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54화 (354/608)

제354화

“접촉해서 체온을 살피는 거 말이죠. 처음 겪으면 기분이 좀 이상하죠. 나도 그랬습니다.”

“……그 말씀은.”

“나도 적응한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입니다. 혹시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다른 사람이 괜찮다고 하는 말은 믿겠지만, 태자의 말은 아무래도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무슨…….”

“황족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는 데 능하니까요. 그 습관 때문에 나도 여행 중에 불편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친구가 접촉해서 살펴줬죠. 덕분에 배웠습니다. 자신을 내색하지 않는 상대를 대할 때는 먼저 접촉하라는 것.”

“…….”

“다행히 거짓말은 아니었군요. 아픈 게 아니라서 안심했습니다. 아, 그래도 식사는 해야 합니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에 라온휘젠은 다시 침묵했다. 얼굴을 조금 굳혔지만 이전처럼 불쾌한 기분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예전엔 마냥 불편하게만 여겨졌던 모습이 이젠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독기가 빠졌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모두 그날 나눈 대화 이후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가 의식을 잃은 동안 모든 상황이 마무리됐다고 해서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거라면 인사를 받을 일은 아닌 것 같군요. 나나 태자나 둘 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날 왜 기절한 겁니까?”

“……글쎄요. 그냥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뭔가 기억나는 상황은 없습니까?”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겼다는 것만 압니다. 마차가 갑자기 멈춘 것까진 알겠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마취향에 부작용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군의에게 진찰을 받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사나의 얼굴은 어색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심경이 복잡해 보였지만 라온휘젠은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차기 황제의 신분을 지닌 이가 이번 사건으로 장애를 얻었다면 단순히 일이 커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마도 이사나가 지금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전 중인 나라에 방문한 라온휘젠의 잘못이 더 크다. 더구나 제 산하에 있던 이가 관련되기도 했으니 당당하게 항의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이해득실 문제는 애초에 이성적인 사고를 동반하지 않는다. 황제군 진영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만으로, 총수인 이사나는 책임 소재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번 일을 도모한 자가 비단 한두 명일 리도 없었다. 시간과 동선이 전부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소수가 계획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는지 책잡기로 작정하면 얼마든지 물고 늘어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시시비비부터 가려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이렇게 많은 것들이 바뀐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권하시니 진찰은 받아보겠습니다만.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담을 덜어주고자 건넨 말에 이사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금까진 그저 형식적으로 안부를 살핀 거라면, 이번엔 진심으로 그의 상태를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민망한 기분을 오래 만끽하고 싶지 않았던 라온휘젠은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귀족 하나를 구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리암 남작 말이군요. 굳이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그도 이번 건에 관련된 이 중 하나입니다. 털어봤는데 건질 만한 건 별로 없더군요. 내일 오전에 형이 집행될 겁니다.”

대답하는 이사나의 표정은 담담했다. 전쟁 중에 배반자가 나오는 경우가 특별한 건 아니지만, 달가운 경험은 아닐 것이다. 특히 지금 선발대에 있는 귀족은 모두 선황을 충실하게 섬기던 가문들뿐이라고 들었다. 대대로 정통파이며, 이사나가 황제가 되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가문들이다. 그 일원이 자신을 배신했는데도 이사나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방증이었다.

“폐하께서도 어릴 때부터 암살 위협을 받으셨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위에 적이 많으면 의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

“저는 그랬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주변에 있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고해(告解)에 더 가까웠다. 이사나는 그저 잔잔하게 응시하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고요한 반응에 라온휘젠은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남에게서 받는 건 뭐든 수상하게 보였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은 늘 피해 다녔죠. 제 기사단이 훈련하는 연무장조차 선뜻 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대련하는 척, 눈먼 칼을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누가 제 편이고 아닌지 구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다 경계하자고 생각했습니다. 호위는 늘 제가 직접 고른 이들만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만…….”

