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5화
“설마…….”
억지로 침착을 가장하던 표정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라온휘젠을 보며 이사나는 쓰게 웃었다.
“대답이 나왔군요.”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뭔가,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그 모임을, 일리야를 후원한 건 아드리스의 뜻이 아닙니다. 아드리스가 일리야를 후원하게 된 건 부황의 뜻이었습니다.”
“나르젠 황제까지 연결된 겁니까? 배후가 분명해져서 좋네요.”
“…….”
냉정할 정도로 간단히 내려진 결론에 라온휘젠은 해명하려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채 삼켜지지 못한 숨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사나는 그쯤에서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이미 모든 정황이 드러난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더 길게 말을 이어봤자 그를 자극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그와 감정적으로 얽히는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
사실 그 연결 고리는 이사나도 충격이 컸다. 알폰프 제국 최고의 학술원인 라무스에 대공이 손을 뻗었음을 알았을 때부터, 그의 마수가 대륙 각지에 뻗어 있다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카터스 제국 황실이 그에게 협조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현 황제인 나르젠은 그의 삶 전반을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헌신한 군주였다. 카터스 제국은 원래도 마법 분야에서 독보적이었지만, 보다 실용성 있는 마도구가 개발되기 시작한 건 그가 등극한 이후였다. 하늘의 내린 군주라며,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그가 대공과 손을 잡은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황께서 태자 시절에 로아 선황후를 은애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일방적인 연심이었고, 마음은 금방 정리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충격을 크게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스왈트 제국 쪽에 사람을 보내 돌아가신 연유를 알아보신 걸로 압니다. 그때 이어진 교류를 최근까지도 계속 유지하시는 듯했습니다.”
첩첩산중이로군.
이사나는 신음성을 내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야기는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서, 이제 알아보기도 두려울 정도였다. 고개를 든 그는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라온휘젠과 시선을 마주했다. 넋이 나가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자 허탈한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갔다.
“태자와 내가 정말 같은 운명의 별이긴 한가 봅니다. 선대로부터 이어진 감정의 고리까지 같이 짊어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친해져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네요.”
“지금 그런 농담을 하실 때가…….”
“농담이 아닙니다. 나와 손을 잡죠.”
“…….”
친해지자는 말보다 더 직접적인 제안이었다. 한숨을 내쉬던 라온휘젠이 멈칫할 때였다.
“나르젠 황제가 황자들의 정쟁을 즐긴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제국의 자랑인 황태자를 겉으로는 몹시 아끼는 것처럼 대하지만, 사실은 질시하고 있다는 것도요.”
이어진 말은 평온하던 흐름을 단숨에 바꿨다. 대화를 나누면서 긴장이 풀려 있던 라온휘젠의 얼굴이 곧바로 딱딱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이사나는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마법사가 되고 싶었으나 타고난 재능이 없어서 절망했다던가요. 그런 자신과 달리 아들은 천부적인 마법사로 태어났으니 속이 타기는 할 겁니다. 태자가 제 기사단도 믿지 못할 만큼 지나치게 주위를 경계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 아닙니까?”
“폐하.”
“반대로 둘째인 아드리스 황자는 부친을 그대로 닮았죠. 외모와 재능은 물론, 성격조차도. 나르젠 황제가 그를 가장 가까이한다는 건 알았지만 황실 수석 마법사를 인척으로 붙여 주고, 은밀한 계획까지 함께할 정도로 총애할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는지 분명해졌군요. 이제부터 시작일 겁니다. 태자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겁니까?”
“저를 모욕하시려는 거라면…….”
“왜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지 모르겠군요. 난 처음부터 일관적인 말만 하고 있는데요. 나와 손을 잡자고 말입니다. 내가 태자를 돕겠습니다.”
“그거 참 감사한 제안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제가 치러야 할 건 뭡니까?”
“그야 당연히 황제가 되는 겁니다.”
“그다음은? 빚을 졌으니 값을 지급하라고 하실 겁니까? 매년 마다 형님 나라에 공물이라도 바칠까요?”
“동맹의 뜻을 곡해하고 있군요. 난 그저 우리가 우호적인 관계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태자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하겠다는 것뿐, 모든 걸 대신 해결해 주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동맹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을 겁니다. 나나 태자에게나, 평판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노려보는 눈길에도 이사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라온휘젠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와 이런 거래를 해 봤자…… 폐하께서 얻으실 이득이 없을 텐데요.”
