 낸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눈만 깜빡이는 동안 이프리트는 다짜고짜 내게 걸어오더니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너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왜 빠릿빠릿 해결하지 못하고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어? 굳이 나까지 움직여야겠어?”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도와주러 온 거라는 말을 굳이 험악하게 표현하는 게 참 너답다.”
“시끄러! 대공부터 진작 처리했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지금이라도 당장 그 녀석을 찾아 없애버려!”
“그러려고 했어. 찾을 수가 없어서 그렇지.”
“그걸 왜 못 찾아? 너 진짜 무능하다!”
“나만 못 찾는 거 아니야. 다들 못 찾고 있거든? 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건 나도 알아!”
“……대체 나한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 허심탄회하게 말해 주지 않을래.”
“대답을 바라긴 무슨. 그냥 화풀이야.”
“허?”
“난 네가 세상에서 제일 만만하거든. 아, 소리 질렀더니 속이 좀 풀리네.”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는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날 대놓고 동네북 취급을 했겠다?
“너 성격 진짜 나쁘다는 말 많이 듣지 않냐?”
“시끄러. 나 정도 되면 이런 성격도 매력이야. 엘뤼엔한테 이르기만 해 봐.”
“매력이라면서 이르지 말라는 건 뭐야. 게다가 내가 이르지 않으려고 해도 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은데.”
“뭐?”
눈살을 찌푸리던 이프리트는 내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돌이 된 것처럼 굳었다. 그곳에서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신을 발견한 탓이다.
“……에, 엘뤼엔?”
“넌 여전하군, 이프리트.”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이프리트는 나를 붙잡고 어디론가 마구 질주했다. 거리를 벌리려는 목적인 것 같은데 솔직히 의미 없는 시도라는 건 우리 둘 다 알았다.
“엘뤼엔이 왜 여기에 있어!”
“나 보러 왔대.”
“진작 말했어야지!”
“양심을 찾으세요, 이프리트 씨. 네가 언제 말할 틈이나 줬냐.”
“어휴, 진짜! 아무튼 도움이 안 돼!”
씩씩거리는 이프리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지 궁리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애초에 엘뤼엔이 있어서 온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애써 이미지 관리한 게 다 소용없어졌잖아!”
“몰랐구나. 한국엔 이럴 때를 위한 속담이 있어.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지.”
“죽을래, 진짜?”
음산할 정도로 낮아지는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이미지 개선이 되기는 했을까. 이프리트에 대한 거라면 나보다도 오히려 엘뤼엔이 더 잘 알 텐데. 이제 와 성격이 바뀌었다고 해 봤자 그게 얼마나 통했을까 싶다. 지금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오히려 그러려니 하는 엘뤼엔을 보면 확실히 실패한 게 분명한데, 그걸 이프리트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거나.
어쨌든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었던 나는 버티는 녀석을 억지로 붙잡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계속 저항하던 이프리트는 막상 엘뤼엔 앞에 이르렀을 땐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세를 바로 했다.
“흠흠, 오랜만이야, 엘뤼엔. 네가 여기 있는 줄 몰랐어.”
“그래, 그런 것 같더군.”
“네가 아크아돈에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와볼 걸 그랬네. 이런 곳에서 둘이 뭘 하고 있었어?”
“둘이 아닐걸? 여기 우리도 있는데, 이프리트.”
“……아, 그렇네.”
그때쯤에야 트로웰과 라피스를 발견한 듯 이프리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오자마자 나를 붙잡고 쏘아붙이더라니, 주변은 하나도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새삼 시샘이 서려 있었다. ‘내 유희엔 아무도 참여 안 하면서 왜 다들 얘랑은 같이 다니는 거야?’ 라는 의문이 그대로 보이는 시선이라 쓴웃음이 나왔다. 이쯤 되면 불과 물이 상성이 안 맞는다고 알려진 건 일방적으로 이프리트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근데 정말 왜 온 거야? 엘뤼엔이랑 트로웰이 여기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면 미리 상황을 알아본 것 같진 않은데.”