지금도 수하의 배신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언제부터 마음을 바꾸기로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대공과 접촉한 날에 그에게 매수된 건지, 혹은 처음부터 또 다른 이가 뒤에 있었던 건지. 붙잡자마자 자결하는 바람에 자세한 내막은 확인하지도 못했다. 중요한 건 자신이 그때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젠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그런 그를 달래듯이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나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겁니다.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죠. 믿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십니다. 친위대와도 가깝게 지내시잖습니까.”

“그야, 나는 그 새벽을 겪었으니까요.”

“……?”

“원래 친위대 수는 백 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 남은 이들은 열 명 정도죠. 그들 모두 날 지키려다가 죽었습니다. 내 눈앞에서, 나 대신 날아오는 활과 검을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아…….”

“그날 케이도 날 대신해서 다쳤죠. 부상이 너무 심해서 살아난 게 기적일 정도였습니다. 그들 모두가 내 목숨을 구한 은인들입니다.”

“그래서 믿으시는 겁니까?”

“글쎄요. 솔직히 말하면 믿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어진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라온휘젠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믿는 게 아니라면…….”

“그냥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해야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 상관없습니다. 그들에겐 내 목숨을 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그들이 아니었다면 난 그날 죽었을 테니까.”

라온휘젠의 입이 무심코 벌어졌다. 경악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를 보고 이사나가 피식 웃었다.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얼굴이군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예로부터 황제는 신이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자는 자신의 목숨도 사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무례한 발언이겠으나, 폐하께선 황제라는 자각이 부족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무례한 말인데요. 태자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만.”

“솔직히 제 기준으로는 폐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황제의 길과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황제의 길은 굉장히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건 내 생각과 같군요.”

“……하지만, 폐하가 좋은 분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마지막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바로 앞에 있는 이사나에겐 선명하게 들렸다. 놀란 표정을 지은 이사나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라온휘젠은 애꿎은 바닥만 열심히 노려봤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금방 후회됐지만 진심이기는 했다. 자신은 눈앞에서 수하들이 저를 지키다 죽는다 해도 그처럼 말할 자신이 없었다. 신뢰와 관계없이 목숨을 내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들을 아끼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라온휘젠이 보기엔 믿는다는 말보다 더 굳건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이상적인 황제의 모습은 아닐지언정, 이사나가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주군이라는 건 부정하기 힘들었다.

“우리 친하게 지낼까요?”

“……예?”

그러나 설마 그 인격이 이런 식으로까지 발휘될 줄은 몰랐다.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라온휘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황해서 고개를 든 그를 향해 이사나가 빙긋 웃었다.

“같은 운명의 별을 타고났다는 것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만큼 강한 인연도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걸 경쟁적인 관계로만 해석하기엔 아까운 것 같아서요.”

“아깝다……고요?”

“네, 무척 아깝군요. 같은 운명이라는 건,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잖습니까.”

라온휘젠은 그대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둘로 나뉜 제왕의 별은 그에겐 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시험대였을 뿐이었다. 상대보다 먼저 반려성을 쟁취해야만 진정한 제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치. 그 결과엔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했다. 서로 친하게 지낸다는 건 당연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사나가 한 말은 그의 인생 전반을 통째로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폭약을 터트린 이사나는 정작 그의 대답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가 곧바로 화제를 전환하는 바람에 라온휘젠도 생각을 더 잇지 못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용건이 있어서 방문한 건데, 사담이 길어졌네요.”

“……?”

“예전에 현자 다니멜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태자의 행방을 찾는 것에 도움을 받고 싶다는 용건이었죠.”

이름을 듣는 순간 라온휘젠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사나가 그 반응을 예리하게 살피는 것이 느껴졌으나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오늘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엔 태자의 귀국 문제를 거론하더군요. 반려성의 문제가 제국 간 불화로 번지는 걸 염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네. 재밌는 사실은 날 찾아왔을 때 그는 반려성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는 겁니다. 참고로, 그때나 지금이나 내 쪽에선 그에게 아무것도 알린 적이 없습니다.”