“우호국이 생기는 건데 이득이 없을 리가요. 게다가 태자와 나는 사이가 좋아질수록 별의 운명이란 것에서도 벗어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내 세대에서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르고 싶진 않습니다.”
“……애초에 폐하께서 저를 어떻게 돕겠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으신 것 같습니다만, 폐하께선 아직 내전 중이십니다.”
“아, 그건 곧 끝날 겁니다.”
“전쟁 상황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겁니다. 당장 며칠 전에도 큰 곤욕을 치를 뻔하셨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는 겁니까?”
“이래 봬도 난 운이 꽤 좋은 사람입니다. 세계의 흐름이 내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고 있거든요.”
“신의 가호라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대체…….”
“폐하!”
그 순간 막사의 문이 젖혀지면서 케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들어서면서 이사나와 라온휘젠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세리크 경, 무슨 일입니까?”
“폐하, 큰일입니다. 첩자들을 가둬둔 곳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리암 남작이 죽거나 도망이라도 쳤습니까?”
“아닙니다. 더 심각합니다.”
“심각하다니…….”
“그자들이 괴물로 변했습니다.”
“……!”
“날뛰는 걸 제압하기 위해 카웰 공작님이 나서셨습니다만, 베어낼수록 분열하는 성질인 것 같습니다. 숫자가 너무 많이 불어나서 피해가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비상사태에 걸맞은 대답이었다. 얼굴이 굳어지는 중에도 이사나는 내심 감탄했다. 사람이 괴물로 변하는 상황은 전에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설마 쓸모가 없어진 첩자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다시 접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게다가 분열한다는 걸 보니 그때와는 종류가 다른 것 같았다.
“말씀드리기가 무섭게 또 위기가 닥쳐왔군요. 정말 신의 가호를 받는 게 맞으십니까?”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귓가에 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신이 가득한 라온휘젠의 얼굴에 이사나는 사태의 심각성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이 급하니 일단 이 건은 나중에 이야기하죠. 양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거야…….”
이사나는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빠르게 막사를 나갔다. 채 끝내지 못한 말을 입안으로 삼킨 라온휘젠이 서둘러 따라나섰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세리엄과 다이도 어리둥절해하면서 뒤를 따랐다.
현장은 그리 멀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라온휘젠은 신음을 삼켰다. 직접 와 보니 말로 듣는 것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 괴물이라고 해서 짐승 같은 것을 연상했으나 실제로 날뛰고 있는 건 점액질 덩어리처럼 기괴한 형체들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수십 개씩 달린 것도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것도 있었다. 생명체는 분명한데 어느 하나 온전한 형태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몬스터나 마수 도감만 봐도 흉하게 생긴 괴수가 많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갖추긴 했다. 저런 식으로 근본 없이 뭉쳐놓은 듯한 생물은 처음이었다.
“저게 대체…….”
“마물입니다.”
“마물? 저게 마물이라고요?”
이사나의 대답에 라온휘젠은 눈을 부릅떴다. 마물은 마수보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훨씬 강력하고 위험한 생물이었다. 마계 안에서도 위험성 때문에 철저히 통제되는 것들이라 중간계에 나타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걸 한눈에 알아본 이사나도 놀라웠지만 당황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읽은 이사나가 설명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설마 그때도 사람이 마물로 변했습니까?”
“네, 바로 앞에서 봤었죠.”
“……폐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이쯤 되면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게 가호의 증거 같지 않습니까?”
이사나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라온휘젠은 도저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렇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폐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자리를 피하십시오!”
그때 한창 마물과 대치 중이던 카웰 공작이 이사나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그는 베어내도 죽지 않는 상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접할 일이 거의 없는 만큼 마물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게 없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상대 앞에선 헤매는 것이 당연했다. 이미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한밤중 벌어진 습격에 당황한 병사들은 방어하기에만 급급한 상태였다. 좁은 장소에 서로 바짝 밀착된 상태였기에 활이나 마법을 쓰기도 적당하지 않았다. 덕분에 부상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전하, 여기 있다간 큰일 나겠습니다. 서둘러 피하시죠.”
얼굴이 희게 질린 세리엄이 라온휘젠을 재촉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이사나가 쪽을 돌아보았다. 이사나는 기사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중이었다.