“미네가 날 찾아왔었어. 신계 쪽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야.”
“신계에서?”
그것도 카노스가 관여한 건가? 신계라는 단어에 나를 비롯한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흐트러졌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자신에게 집중되자 이프리트는 꽤 뿌듯해진 것 같았다(특히 엘뤼엔이 자신을 봐줬다는 점에서). 눈빛이 반짝거리는 게 귀여워서 웃었더니 후다닥 표정을 갈무리하는 것도 그다웠다.
“악신 때문이야?”
“그게 아니면 이 시점에 연락할 이유가 뭐겠니.”
“자세히 얘기해 줘. 신계에서 뭐라고 해?”
“악신을 정화하는 마법진을 짤 예정인가 봐. 우리에게 협조를 부탁했어.”
“정화 마법진?”
“왜 소멸진이 아니라?”
트로웰이 살짝 찡그리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화진이라면 일단 카류안의 영혼을 정화해서 회생의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놈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과하다 싶을 만큼 관대한 조치였다.
“안 그래도 이상해서 물어봤는데. 그게 조금 더 편한 방식인 가 봐. 소멸진이 생각보다 위험하다더라고.”
“그래?”
“필요한 재료들도 까다로운 것 같았어. 그래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단 정화진부터 만들려고 하나 봐.”
그렇게 말한 이프리트가 잠시 엘뤼엔 쪽을 힐끔거렸다. 뭔가 해야 할 말을 삼키는 얼굴이었다. 엘뤼엔도 그걸 알아차렸을 텐데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건 틀림없이 일부러 반응하지 않는 거였다.
‘……뭐지?’
이프리트가 엘뤼엔을 힐끔거리는 건 워낙 흔한 일이고, 그걸 엘뤼엔이 무시하는 것도 발에 차이는 돌멩이만큼 흔한 광경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 모습에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진행되는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었다. 왠지 그 부분을 무시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화제가 이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그래서 우리더러 무슨 협조를 하라는 거야?”
“정화진을 지탱할 수 있도록 아크아돈 전반에 걸쳐 마나 공급원을 만들어야 해. 물론 이건 소멸진에도 필요한 거라 어차피 만들어야 하는 거고.”
“흐음. 무엇을 주춧돌로 삼을지가 관건이겠는걸.”
“아무래도 그렇지. 그 부분은 미네랑 의논을 해 둔 게 있어. 일단 기다려 봐.”
“……?”
한동안 트로웰과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던 이프리트가 잠시 동작을 잠시 멈췄다. 어디론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했다. 그러자 잠시 후,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두 명의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이었다.
“이프리트. 그렇게 갑자기 가버리면 어떡해.”
한탄하며 나타난 그들은 둘 다 짙은 흑발에 흑안을 지니고 있었다. 신기한 건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 속에 자리 잡은 동공은 화려한 금색이라는 사실이었다. 트로웰을 연상시키는 조합인데 실제로 느껴지는 기운도 그와 흡사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대지의 속성을 강하게 지녔으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 게다가 상당히 강하다. 혹시 드래곤이려나? 그걸 확신하게 된 건 옆에 있는 라피스의 반응 덕분이었다. 무심하게 상황을 관조하던 그가 남자들이 등장하는 순간 얼굴을 왕창 찌푸렸기 때문이다.
“아, 젠장.”
못 볼 걸 봤다는 듯 질색한 그가 낮게 혀를 찼다. 동족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일 텐데, 과연 평범을 지향하지 않는 드래곤다운 태도였다. 평소와 다른 점은 그게 불쾌감이 아니라 낭패감에 더 가까웠다는 거다. 본인은 의식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살짝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상대를 껄끄럽고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느껴졌다. 신인 엘뤼엔조차 편하게 여기는 그를 아는 이라면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장소를 안다고 하곤 그냥 혼자 가버려서 우리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그래서 이그니스를 보내 좌표 불러줬잖아.”
“아무리 그래도 미리 말은 해줘야…….”