“…….”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숨이 끓어올랐다. 라온휘젠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가 풀기를 천천히 반복했다. 그를 배신한 수하가 누구의 입김을 받았는지 드디어 알 것 같았다.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진 라온휘젠을 보고 이사나도 제 짐작을 확신했다.

“다니멜은 태자의 스승 아닙니까?”

“……그의 고명딸이 제 둘째 동생과 혼인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여식이 황족이 되고 나니 황제의 장인 자리도 탐나나 보더군요.”

“아아.”

모든 상황을 파악한 이사나가 쓴웃음을 삼켰다. 현자 다니멜의 행동은 처음부터 수상했다. 황태자가 실종된 엄청난 사실을 본인 선에서 처리하려고 한 것도 그렇지만, 다른 제국의 황제인 이사나 앞에서 자국 황태자의 정보를 상세하게 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제왕의 별도 반려성에 대한 것도, 다른 제국에서 언급하기엔 민감한 소재였다. 현자로 칭해지는 그라면 좀 더 현명한 방법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다니멜의 발언은 거침없었다. 황태자를 과장되게 추켜세우고, 특별하다는 기색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마치 이사나를 일부러 자극하려는 것처럼.

실제로 그 자리에서 이사나는 황태자를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그가 시기심이 많고 잔혹한 성정이었다면 그 순간 다른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당연히 다니멜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라온휘젠과 만난 후에도 그에겐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제자 사랑이 지극한 푼수로 여겨 보려 했는데 유감이군요. 심어둔 첩자가 발각된 바람에 마음이 상당히 초조해진 모양입니다. 경솔하게 정체를 드러낸 걸 보면.”

“폐하와 손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거겠죠. 저를 적대시할 거라 여겼을 테니까요.”

“실제론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문 라온휘젠을 보고 이사나는 다시 피식 웃었다.

“어쨌든 다니멜이 이 일에 관여한 걸 알았으니, 그가 언제부터 대공과 유착 관계를 맺은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 제가 대공과 만났을 때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건, 폐하께선 다니멜이 이전부터 대공과 긴밀한 관계였다고 보시는 겁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을 뿐입니다. 아, 그렇죠. 혹시 태자는 일리야라는 자들에 대해 들어본 적 있습니까?”

“일리야, 라고요?”

그 순간 라온휘젠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이사나가 살짝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생각보다 쉽게 대답이 나온 것 같네요. 처음부터 태자에게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리야라니, 왜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오는 겁니까?”

“첩자로 잡힌 리암 남작이 자백한 내용입니다. 대공이 오래전부터 부리는 자들이 있고, 그들이 일리야라는 명칭으로 불린다고 하더군요.”

충격으로 멍해졌던 라온휘젠의 얼굴이 다시금 경직됐다.

“그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리야는…….”

“태자는 일리야를 어떻게 압니까?”

“제가 아는 일리야는, 아드리스가 후원하는 신학연구회의 이름입니다.”

“신학연구회?”

“이름처럼 정말 평범한 모임입니다. 아카데미에 종종 강연하러 와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는데, 학자나 종교인에 더 가까웠습니다. 대공이 부린다는 이들과는 동명의 다른 단체일 겁니다.”

“글쎄요. 아드리스라면, 둘째 황자 이름 아닙니까?”

“……맞습니다.”

“둘째 황자의 장인인 현자 다니멜이 이번 일에 관여했는데, 마침 그 둘째 황자가 후원하는 모임과 같은 명칭을 지닌 자들도 연관되었다는 말이군요. 태자도 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충분히 압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우연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쯤은 겹칠 수 있잖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아, 그런데 혹시 그 연구회가 크라제의 문양을 상징으로 쓰진 않습니까? 모르지는 않겠지만, 사람의 눈 모양과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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