“페리스는?”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비둘기 쪽으로 갔습니다.”
“아, 그랬지. 시벨 형님께 기별은 했나?”
“알렉이 연락을 드리러 갔을 겁니다.”
“일단 시간을 벌어둬야겠다. 사람들을 저것들과 분리해야 해. 저걸 한 곳으로 유인할 방법을…….”
금방 끝날 거란 예상과는 달리 대화는 본격적인 논의의 형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좀처럼 현장을 떠나지 않을 기색이라 라온휘젠은 얼굴을 찌푸렸다. 전장에서는 수장의 목숨이 무엇보다 최우선이다. 그가 여기서 죽으면 이 내전은 아무런 의미 없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몸을 피해야 할 이가 미적거리고 있으니 속이 탔다.
“폐하……!”
갑갑해진 라온휘젠이 강제로 끌어갈 작정으로 다가갈 때였다. 이사나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라온휘젠은 머리 위에서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려는데 그보다 먼저 억센 힘이 그를 끌어당겼다.
“저, 전하!”
“폐하!”
가장 먼저 느낀 건 둔탁한 통증이었다. 머리가 땅에 닿은 걸 느끼고서야 라온휘젠은 자신이 뒤로 넘어졌다는 걸 자각했다. 무언가가 자신을 덮치려고 했고, 누군가가 붙잡고 구른 덕분에 그걸 피했다는 것도. 간발의 차이로 자신을 구한 사람은 바로 이사나였다. 늘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만 보던 푸른색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태자, 괜찮습니까?”
설마 황제가 직접 자신을 구할 줄 몰랐던 라온휘젠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공격하려던 마물은 케이와 친위대들이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세리엄과 다이도 그들에게 힘을 보태는 중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사나가 몸을 던지는 장면을 목격한 카웰 공작이 당황해서 방심하고 만 것이다. 그의 힘이 빠지자 아슬아슬하게 대치하고 있던 균형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촉수를 지닌 마물이 공작과 병사들의 몸을 휘어 감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다른 병사들이 무기를 쥔 채 달려들었으나 베어낼수록 분열하는 존재라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했다. 사기가 한 꺼풀 꺾인 얼굴들엔 점차 절망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사이 몸을 일으킨 라온휘젠이 창백한 얼굴로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이사나 역시 표정이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폐하, 어서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을 놔두고 자리를 뜨란 말입니까?”
“그럼 달리 해결 방안이 있기라도 하십니까?”
“……할 수 없네요.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증명하죠.”
“예?”
이해하지 못할 말에 얼굴을 찌푸리던 라온휘젠이 곧 이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언가를 짐작했음을 알아차린 이사나가 쓰게 웃었다.
“시큐엘.”
그 순간 차가운 감각이 퍼지더니 이사나의 주위에 물보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라온휘젠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이사나를 감싸듯이 둘러싼 물보라는 곧 두 갈래로 갈라져 위쪽으로 치솟아 올랐다. 투명한 물줄기가 각자 거대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
아름다운 물의 늑대들은 등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물이 날뛰는 현장을 휘저었다. 그들이 지나는 자리마다 거대한 물 폭풍이 몰아쳤다. 바다도 아닌 곳에서 파도가 이는 것 같았다. 마물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덮치는 물속에 삼켜졌다. 신기하게도 마물만 건드렸을 뿐, 사람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물에 갇힌 마물들은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버둥거리던 형체들이 부르르 떨더니 이윽고 축 늘어졌다. 빚어진 반죽처럼 눌린 시체는 모두 압사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직후 할 일을 마친 물의 늑대들이 우아하게 이사나의 양옆에 내려앉았다. 일렁이는 파도가 사라진 공간엔 비 갠 직후 같은 습윤한 공기가 흘렀다.
“…….”
“…….”
흥건하게 젖은 현장에 기묘한 정적이 가라앉았다. 정령의 강력한 힘도 놀라웠지만, 그 정령을 불러낸 이의 정체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넋을 잃은 채 이사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웰 공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능력을 드러낼 예정이 없던 이사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다 보니 빠르게 체념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본 그는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라온휘젠을 발견했다.
“음……. 이쯤이면 날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멍해져 있던 라온휘젠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반응을 얻은 이사나가 빙긋 미소 지었다. 서로만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동맹 성립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