흑발의 남자들은 서로 빼닮은 외모만큼이나 분위기도 비슷해서 혈연관계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중에서 조금 더 연상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프리트를 붙들고 하소연하다, 근처의 트로웰을 발견하곤 반가운 낯을 했다.
“오, 트로웰. 여기서 만나네.”
“디아곤. 오랜만이야.”
마주 인사하는 트로웰은 드물게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정령이 아닌 이에게 저런 표정을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그와 같은 속성을 지닌 드래곤이기 때문일까. 한눈에도 친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밀접한 관계로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잇자 불현듯 찾아드는 깨달음이 있었다.
‘아, 혹시…….’
그 순간 트로웰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붙잡은 건 라피스의 옷자락이었다. 약간 흐트러졌던 라피스의 형체가 강제로 고정되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어디를 봐도 공간 이동을 하려다가 그의 제지로 실패한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진짜 이러기야?”
라피스가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트로웰은 전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쓸데없는 참견이야.”
“넌 그렇게 생각해도 디아곤은 그렇지 않을걸?”
“대부라면 이럴 땐 내 편을 좀 들어봐.”
“미안하지만 난 말 안 듣는 대자보다는 내 계약자가 더 우선이라서.”
안 그래도 구겨져 있던 라피스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분위기가 살벌해졌지만 트로웰이 워낙 상큼하게 웃고 있어서 위기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가 한 말에 더 주목했다. 유난히 친근해 보이더라니, 역시 저 남자가 트로웰의 계약자인 모양이다. 그 말은 즉, 그가 라피스의 아버지라는 뜻이기도 했다. 워낙 젊어 보이는 외형이라 아버지라기보다는 형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실제로 라피스의 형일 다른 쪽 흑발의 남자는 라피스보다 어려 보였다. 그간 말로만 듣던 라피스의 가족을 실제로 보게 되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둘 쪽은 서로 꽤 닮은 반면에 라피스는 그들과 하나도 닮지 않아서 더 그랬다. 예전이었다면 라피스가 혼자 튀는 외모로 변형해서 그런 거라고 어림짐작했겠지만 이젠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인데, 드래곤이나 유니콘이 인간형의 모습이 되는 건 마법이 아니었다. 일종의 현신으로, 그 모습도 본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거였다. 종족이나 피부색을 바꾸는 식의 몇 가지 변화는 줄 수 있으나 기본적인 부분은 타고나는 거다. 즉, 라피스의 저 화려한 외모도 실제로 그가 미룡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마법을 써서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것도 되긴 했다. 하지만 그 경우엔 마나가 덮여 있는 것 같은 미세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고 내가 정령왕이라서 느낄 수 있는 거겠지만. 여하튼 이사나의 모습이 변했을 때도 그랬고 라피스가 머리카락이나 눈 색을 바꿨을 때도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셋에게선 아무런 이물감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결국 셋 다 타고난 현신 그대로라는 건데, 그런데도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서 라피스만 현저히 외모가 달랐다. 누가 보면 그 혼자 다른 곳에서 주워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인데 도망부터 치려고 하다니. 우리 카닐, 여전히 새침하구나.”
“젠장, 징그럽게 표현하지 마!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흑발의 남자, 디아곤이 애석하다는 듯 건넨 말에 라피스가 버럭 소리 질렀다. 새침하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소름이 돋는 것과는 별개로, 낯선 단어가 귀에 밟혔다.
“카닐?”
“디아곤이 부르는 라피스의 애칭이야.”
트로웰이 웃음을 삼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저 녀석 어릴 때 아명을 사도닉스라는 보석에서 따왔는데, 그 보석이 다른 이름으론 카닐리언이라고도 불리거든. 거기서 기인한 거지.”
“그렇구나.”
뭔가 가족이라서 붙일 수 있는 애칭이라는 건 알겠다.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가 따로 존재한다는 느낌이랄까. 전혀 닮지 않은 외모 때문에 어색해 보였던 관계가 순식간에 하나로 융화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